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99(2010)년 9월 1일 로동신문

 

간또땅을 피로 물들인 일제의
극악한 조선인집단살륙만행

 

지금으로부터 87년전 9월 1일이였다. 이날 오전 일본의 간또일대에서는 일본력사상 보기 드문 대지진이 일어났다. 리히터척도로 7. 9의 강한 지진은 점심식사준비로 집집마다에서 풍로에 불을 피우고있을 때 돌발적으로 일어난것으로 하여 그 후과는 매우 파국적이였다. 목조건물로 된 살림집들에서 불이 일어나고 그것이 공공건물들과 량곡창고들에까지 타번져갔다. 동시에 가스관, 가스탕크들이 가열되여 폭탄처럼 폭발되면서 모조리 파괴되였다. 도꾜와 요꼬하마를 비롯한 간또지방의 10여개도시들과 마을들이 불바다로 변하였다. 120여만명의 주민들이 한지에 나앉았다.

하지만 력사에 수록된 간또대진재는 결코 자연적인 재난만이 아니였다. 이것을 재일조선인탄압의 좋은 기회로 삼은 간악한 일제에 의하여 우리 민족은 참혹한 죽음을 강요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당시 파괴적인 지진의 후과로 재난을 당한 피해지역 주민들속에서는 시급한 구제대책을 취하지 않는 정부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식량이 모자라 굶주리게 된 사람들은 점차 폭동에로 넘어갈 기세까지 보였다.

이렇게 되자 바빠맞은 일본당국은 극도에 이른 민심의 불만의 창끝을 재일조선인들에게 돌려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눅잦히는 한편 이를 대대적인 조선인탄압과 학살의 기회로 삼을 무서운 음모를 꾸미였다.

9월 1일 오후 일본수상관저에서 열린 《림시각의》에서는 정보부에 민심안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데 대한 명령이 하달되였다. 이에 따라 정보부에서는 《조선인이 방화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친다.》 등의 류언비어를 날조해냈다. 일본당국의 두뇌진들이 달라붙어 조선인대학살음모를 고안하였다.

그리고는 9월 2일 오후 조선인탄압지령을 지바현 후나바시의 해군무전소를 통해 각 지방장관들에게 내리였다. 뒤이어 교활한 일제는 조선인살륙의 《필요성》과 《합법성》을 일본인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하여 《조선인폭동설》을 날조해내고 조선인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하게 학살할데 대한 내용을 담은 일본왕의 《칙령》 401호를 공포하였다. 당시 일본법에 의하면 《계엄령》은 전시 혹은 사변이 발생할 경우에만 선포할수 있었고 사변인 경우에도 반드시 내란 또는 폭동의 발생이 인정되여야 내리게 되여있었다.

그러나 자연재해구제와는 관계없이 《조선인폭동설》을 날조한 일제는 무고한 재일조선인들을 터무니없이 《적》으로 규정하고 탄압할데 대한 《계엄령》을 공포하였던것이다. 이것은 일본반동정부가 저들이 날조한 《조선인폭동설》을 일본인들이 그대로 믿게 하기 위한 술책이였다.

일본반동정부는 내각비상회의를 열고 가장 악질적인 장교들로 《간또계엄사령부》를 조직하였다. 수만명에 달하는 군대와 경찰무력이 도꾜-요꼬하마를 중심으로 한 간또일대에 집결되는 등 이 지역의 정세는 어마어마한 전시상태를 방불케 하였다. 이와 함께 경찰서, 파출소의 게시판들에는 《불량조선인들이 봉기》하였다는 날조설과 함께 《반항하면 구태여 죽여도 일없다.》는 게시문이 나붙었으며 경찰관들은 메가폰을 들고 도시를 순회하며 《조선인들의 폭행에 대하여서는 죽여도 일없다.》고 일본인들에게 공공연히 선동하였다. 일본반동정부의 지시에 따라 불량배들로 조직된 《자경단》 등이 군대와 경찰들과 협동하였다. 력사에 지각운동이 일으킨 자연의 재난인 간또대진재와 함께 인공적인 재난으로 수록된 일제의 극악무도한 조선인집단살륙범죄의 막은 이렇게 열렸다.

당국의 살인지령에 따라 조선민족말살책동에 피눈이 되여 날뛰던 일제살인귀들은 장총, 일본도, 단도, 날창, 참대창, 곤봉, 쇠갈구리 등 각종 흉기들을 가지고 짐승도 낯을 붉힐 잔인한 방법으로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무참히 탄압학살하였다. 놈들은 이르는 곳마다에 《검문소》들을 만들어놓고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고엔 고쥬고센(5원 55전)》이라는 발음하기 까다로운 일본말을 시켜보고 조선사람이라고 인정되면 그 자리에서 가차없이 목을 자르거나 배를 갈라 죽였다. 뿐만아니라 눈알을 빼고 코를 베여냈으며 벌거벗겨 모욕을 준 다음 죽여서는 그 시체를 시내로 질질 끌고다니는 야수적만행을 감행하였다.

간또지방에서 일제의 학살만행을 직접 목격한 일본인들의 증언을 되새겨보자.

《살해된 이웃동네에 가보았다. 그곳은 석탄재로 메운 400~500평쯤 되는 공지였다. 공지에는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거의나 알몸뚱이인 조선사람들의 시체들이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주런이 누워있었다. …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사람들의 목부분이 끊기워 기관지와 식도의 경동맥이 허옇게 드러나있었다. 목이 떨어져나간 시체들도 있었는데 목을 강짜로 비틀어끊었는지 살과 피부와 힘줄이 풀려있었다. … 한 애젊은 조선녀성의 시체도 있었다. 그 녀성의 배는 갈라져있었고 6~7개월쯤 되여 보이는 태아가 창자속에 딩굴고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너무나도 놀라 옆으로 뛰면서 물러섰다.

우리 일본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잔인한짓을 했단 말인가. … 내가 일본사람이라는 수치감을 이때처럼 절감하기는 처음이였다.》(다나베 사다 노스께)

《조선인학살정형을 도저히 말로 다 표현할수 없었다. 어린 아이들을 줄을 세워놓고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잘랐으며 그다음 부모들도 칼로 찔러죽였다.

살아남은 조선사람들의 팔을 톱으로 켜는자도 있었다. 그것을 도중에서 내던지고 또 다른 조선사람들을 톱으로 자르는 참혹성은 보기에도 끔찍하였다.

죽은 사람의 눈을 도려내는자도 있었다. …경찰서구내는 피바다를 이루었으며 장화를 신지 않으면 걸을수 없는 형편이였다.》(당시 경찰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잘 알수 있는것처럼 일제는 간또대지진때에 정상적인 사고력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수 없는 야만적인 방법으로 조선사람들을 무참히 대량학살하였다. 일제야수들은 조선사람들을 10여명씩 묶어 제방뚝에 세워놓고 《새로 만든 기관총의 성능을 검사한다》고 하면서 쏴죽이였고 맨몸의 사람들을 철사로 묶어 불붙는 곳에 집어던져 불태워죽였다. 일제살인마들은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여 밟아죽이였고 음부에 참대창을 박아죽이는 등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귀축같은 만행을 거리낌없이 감행하였다. 일제의 극악한 조선인집단학살만행으로 지진발생후 불과 두주일 남짓한 기간에만도 도꾜 하네다부근에서는 2 000여명, 스미다강부근에서는 400여명, 혼죠부근에서는 400여명, 우에노경찰서부근에서는 150여명, 쯔루미경찰서부근에서는 100여명이 학살되였다. 이때 일제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조선사람들의 수는 무려 2만 3 000여명을 헤아린다. 간또지방은 말그대로 무고한 조선사람들의 피로 물들었다.

그뿐이 아니다. 사람잡이를 하나의 도락으로 여긴 일제살인귀들은 짐승도 낯을 붉힐 잔악무도한 학살을 하고서도 모자라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조선사람들을 《포로수용소》에 가두어놓고 소나 말보다 더 혹독하게 부려먹었다. 일제야수들은 제놈들에게 선전포고도 한 일이 없고 맞서싸운 일도 없는 재일동포들을 《포로》로 취급하면서 지진피해지역에 내몰아 강제로동을 시켰다. 이 과정에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무참히 학살당하고 굶어죽고 로동재해로 쓰러졌다.

실로 재일조선인들에게 들씌워진 간또대지진참변은 철두철미 일제에 의하여 감행된 인공적인 재난이였으며 그 목적과 실행에 이르기까지 일본반동정부의 주도세밀한 계획밑에 조작된 야만적인 조선인집단학살사건, 피비린내나는 반인륜적대살륙만행으로서 일본반동지배층의 민족배타주의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산물이였다.

조선사람들의 피로 얼룩진 간또대지진참변은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일제가 감행한 죄악의 일부이며 침략과 략탈, 파괴와 피비린내나는 살륙만행으로 얼룩진 일제침략사의 한 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은 그 어떤 술책으로써도 살인죄악으로 가득찬 과거사를 절대로 외곡할수도 묻어버릴수도 없다는것을 똑똑히 알고 그에 대해 하루빨리 사죄하고 배상하여야 한다.

배 금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