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3(2014)년 10월 8일 로동신문

 

[정세론해설]

과거죄악은 절대로 덮어버릴수 없다

 

력사에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타민족에 대한 살륙만행을 저지른 전범국들의 죄행이 적지 않게 기록되여있다.그러나 일제가 조선에서 감행한 인간살륙만행은 그 간악성과 잔인성에 있어서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것이였다.력사에 《을미사변》으로 알려진 명성황후살해사건도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중의 하나이다.여기에 지금으로부터 119년전인 1895년(을미년) 10월 8일에 있은 명성황후살해사건에 직접 관여했던 일본인 기꾸찌가 후날 자기의 수기에 남긴 고백자료가 있다.

《선혈로 물든 민비의 시체에는 석유가 뿌려지고 불이 달렸다.순식간에 시체는 화염에 싸여 이상한 냄새를 풍기였으며 참으로 귀곡추추(귀신도 서글프게 운다는 뜻)하였다.》

이날 날강도 일제는 총칼을 빼들고 조선봉건정부의 황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학살함으로써 일제야말로 국제법도 인륜도덕도 모르는 포악무도한 살인마무리였음을 낱낱이 드러내놓았다.

19세기말 조선봉건통치배들의 극심한 외세의존정책으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는 렬강들의 첨예한 각축전장으로 변하였다.청일전쟁의 결과 일제는 조선에서 청나라세력을 밀어내고 우리 나라에 대한 독점적지배권을 확립할수 있는 유리한 기회를 마련하였다.하지만 이 시기 우리 나라에서 갑오농민전쟁을 비롯한 반일투쟁이 강화된것으로 하여 일은 일제의 야망대로 되지 않았다.

한편 짜리로씨야가 조선봉건정부의 실제적인 권력자였던 명성황후와 결탁하여 우리 나라에 세력권을 뻗치기 시작한것은 조선침략야망에 들떠있던 일제에게 있어서 큰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짜리로씨야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는 명성황후를 그냥 살려두면 대조선침략계획이 파탄될수 있다고 여긴 일제는 명성황후를 암살할 음모를 꾸미고 실천행동에 들어갔다.

일제는 명성황후암살작전의 적임자로 륙군중장 미우라 고로를 내세우고 이자를 조선주재 일본공사로 임명하였다.

어떻게 해서나 조선봉건정부를 가로타고앉을데 대한 비밀훈령을 받고 서울에 기여든 미우라는 우리 나라의 정치정세를 내탐한 후 황후를 살해하기 위한 흉악한 음모를 꾸미였다.미우라가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이 나라(조선)에서의 우리의 세력은 몇달도 못 가서 깨끗이 사라질것》이라고 떠벌인것만 놓고보아도 일제가 이 사건조작을 얼마나 중요시하였는가 하는것을 잘 알수 있다.

1895년 10월 8일 미우라의 총지휘밑에 드디여 피비린 황후살해극의 막이 올랐다.이날 이른새벽 광화문부근에 집결한 수백명의 일본살인악당들은 훈련대를 앞장에 내몰아 황궁을 지키고있던 시위대와 총격전을 벌리게 하고 성벽을 뛰여넘어 광화문을 열어제끼였다.

일제살인마들은 황후를 찾아내기 위해 침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황후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있던 살인악당들은 궁녀들이 있는 방문들을 닥치는대로 짓부시고 들어갔으며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그들을 잡아 머리태를 잡아끌고 대청마루에 끌어내다가 마구 죽이였다.황궁은 삽시에 일제날강도들의 살인,파괴의 란무장으로 변하였다.살인깡패들에 의해 황후도 끝내는 많은 궁녀들과 함께 칼에 맞아 쓰러졌다.

일제의 죄행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일제깡패무리들은 칼에 맞은 황후를 재확인한 후 숨이 채 꺼지지 않은 그를 이불에 둘둘 말아 미리 준비하여놓은 장작더미우에 올려놓고 불태워버리였다.그것도 성차지 않아 다 타버린 황후의 유골마저 못속에 집어던지였다.

당시 조선봉건정부 고문이였던 이시즈까는 일본법제국장앞으로 보낸 보고서에 《살인범들인 데라자끼(본명 다까하시 겐지)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참살한 황후를 끌어내여 그를 벌거벗긴 후… 기름을 들씌워 불태웠다.》고 썼다.

가장 야수적인 방법으로 황후를 학살한 일제는 범죄사건의 진상을 은페하기 위해 모든 책임을 대원군과 훈련대에 넘겨씌우고 저들은 다만 《국왕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을뿐이라고 내외여론을 기만하였다.

사건당일로 일제의 피비린내나는 살륙만행은 온 서울장안과 짜리로씨야를 비롯한 서울주재 각국 외교대표부들에 퍼져나갔다.그후 일제에 의한 황후살해사건은 국제적인 문제로 번져졌으며 세계도처에서 일제를 규탄하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였다.이렇게 되자 일제는 짜리로씨야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나아가서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적지반을 더욱 확대강화할 목적밑에 그 무슨 《조사단》을 파견하여 황후살해만행의 주모자인 미우라를 비롯한 사건관계자 수십명을 우리 나라에서 빼내여 히로시마감옥에 림시《구금》하는 기만적인 놀음을 벌리였다.다음해 1월에는 《증거불명》의 리유로 그들전원을 무죄석방하였다.그러나 일제가 제아무리 발뺌하려고 획책하였어도 황후살해계획의 직접적인 작성자,집행자로서의 저들의 죄행은 결코 감출수 없었다.

이 모든것은 《을미사변》의 주범이 다름아닌 일본정부이며 전대미문의 이 테로사건은 우리 나라에 대한 일제의 독점적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침략의 전주곡이였다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그후 우리 나라를 비법적으로 강점한 일제는 40여년간에 걸치는 가장 야만적인 식민지파쑈강점통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들씌웠다.수많은 조선청장년들이 일제에 의해 죽음의 고역장들과 전장터들에 끌려가 마소와 같이 혹사당하거나 총알받이로 내몰려 무참히 죽었다.20만명에 달하는 우리 나라 녀성들을 강제련행,랍치,유괴하여 일본군성노예로 만들었다.경악을 자아낸 일제의 이러한 범죄만행은 력사의 한페지에 생생히 기록되여있다.

일제가 패망한지도 69년세월이 흘렀다.하지만 일본은 오늘까지도 과거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은커녕 그 책임에서 한사코 벗어나보려고 교활하게 책동하고있다.일본은 과거청산문제에서 그 어떤 오그랑수도 통할수 없다는것을 명심해야 한다.

력사는 절대로 덮어버릴수 없다.

김철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