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4(2015)년 4월 18일 로동신문

 

위대한 태양의 품속에 백두산식솔이 산다

최씨혁명일가에게 돌려주신 절세의
위인들의 믿음과 의리의 세계를 더듬어

 

영광찬란한 조선혁명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소중한 삶을 바친 유명무명의 렬사들과 투사들,애국자들을 안고있을뿐아니라 혁명일가라는 고귀한 부름도 성스러운 갈피에 아로새겼다.

지심깊이 뿌리내린 아름드리거목도,푸르러 설레이는 무성한 숲도 은혜로운 태양의 빛발을 떠나 생각할수 없듯이 조국이 알고 인민이 기억하는 혁명일가들은 절세위인들의 품을 떠나 생각할수 없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요영구유격근거지에서 살던 최씨가문에는 최금산을 비롯하여 손에 총을 잡고 일제와 싸우다가 전사하였거나 일제놈들에게 학살된 사람이 근 열명이나 됩니다.그 최씨가문도 자랑할만 한 혁명일가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수십년세월이 흐른 후에도 잊지 못하시여 자랑할만 한 혁명일가라고 내세워주신 최씨가문에서는 항일혁명시기에 많은 혁명렬사들이 나왔다.우리 혁명이 큰산들을 넘으며 전진하던 년대들에는 백두의 넋과 전통을 이어가는 혁명가들,당과 수령을 충직하게 받들줄 아는 진정한 전위투사들을 대를 이어 배출하였다.

우리는 최씨혁명일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백두산식솔이 안겨사는 위대한 태양의 품에 대한 찬가를 세상에 격조높이 전하게 된다.

 

항일전구에서 태여난 혁명일가

 

위대한 수령님의 항일혁명 20성상은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는 피어린 격전의 력사인 동시에 이 나라의 억눌리고 짓밟혔던 인생들에게 참된 삶을 찾아주고 사상과 신념을 체현시켜 백절불굴의 강의한 투사들을 키워낸 혁명가육성의 력사이기도 하다.

최씨혁명일가의 1대인 최재경만 보아도 그는 불우한 시대에 살며 민족의 수난을 겪어야 했던 이 나라 인민들 누구와도 다름없는 평범한 인간이였다.구태여 다른 점을 찾는다면 극심한 가난과 민족적울분을 못 이겨 1910년,망국의 그 경술년에 동해바다가의 고향마을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는것이다.피눈물의 두만강이 그의 인생길앞에 놓여있었다.나라잃고 고향을 등진 수많은 류랑민들의 눈물이 그대로 물결로 넘쳐나는것인가 두만강은 비분과 설음을 담고 구슬프게 흘렀다.어린 자식들을 앞세우고 고국산천을 하직해야만 하는 최재경의 마음에서는 피가 흘렀다.

최씨일가가 류랑의 괴나리보짐을 푼것은 왕청현의 전각루였다.하지만 이역땅에서도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이곳까지 마수를 뻗친 일제는 야수적인 토벌로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학살하고있었다.화승대를 들고 일제군경들과 십년유여의 항쟁을 계속해온 의병시대의 용장들과 독립군잔류세력들의 처절한 말로가 여기 남의 나라 땅에서 빚어지고있던 사실은 최재경의 가슴에 허무함과 환멸감을 채워주었다.

반만년력사국이 과연 이렇게 사멸해야 하는가를 통탄하면서도 우국의 마음과 항거의 의기를 간직한 그는 언제나 갈망에 모대겼으니 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줄 절세의 애국자,민족의 영웅은 과연 언제 오려나 하는 일구월심이였다.참으로 걸출한 령도자를 기다리는 겨레의 소망으로 하루하루가 십년같던 20세기 초엽이였다.

바로 그러한 때 민족수난의 캄캄한 밤하늘을 밀어내며 조선의 태양이 솟아 청신한 길림바람이 왕청의 산간오지에도 불어왔다.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우리 인민을 하나로 묶어세우시며 광복혁명의 용암에 동만각지가 끓어번지게 하시였던것이다.

1920년대 중엽부터 위대한 수령님께서 벌리신 초기혁명활동의 영향속에 192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대중적인 혁명조직들이 무어지고 군중의 혁명열,투쟁열이 더욱 왕성해진 왕청땅이 항일대전의 주요전구로 영광스러운 조선혁명사에 기록될 1930년대가 태동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당시의 왕청현 전각루에 대하여 이렇게 회상하시였다.

《간도혁명의 중요한 발원지들의 하나인 소왕청과 라자구가까이에 위치하고있는 전각루는 일찍부터 항일투쟁의 세례를 많이 받아온 고장이였다.수천명의 농민들과 떼목군들,채벌로동자들이 한데 뒤섞여 와글와글하는 이 골안에는 당,공청을 비롯한 전위조직과 함께 계층별로 되는 혁명조직들이 다 들어가있었다.이 조직들이 군중을 동원하여 춘황투쟁때에는 마을에 둥지를 틀고있는 보위단을 들부시기까지 하였다.》

전각루에 꾸려진 혁명조직,그것은 최씨일가에게도 미쳐온 위대한 태양의 빛발이였다.위대한 수령님께서 추켜드신 항일의 기치아래 전각루에도 당조직으로부터 아동단에 이르는 혁명조직들이 꾸려지고 최재경의 아들들과 며느리,왕청땅에서 태여난 손자들이 이 조직들에 망라되였기에 최씨일가는 혁명투쟁에 나설수 있었다.1929년 봄 반일회의 조직성원으로 된 최재경은 일제를 반대하고 나라를 찾는 항일혁명의 길에서 생의 희열과 래일에 대한 희망,활력을 되찾을수 있었다.

진정 망국의 치욕을 안고 모래알처럼 흩어졌던 우리 겨레를 혁명조직에 묶어세우시고 사상을 주고 기치를 주시여 광복성전에 일떠세워주신 우리 수령님을 어찌 저 하늘의 태양에만 비길수 있으랴.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1931년과 1932년에 벌어진 추수,춘황투쟁에 최재경과 아들들인 최춘삼,최덕삼,최문삼,손자들인 최성호,최성준,최금산,최룡석을 비롯한 최씨혁명일가가 참가하였다.반일인민유격대창건과 유격구창설,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 투쟁에서 일가는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동지만을 믿고 따르면 빼앗긴 조국을 찾을 날이 반드시 오고야만다는 신념을 더욱 굳히였다.

최씨혁명일가에게 있어서 1933년 봄은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투쟁한 행운과 영광의 계절이였으며 일가의 3대들을 반일인민유격대에 입대시킨 계절이였다.

요영구유격구의 분여받은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람찬 새삶을 누리게 된 최씨일가는 유격대원호와 유격근거지방위투쟁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 최대의 애국은 총을 잡는것이라는 견해를 세운 최재경은 아버지를 잃은 세 손자들이 군복을 입고 항일대전에 참전하도록 하였다.

1933년 12월 유격대원호물자를 가지고 떠났던 최재경은 왕청현 태양촌에서 일제토벌대놈들에게 체포되였다.혁명조직성원들과 100여명의 군중을 대피시키다보니 미처 몸을 피할 사이가 없었다.조직의 비밀과 혁명군중이 대피한 곳을 알아내기 위해 적들은 야수적인 고문을 들이댔지만 최재경은 숨이 지는 순간까지 혁명적지조를 지켰다.악에 받친 적들은 군도로 그의 목을 쳐서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지난날에는 강도 일제의 악정과 폭압을 피해 두만강을 건는 우국지사였지만 위대한 수령님의 태양의 빛발을 받아안으며 애국자,혁명가로 성장하여 견결하게 싸웠고 장렬한 삶을 마친 최재경렬사였다.

간악한 일제는 렬사의 목숨을 빼앗을수는 있었지만 최씨일가의 혁명열은 빼앗을수도 식힐수도 없었다.위대한 수령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 죽어도 혁명신념을 버리지 않은 렬사의 희생은 일가후손들의 혁명적성장에서 중요한 계기로 되였고 항일혁명의 가풍은 더욱 굳건히 이어졌다.

항일대전의 치렬한 격전장이였던 왕청땅에는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목숨바친 최씨혁명일가의 1대와 2대가 묻혀있다.

만고의 항쟁사가 굽이쳤던 항일전구에 류수이런가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세월의 풍운속에 삭막해져가던 렬사들을 혁명일가로 추억하시며 영생을 주신분이 계셨으니 그분들은 위대한 수령님들이시였다.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도덕의리의 세계를 전하는 애국렬사릉의 항일혁명렬사추모비에 최재경렬사는 최덕삼,최문삼,최성호렬사들과 함께 우리 혁명의 1세로 이름을 남기였다.

수령결사옹위의 제1선에서 삶을 빛내인 친위전사가 배출된것은 혁명일가의 자랑중의 자랑이다.혁명의 사령부결사옹위의 전렬에 섰던 항일혁명투사 최금산동지의 값높은 한생은 위대한 태양의 품에서 성장하여 혁명렬사들로 삶을 빛내인 최씨일가의 축도이기도 하다.

언제인가 피어린 항일혁명의 나날을 감회깊이 돌이켜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최금산은 사령부전령병으로서 나를 따라다니면서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는 나이가 어렸지만 똑똑하고 책임성이 남달리 높았습니다.그는 혁명의 사령부를 목숨바쳐 보위한 혁명전사입니다.》

혁명의 사령부를 목숨바쳐 보위한 혁명전사,그것은 최금산동지가 받아안은 고귀한 칭호였다.

어찌 보면 녀자와 같이 곱게 생긴 청년,꿈이 많고 공상도 많았던 최금산동지가 혁명전사로 억세게 자랄수 있은것은 걸음걸음 보살펴주고 이끌어주시는 사령관동지의 자애로운 손길이 있었기때문이다.

최씨혁명일가의 3대들인 최성호,최성준과 함께 왕청유격대 제4중대에 입대한지 얼마 안되는 최금산동지는 그 위대한 믿음과 사랑속에 사령부전령병이라는 무겁고도 영예로운 임무를 수행해낼수 있었다.죽어도 살아도 내 나라,내 민족을 위하여 만난을 헤치며 싸워 승리하려는 필승의 신념과 불굴의 기개가 최금산동지의 심장에 맥박쳤으니 그 신념과 의지를 주신분은 우리 수령님이시였다.

이국땅에서 태여나 이국의 물을 마시며 자라난 류랑민의 아들 최금산동지의 가슴속에 간직된 소망은 고국땅을 밟아보는것이였다.남호두에서 백두산으로 나오는 행군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였지만 최금산동지의 마음은 벌써 저 멀리 흰구름 피여나는 조국의 하늘가에 둥둥 떠있었다.맡은 임무수행으로 드바삐 뛰여다니면서도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그리고는 그이께 끝없이 질문을 드렸다.

이제 얼마나 더 가면 조국땅을 볼수 있습니까.서간도땅에 가보았습니까.앞으로 몇해안에 평양이랑,서울이랑,부산이랑 칠수 있습니까.…

천진하고 엉뚱스러운데가 있는 질문들이였지만 우리 수령님께서는 탓하지 않으시였다.전령병의 푸르른 꿈속에 자리잡고있는 조국을 중히 여기신 수령님이시였다.티없는 그 꿈에 우리 수령님께서는 신념과 락관을 더해주시며 그가 세계관형성의 큰걸음을 내짚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함께 한모포를 덮고 백두산식솔로 동고동락하였으며 오랜 기간 사령부전령병으로 일해온 어린 전우였던 최금산동지는 그후 경위소대장으로 임명되였다.

위대한 항일혁명은 혁명전사들에게 령도자는 한없는 사랑과 믿음을 주고 혁명전사들은 그 사랑과 믿음에 충정으로 보답하는 숭고한 도덕의리관계의 빛나는 전통을 창조하였다.

일찌기 왜놈들에게 부모를 잃고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손길아래 자라난 최금산동지에게 있어서 사령관동지는 친어버이이시였고 자애로운 스승이시였으며 정치적생명의 은인이시였다.

사령관동지께서 계시기에 전사의 삶도,조국의 해방도 있다는 진리를 길지 않은 생애에 체험한 최금산동지는 그이의 높은 뜻을 받드는 길에서 혁명전사의 본분을 다하다가 1939년 가을 영웅적으로 전사하였다.

오늘도 주체의 최고성지 금수산태양궁전을 옹위하여 최금산동지를 비롯한 항일혁명의 1세들,백두산식솔들이 주작봉마루에 서있다.

주작봉의 유정한 솔바람소리가 들려온다.솔바람소리는 어제날의 사령부전령병이였던 최금산동지의 심장의 목소리도 전하여주는듯싶다.

혁명의 수뇌부를 결사옹위하라! 바로 그 길에 백두산식솔의 영원한 행복이 있고 무궁한 번영이 있으며 찬란한 미래도 있다!

 

우리 수령님 잊지 못하신 요영구부녀회장

 

요영구는 우리 수령님께서와 장군님께서 잊지 못하시던 력사의 고장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930년대 전반기의 나날에 소왕청의 마촌에 이어 요영구에 조선혁명의 사령부를 정하시고 유격구방위전투를 승리에로 이끄시였으며 요영구에서 북만원정의 길을 떠나시였다.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시고 비범한 선군혁명령도로 우리의 사회주의를 수호하시던 위대한 장군님의 집무실에 요영구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 걸려있었다.언제인가 일군들에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요영구의 풍경을 그린 그림에는 바로 붉은기사상,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적들의 그 어떤 침략과 봉쇄도 단호히 짓부셔버리고 우리 혁명을 승리에로 이끌어나가려는 자신의 의지와 결심이 그대로 어리여있다는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진정 위대한 수령님들의 심중에 혁명승리의 상징적인 고장으로 깊이 자리잡고있은 요영구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친솔부대가 반일인민유격대기발을 휘날리며 나팔을 불면서 요영구유격근거지에 들어선것은 주체22(1933)년 2월 중순이였다.

그때 최재경렬사의 넷째며느리이며 최금산동지의 삼촌어머니인 홍영화녀성이 아동단원들을 데리고 큰길에서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여기저기에서 뛰여나온 근거지인민들이 대오를 에워쌌다.위대한 수령님을 뵈옵는 순간 홍영화녀성은 감격에 목메이였다.아,바로 저분이 우리 민족의 운명을 건져주시는 백두산청년장군이시구나.

영채로운 안광,활달하신 걸음새,뢰성마냥 울리는 우렁우렁하신 음성…

천하를 쥐락펴락하실 절세영웅의 비범성이 그이의 온몸에서 풍기고있었다.

맵짠 날씨였으나 그이께서 흐르는 땀을 훔치시며 웃으시자 금시에 온 요영구골안이 환해졌다.인민들의 환호에 답례를 보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동단대렬앞에 이르시여 나어린 소년을 번쩍 안아올리시였다.그러시고는 아동단원들의 손을 잡으시고 골안의 첫 어귀에 자리잡은 유격대병실로 향하시였다.

요영구는 명절날처럼 흥성이였다.인민들은 넉넉치 못한 살림살이였지만 고이 간수해두었던 기장쌀로 떡을 치고 메밀로 국수도 눌러 유격대원들에게 대접하였다.저녁에는 요영구아동단원들의 연예공연도 있었다.

홍영화녀성은 근거지인민들을 선동하여 그 모든것을 조직하고 주관하느라 드바빴다.

그의 열정적인 모습이 우리 수령님께 요영구유격근거지와 더불어 깊이 새겨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의 일을 잊지 못하시여 뜨겁게 회억하시였다.

《그때 부녀회장을 홍영화녀성이 하였습니다.

나는 수십년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홍영화녀성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홍영화녀성은 요영구유격근거지에서 유격대원호사업을 잘하여 소문이 났댔습니다.》

우리 수령님 수십년후에도 불러주신 요영구부녀회장,여기에는 항일무장투쟁의 나날 유격대를 발벗고 도와나섰던 한 평범한 녀성의 소행을 잊지 않으시고 내세워주시려는 뜨거운 의리의 세계가 깃들어있었다.

홍영화녀성은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 만나뵈왔던 그날에 이어 며칠후에도 부녀회에서 준비한 탄띠며 버선,행전과 담배쌈지들을 가지고 유격대병실로 갔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번 만나자고 했는데 마침 잘 왔다고 반가와하시며 홍영화녀성의 수고를 헤아려주시였다.유격대원들은 동무들이 보내준 이 물품을 쓰면서 고향의 부모들을 생각하며 더 잘 싸울것이라고 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홍영화녀성은 부녀회사업에 대한 높은 긍지를 간직하였다.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유격근거지에서는 장정들이 유격대에 입대하였거나 적위대를 비롯한 반군사조직에 망라되여 활동하고있는 조건에서 근거지의 많은 일을 녀성들과 늙은이들이 맡아하고있다고 하시면서 부녀회가 해야 할 사업에 대하여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밤늦도록 근거지인민들을 만나시고 돌아오시는 길에서도,왕청현 소북구에 함께 가시여 조직책임자들과 담화를 하실 때에도 우리 수령님께서는 홍영화녀성이 지침으로 삼아야 할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시였다.

홍영화녀성은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대로 부녀회사업을 개선하여 유격대를 원호하고 근거지인민들의 생활을 안착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 뵈옵던 잊을수 없는 그날 밤에 진행된 요영구유격구방위전투때 유격대를 도와서 탄약과 후방물자들도 운반하고 인민들을 안전한 곳에 대피시키기 위한 사업들을 맡아하였던 그는 그후에도 원군사업에 부녀회원들을 불러일으켰을뿐아니라 적들을 족치는 싸움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였다.

치렬한 전투가 끝난 후이면 부녀회원들과 근거지인민들을 발동하여 악착한 적들이 불태워버린 집터에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새 집을 짓도록 하였고 분여받은 토지에서 농사도 이악하게 짓도록 교양사업을 벌리면서 이신작칙으로 대중을 이끌어나갔다.

폭풍세찬 항일대전에 기쁨과 영광만이 있은것은 아니였다.

제일 넘기 어려웠던 시련의 언덕은 그처럼 믿고 의지하던 남편과 집안의 가장인 시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이겨내는것이였다.

전각루에서 당지부서기를 하던 남편 최문삼을 체포한 적들은 조직의 비밀을 대라고 팔다리가 꺾어지고 눈알이 튀여나오도록 고문을 하고도 목적을 이룰수 없게 되자 요영구강가에 끌어내다가 총살하였다.

하지만 홍영화녀성은 남편을 잃은지 10여일후에 입당하였으며 시아버지마저 학살당하였으나 부녀회사업에 더욱 전심하고 최씨혁명일가의 후대들을 잘 키우는것으로써 그 모든 슬픔을 이겨나갔다.

참으로 홍영화녀성은 시련과 난관을 강인한 의지와 혁명열로 헤쳐나간 1930년대 요영구유격근거지 녀성혁명가의 전형이였다.요영구유격근거지의 마지막방위전투가 진행될 때에도 홍영화녀성은 부녀회원들을 전투승리보장에로 이끌었다.요영구유격근거지가 해산된 후에도 그리고 조국이 해방된 다음에도 중국 동북지방에서 홍영화녀성의 부녀회사업과 혁명투쟁은 계속되였다.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그는 두 아들과 시조카들인 최진석,최성준을 조국으로 떠나보냈으며 수많은 원호물자들을 보내주었다.꿈에도 잊지 못하던 사랑하는 조국을 지켜가는 가렬한 상감령일대의 전투와 정형고지계선전투에서 최씨혁명일가의 3대인 두 시조카는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혁명가유가족들에 대한 당의 은정속에 홍영화녀성은 1962년에 조국의 품에 안기였다.

조국에 발을 들여놓는 첫 순간부터 우리 수령님을 한시바삐 만나뵙고싶었던것이 그의 심정이였다.허나 나라일에 그처럼 바쁘신 우리 수령님의 천금같은 시간을 어제날의 요영구부녀회장은 축낼수가 없었다.혁명투쟁경력만으로도 한생을 편히 살수 있었지만 그는 모든것을 내색하지 않고 평양방직공장(당시)생필직장에서 로동자로 성실히 일하였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홍영화녀성은 사회주의대건설장들을 찾아다니며 성의껏 준비한 지원물자들을 넘겨주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홍영화녀성은 어버이수령님탄생 60돐에 즈음하여 만수대언덕에 수령님의 동상을 모시게 된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였다.해당 일군을 찾아간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을 모시는데 이바지하고싶다는 자기의 진정을 말하며 충정의 마음을 바쳤다.

요영구에서의 나날을 가장 소중한 인생추억으로 간직하고있던 홍영화녀성에게는 조국으로 나올 때 위대한 수령님께 올리려고 마련한 탁상보가 있었다.그는 위대한 수령님께 자기의 지성이 어린 탁상보를 끝내 올리지 못하였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그 모든 사연들을 다 헤아려주시였다.

여러 기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영화녀성에 대하여 유격근거지에서 부녀회장을 하던 사람이 다르긴 다르다고,정말 쉽지 않은 녀성이라고 높이 평가하시였고 인생말년에는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잘 싸운 사람들이 좋은 세상에서 건강한 몸으로 오래 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의 병치료를 위하여 은정넘친 조치들을 취하여주시였다.

한생을 요영구부녀회장으로 살고 최씨혁명일가도 빛내여온 홍영화녀성,

혁명선렬들이 있는 영생의 언덕에 그는 자기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도 그는 최씨혁명일가의 후손들이 백두산식솔로 살도록 떠밀어주고있다.우리 당력사에 요영구부녀회장으로 영생하고있다.

 

혁명의 피줄기 꿋꿋이 이어진다

 

주체59(1970)년 6월 11일 깊은 밤 조선인민군 총참모장방에 전화종소리가 울렸다.위대한 수령님께서 걸어오신 전화였다.그이께서는 전번에 과업을 주었던 어느 한 대련합부대의 정치일군선발문제를 알아보려고 찾았다고 하시였다.

대련합부대의 사명과 임무로 보아 정치일군선발은 중요한 문제였다.

총참모장은 현재 선발한 일군에 대하여 보고드리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동무의 아버지가 왕청현 전각루에서 당지부서기로 일하다가 학살되였고 어머니는 요영구유격근거지에서 부녀회장을 하였으면 알만 하다고,홍영화녀성이 요영구유격근거지 부녀회장을 할 때 갓난 아들이 있었다고 하시면서 그 동무가 아마 최금산의 4촌동생일것이라고 대뜸 그를 알아보시였다.

요영구시절 두살잡이로 어머니의 등에 업혀있던 최춘길동무라는 생각에 그이의 감개는 깊으시였다.항일의 그날로부터 멀리도 전진해온 우리 혁명사를 더듬으시는가 그이께서는 말씀이 없으시였다.

이윽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항일혁명투쟁의 불길속에서 태여난 혁명가유자녀들이 우리 인민군대의 대련합부대 지휘성원대렬에 당당하게 들어서고있습니다.》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5살때 총을 메고 동북해방전쟁에 참가하였을뿐아니라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근위부대로 이름떨친 제4보병사단에서 대대 민청위원장을 하고 그후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에서도 사업한 최춘길동무를 두고 홍영화녀성의 아들이 대련합부대의 정치일군을 얼마든지 할수 있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시였다.

《그를 정치부장으로 임명하여 보낼 때 그에게 내가 항일혁명투쟁에 참가하여 목숨바쳐 싸운 혁명선렬들처럼 당과 혁명,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일을 잘하라고 하였다는것을 전달하여야 하겠습니다.》

39살의 최춘길동무를 대련합부대의 정치일군으로 내세워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그의 사업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리시며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주체60(1971)년 3월초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대련합부대 지휘부를 찾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던 최춘길동무에게 부대의 임무와 전투정치훈련을 강화하는데서 나서는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그이께서는 동무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구상과 의도를 깊이 파악하고 훈련에 모든 력량을 집중하여야 한다고,정치사업을 하여도 항일유격대식으로 하고 훈련을 조직해도 주체전법의 요구에 맞게 하여야 한다고,훈련에서는 물론 군사규률과 군중규률을 지키는데서 전군의 본보기가 되여야 한다는 강령적인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주체60(1971)년 12월 23일은 최춘길동무에게서 잊을수 없는 날이였다.

이날 한 구분대에 나가 훈련지도를 하고있던 그는 또다시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던것이다.

훈련장에서 인사올리는 그를 대견히 바라보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정치부장을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는 정치부장동무의 집안래력을 잘 안다고,동무는 자신께서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 요영구유격근거지에서 자랐다고 이야기하시였다.아버지얼굴도,아버지의 정도 모르고 자란 최춘길동무에게 가정래력도 들려주시며 자애깊은 은정을 부어주시는 우리 수령님,

《정치부장동무는 혁명가유자녀답게 맡은 일을 잘하여야 합니다.…동무는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일제를 반대하여 목숨바쳐 싸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혁명의 대를 꿋꿋이 이어나가야 합니다.》라고 거듭하여 이르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당부는 최춘길동무의 가슴을 얼마나 울려주었던가.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받아안으며 그는 아버지를 생각하였다.력사의 왕청땅에 선혈을 뿌리며 쓰러진 아버지,자기의 얼굴모습마저 자식에게 새겨주지 못했던 그 아버지가 지금 살아계신다면 영광의 이 자리에 선 아들에게 과연 무엇을 말해주고싶었을것인가.사랑하는 아들아,김일성장군님께서 개척하시고 이끌어오신 조선혁명이다.후손만대로 이어질 민족의 존엄과 행복을 위해 선렬들이 흘린 피를 헛되이 말아다오.백두의 후손들은 조국의 운명이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길에 삶의 뿌리를 내릴줄 알고 꽃피울줄 알아야 한다.…

최춘길동무는 아버지의 그 목소리를 분명히 듣고있었다.

혁명가유자녀의 가슴에 고패치는 감정의 격류를 읽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가 당에서 맡겨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리라고 믿는다고,건강하여 일을 더 잘하기 바란다고 크나큰 믿음과 사랑의 교시를 주시였다.

그이께서 이어가시는 머나먼 길을 뜨거운 격정으로 따라서는 최춘길동무의 심장에서는 혁명의 대,애국의 대를 꿋꿋이 이어갈 신념의 맹세가 불타올랐다.그후 그는 다진 맹세를 지키는 길에 자기의 온넋과 정력을 깡그리 바쳐나갔다.

우리 수령님과 장군님의 뜻을 한치의 드팀도 없이 충직하게 받드는 길에서 최춘길동무는 모든 장병들을 펄펄 나는 일당백의 싸움군들로 키우기 위해 늘 그들속에서 살며 걸음도 숨결도 같이하였다.

대련합부대의 장병들은 누구나 친근감과 존경심으로 최춘길동무를 《우리 정치부장동지》라고 부르며 따랐다.

부대의 전투력강화를 위해 불같은 열정을 쏟는 그의 건강을 념려하시여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장군님께서는 그가 조선인민군 휴양단 단장으로 휴양의 길에 오르도록 다심한 은정도 기울여주시였다.그 믿음과 사랑속에 최춘길동무는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 대표로,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되였으며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도 지니게 되였다.

일상생활에서 인정이 많고 사려깊었으나 과묵한 성격인 최춘길동무가 집사람들에게 살틀한 정을 표현한것은 1972년 12월 18일 점심이였다.

안해가 차려놓은 점심상앞에서 요즘 우리 맏이가 퍽 큰것 같다고 말한 최춘길동무는 오늘은 키를 한번 재보자면서 벽으로 다가섰다.름름하게 자라는 자식의 모습은 단란한 가정에 행복의 웃음꽃을 피웠다.

그런데 몇시간후에 천만뜻밖의 소식이 전해질줄이야.

저녁 7시경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의 책임일군은 사경에 처한 최춘길 정치부장을 소생시키기 위한 긴급대책을 세워야 하겠다는 위대한 수령님의 전화를 받게 되였다.

《그는 요영구유격근거지에서 자란 혁명가유자녀입니다.그의 아버지는 일제놈들과 잘 싸우다 희생된 혁명동지입니다.혁명동지들이 남기고 간 자녀들을 잘 돌보아주는것은 혁명가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숭고한 도덕의리입니다.》

혁명가유자녀들을 금싸래기처럼 아끼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수한 의료일군들을 직승기로 현지에 파견하며 총참모부에서 직접 소생전투를 장악지휘할데 대하여 명령하시였다.그 시각 총정치국에서도 수령님께서 교시하신대로 그를 소생시켜야 한다시며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게 되였다.

현지에서 긴급치료대의 긴장한 구급소생전투가 벌어졌다.

정말 아까운 사람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자정이 가까와오는무렵 최춘길동무의 순직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고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장군님께서 꼭같이 하신 교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가유자녀인 그를 잘 키워 아버지의 뒤를 잇게 하려고 하였는데 너무 무리하게 일하다 그렇게 되였다고 애석해하시였다.

밤은 바닥없이 깊어가건만 떠나간 전사를 위하시는 우리 수령님의 마음에는 끝이 없으시였다.우리 당의 군사로선을 관철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다가 순직한 그의 장례식으로부터 유가족들에게 렬사증을 수여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온갖 은정어린 조치를 다 취해주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최춘길동무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정도 각별하시였다.혁명가유자녀인 그는 사람이 고지식하고 정열적이며 일욕심도 많았다고,당의 의도대로 수령님의 현지교시를 관철하기 위한 당정치사업을 힘있게 벌려 부대안에 혁명적인 훈련기풍을 세우고 싸움준비를 완성하는데서 많은 일을 해놓은 그를 잊을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유가족들의 생활을 잘 돌보아주며 자식들을 혁명학원에서 잘 키워 부모들의 대를 꿋꿋이 이어나가도록 할데 대하여 이야기하시였다.

생전에는 혁명의 대를 굳건히 이어가도록 혁명가유자녀 한사람한사람을 품들여 키워주시고 혁명의 길에서 떠나간 후에도 그들의 영생을 위해 그토록 다심하게 마음쓰시는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품에서 최씨혁명일가에는 로동당시대에 또 한명의 혁명렬사가 나올수 있었다.진정 우리 수령님들의 품은 혁명가유자녀들이 안겨사는 자애로운 어버이의 품,이 땅에 태를 묻은 백두산식솔모두가 안겨사는 태양의 품이였다.

최춘길동무의 형 최룡석동무가 항일의 아동단시절과 조국해방전쟁시기의 지휘관시절을 거쳐 당시 조선인민군 련합부대의 책임일군으로 사업하고있을 때 어느덧 최씨혁명일가의 바통은 4대가 넘겨받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품속에서 성장한 최춘길동무의 아들딸들을 비롯한 최씨혁명일가의 후손들이 혁명의 피줄기를 꿋꿋이 이어가고있다.최씨혁명일가의 4대,5대의 대다수가 혁명의 군복을 입고 위대한 선군시대를 빛내여가고있다.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동지께서 한 바다가양어사업소를 찾으신 날은 두해전 9월이였다.

《철갑상어는 바다로,조선은 세계로》라는 어버이장군님의 뜻깊은 명언이 현실로 꽃펴난 이곳에서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를 맞이한 조선인민군 한 부대 일군들의 격정은 참으로 컸다.하지만 그때 작업복차림으로 최고사령관동지께 인사를 올리게 된 정치일군의 마음은 죄송스럽기 그지없었다.

책임일군이 정치부장동무가 현장에서 일하다보니 작업복차림이라고 말씀드렸을 때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오히려 얼마나 기뻐하셨던가.

《…정치부장이 현장에서 일하던 차림으로 나를 마중하였다고 하는데 일없습니다.

정치일군들은 현실에 심화되여야 합니다.》

최고사령관동지의 사랑과 믿음,격려의 말씀을 받은 그 일군이 바로 최춘길렬사의 맏아들인 최씨혁명일가의 4대 최용동무였다.항일의 나날 사령부전령병 최금산동지에게 사상정신적성장의 자양분을 주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그 사랑으로,정치사업을 하여도 항일유격대식으로 하여야 한다고 하시며 최춘길동무에게 부대전투력강화의 지침을 안겨주시던 위대한 장군님의 그 믿음으로 오늘은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혁명가유자녀 최용동무가 혁명의 대를 꿋꿋이 이어가도록 이끌어주시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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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식솔에서는 백두의 넋과 정기를 타고난 후대들이 나오기마련이다.그것은 자연의 법칙이여서가 아니라 위대한 태양의 품에 백두산식솔들이 대를 이어 안기여살기때문이다.

사상은 유전되지 않지만 위대한 믿음과 은정으로 혁명의 피줄기를 만대에 이어주는 백두산절세위인들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혁명의 대는 꿋꿋하며 백두산대국의 미래는 끝없이 밝고 창창한것이다.

이 땅에서 생을 누려가는 우리 천만군민모두는 세상에 존엄높은 위대한 태양민족,백두산식솔이다.

백두산식솔의 후손만대를 품어안고 지켜주고 보살펴주며 성장시켜주는 영원한 태양의 품에서 우리가 산다.

본사기자 박일민
본사기자 리금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