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3(2014)년 9월 21일 로동신문

 

제주도녀걸로 키워준 은혜로운 품

통일애국렬사 고진히동지가 받아안은 사랑과 은정에 대한 이야기

 

9월의 주작봉마루에 그리움의 대하가 물결치고있다.

오늘도 천만아들딸들을 따뜻이 맞아주시는 백두산녀장군 김정숙어머님의 자애로운 모습은 우리 인민들과 온 겨레의 심장속에 태양의 빛발로 새겨져 소중히 자리잡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혁명동지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뜨거운 인정미는 우리 어머님의 천품이였습니다.》

김정숙어머님의 불멸의 한생에는 천대받고 멸시받던 이 나라의 녀성들을 사랑과 정을 다해 안아일으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몸 바쳐나서는 애국자로,시대의 영웅으로 키워주신 가슴뜨거운 사연들이 수없이 수놓아져있다.

공화국영웅,조국통일상수상자인 통일애국렬사 고진히동지가 받아안은 사랑과 은정도 어머님에 대한 숭엄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고있다.김정숙어머님의 한없는 덕망은 제주도의 평범한 녀성을 애국자로,신념의 강자로 키워준 젖줄기였으며 꺼질줄 모르는 생명력의 원천이였다.

 

자애로운 어머니,위대한 스승

 

고진히동지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원쑤들과 용감히 싸운 제주도녀걸로 우리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져있다.

어려서부터 가난에 쪼들려 소학교문전에도 가보지 못했던 고진히동지가 조국과 민족이 기억하는 애국자,신념의 강자로 성장하기까지에는 항일의 녀성영웅이신 김정숙어머님의 자애로운 손길이 뜨겁게 깃들어있다.이 이야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던 뜻깊은 그 나날로부터 시작된다.

주체37(1948)년 9월 평양의 모란봉극장에서는 북과 남 전체 조선인민의 대표들인 공화국의 첫 대의원들이 모인 가운데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차회의가 성대히 열리였다.제주도대표로 남편과 함께 력사적인 회의에 참가한 고진히동지는 오매에도 그립던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는 영광의 시각을 맞이하였다.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고진히동지에게 이번에 남편과 같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였는가고 따뜻이 물어주시며 싸우는 부부대의원이라고,장하다고 치하의 말씀을 주시였다.

순간 고진히동지는 이름할수 없는 송구스러움과 북받치는 격정에 몸둘바를 몰랐다.제주도에서 남편의 뒤바라지를 하면서 혁명이라는 말을 처음 알았고 점차 그 영향을 받아 조국통일을 위한 구국항쟁의 길에 따라나서게 되였던 그였다.민족재생의 은인이신 김일성장군님의 정치가 고향땅에 펼쳐질 그날을 위해 손에 총을 잡고 나섰던 고진히동지에게 있어서 공화국의 품에 안기게 된것은 인생의 더없는 행운이였다.하기에 이 땅우에 인민의 나라를 세워주시고 자기 부부를 공화국의 첫 대의원으로 내세워주신 김일성장군님의 고마운 은덕에 제주도인민들의 마음까지 합쳐 감사의 큰절을 올리리라 생각하고있었는데 오히려 분에 넘치는 말씀을 받아안게 되였으니 솟구치는 격정으로 마음을 다잡을수 없었던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자기들이 얼마나 넓고넓은 인덕의 바다,따사로운 어버이품에 안기였는지 미처 다 알지 못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토록 대견해하시며 내세워주신 고진히동지를 위해 누구보다 살뜰한 정을 기울이시고 육친적사랑을 부어주신분은 바로 김정숙어머님이시였다.장군님 한분만을 믿고 찾아온 남조선혁명가부부를 자신께서 돌봐주어야 한다시며 말 못하는 마음속고충까지 깊이 헤아려주시는 그이의 뜨거운 인정미와 다심한 손길은 고진히동지의 사업과 생활의 구석구석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주체37(1948)년 10월 28일이였다.김정숙어머님께서 위대한 수령님과 어리신 장군님을 모시고 고진히동지가 공부하고있는 중앙고급지도간부학교(당시)를 찾으시였을 때였다.고진히동지의 기숙사호실에 몸소 들리신 어머님께서는 그의 자식들이 종이에 그린 집을 보게 되시였다.그이께서는 집이 얼마나 그리우면 아이들이 그림까지 그렸겠는가고 하시며 진히동무와 남편이 출근하기에도 편리하고 자신께서도 자주 가볼수 있는 위치에 집을 잡아주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너무도 꿈만 같은 사랑에 접하여 그는 눈물속에 《고맙습니다.》라는 말밖에 되뇌일수 없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그들에게 집을 마련해주시였을뿐아니라 세간난 자식을 위하는 친정어머니심정으로 집세간도 보내주시고 몸소 집까지 찾아주시였다.

그날 어머님께서는 고진히동지로부터 제주도에서 딸을 데려오지 못했다는 가슴아픈 사연을 접하게 되시였다.사실 고진히동지가 제주도에 두고 온 자식들때문에 걱정하고있다는것을 남먼저 헤아리시고 어서빨리 데려오도록 마음쓰신분은 김정숙어머님이시였다.

고진히동지가 제주도에 갔을 때 적들의 감시는 실로 삼엄하였고 게다가 딸은 다른 먼곳의 친척집에 가있었다.사람들이 그런 정황속에서 세 아들을 데리고 무사히 돌아온것만도 다행이라고 위안해주었지만 딸에 대한 걱정을 누구에게도 터놓을수 없었다.

사연을 다 들어주신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안색을 흐리시며 그 어린것이 누구를 의지하여 살겠는가,아무리 정황이 위급하다고 해도 딸애를 데려오지 못한것은 잘한 일이 아니라고 책망하시였다.그러시면서 딸애를 데려오지 못한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몰라서 그러는것이 아니라고,그 철부지가 살벌한 땅에 홀로 남게 된것이 가슴아파 그런다고 갈리신 음성으로 뇌이시였다.고진히동지는 친부모인 자기들보다 더 가슴아파하시는 김정숙어머님의 인정의 세계에 참고참았던 울음을 터치고야말았다.

고진히동지의 가정을 위하시는 김정숙어머님의 사랑과 은정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새 집을 받았을 때에는 손수 명세까지 짜놓으시고 가구비품일식과 함께 여러가지 옷감,이부자리,쌀,부식물 지어 부엌과 뜨락에 따로 놓고 쓰라고 보내주신 쇠절구와 돌절구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마련해주신 이야기,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집을 찾으시여 제주도에서 나무만 때다가 진탄을 때자면 힘들것이라고 념려하시며 부엌아궁이문도 열어보시고 장난세찬 그의 자식의 옷에 묻은 흙도 깨끗이 닦아주시며 손에 난 상처까지 치료해주신 가슴뜨거운 사실…

이런 이야기를 다하자면 끝이 없다.

언제인가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고진히동지가 사업에 시간과 정력을 바치며 가정생활을 소홀히 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시였다.이러한 그를 나무람하시며 어머님께서는 우리 녀성들은 혁명사업에 적극 참가할뿐아니라 남편의 사업도 잘 도와주고 뒤받침해주어야 한다고,녀성들은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가정을 살뜰히 돌볼줄 알아야 한다고 간곡히 타일러주시였다.그것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며 때로는 엄한 매도 드는 친어머니의 심정 그대로였다.

네 남매의 어머니가 되도록 세상에 그렇듯 따뜻한 사랑이 있는줄 모르고 살아온 고진히동지였다.바람많고 돌많은 제주도처럼 세상은 어디 가나 거친 바람만 불어치고 걸음걸음 발끝에 채이는것은 모난 돌뿐인줄로만 알던 그에게 있어서 김정숙어머님은 진정한 삶의 보호자이시였다.

고진히동지가 김정숙어머님의 사랑과 은정속에 배우며 성장한 기간은 그대로 그이의 고매한 풍모에 매혹되여 스스럼없이 따르며 신념의 억센 기둥을 세워간 나날이였다.고진히동지의 대의원수첩에는 평양시인민위원회 보건부 부부장으로 일하면서 김정숙어머님의 가르치심을 받던 일이며 그이의 말씀을 집행하기 위하여 헌신해온 일들이 적혀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늘 진히동무를 보니 빨찌산시절의 전우들생각이 더 난다고,통일된 조국에 장군님을 모시는것이 자신의 념원이라고 하시며 고진히동지에게 조선인민혁명군 녀대원들의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그를 데리고 만경대혁명학원에도 나가군 하시였다.그 나날 고진히동지는 항일의 전구에서 먼저 떠나간 전우들을 잊지 못해하시며 혁명가유자녀들의 친부모가 되시여 따뜻이 보살펴주시는 어머님의 혁명적의리와 후대사랑의 숭고한 모습을 목격하며 눈굽을 적시였다.자신께서는 조국이 해방된지 여러해가 지나도록 아직 고향을 다녀오지 못하시고 이국의 광야에 묻혀있는 부모형제를 찾는 일도 뒤로 미루시며 전우들이 부탁하고 간 유자녀들을 혁명의 기둥으로 억세게 키우기 위해 모든것을 다하시는 김정숙어머님은 정녕 고진히동지가 온넋을 바쳐 따르고싶은 위대한 삶의 귀감이시였다.

그처럼 따르고 받들던 김정숙어머님께서 너무도 뜻밖에 서거하신것은 하늘이 무너지는것과 같은 일이였다.

《조국이 통일되면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한나산에도 같이 가자고 하시더니 왜 이렇게 떠나가신단 말입니까.그 념원,그 소원을 남기고 어떻게 혼자 가신단 말입니까.》

한순간에 자애로운 어머니,위대한 스승을 잃은 고진히동지는 땅을 치며 오열을 터치였다.

김정숙어머님의 령구앞에서 피눈물을 뿌리며 그이의 념원을 마음속으로 열백번 곱씹어외우는 고진히동지의 심장속에서는 불타는 맹세가 용암처럼 끓어번지였다.

 

《〈김일성장군 만세!〉소리 높은 곳에 내가 있다》

 

백두산절세위인들과 뜻과 정,도덕의리로 맺어진 혁명전사들의 혈연의 관계는 세월의 이끼속에서도 영원토록 퇴색을 모르며 보석처럼 빛을 뿌린다.

언제인가 애국렬사릉을 돌아보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곳에 안치되여있는 강규찬,고진히부부의 합장묘앞에서 걸음을 멈추시였다.수십년전에 떠나간 그들을 잊지 못하시며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시였던 장군님께서는 비석뒤에 자그마하게 새겨져있는 고진히동지의 이름을 조용히 외우시였다.그러시면서 고진히동무는 당당한 애국자,혁명가로서 강규찬동무보다 더 유명하여졌는데 비석에 새긴 글은 왜소하게 되였다고,강규찬동무와 고진히동무는 다 혁명가들인것만큼 그들에 대한 글을 비석앞면에 같이 새겨야 한다고 이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정숙어머님께서 그토록 애지중지 감싸안아 키워주신 고진히동지의 자식들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돌리시고 그들을 어버이수령님앞에 내세워주시였다.

그날은 주체82(1993)년 1월 20일이였다.혁명가유자녀들을 만나주신 자리에서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김정숙어머님의 남다른 사랑을 많이 받아온 강규찬,고진히동지들에 대하여 추억하시며 그 자식들에게 너희 부모들은 혁명가부부답게 정말 잘 싸웠다는 은정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통일애국의 길에 바쳐진 강규찬,고진히동지들의 영웅적희생과 빛나는 삶은 김정숙어머님의 령전에서 다진 맹세의 실천이였다.

사랑과 믿음에는 충정과 의리가 따르는 법이다.고진히동지에게 있어서 조국통일의 길은 사나운 폭풍과 불바람이 휘몰아친다고 해도 기어이 가야 할 길이였다.백두산절세위인들의 숭고한 통일애국의 뜻을 실현하는것은 그 무엇으로도 꺾을수 없는 그의 신념이였다.

오늘도 강규찬,고진히동지들의 자식들은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고있다.

부모들이 전선으로 떠나던 그날 엄마가 가는 곳은 어데냐고 묻는 자식들에게 고진히동지는 《김일성장군 만세!》소리가 높이 울리는 곳이 엄마가 가있는 곳이라고 대답해주었다고 한다.

그의 이 말은 항일의 나날 도천리와 신파지구에 대한 지하공작임무를 성과적으로 마치고 사령부로 돌아가실 때 김정숙어머님께서 따라서는 마을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외운것이였다.

떠나기에 앞서 고진히동지는 웃방에서 김정숙어머님의 사랑과 은정이 어린 이불을 안고 내려왔다.제주도에서 데려오지 못한 딸을 두고 못내 가슴아파하시던 어머님의 정을 그대로 전하기 위하여 고이 간수하였던 이불이였다.이불에서 풀색비단 한쪽을 정성스레 떼내여 주머니를 만든 고진히동지는 남편과 함께 모란봉기슭에 안치되여있는 김정숙어머님의 묘소를 찾았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고진히동지는 묘소의 파란 잔디 한포기와 흙 한줌을 살점처럼 정히 떠서 주머니에 간수하였다.김정숙어머님의 존귀하신 영상사진과 함께 그 흙주머니를 품속에 소중히 간직한 고진히동지는 투쟁의 길로 결연히 떠나갔다.

김정숙어머님의 서거 1돐을 맞이할 때에는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던 엄혹한 시기였지만 강규찬,고진히동지들은 남조선인민들과 함께 추모회를 엄숙히 거행하였다.

그후 고진히동지는 적후에서 유격투쟁을 벌리면서 무비의 용감성을 발휘하였다.당시 짧게 잘라버린 머리에 모자를 쓰고 군복을 입은 고진히동지를 보고 사람들은 제주도녀걸이라고 불렀다.원쑤들에게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을 때에도 고진히동지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소중히 간수하고있던 흙주머니를 꺼내든 그는 이렇게 속삭이였다.

(우린 살아도 죽어도 그 품속에 안겨있어요.그래서 세상에 무서울것이 없고 못해낼 일도 없어요.)

그로부터 한달후 고진히동지는 혁명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한 적구공작에 나갔다가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원쑤들은 그에게 악착한 고문을 들이댔다.하지만 제주도녀걸의 억척같은 지조는 결코 꺾을수 없었다.피어린 싸움터에서만이 아니라 살기풍기는 철창속에서도 그는 적들을 전률케 하였다.

최후를 앞두고 고진히동지는 손가락을 깨물어 한자한자 심장의 피로 독감방담벽에 《김일성장군 만세!》라는 글발을 새겨넣었다.백두산절세위인들께 다진 충정과 의리의 맹세를 지켜 그는 생명의 마지막순간에도 《김일성장군 만세!》소리가 높이 울리는 곳에 꿋꿋이 서있었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통일애국의 길에서 혁명전사의 신념과 의리를 지켜 싸운 강규찬,고진히동지들에게 공화국영웅칭호와 조국통일상을 수여하도록 해주시여 그들의 삶이 조국과 후대들의 기억속에 영생하도록 은정깊은 사랑과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 *

 

백두산절세위인들과 혁명전사들사이에 맺어지는 사랑과 충정의 위대한 력사와 전통은 오늘도 면면히 이어지고있다.

천만군민을 혁명전우로,동지로 불러주시며 불보다 뜨거운 정을 부어주시는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속에 우리 녀성들은 시대의 영웅,선군혁명투사들로 억세게 자라나고있다.그 장엄한 대오의 전렬에 우리 혁명이 낳은 수많은 1세,2세 녀성영웅들이 서있거니,그들의 값높은 삶은 후대들에게 인생의 참된 진리를 깨우쳐주고있다.

당과 수령의 위업을 받들어 불속에서도 곧음을 굽히지 않는 참대와 같이,눈속에 파묻혀도 변하지 않는 푸른 소나무와 같이,부서져도 그 빛을 잃지 않는 백옥과 같이 영원히 변치 않을 신념과 의리를 간직하고 사는 바로 여기에 혁명전사들의 참된 삶의 가치와 인생의 영광이 있다고.

본사기자 최철순
본사기자 박철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