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3(2014)년 7월 20일 로동신문

 

력사의 땅 유평이여 천만년 길이 전하라!

조국해방전쟁의 가장 준엄한 시기였던 1950년
10월의 잊지 못할 그날을 더듬어(1)

 

잠시 자리를 뜨시였는가,창호지를 바른 살문은 열려있고 방금 놓으신듯 송수화기는 가볍게 얹혀있다.

얼핏 집모퉁이를 돌아서면 사색에 잠겨 산기슭을 거니시던 발걸음소리도 들리여올듯…

방안에도 마당에도 어버이수령님의 체취가 스며있는 60여년전의 농가,

조국땅 북부산골 한채의 추녀낮은 집앞에 우리는 서있다.

흙벽에 노전을 깐 방안에는 자그마한 앉은책상이 한개,그 책상우엔 초연내가 풍기는듯 한 군용전화기,옆방엔 그전날 어느 농촌집에서나 볼수 있었던 투박한 둥근 밥상…

한 나라의 령도자께서,한 나라 군대의 최고사령관께서 계시였던 곳이라고 하기엔 집도 책상도 한장의 삿자리마저 너무나 수수하고 소박하다.

그래서 더더욱 어려운것인가.바로 이 집,이 방에서 전화의 가장 준엄한 시기 나라와 민족을 생사의 위기에서 구원한 기적이 마련되고 력사상 처음으로 미제의 《강대성》의 신화를 깨뜨리고 내리막길의 시초를 열어놓은 반제대전의 위대한 승리의 려명이 밝아왔다고 믿기에는!

하지만 사실이다.엄연한 사실이기에 충격은 그처럼 크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것이다.

백두의 설한풍을 헤치시며 나라를 찾기 위해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하신 우리 수령님께서 전화의 나날에는 또 어떠한 로고를 겪으시며 조국의 운명을 두번다시 구원해주시였는가를 력력히 보여주고있는 유평의 옛 농가,

말하라 유평이여,이 세상 그 어디에 이처럼 만사람의 심장을 울리는 력사의 집이 또 있는가를!

천추만대에 전하라.전화의 그 준엄한 10월 우리 수령님께서 여기에 어떤 자욱을 남기시였는가를!

 

* *

 

한줄기 개울,우등불자리 하나에도 절세위인의 발자취 어려있고 전화의 만단사연이 비껴있는 력사의 땅,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혁명업적을 천만군민의 심장에 깊이 새겨주시려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숭고한 뜻에 받들려 더욱 빛을 뿌리고있는 유평혁명사적지!

지난해 6월 13일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전승업적이 깃들어있는 창성군의 창골혁명사적지를 돌아보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이틀후인 6월 15일 불철주야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는 속에서 또다시 북부산악의 준령을 넘어 창성에 오시여 수풍호연안의 유평혁명사적지를 찾으시였다.

조국해방전쟁의 가장 어려운 시기 위대한 수령님께서 하루 묵으시였던 유평의 농가에서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오래도록 눈길을 떼지 못하시였다.

동창과 창골,고산진의 추녀낮은 농가들,옥천의 어두운 기차굴과 향하리의 습한 갱도,포탄이 작렬하고 탄환이 비발치는 전선길들과 포연이 흩날리는 고지들…

전화의 날 그처럼 수수한 민가들과 위험한 전장들에 계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겪으신 천만로고를 되새겨보시는듯 이윽토록 농가앞에 서계시던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절절하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내가 창골혁명사적지를 돌아보면서도 말하였지만 수령님께서는 잘 꾸려진 집무실도 아니고 작전탁도 없는 이런 수수하고 추녀낮은 북부산골의 농촌집에서 조국해방전쟁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오기 위한 탁월한 사상과 전법을 창조하시였습니다.》

참으로 유평의 농가는 한평생 특전을 모르시며 조국과 인민,혁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신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그대로이고 겪으신 로고그대로였다.

돌이켜보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년대와 년대를 이으시며 창성군을 끊임없이 찾으시였다.

우리 수령님께서 그처럼 이 고장에 새기고새기신 거룩한 자욱이 다 그러하지만 전화의 포화속에서 남기신 불멸의 자욱에는 더욱더 로고가 짙다.

조국해방전쟁시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화국북반부지역에 기여든 적들을 격멸소탕하고 전전선에 걸쳐 새로운 결정적인 반공격을 단행하실 작전적구상밑에 최고사령부 지휘소를 청천강이북지역들에로 기동적으로 전개하시였다.그중 한 지역이 바로 창성군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옥천,운산,동창을 거쳐 창성군 읍에 도착하신것은 주체 39(1950)년 10월 26일이였다. 강행군을 하시며 수백리 먼길을 오셨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쌓이신 피로를 푸시지 않으시고 창성군인민들의 생활형편부터 알아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며 수행성원들은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험준한 령을 넘어 창성으로 오시는 길에서도 한 농가에 들리시여 농민들의 생활형편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시고 축산과 농사를 잘하여 생활을 향상시킬 방도를 가르쳐주신 어버이수령님,또 어느 한 집에 들리시였을 때에는 날씨가 차지는데 밤에 덮고자라고 군용모포도 안겨주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그때처럼 창성군인민들의 생활을 세심히 보살펴주시며 지체하시다나니 위대한 수령님께서 유평에 도착하신것은 이른새벽이였다.

창성군 일군의 집을 마다하시고 인민들과 함께 계시려 읍에서 멀리 떨어진 유평리로 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산기슭에 농가가 보이는 길가에서 차를 멈추시였다.

창성군의 외진 산골인 유평,

농가앞으로는 개울물이 사품치며 흐르고있었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끄러운 징검돌을 밟으시며 개울을 건느시여 농가앞에 이르시였다.

북부산골의 가을밤은 서리까지 내려 여간만 춥지 않았다.수행성원들은 위대한 수령님을 빨리 방안에 모시려고 급히 농가대문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인을 깨우지 말라고 조용히 이르시였다.그러시고는 농가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유평의 그날 새벽에 수놓아진 사랑의 이야기를 잊지 못하시여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1950년 10월 26일 새벽 3시경에 유평리에 가시였습니다.그때 수행성원들이 집주인을 깨우려고 하자 수령님께서는 밤중에 우리가 들어서면 주인이 놀랄수 있으니 깨우지 말라고 하시였습니다.수령님께서는 안타까와하는 수행성원들에게 밭에 낟알짚이 있으니 그것을 가져다 깔고자면 구수한 낟알냄새도 맡을수 있고 온기도 돌것이라고 하시면서 빨찌산투쟁을 할 때에도 그렇게 하니 아주 좋았다고 하시였습니다.》

그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손수 짚단을 가져다놓으시고 그우에 허물없이 앉으시였다.

이윽고 우등불을 마주하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전에 산에서 왜놈들과 싸우던 생각이 난다고 하시면서 간고하였던 항일의 나날들을 더듬으시였다.

빠직빠직 소리를 내며 우등불이 타올랐다.불길은 활활 솟으며 위대한 수령님께서 입고계시는 옷을 비치였다.

포연에 끄슬리고 색이 바래진 등어리며 어깨받이,다스러진 소매혼솔…

그것을 보면서 수행성원들은 너무도 가슴이 아파 눈물을 머금었다.

다 닳은 옷을 입으시고 전화의 길을 헤치시며 이밤에는 한 농민가정의 단잠을 깨우지 않으시려 항일의 그날처럼 우등불가에서 밤을 보내시는 위대한 수령님,

그날의 한 수행성원은 후일에 이렇게 회고하였다.

아무리 전쟁시기라고 하여도 어쩌면 위대한 수령님을 그렇게 모실수 있고 새옷 한벌 지어드리지 못한단 말인가? 후대들이 이렇게 우리를 욕할수 있다.그러나 딴 도리가 없었다.위대한 수령님께서 숙소를 하나 정하시여도 소박한 인민들속에 같이 있는것이 제일이라고 하시면서 언제나 인민들속에 계시였고 새옷을 짓는것을 비롯하여 자신을 위한 일은 일체 반대하시였던것이다.우리가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창성군의 유평,창골에 있다가 그곳을 떠나온 후인 1951년 2월 중순 최고사령부의 한 성원이 수령님께서 입고계시는 옷의 팔소매며 바지가랭이가 다 다스러진것을 보고 너무도 가슴이 아파 최고사령관동지,이제는 옷이 다 해졌는데 어떻게 입으시겠습니까,새옷을 한벌 지어입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씀올렸다.그러자 수령님께서는 지금 우리 인민들이 전쟁으로 하여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어렵게 살고있는데 최고사령관이라고 어떻게 새옷을 지어입겠는가,아직 더 입을수 있으니 따진데와 구멍이 난 곳을 잘 손질하라고 이르시였다.그리하여 끝내 새옷을 지어드리지 못했고 수령님께서는 전쟁기간 혼솔이 다 다스러진 옷으로 겨울을 나시고 여름도 보내시였다.유평에 도착한 날 우리 수행성원들은 수령님께서 타시는 군용승용차를 보면서도 눈물을 많이 흘렸다.수령님께서는 전쟁시기 늘 찬바람과 포연이 스며드는 풍막을 친 군용승용차를 리용하시였는데 아무리 좋은 차로 바꾸어드리려고 하여도 수령님께서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시였다.

포연내가 배인 그 군용승용차에는 잊지 못할 1950년 10월의 이런 이야기도 깃들어있다.

어느날 일군들이 보통군용승용차를 타고다니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신변안전과 안녕을 보장해드리려고 새 승용차를 가져왔다.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중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동무들,생각해보시오.지금 인민들과 군인들이 어려운 시련을 이겨내며 피어린 싸움을 하고있는데 내가 어떻게 화려한 승용차를 타고다니겠소.우리는 어려운 때일수록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어야 하오.조국을 통일하고 서울로 나갈 때나 새 차를 타게 되겠는지 모르겠소.…

우리 수령님은 바로 이런분이시였다.언제나 자신보다 먼저 전사들과 인민들을 생각하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기에 유평의 그밤에도 한 농민가정의 단잠을 지키시며 찬서리 내리는 한지에 계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처럼 대문밖에서 밤을 새우시는것을 모르고있다가 날이 훤히 밝아서야 밖으로 나온 집주인은 수령님을 알아뵙고 너무도 죄송스러워 어찌할바를 몰라하였다.그는 이슬에 축축히 젖은 수령님의 옷자락을 더듬으며 눈물을 쏟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는 농민의 손을 다정히 잡으시고 아직 집안사람들이 다 일어나지 않았겠는데 여기 앉아 이야기나 나누자고 오히려 그를 위안하시면서 불곁으로 이끄시였다.

농민과 무릎을 마주하고 앉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곳에서 몇년이나 살았는가,토지는 얼마나 분여받았는가 하나하나 물으시고 생활형편도 자세히 알아보시였다.수령님의 소탈하신 인품에 끌려 농민은 어려움을 잊고 해방전에는 소작살이를 하면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해방후에는 장군님은덕으로 6 300평의 땅을 분여받아 잘산다고 말씀드리였다.그 말에 수령님께서는 못내 기뻐하시면서 이제는 부자가 되였다고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유평의 농가에 머무르신 기간은 하루밖에 되지 않는다.그동안에도 우리 수령님께서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검박하게 생활하시였다.인민들의 생활이 넉넉치 못한것을 심려하시며 식사도 검소하게 하시였다.

수령도 인민의 아들입니다,인민들이 잡곡밥을 먹을 때는 나도 잡곡밥을 먹어야 합니다라고 하시며 전화의 나날 늘 잡곡밥이나 강냉이국수를 드신 우리 수령님이시다.

어느날에는 밥상을 받으시고도 한동안 수저를 들지 못하시며 지금 전선에서 싸우고있는 전사들은 밥이나 제대로 먹는지 모르겠소,아마 하루에 한끼씩 먹고 싸우는 때도 많을것이요,그런데 내가 최고사령관이라고 하여 어떻게 하루에 세끼씩 먹을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시면서 이제부터는 점심식사를 그만두자고 하신 어버이수령님,

그렇듯 마음속에 전사들과 인민들을 소중히 안고계시였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유평의 농가에 계실 때에도 흰쌀밥을 짓거나 색다른 반찬을 만드는것을 허용하지 않으시였고 농가를 떠나실 때에는 수행성원들에게 부엌을 리용하면서 손상을 준것이 없는가 잘 살펴보라고 거듭 이르시였으며 토방에 있는 고구마를 보시고서는 날씨가 차지는데 얼지 않게 잘 보관해주라고 당부하시였던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로고는 다 잊으시고 농가에 사랑의 자욱을 남기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곳을 떠나신 때로부터 몇해후 창성군을 찾으시여 현지지도로 바쁘신 속에서도 유평의 농가주인을 잊지 않으시고 그의 안부까지 알아보시였다.

아,태양보다 더 뜨거운 그 인정,하늘처럼 높으신 그 덕망!

지난 5월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유평의 농가에 깃든 사연을 다시금 추억하시며 이것은 우리 수령님께서만이 남기실수 있는 사랑의 전설이라고 하시면서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우리 수령님 같으신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 우리 수령님 같으신분이 또 어데 있으랴!

본사기자 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