주체96(2007)년 6월 20일 웹 우리 동포

 

수 필

만남과 추억

                         ―김창현선생을 추모하여―              김 형 근

 

청천벽력

 

올해 정월초하루였다. 여러 장의 년하장을 받았다. 그 중에는 채 보내지 못한 분들의 년하장도 있었다. 새해에 86살인 김창현선생도 있었다. 정초부터 결례를 해서 죄송스러웠다. 1월5일에 그런 분들에게 년하장을 보내드리느라 아침부터 서둘렀다. 년하장용지를 프린터에 놓고 파소콤에 인사말이며 사진이며 주소를 입력한다.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김창현고문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경야는 오늘 밤6시부터이고, 고별식은 래일 오전 10시부터, 같은 장소에서 거행한답니다.》… 나에게 년하장을 보내주신 분이, 올해도 건강한 몸으로 새해를 맞이한줄로만 알았던 분이 설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다니…. 이날 예정을 취소하고 경야에 나갔다.

오랜 교육자인 고인은 해방직후부터 각급 학교들과 총련중앙, 학우서방 등에서 민족교육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쳐온 분이다. 조객들은 이 세월에 고인과 인연을 맺은 교육관계자들이 많았고 동지들, 제자들, 연고자들이였다. 대기실에서는 고인을 추모는 말들이 조용히 오고 갔다. 세상을 떠나신것이 12월 31일 오전 6시경이라는것도 이때 처음 알았다. 정말 청천벽력이였다.

나에게 년하장을 보내놓고 그냥 숨을 거두신게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객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숙연한 마음으로 듣고만 앉아있었다. 대체로 아는 내용들이였다. 그러면서도 (이 조객들가운데서 고문의 말년에 가장 가까이 지내고 마음과 정을 나눈 사람은 누구일가, 내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기가 막혀 마음을 진정시킬수가 없었다.

 

글 쓰는 일

 

참 이상 야릇한 일이다. 경야를 계기로 어쩐지 마음속이 허전했다. 가슴속에 빈자리가 생긴것 같기도 하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 한달이 지나도 마음의 공허감이 메워지지 않는다. 왜 이럴가.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일이였다.

김창현선생과는 수십년동안 애국사업에 참가하는 과정에 오래전부터 안면은 익힌 사이이다. 같은 직장에서 일한적은 없고 만나면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고령으로 일선에서 물러서게 되였다.

고문과 만난것이 4년전인 2003년 6월경, NPO법인 《同胞法律、生活쎈터》활동의 일환으로 나온 《동포고령자련락망-코리안시니어네트워크(Korean Senior Network)》모임에서였다.

이 무렵에 나는 위임을 받고 코리안시니어네트워크 정보지《보람》 창간호를 파소콤으로 편집발간하는 사업을 담당하였다. 고문은 정보지 창간호에 《생애현역(生涯現役)》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 글에서 인생의 좌우명이 《애국의 신념과 량심》이라고 한것이 인상적이였다.

80대고령이였지만 고문은 글을 쓰는데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새 세대를 위하여 늘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내가 집필도 하고있다것을 알고있던 고문은 자기가 쓴 글을 보아달라고 하기도 하였다. 나의 의견을 주의깊게 들어주기도 하고 겸허하고 진지하면서도 허물이 없어 친근감이 갔다. 완성된 글은 조선신보에 실리기도 하였다.

조국정세를 알고싶다고 하기에 인터네트에서 뽑은 조국자료도 드리고 정세해설도 하였다. 와드(Word)가 든 최신식노트파소콤을 사는데도 동행하였고 나는 고문을 포함한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동포고령자《파소콤교실》강사도 맡았는데 고문은 가장 열성적인 수강생이였다.

 

마음과 정

 

하루는 고문의 이름으로 한권의 책이 집에 우송되여왔다. 책이름은《애국에 바친 자욱을 더듬어》였다. 80평생을 회상하며 후대교육사업에 종사하는 과정에 쓴 수필,수기 등 40편이 편집되여있었다.

글은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을 알려거든 그 사람이 쓴 글을 보라는 말이다. 선생의 한평생은 말그대로 어버이수령님따라, 경애하는 장군님의 령도따라 오직 애국애족의 한길을 걸어온 헌신의 한생이였다. 먹은 마음 변치 않고 신념과 량심으로 살아온 한생이였다는것이 가슴 뜨겁게 안겨왔다. 선생과 마주앉아 책에 대한 나의 소감을 말씀드리면서 오고간 말이 있다.

《고문님, 새 세대를 위해서 이제 책을 써보시면 어떻습니까. 80성상(星霜)을 회고하시면서 〈수령님과 나〉혹은〈왜 장군님을 숭배하는가〉라는 제목으로 할수도 있잖습니까. 글은 고문이 직접 체험하거나 목격한 력사적인 사실, 사건에 기초하면서도 령도자의 위대한 인간미에 매혹되여 80평생을 애국의 한길에 몸바쳐온 오직 본인만이 쓸수 있는 개성적인 글, 필자의 신념과 량심이 일관된 사상감정으로 흘러넘치는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생활적인 내용으로 서술되면 좋겠습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요, 지금까지 짤막한 글만 써 왔는데 그것을 자료로 해서 책을 써보자는거요, 어떻게 하면 이 험악한 일본땅에서 새 세대들이 자기 령도자를 대를 이어 잘 모시고 따르도록 하며, 애국애족의 대를 이어나가도록 하겠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요. 동무가 나의 생각을 알기때문에 한번 집필요강을 짜주지 않겠소.》

몇일간 고심하여 고문의 분부대로 상세하고 전개된 집필요강을 만들어 드렸다. 완성해놓고 보니 그 자체가 상당한 분량이 되였다. 이 동안 나는 늘 고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고문은 새 노트파소콤을 구입하고《파소콤교실》이 있는 날이면 그 무거운것을 늘 메고다녔다. 우리 말 와드 입력법도 배우고 글 집필에 본격적으로 달라붙었다.

고문과의 만남이 잦아졌다. 만나기만 하면 글 쓰는 문제를 놓고 이야기가 오고갔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책을 쓰시겠다는 고문의 비상한 열정과 이악성이 로쇠를 방지하고 수명을 더 연장시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군 한다. 고문은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인생말년의 고문과의 만남은 비록 짧은 기간이였으나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따르는 길에서 맺어진 진짜 동지의 만남, 진심으로 마음과 정을 나눈 만남이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리별로 인한 공허한 감정은 일시적이다. 고문이 남긴 애국의 뜻을 이어 력사의 광풍을 이겨내며 수령님따라 천만리, 장군님따라 천만리를 가고 가리라는 신념, 자기 위업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의 맹세를 더욱 가다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