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3(2014)년 7월 3일 로동신문

 

혁명전우라고 불러주시며 뜨겁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전설

어버이수령님께서 전 꾸바녀성법률가였던
깐델라리아 로드리게스에게 돌려주신 은정

 

20세기를 대표하시는 위대한 김일성동지는 우리 인민뿐아니라 세계 진보적인류를 뜨거운 사랑으로 한품에 안으시고 반제자주위업을 위하여 온 생애를 깡그리 바치신 력사에 전무후무한 희세의 위인이시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수십년전에 알게 된 꾸바의 한 녀성법률가를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잊지 않으시고 다심한 은정을 베풀어주신 이야기는 오늘도 우리 인민과 인류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우리 수령님은 그이께서 지니신 천재적인 사상리론과 특출한 령도력으로 하여,한없이 너그럽고 자애에 넘친 인품과 높은 덕망으로 하여 인류력사가 일찌기 알지 못했던 존경과 흠모를 낳은 위인중의 위인이시였습니다.》

1950년대 조선전쟁은 결코 이 땅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청소한 우리 공화국을 집어삼키려고 미국이 도발한 조선전쟁은 침략과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력량과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렬강들,그 추종세력들과의 전인류적인 대결전이였으며 전쟁력사에 있어본적이 없는 범죄적만행을 감행한 미제를 단죄하는 성토마당으로 온 지구를 화하게 하였다.

지난 조선전쟁시기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미제의 살인귀적만행을 규탄배격하는 광범위한 국제적운동의 시작은 그 계기가 있었다.

1951년 여름 국제민주녀성련맹조사단이 압록강을 조용히 건너 조선땅에 들어섰다.그들속에는 23살 난 나어린 꾸바처녀 깐델라리아 로드리게스도 있었다.

평화롭고 자유로운 세계에서 꿈많은 처녀시절을 보내야 할 한창나이에 총포탄이 비발치는 조선땅에 그가 발을 들여놓은것은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고 불의와 전쟁을 증오하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반미반제전선의 한전호에 선 조선인민을 적극 지지성원하며 미제의 죄행을 폭로하기 위해 생명의 위험도 무릅쓰고 나선 그의 앞길을 그 누구도 막을수 없었다.우리 나라에 도착한 그는 즉시 미제의 온갖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범죄행위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가 신의주와 안악,신천 등 여러곳을 돌아보며 조사한 미제의 치떨리는 범죄적행위에 대한 자료는 조사단의 보고서를 통하여 유엔에 제출되였으며 이를 계기로 세계적으로 반미반전투쟁이 세차게 벌어졌다.

국제민주녀성련맹조사단이 귀국을 며칠 앞둔 5월 27일 깐델라리아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사단성원들을 접견해주시겠다는 소식에 접하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전쟁의 중하를 한몸에 안으신 최고사령관이 귀중한 시간을 내여 우리들을 만나주시다니…)

그들을 따뜻이 맞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폭격에 사고는 없었는가,식사는 어떻게 하는가에 대하여 하나하나 물어주시고 국제적인 련대성을 표시하여준데 대해 감사를 표하시였다.

깐델라리아가 23살의 처녀라는것을 아신 수령님께서는 먼곳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케 왔다고 하시면서 조선인민은 꾸바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을 적극 지지한다고 고무격려해주시였다.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은 반드시 자유로운 독립국가로 될것이라고,결코 미제의 식민지로 될수 없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 어떤 뢰성벽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무비의 담력과 강철의 의지,호방한 웃음과 활기에 넘치신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우러르면서 깐델라리아는 승리한 조선의 래일을 확신하게 되였으며 그이의 위인적풍모에 저도모르게 매혹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깐델라리아사이의 혈연적관계는 가렬처절한 조국해방전쟁의 포연속에서 이렇게 맺어졌다.

꾸바에 돌아간 그는 조선에서 감행된 미제의 천인공노할 만행과 페허로 된 조선의 현실을 폭로하는 도서 《내가 본 조선》과 《우리는 고발한다》를 출판발행하였다.도서는 미제를 반대하여 일떠선 영웅적조선인민의 정의의 위업을 지지하고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진보적인류의 투쟁에 적극 기여하였다.

전화의 나날 위대한 수령님을 직접 만나뵙고 그이의 특출한 위인상과 풍모에 매혹된 깐델라리아는 그후에도 우리 나라를 여러차례 찾아왔다.미제가 100년이 걸려도 일떠설수 없다고 하던 땅에서 천리마의 기적을 안아오며 세기적인 변혁을 일으키는 사회주의조선의 현실을 보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흠모와 경탄의 마음이 스스럼없이 솟아올랐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40여년세월이 흐른 주체82(1993)년 8월 건강이 허락된다면 깐델라리아를 우리 나라에 초청하도록 해주시였다.오랜 세월이 흐르면 모든것이 희미해진다고 하지만 총포탄이 비발치던 나날에 어버이수령님과 깐델라리아사이에 맺어진 혈연적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어버이수령님의 직접적인 조선방문초청을 받았다는 소식은 깐델라리아의 가슴을 씨에라 마에스뜨라산줄기의 밀림처럼 설레이게 하였다.수십년세월이 흘렀어도 자기를 잊지 않으시고 몸소 불러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고결한 의리심에 격정을 금치 못하며 깐델라리아는 그이께 올릴 선물을 정성껏 마련하였다.하나하나의 선물마다에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다함없는 흠모의 마음이 깃들었다.몸은 대양건너 멀리 있어도 항상 위대한 수령님께로 달리는 마음을 담아,진보적인류는 언제나 조선을 지지하고 련대성을 보내며 미제를 반대규탄한다는 심정을 담아 품을 들여 준비하였다.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그를 친히 만나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40여년전의 모습을 잊지 않으시고 아,깐델라리아,23살의 처녀가 이렇게 됐구만,이렇게 됐어라고 하시며 손을 다정히 잡아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를 처음 만나시였을 때의 일을 하나하나 추억하시며 그동안의 생활에 대하여 친어버이심정으로 세심히 물어주시였다.

그가 소박한 선물로 조각품 《싼따 마리아》호와 책 《내가 본 조선》,《우리는 고발한다》를 드렸을 때에는 그의 진정을 헤아리시고 《싼따 마리아》호는 콜럼부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할 때 타고온 3척의 배들중의 하나라고 일군들에게 설명도 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제는 년로보장이라니 아무때나 조선에 와서 쉬고가라고,평양을 제 집처럼 여기고 자주 오라고 친어버이사랑을 거듭 부어주시였다.

인생말년에 보통외국인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크나큰 영광과 사랑을 받아안은 깐델라리아의 심정은 마치도 친어버이를 만난것만 같았다.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가 우리 나라에 체류하는 기간 날씨가 추워지는것을 념려하시여 자신의 명의로 모세타와 털신발을 선물로 보내주시였다.또한 우리 나라와 꾸바와의 친선관계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여 친선훈장 제1급을 수여하도록 해주시였다.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어버이수령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안으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깐델라리아는 수령님께서 또다시 부르신다는 가슴벅찬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전달에도 만나주셨는데 또다시 나를 부르시다니…)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사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를 만나신 후 일군들에게 오늘까지 우리를 위하여 아주 훌륭한 일을 한 인사라고 거듭 평가하시면서 그가 혼자몸이니 꾸바에 기다리는 사람도 없을것이라고,그러니 설도 함께 쇠고 다음해 1월에 우리 나라 비행기를 타고 떠나가게 하도록 이르시였다.그리하여 그는 우리 나라 체류기일을 더 연장하고 평양시안의 대기념비적건축물들과 묘향산,개성,신의주 등 우리 나라의 명승지들을 돌아보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그 나날 어버이수령님과 장군님의 따뜻한 사랑과 은정이 어린 생활필수품과 남방과일까지 받아안았으니 기둥도시로 소문난 아바나의 건축물들과 빨마나무가로수들도 감복할 전무후무한 사랑의 전설이 아닐수 없었다.

주체82(1993)년 12월 21일 깐델라리아가 감격에 겨워 어버이수령님께서 계시는 곳에 도착하였을 때였다.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깐델라리아와 인사를 나누신 후 따뜻한 분위기속에서 담화를 하시고 성대한 오찬회도 마련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오찬회에서 전승혁명사적관에 있는 조국해방전쟁시기 국제민주녀성련맹조사단의 활동정형을 찍은 사진에 깐델라리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데 사실인가고 물으시였다.얼마전 사적관을 돌아보던 그가 해당 일군에게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나가는 말을 한적이 있었다.

당시 그 사적관에는 조사단의 활동과 관련한 사진이 있었는데 그의 얼굴이 가리워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연을 일군들로부터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해당 기관들에 깐델라리아의 얼굴이 잘 보이는 사진이 있을수 있으므로 그 사진을 바꾸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깐델라리아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우리 인민의 정의의 위업을 진심으로 도와준 혁명전우이라고,그의 사업을 잘 도와주어야 한다고 간곡하게 당부하시였다.

깐델라리아를 위하여 베풀어주신 사랑은 끝이 없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새해를 맞으며 그에게 년하장도 몸소 보내주시였으며 평양체육관에서 진행된 1994년 새해설맞이모임에도 참석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깐델라리아는 혁명전우라는 고귀한 칭호를 안겨주신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대해같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한생을 조선의 딸,수령님의 전우로 살리라 굳게 맹세다졌다.

그가 어버이수령님을 얼마나 흠모하고 따랐는가 하는것은 조선방문을 마치면서 자기의 가슴에 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이 모셔진 초상휘장을 모시고 수령님과 장군님의 불후의 고전적로작들을 우리 일군들에게 부탁한것만 놓고서도 잘 알수 있다.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온 후 그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 방문기 《40년만에 다시 본 조선》을 집필하였다.그는 《하늘에서 받은 생일상》,《떠날수 없는 마음》,《지구는 깨뜨릴수 있어도》,《조선속에 전세계가 있다》,《권총을 들이대면 포를 내댈것이다》,《높은 칭호,고귀한 이름》 등 여러 제목의 글에서 조선방문기간 자기가 받아안은 사랑과 은정에 대하여,절세위인들의 특출한 위인상에 대하여 격조높이 구가하였다.

그가 쓴 도서는 조선어,영어,프랑스어,중어,로어,일본어 등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출판되여 세계인민들속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는 여러 계기들에 좌담회와 회견을 가지고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인덕정치,광폭정치에 대하여,사회주의를 고수해나가는 우리 인민의 자랑찬 투쟁에 대하여 널리 해설선전하였다.

이 과정에 깐델라리아의 가슴속에는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절절한 흠모심이 더욱 가득차게 되였으며 그 품을 떠나서는 한시도 살수 없을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혔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이러한 마음을 속속들이 헤아려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몇달전에 깐델라리아와 한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그가 우리 나라에 다시 와서 백두산지구를 비롯한 혁명전적지와 사적지들,금강산을 비롯한 명승지들을 돌아보면서 휴식하도록 할데 대한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깐델라리아는 1994년 5월말 우리 나라를 다시 방문하게 되였다.1994년 6월 3일은 깐델라리아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날이였다.

이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깐델라리아를 만나주시기 위하여 넓은 홀에까지 친히 나오시여 그의 우리 나라 방문을 환영한다고 말씀하시며 따뜻이 맞아주시였다.어버이수령님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을 다시금 듣는 순간 깐델라리아는 헤여졌던 친부모를 다시 만나는듯 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피델 까스뜨로동지를 비롯한 꾸바의 령도자들이 모두 건강하여 일을 하고있다는 그의 말을 들으시고 못내 만족해하시였다.그러시면서 혁명가는 일감이 생길것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일을 찾아서 하여야 한다고,꾸바에 신발을 신고 죽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있는 좋은 말이라고 긍정해주시였다.

깐델라리아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오는 도중에 불편한 점은 없었는가 알아보시고 그동안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료해하시였다.깐델라리아가 꾸바의 청년섬에 가서 공부하고있는 우리 나라의 류학생모두를 자기의 손자로 여기고있다는것을 아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에게 160여명의 손자가 있는셈이라고,좋은 일이라고 과분한 치하를 하시였다.

그는 어버이수령님께 이처럼 극진하게 환대해주어 정말 고맙다고 자기의 심정을 아뢰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친구들끼리 돌봐주는것은 환대가 아니라 응당한 일이라고,환대라는 말은 손님들과 외교를 할 때나 쓰지 전우들사이에는 쓰지 않는다고 이르시였다.

전우,이 말은 생사를 같이하며 같이 싸운 동지들사이에 부르는 말이다.

전우로 불러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다정한 말씀에 그는 참으로 감격을 금할수 없었다.

계속하여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가 지난해 우리 나라에 왔다가서 쓴 글을 보았는데 사실을 그대로 실감있게 잘 썼다고,그 글은 문학가라고도 할수 있고 법률가라고도 할수 있는 사람이 쓴것과 같이 잘 썼다고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그이의 말씀에 깐델라리아는 너무도 황송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책에서 어버이수령님과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조선에서 일어나고있는 사변적인 일들을 진실하게 서술하였을뿐이였다.사실 도서의 분량이나 담고있는 사상주제적내용으로 볼 때 자기의 느낌을 그대로 담은데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토록 분에 넘친 치하를 하여주시는것이였다.

깐델라리아는 어려움도 잊고 어버이수령님께 이제 돌아가면 위대한 김정일동지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말씀드리였다.

그의 말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면서 열렬히 환영한다고 지지해주시였다.

이어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생활적인 문제에로 화제를 돌리시며 지난해에는 겨울에 왔댔기때문에 지방에 많이 가보지 못하였을것이라고,이번에는 마음놓고 휴식하면서 그때 보지 못한것들을 다 보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이번 기회에 백두산에 가보려고 한다는 깐델라리아의 말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지금은 좀 이르다고,백두산에는 아직 눈이 적지 않게 있고 춥다고 하시면서 그의 건강을 념려해주시였다.그러시고는 앞으로 해마다 여름철에는 우리 나라에 와서 휴식하고 겨울철에는 꾸바에서 휴식하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깐델라리아를 위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다심한 사랑은 그가 한생을 살면서 이 세상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뜨겁고 진실한것이였다.진보적인류가 그처럼 흠모하고 따르는 어버이수령님께서 국가정치가도 아니고 평범한 녀성법률가에 지나지 않는 자기를 그처럼 세심히 보살펴주시는 친어버이사랑은 돌우에도 꽃을 피우는 뜨거운 동지애였다.

일생에 거의나 눈물을 흘려본적이 없는 그는 어버이수령님의 육친적사랑에 종내 행복의 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참으로 깐델라리아를 위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진정은 끝이 없으시였다.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깐델라리아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시였으며 자신의 존함이 새겨진 금시계를 그의 손목에 친히 채워주시며 이것은 자신께서 로혁명가들에게 주는것이라는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날 점심식사도 마련해주시고 전우들끼리 이렇게 만나니 얼마나 좋은가고,당신을 위하여 점심식사를 차렸는데 음식을 많이 들어야 하겠다고 은정넘친 말씀도 해주시였다.그러시면서 손수 그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앞에 놓아주기도 하시고 축배잔도 찧어주시였다.

국제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명철한 해답을 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자기 집에 온것처럼 생각하고 휴양도 하고 구경도 하면서 잘 지내라고,생활하는데 제기되는것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간곡히 이르시였다.

그가 어버이수령님의 건강을 축원하여 준비한 선물을 드리였을 때에는 오히려 그의 건강을 념려하시며 나는 건강하니 10년은 더 일할수 있다고,우리 더 건강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자고 고무해주시였다.

그로부터 한달후 평양의 한 숙소에서 도서집필에 전념하던 그는 어버이수령님께서 뜻밖에 서거하시였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보에 접하게 되였다.믿을래야 믿을수 없는 사실앞에서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저를 만나주신지 불과 35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서거하시다니…)

그것이 정말인가고 열번,스무번 곱씹어 물어본 그는 절통함을 금치 못하며 어버이수령님의 령전을 찾아 화환을 진정하였다.그리고 위대한 장군님께 조의편지를 삼가 올리였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또 닦는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제 더는 수령님의 친어버이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게 되였다는 비통함과 함께 그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더해만 갔다.

하지만 어버이수령님께서 깐델라리아에게 돌려주시던 사랑과 은정은 위대한 장군님에 의하여 그대로 이어졌다.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뜻밖에 수령님을 잃은 크나큰 상실의 아픔속에서도 그를 잊지 않으시고 조국해방기념일에는 대를 두고 길이 전할 사랑의 선물을 보내주시였다.또한 그로부터 며칠후에는 깐델라리아의 건강을 념려하시여 사랑의 보약들도 가슴한가득 안겨주시였다.

정녕 깐델라리아에게 있어서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은 생의 활력을 부어주신 자애로운 친어버이이시였다.하기에 그는 귀국하면서 위대한 장군님께 자기의 심정을 담은 감사편지를 삼가 올리였다.

그후 깐델라리아는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절절한 흠모심을 안고 자기 집에 모신 수령님의 초상화앞에 놓은 수정꽃병에 매일 장미꽃 한송이를 어김없이 꽂아놓았다.

어버이수령님의 서거 3돐이 되는 1997년 7월 8일에도 깐델라리아는 자기뿐만아니라 이 세상 모든 진보적녀성들의 마음을 담아 붉은 장미와 순결의 상징인 백합꽃을 수령님의 초상화앞에 삼가 드리였다.

《주석님!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던 그 통곡의 7월 8일,악몽과도 같던 그날이 정말로 꿈이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지금도 저에게는 주석님의 자애로운 모습과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그대로 심장속에 간직되여있습니다.주석님은 가시지 않으셨습니다.주석님은 영원히 인류의 심장속에 영생하십니다.》

외국의 한 평범한 늙은이에 불과한 자기에게 최상의 행복과 영광을 주신 절세위인에 대한 열렬한 흠모심을 변함없이 간직해온 깐델라리아,그후 그는 어버이수령님앞에서 한 맹세를 지켜 위대한 장군님을 칭송하는 책 《사랑과 믿음의 정치》를 집필하였다.그는 책에서 위대한 장군님께서 어버이수령님께서 지니시였던 인간사랑과 숭고한 덕망을 그대로 체현하시고 인민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믿음의 정치를 펼쳐오신데 대하여 감동깊게 서술하였다.

깐델라리아는 자기의 한생에서 그 누구도 받아안을수 없는 최상의 영광과 행복을 받아안았다.하기에 그는 로환으로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어버이수령님의 따뜻한 사랑속에 보내던 나날을 감회깊이 돌이켜보며 그이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위인중의 위인,성인중의 대성인이시였다고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숭고한 혁명적의리와 사랑의 력사는 위대한 대원수님들 그대로이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에 의하여 오늘도 빛나게 계승되고있다.

오늘 진보적인류는 자주시대의 또 한분의 걸출한 령도자이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천출위인상에서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자애로운 영상을 뵈오며 세월이 가고 대가 바뀔수록 반제자주위업을 위하여 더욱 힘차게 싸워나가고있다.

본사기자 신경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