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4(2015)년 3월 10일 로동신문
항일선렬들의 영원한 웨침- 죽어도 혁명신념 버리지 말라 권영벽,리제순,지태환,리동걸동지들의 서거 70돐에 즈음하여
혁명가의 삶이 그리도 아름답고 빛나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지난해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찾으시였던 마두산혁명전적지의 구호문헌이 지금도 우리모두의 심장을 세차게 뒤흔든다. 《죽어도 혁명신념 버리지 말라》 불어치는 찬바람을 맞받아 헤치시며 마두산을 찾으신 그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구호문헌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혁명은 곧 신념입니다.신념을 버리면 혁명을 할수 없습니다.혁명적신념을 굳건히 간직한 사람만이 혁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수 있으며 조국과 인민앞에 떳떳할수 있습니다.… 죽어도 버리지 않는 혁명신념, 바로 여기에 항일혁명선렬들이 지녔던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이 비껴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언정 혁명적신념과 지조를 굽히지 않은 그들의 높은 사상정신세계가 어려있다. 얼마나 많은 항일의 투사들이 수령앞에,혁명앞에 다진 맹세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귀중한 청춘과 생명을 아낌없이 바치고 신념의 인간으로 영생의 삶을 누리고있는것인가. 주작봉마루의 혁명렬사릉,우리 혁명의 자랑스러운 첫 세대로,신념과 지조를 지켜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억세게 싸운 투사들의 전형으로 피어린 항일혁명전쟁사에 불멸의 공적을 아로새긴 권영벽,리제순,지태환,리동걸동지들의 열혈의 심장들도 이 영생의 언덕에서 세차게 고동치고있다. 위대한 수령 《손에 무장을 들고 우리와 함께 험난한 항일혁명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물론 신념도 강하고 의지도 강한 백절불굴의 투사들이였다.그들은 최악의 역경에 처한 순간에도 혁명가의 지조를 버리지 않았고 조국해방에 대한 신념을 더럽히지 않았다.》 주체39(1950)년 여름 해방된 서울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제일먼저 서울서대문형무소부터 들리시였다.친지들과 전우들의 붉은 피가 진하게 슴배여있는 형무소를 보시는 순간 우리 수령님의 심중이 과연 어떠하시였으랴.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때를 돌이켜보시며 바로 악명높은 이 형무소에서 권영벽,리제순,리동걸,지태환을 비롯하여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과감히 저항해나섰던 조선민족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귀중한 생명을 잃고 한줌의 흙으로 되였다고 하시면서 패말도 없는 무덤들은 찾을 길이 바이 없었지만 그들의 피와 숨결이 어려있는 형무소의 지붕과 담벽만이라도 보니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고,해방이 되여 5년세월이 흘렀지만 옛 전우들의 조의방문조차 받아볼수 없었던 동지들의 영령앞에서 오래 참아왔던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고 뜨겁게 회고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받들어 조국해방성업에 모든것을 다 바쳐 싸운 권영벽,리제순,지태환,리동걸동지들,그들은 원쑤들에게 체포되였지만 모진 고문과 악형에도 굴함없이 혁명가의 지조를 지켜내고 조국해방을 눈앞에 둔 주체34(1945)년 3월 10일 교수대에서 《 공고한 기초우에 선 신념은 자기가 숭상하는 리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며 그 리념을 위해서라면 굶어죽을 각오,얼어죽을 각오,맞아죽을 각오까지 되여있는 신념이다. 일제가 조작한 《혜산사건》은 매개 사람들이 지니고있는 혁명에 대한 충실성과 신념과 의지의 강도를 검증하는 일대 시련이였다.진짜혁명가와 가짜혁명가를 가르는 하나의 엄혹한 검열과정이였다. 적들은 백두산지구에 꾸려놓은 지하조직들을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혁명가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였다. 권영벽,리제순,지태환동지들은 변절자들의 밀고로 적들에게 체포되였지만 끝까지 혁명적신념과 지조를 지켜싸웠다. 그들은 나이로 볼 때 다 위대한 수령님보다 2~10년정도 이상이였지만 수령님을 민족의 태양으로,운명의 어버이로,위대한 스승으로 우러러모시고 받들었으며 수령님께서 이끄시는 혁명위업에 한생을 바치는것을 자기들의 드팀없는 인생관으로 삼았다. 나를 낳아준 조국은 어머니이고 혁명투쟁에서 나를 가르쳐주고 길러준 사령관동지는 나의 스승이시며 어버이이시다. 권영벽동지가 삶의 좌우명으로 간주하고있던 이 말은 투사들모두가 심장속깊이 간직하고있던 혁명신조이기도 하였다. 주체24(1935)년 3월에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한 권영벽동지는 그후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에 의하여 주력부대 선전과장의 임무를 수행하였다.어느날엔가는 장백지구에서 당창건을 위한 조직사상적준비사업을 추진시키며 조국광복회를 확대발전시킬데 대한 임무를 받게 되였다. 권영벽동지는 어느 하루밤도 집에서 발편잠을 자지 못하였다.하루밤사이에도 수십리길을 걸으며 여러곳에 조국광복회 지회와 분회들을 새로 내오고 지도하였다.위대한 수령님의 지도밑에 장백현당위원회를 책임지고 맹활약을 하였다. 이름없는 산촌에서 야학선생과 촌장으로 있던 리제순동지에게서 혁명가로서의 남다른 품격과 자질,재능을 보시고 그를 조국과 인민에게 충실한 열렬한 애국자,견결한 혁명투사로 키우신분은 다름아닌 우리 수령님이시였다. 백두산청년장군을 처음 만나뵈온 리제순동지는 그때 벌써 수령님의 보증으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으로,정치공작원으로 되였으며 수령님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혁명군대의 군복을 입어보았다.리제순동지 단 한사람의 수강생을 위해 위대한 수령님께서도 강의를 담당하시였고 리동백동지를 비롯한 여러명의 유능한 강사들이 번갈아 출연해가며 여러날동안이나 단독강습이 진행되였다.위대한 수령님의 존함과 도장이 새겨진 신임장을 품고 지하혁명활동을 한 정치공작원이 리제순동지 하나였다는 사실도 그에 대한 수령님의 기대와 믿음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잘 말해준다.절세의 위인의 그 따뜻한 손길에 이끌려 리제순동지는 백두산턱밑에 조국광복회조직을 구축해놓았으며 조선인민혁명군과 국내혁명조직과의 련계를 지어주었다.리제순동지는 군중을 조직에 결속시키고 유격대를 원호하기 위한 사업에 그들을 불러일으켜 수만점에 달하는 원호품을 마련하여 보내주었다.보천보전투의 전초선에서 그 승리를 말없이 지켜준 정치공작원도 바로 리제순동지였다.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정치공작원의 임무를 받고 장백현 19도구에 파견된 지태환동지는 권영벽,리제순동지들의 사업을 믿음직하게 뒤받침하면서 일제가 조작한 《혜산사건》후 파괴된 혁명조직을 수습하기 위하여 사선을 헤치였다. 주체28(1939)년 봄부터 정치공작소조를 책임지고 국내의 삼장,연사지구의 로동자,농민들속에서 활동한 리동걸동지도 여러곳에 혁명조직을 내오거나 복구정비하여 백두산동부의 혁명기지를 튼튼히 꾸리는데 기여하였다. 시련과 고난만이 혁명가의 신념을 검증할수 있다. 옥중투쟁의 나날 권영벽,리제순,지태환,리동걸동지들은 원쑤들을 전률케 하는 수많은 신념의 일화들을 피와 목숨으로 새겼다. 혁명이 승승장구하고 평범한 날에는 누구나 혁명을 부르짖고 누구나 신념을 곧잘 외운다.하지만 무거운 쇠사슬이 서리서리 엉킨 침침한 감옥과 단두대는 혁명가와 배신자를 가르는 시험장이라고 할수 있다. 그 시험장에서 이들은 자기들의 빛나는 생애를 통하여 죽어도 버리지 않는 혁명신념과 혁명가로서의 존엄을 검증받았다. 변절자의 밀고에 의하여 일제놈들에게 체포된 권영벽,리제순,지태환동지들이나 적들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체포된 리동걸동지나 다 일제교형리들로부터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야수적고문을 당하였다.그러나 육신을 짓뭉개는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들이 먼저 생각한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안녕과 수령님께 다진 맹세를 죽어도 버리지 않으려는 억센 신념이였으며 혁명조직과 동지들의 운명이였다. 권영벽동지가 조국광복회의 주요인물이라는것을 알게 된 일제교형리들은 갖은 방법을 다하여 그를 굴복시키려고 미친듯이 날뛰였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속에서 권영벽동지는 자신이 할수 있는 최선의 일은 다문 한사람이라도 살려내여 조직을 지키고 동지들을 구원하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권영벽동지는 리제순동지에게 《모든것을 나에게 밀것!》이라고 적은 백글쪽지를 보냈다.그때 리제순동지는 《우리는 일심동체!》라는 글을 써보내였다.서로 다른 방에 갇혀있었고 그이상 더 쪽지를 교환하지 못하였지만 권영벽동지와 리제순동지의 심장은 한마음한뜻으로 고동치고있었다. 《도정님이 백두산에 갔던 일과 그후의 모든 일은 나와 도정님과 장군님밖에 모르는 일이니 도정님만 입을 다무시면 아무런 죄도 씌울것이 없게 됩니다.》 권영벽동지가 박인진도정에게 이렇게 말할 때 리제순동지도 모든것을 자신이 맡아안고 나섰다. 권영벽동지와 리제순동지들의 희생적인 구출작전으로 수많은 피검자들이 재판정에 끌려가기 전에 류치장에서 풀려나갔거나 예상보다 퍼그나 가벼운 형을 마치고 조국해방의 날을 맞이할수 있었다. 권영벽동지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웨쳤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우리는 조국강토에서 강도 일제를 내쫓고 우리 민족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항일대전에 나선 조선의 애국투사들이며 이 나라의 당당한 주인들이다.누가 누구를 감히 재판하는가.재판을 받아야 할 진짜범인은 바로 네놈들이 아닌가.남의 나라를 강점하고 남의 나라 사람들을 마음대로 학살하고 남의 나라의 재물을 제멋대로 도적질해가는 네놈들이야말로 악독한 강도범들이고 살인범들이다.력사가 공정한 심판을 내려 우리를 민족의 수호자로 받들고 네놈들을 매장해버릴 날은 반드시 오고야말것이다.》 리제순동지는 장증렬이 변절했다는것을 알게 되자 이것을 동지들에게 알리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손에 묻힌 다음 천쪼박에 《장증렬 변절》이라고 쓴 다음 고문실로 나갈 때 다른 감방에 넣어주었다.그리하여 많은 동지들이 변절자의 정체를 제때에 알고 사전대책을 세우게 하였다. 리제순동지는 안해가 면회를 오면 태연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안해가 돌아갈 때에는 세계지도를 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사형판결을 받은 몸으로 감옥안에서 그가 왜 세계지도를 요구했겠는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이것은 그가 사형판결을 받은 다음에도 절망이나 비관에 빠지지 않고 조국의 찬란한 미래,세계의 광명한 미래를 끝없이 그려보고있었다는 뚜렷한 증거이라고,그는 현실에 있으면서도 미래에 산 사람이였고 죽음앞에서도 해방된 조국땅에 백화로 만발할 행복한 새 삶을 그려본 사람이였다고 회고하시였다. 《혜산사건》으로 파괴된 조직을 수습하기 위하여 활동하다가 일제놈들에게 체포된 지태환동지는 사형선고를 받고도 혁명가요를 높이 부르며 옥중투쟁을 과감히 벌리면서 꺾일줄 모르는 참된 혁명가의 기개를 남김없이 과시하였다.희생되는 순간까지도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확신하였기에 지태환동지는 《동이 밝아온다.》, 《 한때 대오안에 생겨난 배신자의 정체를 가려보지 못하고 원칙적인 투쟁을 벌리지 못하여 엄중한 과오를 범한적이 있는 리동걸동지도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과 사랑속에 되찾은 정치적생명을 다시는 잃지 않기 위하여 옥중에서 용감히 싸웠다.불의에 달려든 적들과의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채 놈들에게 체포된 그는 그후 6년이란 세월을 위대한 수령님께 다진 맹세대로 혁명조직의 비밀을 끝까지 지키며 굴함없는 투쟁을 벌리였다.당시 이들은 30대,40대의 한창나이였다. 비록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이들은 길지 않은 한생과 최후를 통하여 참된 혁명가의 삶의 본보기,불굴의 신념에 대한 교과서를 우리 후대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때로부터 어언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권영벽,리제순,지태환,리동걸동지들의 이름과 더불어 이들이 남긴 신념의 교과서는 세대를 이어,년대를 이어 또 하나의 혁명유산으로 빛나고있다. 우리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제국주의와의 총포성없는 대결전과 함께 매 사람들의 신념과 의지를 검증하는 시련과 난관이 계속되고있는 오늘 권영벽,리제순,지태환,리동걸동지들을 비롯한 항일의 투사들이 높이 추켜들었던 《죽어도 혁명신념 버리지 말라》,《죽어도 살아도 내 나라 내 민족 위하여》의 구호는 주체혁명위업의 최후승리를 위한 진군길에서 더 높이 울려나오고있다. 온 나라에 백두의 혁명정신,백두의 칼바람정신이 세차게 나래치도록 하시고 백두의 넋과 기상으로 최후승리를 앞당겨나가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숭고한 뜻에 의해 항일의 년대에 투사들이 높이 추켜들었던 죽어도 혁명신념 버리지 말라는 구호가 우리 당의 구호로 천만군민의 앞길에 기폭처럼 새겨지고있다. 오늘도 주작봉의 혁명렬사릉을 찾는 사람들은 조국해방의 날을 몇달 앞두고 희생된 권영벽,리제순,지태환,리동걸동지들의 반신상앞에서 오래도록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살아있으면 개선의 용사가 되여 조국땅에 보무당당히 들어섰을 그들이였다.하지만 그들은 조국과 인민앞에 조선의 혁명가가 줄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승리인 조국해방을 안아온 투사들로,죽어도 혁명신념 버리지 않는 혁명가의 산모범을 보여준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로 오늘도 영생한다. 그렇다.참다운 신념의 강자는 죽어서도 승리자로 영생한다. 본사기자 백영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