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3(2014)년 7월 11일 로동신문

 

태양은 마음속에 찬연하고 우정은 천하를 밝힌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 서거 20돐에 즈음하여

장금천

 

어느덧 스무해가 흘렀다.

인류의 대성인이신 김일성주석님을 회고하여 붓을 든 내 나이 돌아보니 어언 여든한번째 년륜이 감겨있다.

세월의 류수는 김일성주석님에 대한 그리움을 더더욱 실어오고있다.이미 몇건의 글을 세상에 냈건만 장울화렬사의 아들로서,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을 큰아버님으로 모신 나로서는 아직도 력사앞에 할바를 다 못하였다는 생각에 또다시 붓을 들게 되였다.

이 하늘아래 살아숨쉬는 한 나만이 아니라 아들,손자,증손자,고손자에 이르는 우리 가문의 후대들에게는 김일성주석님과 장울화렬사의 우정과 의리의 세계,세상에 다시없을 그 특출한 교우와 교분에 대하여 전해야 할 의무가 있는것이다.

시대는 변천하고 시속은 변하여도 국경과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을 이룩한 김일성주석님의 고귀한 우애심은 래일에도 변함없이 천하를 밝힐것이라는것을 믿어마지 않으며 나는 진정과 진실만을 담아 이 글을 달린다.

 

송화강의 흐름도 천지에 시원을 두었다

 

나는 김일성주석님이 그리워질 때면 무송현성의 밤거리들을 거닐군 한다.

현세기에 무송도 몰라보게 변하였다.

그러나 현대적인 면모속에서 력사는 의연히 숨쉬고있다.

중국에는 《동을 거울로 삼으면 옷차림을 바로잡을수 있고 력사를 거울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수 있다.》는 격언이 있다.

력사라는 거울은 지난날을 통하여 오늘과 래일을 비쳐주는 법이다.

백두산기슭에 위치한 무송현에는 가는 곳마다에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김형권동지,김철주동지의 체취가 슴배여있고 김일성주석님의 유년시절과 항일혁명시기의 뜻깊은 사적이 있다.

주석님께서는 무송을 고향이나 다름없이 여기시였다.하기에 현성의 소남문안에 있던 옛집과 김형직선생님께서 세우신 백산학교,장울화렬사와 한책상에 앉아 2년간 공부한 무송제1우급소학교,신비로운 선인동의 동굴,대영온천과 마안산밀영 등을 감회깊게 추억하시던 김일성주석님이시였다.

현성의 서쪽으로는 송화강이 굽이치고있다.주석님께서는 나의 아버지 장울화와 함께 자주 이 강에서 헤염을 하시였다.그이께서 길림육문중학교로 공부하러 떠나실 때 아버지가 이 강변에서 눈물로 바래워드렸다.

오늘은 물결우에 대교가 건듯 걸렸지만 지금도 송화강은 나루배를 타고 강을 건느시던 김일성주석님의 모습을 정히 비껴담고있는듯싶다.

백두산천지는 력사의 세 장강을 뿜어내는 발원지이다.압록강,두만강과 함께 송화강의 용용한 흐름도 백두산천지에 그 시원을 두었다.

오늘도 광활한 대지를 적셔주며 사품쳐흐르는 송화강의 물갈기마다에는 백두광야를 주름잡아 남전북정하시던 전설적영웅 김일성장군의 자욱자욱이 비껴있다.

내가 왜 송화강의 흐름을 보며 그 시원을 생각하게 되는것인가.

만경대일가분들과 우리 장씨가문사이의 우정은 나의 할아버지인 장만정으로부터 보면 6대에 걸쳐 송화강의 흐름처럼 줄기차게 이어져 오늘은 조선과 중국인민들은 물론이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고있다.

우정이 우정을 낳고 그 우정이 다시 더 큰 우정으로 끝없이 승화되는 과정에 세상에 류례없는 감동적인 인간관계의 력사,참다운 동지애의 력사가 창조되게 된것은 전적으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 지니신 한없이 숭고한 동지적사랑,혁명적의리에 기인된다.

나는 아들로서만이 아니라 공산당원으로서 장울화렬사를 존경한다.

대부호의 아들이지만 불우한 망국소년과 죽마고우가 되여 친형제의 우정을 나누고 주석님께서 항일전장에 나서시였을 때는 재력과 심력을 다하여 수십자루의 무기와 막대한 물자,자금으로 김장군부대를 후원한것은 쉽지 않은 일이였다.더우기 김일성주석님의 직접적인 영향과 보증속에 혁명조직성원으로 성장하여 혁명활동을 벌리고 조선혁명의 심장인 김일성장군의 안녕을 위해 25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자결함으로써 순결한 우정을 지키고 혁명적의리를 꽃피웠다.

아버지는 희미해지는 의식을 모아 성주,나의 친근한 전우여,나는 동무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소,잘 있소라는 마지막말을 남겼다고 한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이국에서 사귄 한 벗을 혁명의 길에 이끌어주시고 혁명전우가 희생된 후에도 잊지 못하시여 풍찬로숙의 꿈속에서 자주 만나시였을뿐아니라 온갖 세파속에서도 그를 조중친선의 상징으로,국제주의전사의 전형으로 내세워주시였다.

아버지가 장렬하게 희생되였을 때 나는 4살,아버지의 모습을 단편적인 표상으로밖에 새기지 못하는 나이였다.그때까지 바깥출입을 모르고 살아온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림종시에 남긴 유언을 듣고서야 남편이 김일성장군과 함께 혁명해왔다는것을 알게 된 순박한 녀인이였다.

하여 나는 아버지와 김일성주석님사이에 친분관계가 깊었다는것만을 알고있었을뿐 그 관계가 친우의 관계를 훨씬 뛰여넘고 국경과 민족도 초월하는 그러한 혁명전우의 관계,동지의 관계임을 리해할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27살이 되였을 때 조선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성취하신 후부터 줄곧 우리 일가를 찾고계시던 주석님의 연줄이 마침내 닿아 우리 집에 찾아온 한 항일혁명투사에게 나의 어머니가 한 말이 기억에 생생하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늘은 시간을 두고 변하고 사람은 일생을 두고 변한다는데 김일성장군님의 우정은 어쩌면 그렇게도 변함이 없으십니까.벌써 20년도 더 지났는데 아직도 저의 남편을 잊지 않고계시니 무슨 말로 감사를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어머니가 사리에 맞는 말을 하였다고 여겼으나 지금 보면 그 인사말에 무엇인가를 보충하고싶은 생각이 들군 하는것을 어쩔수 없다.

김일성주석님의 우정의 세계를 어찌 단순한 친우관념에 머무르며 하늘이나 인간일반의 변함에 비길수 있겠는가.

인류공동의 재보일뿐아니라 우리 가문의 가보로 된 김일성주석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주석님의 심중에 출렁이던 숭고한 동지애의 세계를 읽을수 있었다.주석님께서는 회고록의 여러 대목에서 아버지를 회고하시였으며 4권에서는 독립적인 두개 절로 갈라서 구체적으로 쓰시였다.다음의 대목이 더욱 눈물을 쏟게 하였다.

《나와 장울화의 우정은 장울화가 서거한 다음에도 계속되였다.장울화는 세상을 하직하였지만 나는 한시도 그를 잊은적이 없었다.장울화가 남기고 간 그 인간적향기는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나의 페부에 더 깊숙이 젖어들었다.항일전쟁이 조중공산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을 때 나의 추억속에 제일 선참으로 떠오른 수많은 중국의 동지들과 은인들가운데서도 장울화는 단연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였다.》

나는 회고록을 통하여 주석님께서 지니신 우정에 대한 비범한 견해와 지향을 알수 있었다.

사람의 생존에는 명이라는것이 있어도 장울화에 대한 나의 우정에는 명이란 없다.진실한 우정은 생명보다 길다.우정의 나이는 인생의 수명과 동갑이거나 세월의 어느 지점에서 끝나는 단명이여서는 안되며 영원한것이여야 한다.…

인류는 인간생명의 유한성을 인식한 그만큼 영생을 얻고저 장구한 세월 모지름을 써왔다.하지만 혁명적우정의 무한함을 주장하여 심각한 사색과정과 내적체험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으로서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하여 마침내 그 영원을 이룩하신분은 세상에 오직 한분 김일성주석님이시다.

아버지에 대한 주석님의 영원한 우정은 후대들인 장씨가문의 우리 3대,4대,5대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계속되였다.

경애하는 주석님께서는 중국의 령도자들을 통하여 우리들의 조선방문이 실현되도록 하여주셨다.

만화방창한 봄날 나와 녀동생 장금록,맏아들 장기는 꿈결에도 그리던 김일성주석님을 만나뵈왔다.흰오리가 섞인 머리칼을 봄바람에 날리시며 기다리시던 주석님께서는 환생한 아버지를 보시는것인지 말없이 우리들을 주시하시더니 와락 한아름에 그러안으시였다.주석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였다.나도 동생도 눈물을 흘리였다.

아,우리 큰아버지! 샘솟는 눈물은 주석님과 우리들사이의 관계가 친혈육의 그것임을 말하여주고있었다.

주석님께서는 우리들을 만날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화제의 대부분이 우리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주석님의 이야기는 중복되지 않았다.능란한 잠수부가 깊은 대양에서 진주보석을 골라내듯 하여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우리들에게 피와 살을 가진 아버지의 생동한 모습을 주셨고 아버지의 유지가 무엇이였던가를 리해시켜주시였다.

주석님의 이야기를 통하여 나는 내성적이면서도 강직하고 열정적인 아버지,정의를 위함이라면 결단코 뛰여들고 일단 결심만 하면 칼날에라도 올라설수 있는 성격의 아버지를 애틋한 마음속에 모실수 있었다.

진정 나에게 존경하는 아버지를 찾아주신분은 김일성주석님이시였다.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는 김일성주석님의 그 우정이 끝내는 반세기전에 떠나갔던 옛 전우의 생명도 재생시켜 자식들과 함께 있게 해주었고 중조 두 나라 인민의 마음속에 길이 남게 하였다.

잊지 못할 첫번째 접견때 주석님께서는 금천아,너의 할아버지 장만정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와주었고 너의 아버지 장울화는 조선의 공산주의운동을 도와주었다,너희들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훌륭한 사람,견결하고 굴함없는 혁명가가 되여주기를 바란다고 하시면서 자식을 가르치는 친어버이가 되시여 다음의 말씀을 하시였다.

돌아가면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하여 일을 잘하고 지위를 탐내지 말며 우수한 공산당원이 되며 중국의 4개현대화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주석님께서는 금천아,자주 편지를 하여라,나는 일이 바쁘니 너의 편지에 일일이 회답편지를 보낼수는 없다,이렇게 하자,네가 나한테 두번 편지를 보내오면 나는 너에게 한번 회답하도록 하자,그러시고는 앞으로 조선에 자주 오라고,너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많아 사흘 낮,사흘 밤을 한대도 못다할것이지만 내가 너희들에게 해주겠다고,지금은 국가주석으로서 인민을 위해 일을 해야 하고 책임이 무거우니 시간을 낼수 없지만 너희들이 다시 오고 또 오느라면 내가 년로보장을 받게 될것이고 너희들과 함께 다닐수도 있게 될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때로부터 나는 8차례나 주석님의 접견을 받는 영광을 지녔다.

조선에 올 때마다 외국에 간다는 생각이 드는것이 아니라 친아버지가 계시는 고국에 오는 심정이였다.주석님께서는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였고 우리들의 사업으로부터 살림살이에 이르기까지 돌보아주시며 크나큰 은정을 돌려주시였다.

첫 조선방문때 주석님께서는 천사만량의 고려끝에 자신의 존함이 새겨진 금시계와 사진기를 선택하시여 우리들에게 주시였다.금시계에는 사람은 금과 같이 순결하고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와 무한대한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처럼 우의심은 영원하여야 한다는 깊은 뜻이 깃들어있었다.

사진기에는 무송에서 《형제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주석님의 친솔부대에 사진기를 보내준 아버지에 대한 회억이 담겨있었고 사진업과 더불어 혁명에 기여한 아버지의 모범을 우리들이 이어가기를 바라시는 주석님의 심정이 어려있었다.

나는 김일성주석님을 모시고 장씨가문의 4대가 뜻깊은 좌석에서 들던 동소과술을 잊을수 없다.주석님의 제의에 따라 유명한 술들중에서도 내가 가져온 무송의 동소과술이 올랐다.투명한 잔에 송화강물로 만든 술이 하많은 사연을 담고 찰랑이였다.주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장내를 울리였다.

오늘 날씨도 아주 좋은데 우리가 또 이렇게 만났다.자,첫잔은 우리모두 장울화렬사를 위하여 들자.

주석님께서는 일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석잔을 드시였다.

석잔,무장항일의 나날 그이께서 아버지와 동소과에서 만나실 때에 두분이 바로 석잔을 드시였기때문이리라.

무송시절의 꿈과 리상이 현실로 실현되고 행복이 무르녹는 화기애애한 자리가 마련되였지만 못내 아버지를 잊지 못하시는 주석님이시였다.

추억은 끝없건만 그중에서도 장울화렬사서거 55돐에 즈음하여 무송의 남전자에 세워진 기념비에 대해서는 반드시 언급해야 할것이다.

주석님을 모신 영광의 자리에서 나는 아버지서거 55돐을 맞으며 묘비를 새로 세우려고 하는데 거기에 새길 비문을 써주실것을 요청드렸다.

우리들의 진심과 진정을 고맙게 받아주신 주석님께서는 너희들이 세우는 묘비에 글을 써줄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된 기념비를 세워주겠다고 하시며 기념비를 세울바치고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 행사도 하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사려깊게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주석님의 숭고한 뜻대로 훌륭한 기념비가 만들어져 고위급의 조선대표단과 조선인민군 군인들의 호송하에 평양에서 압록강대교까지 와닿았다.중국정부를 대표하여 일찍부터 교두에 나와 기다리고있던 무송현과 림강시의 일군들과 우리 장울화렬사유가족들이 김일성주석님께서 보내주신 기념비를 맞이하였고 중국의 자동차대렬이 정중히 인계받아 경찰차를 앞세우고 무송현성으로 향하였다.

자동차행렬이 길에 나서자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김일성주석님의 우의심에 감심한듯 방금전까지 따뜻한 가을해빛을 비쳐주던 하늘이 희고 큰 눈송이들을 뿌리기 시작하였다.송이송이 산골길에 내려앉는 정갈한 눈송이들,마치도 중국의 옛 관습대로 렬사의 령혼을 위해 하늘이 종이돈을 뿌리는듯 하였다.류례없는 일이여서 우리모두의 감동은 더욱 컸다.

드디여 중조량국의 큰 관심속에 마련된 성대한 건립행사가 시작되였을 때 김일성주석님의 존함으로 된 기념비의 글발이 찬연히 빛을 뿌리며 참가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울려주었다.

《장울화렬사의 혁명업적은 조중인민의 친선의 빛나는 상징이다.렬사의 숭고한 혁명정신과 혁명업적은 인민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것이다.

김 일 성

1992년 10월 27일》

전우가 희생된지 반세기도 넘었으나 더더욱 깊어지는 우정이였다.

유사이래 동서고금 그 어디에나 우정과 의리에 대한 이야기는 있었다고 하지만 한 나라의 국가수반이 외국의 한 평범한 전우를 위하여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잊지 않고 기념비를 세워준 그런 례가 있었던가.

진정 숭고한 우의로 세계를 뒤흔든 김일성주석님은 한 나라의 수령,국제사회주의운동의 저명한 령도자이시기 전에 가장 위대한 인간,고결한 의리의 최고체현자이시였다.

덕행의 기념비는 피라미드보다 영원하다는 말이 있다.

무송의 장울화렬사기념비는 렬사의 혁명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는 기념비인 동시에 먼저 간 전우들을 영원히 잊지 않고 그들에 대한 숭고한 의리를 지켜가신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하늘과 같은 덕행을 후손만대에 전하는 기념비이다.

 

고귀한 옛정은 세기가 바뀌여도 변함없다

 

나는 한생에 내자신이 시를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타고난 시재도 없었거니와 인간과 그의 생활을 사진에 담는 나의 직업과도 관련되였을것이다.

김일성주석님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속에 시적령감이 떠올랐고 격정으로 충만된 시어들이 샘솟았다.

 

꿈이 없었으면 하는 말

누가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꿈속에서 삽니다

 

달뜨는 초저녁부터

해뜨는 아침까지

김일성주석 만나뵙는

꿈속에서 나는 삽니다

주석과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꿈

주석께 축배를 드리는 꿈

주석과 노래를 부르는 꿈

주석께서 나의 손을 잡고

무송땅을 거니시는 꿈

 

이런 꿈,이런 꿈을

나는 좋아합니다

달콤한 꿈에서 깨지 말기를

나는 소원합니다

 

김일성주석님을 만나뵙는 꿈속에서 사는 나의 마음을 담은 이 시는 인류가 낳은 희세의 대성인을 잃은 비통함이 이 행성에서 가셔질줄 모르던 시기에 씌여졌다.

그것은 영결의 애석함을 담은 시가 아니였다.그것은 설사 이 세상의 한끝에 간다 하여도 갈라질수 없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헤여질수 없는 자애로운 성인이신 김일성주석님에 대한 그리움의 분출이였다.

위대한 주석님과 우리들사이에는 리별이란 있을수 없었다.

왜냐하면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우리들의 친아버지가 되시여 우리 일가에 모든 행복,모든 영광을 안겨주시고도 모자라신듯 비록 서거하시였어도 우리들에 대한 사랑과 은정의 손길을 끊지 못하시기때문이다.

고귀한 옛정은 세대를 이어 세기를 넘어 굽이치고있다.

김정일동지께서와 김정은동지께서는 우리들에게 한치의 간격이나 한점의 그늘도 없이 육친의 정을 부어주시던 위대한 주석님이 되여주셨다.

피눈물의 7월,무송의 하늘도 청천벽력의 비보를 전하며 대줄기같은 비를 쏟아부었다.우리모두는 억장이 무너져내리는것 같았다.처음에는 억이 막혀 소리없는 울음을 울었고 다음에는 흐느껴울었으며 그다음은 대성통곡이 끊길줄 몰랐다.

얘들아,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이다라고 하시던 주석님의 자애로운 음성이 들려왔으며 온 세계가 모여 주석님의 탄생일을 경축하던 때에 장울화일가의 5대인 다섯살 난 장맹맹이를 두손으로 추켜드시여 품에 꼭 안아주시고 볼을 비벼주시던 인자하신 모습이 안겨왔다.

평양에서 처음으로 설을 쇠는 4대들인 장유와 악지운의 숙소에 찾아오시여 손자와 손녀가 설을 쇠는데 할아버지가 와봐야지라고 하시며 장씨가문의 수교즈의 래력과 중국노래 《소무가》에 대한 고사도 들려주시며 큰할아버님의 따뜻한 정을 부어주시던 고매한 인덕도 어려왔다.

너무도 진실하시고 평범하시며 그래서 더 위대하시였던 주석님,자신을 돋구려고도,누구의 마음을 사려고도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속생각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시던 주석님의 환하신 미소와 웅심깊은 말씀,친근하신 손동작…

그때에 우리 집에 꾸려놓은 조의표시방에도 무송현의 지도일군들과 각계인사들,무송인민들이 그칠새없이 찾아왔다.

우리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향하였다.

금수산의사당(당시)에 들어서니 추도곡이 울리고있었다.

나는 먼저 주석님께 큰절을 올리고 꿇어앉아 머리숙여 인사하고는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무엇인가 주석님께 말씀드리고싶었다.

경애하는 큰아버님,주석님께서는 올여름에 다시 조선으로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저희들은 이미 준비를 갖추어놓고 기다렸습니다.지난해에 찍어드린 큰아버님의 사진을 액틀에 모시고 선물로 드리려고 하였습니다.저와 금록이가 큰아버님께 여쭈려는 말씀도 가슴에 차넘칩니다.애들은 큰아버님께 불러드릴 노래까지 다 준비하였습니다.그런데 큰아버님께서는 어찌하여 저희들이 올 때를 기다려주지 않으셨습니까.무송에서는 주석님을 기다리고있습니다.큰아버님께서 싸우시던 곳에도 가보시고 잊지 못할 거리들도 거니시고 전우의 묘에도 가보시고.그런데 이렇게 누워계시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때 김정일동지께서는 호상을 서고계시였다.그이께서는 나의 손을 굳게 잡아주시였다.나는 김정일동지께 위안의 말씀을 올리려 하였으나 목이 꽉 메여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비할바 없는 가장 큰 상실의 아픔을 이겨내시던 김정일동지께서 오히려 나를 위안해주시였다.

언제 평양에 왔습니까.다들 잘 있었습니까.너무 슬퍼하지 말고 건강에 주의하십시오.오느라 수고하였습니다.

웅심깊고도 사려깊으신 그이의 말씀이 나의 마음을 파고들었다.하늘같으신 그이의 위인상이 나의 심장속에 안겨들었다.

그 누가 저 하늘의 태양이 꺼졌다고 하였던가.아니,태양은 영원한것이다.피눈물의 바다우에 태양은 더욱 붉었다.

나에게는 김정일동지의 모습이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모습으로 안겨왔다.

강인하면서도 인자하신 그분의 모습을 우러르느라니 40여일전 위대한 주석님께서 우리 일가에 주신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 되새겨지는것이였다.

내가 지금까지 건강한 몸으로 사업하고 생활할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김정일동지의 덕이다.그는 나의 건강을 보장하는데서 공로가 아주 많다.앞으로 우리 나라에 계속 놀러 오너라.김정일동지가 장울화의 가족들을 잘 돌봐줄것이다.그러니 절대로 어려워하지 말고 매해 한번씩 우리 나라에 오너라.너희들은 나를 믿고 따르는것처럼 김정일동지를 믿고 따라야 한다.…

위대한 주석님의 금언같은 그 말씀을 새겨보느라니 김정일동지께서 주석님의 뜻대로 고귀한 옛정을 귀중히 여기시며 우리 장울화일가를 위하여 기울여오신 남모르는 사연과 사실들이 눈앞에 밟혀왔다.

우리들이 조선에 찾아올 때마다 영접행사와 숙소선정,방문일정까지 국빈급에서 하도록 친히 조직사업을 해주시고 금강산과 묘향산,송도원을 비롯한 명산명처들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도록 해주신 김정일동지,

렬사의 손자,외손녀인 장유와 악지운이 가장 훌륭한 초대소에서 《왕자》,《공주》와 같은 대우를 받으며 류학을 하도록 하시고 맏아들 장기의 무역활동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일일이 풀어주신 김정일동지,

우리들이 조선인민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게 해주신 위대한 그이께서는 주석님을 모시고 무한한 영광과 더없는 행복을 누리는 자리들에 한번도 나선적이 없으시였다.하지만 우리들은 일군들을 통하여 김정일동지께서 주석님과 장울화렬사의 우정을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시며 그 뉴대를 더욱 굳건히 다져주시기 위해 누구보다 마음쓰시였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지나온 년대들은 김정일동지의 천출위인상과 더없이 고매한 륜리도덕관에 대하여 온 세상에 보여주었다.

그중에서도 잊을수 없는것은 위대한 주석님께서 계시던 금수산지구를 주체의 최고성지로 꾸리고 금수산태양궁전에 주석님을 생전의 모습으로 모시도록 하신것이다.

그것은 조선인민들과 세계의 량심 그리고 우리 가문에 있어서도 대를 두고 전해가며 칭송해야 할 거대한 공적이고 은공이였다.

우리들은 그후 조선에 찾아올 때마다 금수산태양궁전에 계시는 위대한 주석님을 만나뵈옵게 되였다.

김정일동지께서 지니신 륜리도덕의 숭고한 모범을 따라 비애의 바다에서 헤여날줄 모르던 우리들도 번쩍 정신을 차리고 주석님의 체취가 어려있는 우리 가문의 옛집에 《김일성주석기념관》을 꾸리게 되였다.《김일성주석기념관》을 꾸리는것은 주석님의 하해같은 은정을 받아안은 우리들의 결초보은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신적요구로 되였다.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기념관을 세우는것을 더없이 신성하게 여기였으며 하나하나의 사적물에 보은의 한마음을 실었다.

우리는 한해동안 공사를 벌려 위대한 주석님의 서거 1돐을 맞으며 《김일성주석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외국의 한 가정에서 위인의 기념관을 꾸리는것은 세상에 처음이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너무도 응당한 도리로 여기였고 결초보은의 첫걸음으로 생각하였을뿐이다.

김정일동지께서 우리들에게 돌려주신 우의의 정은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졌다.

그중에서도 김정일동지께서 보내주신 화환을 장울화렬사묘에 진정하는 의식이 진행되였던 1997년 10월 27일을 잊을수 없다.

김정일총비서께서는 일군들에게 장울화렬사가 장렬하게 희생된 때로부터 60돐이 되는 날에 화환을 보내줄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였다.5년전 김일성주석님께서 장울화렬사를 위하여 기념비를 보내주실 때와 같이 김정일총비서께서 보내주신 화환이 무송에 도착하자 하늘에서는 또다시 렬사의 명복을 빌어 종이돈을 뿌리듯 흰눈이 내려 대지를 덮어주었다.

화환은 김일성주석님께서 세워주신 장울화렬사기념비앞에 정중히 진정되였다.

《장울화렬사를 추모하여

김 정 일

화환의 꽃송이들은 렬사에게 보내는 주석님과 김정일동지의 인사를 전하여주고있었고 붉은 댕기는 세월의 흐름에도 변색되지 않는 우정을 말하여주고있었다.

진실한 우정은 영생하는 위인들의 심장의 음향이고 지울수 없는 력사의 메아리이다.

화환진정의식에 참가한 사람들은 장울화렬사가 비록 60년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생의 불길은 계속 타오른다는것을 페부로 느꼈다.

그들모두는 위대한 김정일동지에 의하여 김일성주석님과 장울화렬사의 우정은 변함없이 이어지고있다는것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장울화렬사의 서거 70돐을 맞으며 또다시 화환을 보내주시여 고귀한 옛정이 세기를 넘어 변함없이 흐르게 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해마다 설날이 오면 주석님을 대신하여 우리들에게 신년축하장을 보내주시였으며 70돐 생일을 맞는 나에게 은정어린 선물도 보내주시였다.

우리 중국에는 보검은 영웅에게 드린다는 속담이 있다.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장검을 집을 지키는 보검으로 여겨왔고 권력,승리,힘을 상징하는것으로 전하여왔다.

언제인가 우리는 김정일동지께 청동으로 만든 옛 장검을 선물로 올리는 영광을 지니였다.

온 가문이 모여앉아 많은 생각끝에 도달한 선택이였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김정일동지는 천하대적도 이기시는 영웅이실뿐아니라 의리와 인덕으로 인간세계를 아름답게 가꾸시는 영웅중의 참영웅이시였다.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진실한 우정은 력사의 풍운속에서도 풍화되지 않고 인간세계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준다.

어떤 대가와 보상도 바라지 않고 바치는것을 곧 행복과 락으로 여기는 그 우정은 인간세계를 끝없이 정화시켜주며 천하를 밝게 비치고있다.

그것은 고상한 륜리도덕으로 건설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힘있는 긍정이며 자주적인것으로 하여 더없이 아름다운 인간본성에 대한 긍지높은 주장이고 례찬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사랑,인간존중의 화원을 펼쳐가시는 대성인이신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동지의 옛정은 오늘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에 의하여 맥맥히 이어지고있다.

김정은동지께서는 강성국가건설을 이끄시는 바쁜 속에서도 2012년 10월 장울화렬사의 서거 75돐,생일 100돐을 맞으며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을 보내주시고 위로연회를 차려주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김정은동지의 후더운 은정이 고이고고인 연회상을 마주한 우리들의 마음은 이루 형언할수 없었다.

행복한 순간이면 언제나 그러하듯이 김일성주석님의 인자하신 음성이 들려왔다.

금수산의사당의 연회석상에서 소고기료리가 들어오고있을 때 식사안내표를 보시던 주석님께서는 장유에게 말씀하시였다.

마음놓고 먹어라.다른 사람들의것은 소고기이지만 네건 돼지고기야.네가 소고기를 안먹는다는것을 알고있다.…

언제인가 주석님께서는 식탁에 둘러앉은 손자손녀들에게 말씀하시였다.

내가 동북의 무송에서 오래동안 생활하면서 그곳 빙탕후루에 대하여 대단히 흥미를 가지였는데 그 맛이 좋았다.오늘 너희들이 왔기때문에 내가 료리사들에게 만들어주라고 하였다.어디 비슷한지 너희들이 맛을 보아라.…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생일 80돐을 맞는 우리 부부에게 귀중한 선물을 보내시고 조선대표단을 파견하여 축하하도록 하여주시였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80고령의 우리 부부가 30여일동안 평양의 초대소에 머무르면서 유명한 병원에서 치료받도록 하시였다.다시는 앞을 잘 볼수 없다는 체념에 빠지였던 안해가 광명을 되찾게 되였고 나는 로년기이면 어쩔수 없다던 병들을 털어버리고 로당익장하게 되였다.

평양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는 보석화로 형상한 나의 아버지 장울화의 초상도 있다.

사랑에 국경이 없고 과학에 국경이 없는것처럼 혁명에도 국경이 없다는것이 위대한 주석님께서 지니시였던 지론이였다.나의 아버지 장울화를 조중친선의 상징으로,국제주의의 세계적모범을 보여준 거성으로 빛내여주신 김일성주석님의 숭고한 우의의 세계를 오늘은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 지켜가고계시는것이다.

우리 장울화일가가 받아안은 뜨거운 사랑의 력사는 진정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동지,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만이 창조하실수 있는 숭고한 우의의 서사시이다.

세월은 흘러 장울화가문에 6대가 태여났다.

그애가 태여나던 날 나에게는 장울화의 고손을 보고싶다고 하시던 위대한 주석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여 나는 아이에게 속삭였다.

얘야,어서 크거라.크거들랑 이 세상에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이 있고 한없이 굳건한 뉴대가 있는가를 알게 될것이다.

너도 그 아름다운 화원을 꽃피우는 한송이 꽃이 되거라.…

위대한 주석님께서 서거하신 때로부터 스무번째의 돌기가 새겨졌지만 김일성주석님과 장울화렬사의 우정은 계속되고있다.

위대한 주석님의 우정은 장울화렬사의 생을 영원에로 이어주고 우리 후대들을 변함없이 보살피신다.

세기가 바뀌고 강산은 변하여도 주석님의 우의의 숭고한 모범은 끝없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흘러들며 인간세계를 아름답게 정화시켜줄것이다.

인류의 대성인이신 김일성주석님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고 그이의 숭고한 우의심과 고결한 인덕은 천하를 밝히고있다.

(필자는 중국항일혁명투쟁연고자 장울화의 아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