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96(2007)년 12월 21일 《로동신문》에 실린 글

 

건국의 초행길에 남기신 어머님의 당부를 잊을수 없습니다(1)

 

전 병 호

 

사무치는 그리움속에 12월의 하루하루가 흘러가고있습니다.

위대한 김정숙어머님을 절절히 그리는 온 나라 군대와 인민의 마음이 대성산혁명렬사릉으로, 회령의 고향집으로 끝없이 달리는 이 시각 나의 마음도 한없이 격동되여있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김정숙어머님의 한생을 회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습니다.

《그는 남달리 조국을 사랑하였고 동지들을 사랑하였으며 혁명의 리익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왔습니다.》

위대한 김정숙어머님은 단순히 추억으로 영생하시는분이 아닙니다. 그렇게도 열렬히 동지들과 인민들을 사랑하시던 어머님의 숨결과 체취는 사회주의 이 강산에 흘러넘치고 그렇게도 열렬히 부강한 조국을 바라시던 어머님의 념원은 오늘 우리 나라의 막강한 국력에 그대로 어려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인 주체84(1995)년 4월 29일이였습니다.

준엄한 《고난의 행군》의 나날이 흘러가던 잊을수 없는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김정숙어머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온 나의 옛 경위대원시절에 대하여 추억하시면서 어머님의 사랑과 보살피심속에 자라난데 대하여서는 본인이 더 잘 알고있으므로 이 자리에 모인 여러 동무들에게 이야기하여주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습니다.

너무도 뜻밖에 마련된 감회깊은 회고의 그 좌석에서 나는 별로 말을 잘할줄 모르는 천성그대로 띠염띠염 말을 시작하였습니다.

가슴속에 쌓이고쌓인 그리움만이 북받쳐올라 한자리에서 다할수 없었던 하많은 이야기들이 언제나 나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고있습니다.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탄생 90돐을 앞둔 이 시각 나는 잊을수 없는 그 좌석에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인민들과 후대들에게 전하고저 붓을 들었습니다.

 

《총은 장군님보위를 위하여 인민이 안겨준 혁명의 무기입니다》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극적전환의 새 전기를 펼친 주체34(1945)년은 환희롭게 저물어가고있었습니다.

거리와 거리에서 새 조선의 포부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가고 집집마다에서 새 나라의 앞날을 책임지신 백두산청년장군에 대한 매혹과 흥분으로 이 땅의 남녀로소가 잠들지 못하고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뜻깊은 시각 평양에 도착하시여 수령결사옹위의 제일선에 서있는 경위대부터 찾으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는 우리 경위대원들의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습니다.

영광스럽게도 나는 해방직후 혁명의 총을 잡고 위대한 수령님을 보위한 첫 경위대원들중의 한 사람이 되였습니다.

어느날 우리는 어머님께서 마련해주신 새 군복을 입게 되였습니다.

《정말 멋있구만요.》

시름을 놓으신듯 밝게 웃으시며 한사람한사람 눈여겨보시던 어머님께서 문득 내앞으로 다가오시였습니다.

《이게 정말 병호동무가 옳은가요? 이렇게 미남자인줄은 몰랐는데요.》

어머님의 이 말씀에 나는 저도모르게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이제야 우리 군대의 맛이 나요. 유격대원들의 군복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요.》

우리들의 모습을 대견스레 바라보시던 어머님의 눈가에 금시 눈물이 맺히였습니다.

《동무들을 보니 너무도 어린 나이에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땅에 묻힌 그들이 생각나는군요.》

어머님께서는 갈리신 어조로 이렇게 외우시면서 항일무장투쟁시기 함께 싸운 한 전령병은 장군님의 신변에 위험이 조성되였을 때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서슴없이 한목숨을 바쳤다고, 희생된 그들이 다시 돌아와 내앞에 서있는것 같다고 하시며 동무들도 그들처럼 참된 호위병이 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우리는 오돌찬 목소리로 《옛!》하고 대답했습니다.

마지막한사람의 군복까지 다 보아주신 어머님께서는 이제는 마음이 놓이신듯 가볍게 숨을 돌리시며 《장군님께서 새 군복을 입은 동무들을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돌아오실 시간에 바로 내가 근무를 서게 되였습니다.

보초소를 통과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거수경례를 하는 나에게 답례하시다가 달라진 옷차림을 띄여보시고 걸음을 멈추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놀라신 표정으로 《이게 누구요. 난 또 남의 집에라도 들어왔는가 했지. 언제 이렇게 새 군복을 해입었소.》라고 물으시였습니다.

새 군복을 입게 된 사연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족하신 표정으로 한줄로 정렬해있는 경위대원들에게 천천히 다가서시였습니다.

한없는 행복감으로 가슴설레는 경위대원들을 대견스레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입혀놓으니 얼마나 좋은가, 새 군복이 정말 마음에 든다고 하시며 만면에 환한 웃음을 담으시였습니다.

그러시고는 넓고 따사로운 품에 경위대원들을 안아주시였습니다.

경위대원들을 품에 안으신 어버이수령님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괴여올랐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위대한 수령님과 김정숙어머님의 사랑의 품속에서 군복을 입게 되였지만 항일유격대원들의 군복과 꼭같은 혁명의 군복을 만들도록 하신 절세의 위인들의 웅심깊은 뜻을 다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날이였습니다. 나는 보초근무에 나갈 준비를 하다가 군모에 달았던 모표가 낡아진것을 보았습니다. 3일전에 달았던 붉은별모표가 벌써 퇴색되고 주글주글해졌습니다. 철판이 없어 모표를 마분지로 만들다보니 그렇게 된것입니다.

낡아진 모표를 뗀 나는 문득 언제부터 건사하고있던 어느 한 나라의 군대모표가 생각나 그것을 군모에 달아보았습니다. 벽에 붙은 작은 거울에 비쳐보니 아주 멋있어보였습니다.

나는 기분이 좋아 그대로 보초근무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해서 나는 어머님에게서 책망을 듣게 되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간곡한 어조로 우리가 동무들에게 항일유격대의 군복과 꼭같은 군복을 만들어 입힌것은 그들처럼 김일성장군님을 높이 모시고 견결히 옹호보위하라는 뜻에서였다고, 군복은 분명 그 군복인데 다른 나라 사람의 정신이면 어떻게 자기 나라, 자기 인민을 지켜낼수 있겠는가, 더우기 그런 정신으로 어떻게 장군님을 보위하는 임무를 수행할수 있겠는가고 일깨워주시였습니다.

어머님의 사려깊은 보살피심속에서 나는 이렇게 혁명의 군복을 입었고 군모와 모표, 군화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하나에 깃든 깊은 뜻을 새기였으며 바로 이 나날에 혁명의 총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서도 깨닫게 되였습니다.

혁명의 무기의 사명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소스라치게 떠오르는 사건이 있습니다. 나는 3. 1운동 27주년기념 평안남도군중대회장에서 반동분자들에 의해 빚어진 수류탄투척사건현장에 있었던 경위대원입니다.

그때 20대에도 이르지 못한 애젊은 청년이였지만 일생과도 맞먹는 심각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날 저녁 수류탄사건과 관련한 심각한 총화가 있었습니다.

병실문이 열리더니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 들어서시였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어머님을 마주볼념을 못했습니다.

우리를 다시 자리에 눌러앉히신 어머님께서는 엄하고 갈리신 음성으로 《장군님께서 계시는 주석단으로 수류탄이 날아들었다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칩니다.》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잠시 동안을 두신 어머님께서는 《간고하였던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대사하치기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들에서 아슬아슬한 고비들을 수없이 넘겼지만 대낮에 장군님께로 수류탄이 날아든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광복된 조국땅에서 숱한 호위병들과 무장한 군인들이 경비진을 치고있는데서 장군님께로 수류탄이 날아들었다는것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물론이고 동무들도 한생에 두번다시 되풀이되여서는 안될 수류탄사건을 놓고 자신들을 심각하게 검토해보아야 합니다.》라고 하시면서 머리를 저으시였습니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토론하였습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입술을 깨물며 서있는 우리들을 엄하게 바라보시면서 어머님께서는 준절하게 말씀하시였습니다.

《아마 동무들은 수십만의 군중이 붐비는 속에서 불의에 주석단에 날아드는 수류탄을 어떻게 발견하고 막아낼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할것입니다.

그러나 장군님의 호위병들인 우리들은 그것을 즉시 발견하여야 하며 비호같이 몸을 날려 반드시 막아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동무들은 장군님과 생사운명을 함께 해야 할 호위병으로서 조국과 인민앞에서 장군님의 신변안전을 책임진 친위대원들이기때문입니다.》

계속하여 어머님께서는 적들은 반드시 어수룩한 틈을 노린다, 동무들이 비판한것처럼 군중들의 환호에 신경이 쏠리고 또 어디에 마음이 가는 등 그렇게 개개가 해이되길 바란다, 그러니 최대로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 장군님을 호위하는 길에서 우리모두가 성벽이 되고 방패가 되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경위대원은 곁에서 설사 산악이 무너진대도 자기의 임무를 일분일초도 잊어서는 안되며 불의의 사태앞에서도 언제나 정황을 재빨리 포착하고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고, 그러자면 자신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부단히 준비하여야 한다고 하시였습니다.

호위사업의 철리를 밝혀주시는 김정숙어머님의 가르치심을 새길 때 나의 머리속에는 한달전 어느 한 사격장에서 백발백중의 명사격술을 보여주신 어머님께서 명중사격의 비결에 대하여 알려달라는 우리의 청을 들으시고 하신 뜻깊은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총은 장군님보위를 위하여 인민이 안겨준 혁명의 무기입니다. 내가 적을 단방에 명중하지 못하면 적이 나를 쏠것이다, 그러면 장군님의 신변이 위험하다, 장군님을 호위하지 못하고서는 죽을수도 없다, 이런 신념을 새기며 총 한방을 쏘아도 명중탄을 쏘아야 합니다.》

내가 뜨거운 마음으로 그때일을 되새기고있는데 어머님께서는 또다시 말씀을 이으시였습니다.

《항일무장투쟁시기 경위대원들은 김일성장군님을 잘 받들어모셔야 조국해방의 위업을 성취할수 있고 우리 조선민족이 3천리강토에서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때문에 장군님을 지켜싸우는 길에서는 죽어도 영광, 살아도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무들은 바로 해방된 조국에서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호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책임적인 임무를 수행한다는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김일성장군님을 호위하는것은 조선혁명을 보위하고 우리 조국과 민족의 운명, 자기자신의 운명을 지킨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고귀한 삶의 철리였습니다.

수령결사옹위는 신념과 각오로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였습니다.

무기를 손에 잡은 군인은 행동의 순간순간이 수령결사옹위의 예리한 각성으로 흘러갈 때 비로소 총대의 사명을 수행할수 있는것입니다.

주체35(1946)년 1월이라고 기억됩니다.

어느 한 극장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출연하신 중요한 강연이 있었습니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의 신변호위와 관련하여 강연회장의 질서를 유지할 임무를 받고 나와 여러명의 동무들이 이곳에 나와있었는데 몹시 땀을 뺐습니다. 한것은 바늘들어갈 틈도 없이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찬데다 저마다 강연에 출연하신 위대한 수령님을 가까이에서 뵙겠다고 자꾸 앞으로 나가려고 덤볐기때문입니다.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사람들과 한데 키여돌아가던 나는 어깨에 멘 기관단총이 떨그럭거리면서 안전장치가 벗겨지는것도 모르고있었습니다.

예민한 방아쇠가 주인도 모르게 완전히 방임상태에 있었습니다.

경위대가 조직되여 있어본적이 없는 오발사고가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심장이 얼어붙는 총소리, 흙빛으로 변한 사람들의 얼굴들이 꿈속에서처럼 흘러갔습니다.

병실로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그지없이 무겁고 착잡하였습니다.

경위대원으로서 상상조차 할수 없는 사건을 빚어낸 자신에 대한 모진 혐오감과 죄책감으로 하여 땅바닥에 엎디여 왕왕 울고싶었습니다.

병실에서는 내가 범한 과오를 놓고 호된 추궁과 비판이 있었습니다.

결론은 한결같았습니다. 경위대원으로서 있을 자리가 없다는것이였습니다.

그리도 열렬히 마음속으로 흠모하여오던 백두산위인들을 뵈옵고 참된 삶을 누려가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긍지높이 자부했던것이 과연 어제날의 이야기로 끝나야 하는가, 경위대원의 군복을 벗어야 한다면 나는 이미 다 산 목숨이다. ... 이렇게 한밤을 뜬눈으로 새우고난 나는 다음날 오발사고를 일으킨 총을 들고 병실에 굳어진듯 앉아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백두산녀장군 김정숙어머님께서 병실에 들어서시였습니다.

늘 다심하고 인자한 목소리로 《꼬마동무》라고 불러주시며 사랑해주시던 어머님을 뵈옵는 순간 참고참았던 눈물의 격정이 일시에 꽉 솟구쳐올랐습니다.

《병호동무, 진정하세요.》

어머님의 이 말씀이 고민과 아픔으로 응어리진 이 가슴에 얼마나 따스한 봄빛처럼 안겨왔는지 나는 그 어떤 처벌도 다 받겠으니 제발 장군님곁에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울며 말씀드렸습니다.

순간 어머님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지는것이였습니다.

《그러니 동무는 지금도 자기만을 생각하고있군요. 정말 섭섭해요. 동무는 사실 경위대원으로선 용서받을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장군님을 호위하겠다는 경위대원이 어면 총을 그렇게 한심한 지경으로 만들어놓을수 있어요.

난 동무가 이렇게 당의 기대에 엇나갈줄은 몰랐어요.

그런데도 사고의 엄중성을 알고 모대길대신 자기만을 생각했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예요.》

어머님의 말씀은 마디마디 심장을 쳤습니다.

《경위대원들은 앉으나서나, 또 밥을 먹어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항상 장군님의 안녕부터 생각해야 해요. 동무는 자기가 메고있는 총에 대해 인식을 바로가져야 합니다.

경위대원의 총대는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도 장군님을 결사호위하는데 그 사명을 두고있습니다.

이 사명을 한시라도 잊는다면 그로부터 초래되는 후과는 단순히 경위대원의 자격문제가 아니라 우리 혁명의 생사존망과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후 어느날 오후시간이였습니다.

근무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오던 나는 문득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어머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급히 뛰여갔습니다.

그런데 현관앞에 다달으니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어머님께서 일가분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시는 그 자리에 나를 부르시는것이였습니다.

나는 저도모르게 돌아서려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심각한 정신적흔적을 남긴 오발사고가 있은것은 불과 며칠전의 일인데 어떻게 머리를 들고 영광의 자리에 나설수 있단 말입니까.

심중의 고민을 알아차리신 어머님께서는 《그렇게 속이 작아가지고 무슨 일을 치겠어요. 과오야 고치면 되는거지요. 난 비판을 받고 마음을 먹고 담차게 일어설대신 기가 죽어 어깨를 처뜨리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요.》라고 하시며 나를 손잡아 이끄시였습니다.

감격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는 나를 알아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병호가 꼬맹이래두 고추알같이 맵짜다고 생각했는데 영 안되겠군, 아무래도 고추밭에 보내서 한서너달 맛을 들여야겠어라고 롱이 섞인 어조로 말씀하시였습니다.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못난 전사를 자애깊은 포옹으로 안아주시는 위대한 그 품에 나는 얼굴을 묻고말았습니다.

《장군님!- 어머님!- 전, 전 나쁜 놈입니다. ... 》

엉엉 울면서 백두산3대장군의 품속에 안기던 그때를 나는 영원히 잊을수 없습니다.

 

《참된 조국애는 자기 향토와 일가를 사랑하는 정신에서 출발합니다》

 

군인에게 있어서 휴가는 이채를 띠는 생활의 한 단면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에도 군복을 입고 고향집으로 향하였던 잊지 못할 휴가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향수의 감정으로 마음이 부풀어올랐던 보통 휴가길이 아니였습니다. 결사옹위의 총대를 멘 병사는 어떤 인간이 되여야 하는가, 혁명가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여야 한다는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하는것을 새겨준 뜻깊은 인생체험길이였습니다.

주체35(1946)년 5월 어느날이였습니다.

오후근무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지 몇분도 안되는데 갑자기 보초소에서 련락이 왔습니다. 부모들이 찾아왔으니 급히 나오라는것이였습니다.

뜻밖의 일은 나를 몹시 놀라게 했습니다.

평양에 온 뒤로는 편지 한장 띄운 일이 없었는데 어떻게 부모들이 내가 여기에 있는줄을 알고 찾아온단 말인가. 한동안 병실안에서 어정거리던 나는 보초소에서 다시 독촉하는 바람에 문을 나섰습니다.

내 뒤를 따라 동무들이 우르르일어나 창문을 열고 보초소가 있는쪽으로 저마다 머리를 빼들었습니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안고 보초소에 다가가던 나는 순간 발걸음을 뚝 멈추고말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을 저으며 서있는것이였습니다.

오래동안 헤여져있던 부모들의 그 낯익은 얼굴들을 보자 저도모르게 달려가 와락 안겼습니다.

그런데 다음 의외의 일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아까부터 좀 멀찌감치에서 뒤모습만 보이며 다소곳이 서있던 한 녀인이 내가 있는쪽으로 돌아섰는데 그 순간 나는 아연해졌습니다. 안해였던것입니다.

《함께 데리고 왔다.》

어머니는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는줄을 어떻게 알았는가고 묻자 아버지는 몇번이나 평양에 올라와 학교란 학교는 죄다 뒤졌다는것과 한 보안서원을 통하여 나의 소식을 알게 되였다는것이였습니다.

나는 눈만 슴벅일뿐 부모들의 물음에 어느 하나 온전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경위대가 있는쪽만 힐끔힐끔 보았습니다.

(안해까지 이렇게 부모들을 따라왔으니 이러다간 경위대에 내가 장가갔다는 소문이 들어갈수 있겠구나.)

사실이 알려져 어린 나이에 장가를 든것으로 웃음바구니가 되는것은 그런대로 참을수 있지만 만약 경위대에서 이것을 문제로 삼아 내보내기라도 한다면...  이렇게 생각하니 급작스레 당황해났습니다.

부모들을 따라온 안해가 민망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나는 부모들을 이끌고 외딴 곳에 가서 하소연하였습니다.

《아버지,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여기는 사실 이렇게 막 찾아오는데가 아닙니다. 빨리 돌아가셔야 하겠습니다. 저를 봐서라도 돌아가시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아들때문에 오래동안 마음을 썩이며 온갖 수소문을 다하던끝에 겨우 행처를 알아가지고 찾아왔던 부모들은 나의 태도에 아연해하였습니다.

《어머님, 용서하십시오.》

나는 겨우 짜내듯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러한 나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먼저 발걸음을 옮기였고 안해도 눈물이 가랑가랑하며 뭔가 말할듯 하더니 그냥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것이였습니다.

사실 내가 때이르게 장가를 들게 된것은 아버지때문이였습니다.

어릴 때에 부모를 다 잃고 별의별 세상설음을 다 겪으며 떠살이로 청춘을 보낸 아버지는 맏아들인 나만은 장가를 빨리 보내야겠다며 17살나던 해부터 혼사를 서둘렀고 결국 18살에 장가를 가게 되였던것입니다.

장가를 들어 몇달이 지나 징병에 끌려가게 된 나는 집을 떠나 몇달간 여기저기 숨어살다가 고대하던 조국해방을 맞이하게 되였습니다.

이 사실을 경위대에선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부모들이 떠나간 다음날이였습니다.

나는 정원에서 김정숙어머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습니다.

5월의 신록이 짙은 먼 산야를 한동안 바라보시던 어머님께서는 문득 어제 부모들이 찾아왔댔는가고 물으시였습니다.

(어머님께서 벌써 다 아셨구나.)

나는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드렸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부모들만 왔댔는가고 재차 물으시였습니다.

이 물으심에 나는 놀란 눈길로 어머님을 바라보다가 《사실은 ...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날 같이 따라온 녀성이 안해가 아닌가, 아니라면 왜 그렇게 수집어하는가고 능청스럽게 묻는 동무들의 말에 누이동생이라고 말해버렸던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미소를 띠우시며 혹시 안해가 아닌가고 나직이 물으시였습니다. 어름어름해있던 나의 얼굴은 금시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이제 어머님께서 어떤 눈으로 나를 보실가. 사실을 숨기고 경위대에 들어왔다고 몹시 노하시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안해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또 났습니다.

그런데 어머님께서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이 다른 동무들의 말을 들어보면 동무는 거의 1년만에 만난 부모들을 반시간도 못되여 그냥 돌려보냈다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고 물으시였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나신 어머님께서는 조용히 웃으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시였습니다.

《리유가 어쨌든지간에 그렇게 부모들을 섭섭하게 보낸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예요. 어떻게 그런 랭정한 생각을 하게 되였어요.

지금이라도 똑똑히 알아두세요.

부모와 안해, 자식들을 사랑할줄 모르는 사람은 그만큼 조국앞에 성실할수 없어요.

참된 조국애는 자기 향토와 일가를 사랑하는 정신에서 출발합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사람은 심장이 뜨거워야 한다, 집에 편지 한장 띄우지 않는것은 매우 옳지 않다, 그렇게 고생하며 찾아온 부모님들과 안해인데 얼마나 섭섭해했겠는가, 동무보다 우리 일군들을 더 욕할것이다, 꼭 부모님들의 마음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경위대에 이야기하겠으니 며칠동안 휴가를 받고 집에 다녀오라고 하시는것이였습니다.

순간 나는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호위전사가 휴가라니... )

김정숙어머님께서는 후에 사죄의 편지를 써서 집에 보내겠다는 나의 말에 그러면 안된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 품이 좁은가, 경위대일때문에 걱정하는것 같은데 마음놓고 집에 가서 부모님들과 안해와 그새 못한 이야기를 실컷 나누라고, 그렇지 않으면 정말 경위대에서 내보내겠다고 하시며 유쾌히 웃으시였습니다.

한 평범한 가정속에 비낀 자그마한 그늘을 가시여주시려고 이렇듯 중대한 호위임무를 지닌 전사를 휴가길로 떠밀어주신 어머님의 그 후더운 인정에 머리가 숙어졌습니다.

그후 나는 어머님께서 지어주신 사연깊은 군복을 차려입고 부모님들이 계시는 개천땅으로 향하였습니다.

《칠성아!》 나의 아명을 부르며 외할머니가 맨발로 달려나왔습니다.

《이게 우리 칠성이가 옳긴 옳으냐. 하늘에서 뚝 떨어진것 같구나.

너를 보고싶어하는 이 할미를 하늘이 굽어살피신게로구나.》하고 눈물을 지었습니다.

온 일가가 위대한 어머님의 깊은 인정에 목이 메여 흐느꼈습니다.

나는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어머님으로부터 받아안은 각별한 사랑과 믿음에 대하여, 백두산위인들의 품속에서 경위대원으로 자라나게 된 격동적인 이야기들을 날이 새도록 하고 또 하였습니다.

백두산3대장군과 함께 찍은 뜻깊은 기념사진까지 내놓았을 때 너무도 감격하여 눈물만 흘리던 그 모습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