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3(2014)년 4월 21일 로동신문
절세위인의 민족대단결사상의 빛나는 승리
4월의 봄,만물이 약동하는 이 소생의 계절과 더불어 온 겨레의 가슴속에 사무쳐오는 추억과 불타는 열망이 있다.그것은 민족분렬의 첫 시기 전민족적인 통일대회를 마련하시여 미제와 남조선의 반통일분자들에게 철추를 내리시고 조국통일위업실현의 길을 개척하신 위대한 수령 그 신념과 의지를 안고 온 겨레는 4월남북련석회의가 열리던 나날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수령님의 애국,애족,애민의 그 자욱을 숭엄히 돌이켜보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위대한 수령 돌이켜보면 해방된 조국땅우에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투쟁은 첫걸음부터 남조선을 무력으로 강점한 미제와의 첨예한 대결속에서 진행되지 않으면 안되였다.주체36(1947)년 9월에 들어서면서 나라안팎에는 엄중한 위기가 조성되였다.미제는 우리 나라에 통일적인 민주주의림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쏘미공동위원회사업을 파탄시키고 저들의 거수기를 발동하여 남조선에 단독괴뢰정부를 조작하기 위해 조선문제를 유엔에 끌고갔다. 비범한 예지와 통찰력으로 조성된 엄중한 정치정세와 민족의 요구를 깊이 헤아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6(1947)년 10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회의에서 하신 력사적인 연설 《남북협상방안에 대하여》에서 민족분렬의 위기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서 폭넓은 남북협상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미제와 그 주구들의 《단독정부》조작책동의 범죄적본질과 위험성을 예리하게 까밝히시면서 미제와 그 주구들의 범죄적책동을 짓부시고 조국의 완전한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구국대책으로서 남북의 정당,사회단체대표자들의 련석회의형식의 남북협상방안을 제시하시였다.이것이야말로 항일혁명의 불길속에서 민족대단결과 통일전선운동의 불멸의 업적과 경험을 쌓으신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운명의 구원자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만이 제시하실수 있는 현명한 방침이였다. 하지만 미제와 그 앞잡이들은 우리 민족을 분렬시키기 위한 책동을 더욱 로골화하였다.미제의 꼭두각시기구인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반대배격하는 투쟁이 북남인민들속에서 세차게 벌어지자 미제는 1948년 2월 《유엔소총회》에서 남조선에서의 《단독정부》조작에 관한 《결의안》이라는것을 강압통과시키였다.미제의 각본에 따라 리승만매국역적은 《남쪽만이라도 림시정부를 조작》하자는 악명높은 《정읍성명》이라는것을 발표하고 《단선단정》놀음에 적극 매달렸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7(1948)년 3월 25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제26차회의에서 남북련석회의를 4월에 평양에서 열것을 남조선의 정당,사회단체들에 제의하시였다. 그이께서 내놓으신 남북련석회의소집제안은 북과 남의 각 정당,사회단체들과 애국적인민들의 한결같은 지지와 적극적인 찬동을 받았다. 그러나 남북련석회의가 소집되기까지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련석회의를 파탄시키기 위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악랄한 방해책동으로 하여 지난날 조국과 민족앞에 저지른 죄와 떳떳치 못한 과거때문에 북행길에 오를 용단을 선뜻 내리지 못하는 인사들의 심리적고민은 컸다.그들은 회의소집이 눈앞에 다가오는데도 《회담의 희망은 매우 박약한것》이라고 반신반의하면서 선듯 걸음을 내짚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헤아리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거를 불문에 붙이는 원칙에서 손잡고나갈데 대한 립장을 천명하시고 남조선의 모든 민주인사들과 함께 우익민족주의자들까지 련석회의에로 부르는 편지를 보내시였다. 이때 김구,김규식과 같은 우익민족주의자들이 받아안은 감동은 매우 컸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주체37(1948)년 3월 바쁘신 시간을 내시여 몸소 김구의 련락원을 만나주시고 반공으로 얼룩진 지난날의 일은 다 백지화한다고,과거불문의 원칙은 항일혁명투쟁시기부터 확립된 전통이라고 명백히 말씀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넓으신 도량과 포옹력에 매혹된 우익민족주의자들은 옹졸했던 자기들을 뉘우치고 련석회의에 참가할 용단을 내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날 그때를 회상하시며 만일 우리가 감정에 사로잡혀 처신을 극단적으로 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을 적대시하는 방향으로 나갔더라면 통일전선은 지상공론으로만 남아있었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그러시면서 통일전선을 위한 우리의 변함없는 노력과 성의앞에서는 김구와 같은 완고한 반공인사도 감동되지 않을수 없었다고 감회깊이 말씀하시였다. 정녕 우리 수령님의 애국애족의 넓은 품이 있어 김구,김규식,조소앙,최동오,엄항섭,조완구,김월송 등 당대의 민족주의자들모두가 통일전선의 기발아래 평양으로 모여들었다.당시 미국의 한 작가는 《리승만을 제외한 남조선에 있는 우수한 인물들이 거의 한사람도 빠짐없이 참가하였다.》고 하였다.4월남북련석회의는 반미구국의 기치밑에 민족분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해방후 처음으로 북과 남의 각계층 애국력량이 통일전선에 합류한 폭넓은 민족단합의 마당이였다. 주체37(1948)년 4월 19일 풍치수려한 평양의 모란봉극장에서는 북과 남의 56개 정당,사회단체대표들의 참가하에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가 열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 두번째 날인 4월 21일 《북조선정치정세》라는 력사적인 보고를 하시였다.그이께서는 보고에서 조선의 분렬을 꾀하는 미제의 책동을 전면적으로 폭로하시고 망국적인 《단독선거》를 저지파탄시키고 민주주의적원칙에서 통일적중앙정부를 세워 조국통일을 실현하는것이 민족최대의 과업이라고 하시면서 이 거족적인 투쟁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떨쳐나설데 대하여 호소하시였다. 민족자주정신이 투철하고 애국애족의 의지가 넘치는 위대한 수령님의 력사적인 보고는 전체 회의참가자들의 심금을 울리였고 그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찬동을 불러일으켰다. 회의에서는 어버이수령님의 보고정신을 반영하여 남조선에서의 《단독선거》를 반대배격하며 통일정부를 수립할데 관한 결의를 담은 《조선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와 격문 《전조선동포에게 격함》이 채택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가 끝난 다음 5월 2일 우리 당의 책임간부들과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조선의 주요정당,사회단체 지도급대표들과 함께 쑥섬에 나가시여 협의회를 마련하시였다.협의회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대단결방침을 다시금 천명하시고 남북련석회의에서 토의결정된 구국통일방침과 민족통일전선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도들도 환히 밝혀주시였다. 남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만나뵈오면 뵈올수록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니신 숭고한 민족애와 고결한 인품에 완전히 매혹됨을 금할수 없었다. 김구는 평양을 떠나기에 앞서 오랜 기간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고 소중히 간직해온 《상해림시정부》의 인장을 꺼내놓으면서 어버이수령님께 《장군님,조선이 정말 주인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조선을 이끄실분은 장군님뿐이십니다.나는 모든것을 장군님께 맡깁니다.》라고 절절하게 말씀올리였다. 그것은 곧 우리 겨레모두의 심정이였고 신념의 맹세였다. 참으로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는 애국심을 원동력으로 하여 온 겨레가 통일전선의 기치아래 굳게 뭉쳐 거족적인 반미구국투쟁으로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획기적국면을 열어놓은 민족사적사변이였으며 어버이수령님의 위대한 민족대단결사상과 특출한 령도력에 대한 뚜렷한 과시였다. 해방후 조국통일운동의 그 복잡다단한 초행길에서 넓은 도량과 통일애국의 숭고한 뜻으로 과거를 불문하고 온 민족을 통일전선의 기치아래 묶어세우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령도업적은 오늘 온 겨레를 민족대단결과 자주통일위업수행에로 힘있게 고무추동하고있다. 본사기자 리효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