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4(2015)년 6월 27일 로동신문

 

이런 일군이 당과 조국의 기억속에 영생한다

건설건재공업성 부국장이였던 김철동무의 고결한 삶

 

우리 혁명의 갈피마다에는 당과 수령을 깨끗한 량심과 의리로,높은 실력과 실적으로 받들어온 일군들의 뚜렷한 삶의 자욱자욱이 보석처럼 빛을 뿌리고있다.

조국이 알고 인민이 기억하는 참된 일군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얼마전까지 건설건재공업성 부국장으로 사업하다 순직한 김철동무의 고귀한 생이 이 물음에 대답을 주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일군들은 숭고한 애국관과 헌신의 각오를 가지고 조국의 부강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멸사복무하여야 하며 스스로 무거운 짐을 맡아지고 대중의 앞장에서 뛰고 또 뛰여야 합니다.》

김철동무는 지난 10여년간 순천세멘트련합기업소의 생산추진을 위해 현지에 내려가 사업하면서 나라의 세멘트생산과 내화물공업의 주체화실현에 이바지하는 실로 큰일을 해놓고 우리곁을 떠나갔다.

살아있을 때에는 강성국가건설의 한개 전선이 당의 뜻대로 맥박치게 하는 기발이 되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우리 일군들이 자신을 비추어보게 하는 거울,본보기로 되고있는 김철동무!

그의 생을 통하여 우리는 여기에 인민경제 한개 부문,한개 단위를 맡은 일군들이 삶과 투쟁의 위치를 어디에 정하고 어떤 실력과 실적으로 조국을 받들어야 하며 후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하는가에 대해 적으려 한다.

 

1선참호에 선 화선지휘관

 

김철동무가 건설건재공업성 정무원으로 사업한 년한은 15년이다.그중 부국장으로 사업한 13년간 그는 순천세멘트련합기업소에 내려가 일하였다.

하기에 성에는 그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 어쩌다 성에 올라올 때면 접수에서 근무성원들이 그를 멈춰세우고 어디서 오는 손님인가고 물을 때가 종종 있었다.그럴 때마다 김철동무는 웃으며 대답했다고 한다.

《순천에서 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여 김철동무는 자연히 사람들의 기억속에 성의 부국장이 아니라 순천사람으로 남게 되였다.

순천사람,우리는 그 부름이 단순히 10여년동안 나라의 세멘트생산에서 큰 몫을 맡고있는 중요생산단위에 내려가 사업한 그의 년한이 준 호칭이 아니라는것을 순천세멘트련합기업소에서의 취재과정에 알게 되였다.

련합기업소에는 생산지휘로 현지에 내려와 살다싶이 하는 성정무원들이 적지 않았다.그들중에는 국장과 부국장들도 있었고 상이나 부상들도 때없이 내려와 걸린 고리를 풀기 위한 협의를 진행한다고 했다.

그런데 현지에서 함께 생활한 성일군들까지도 그를 부국장이기 전에 순천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습관되였다고 했다.

우리가 만난 련합기업소 책임일군들로부터 기술자,로동자들에 이르기까지 김철동무에 대한 말만 꺼내도 우리 부국장이라고 부르며 눈물이 글썽해졌다.그가 이곳 기업소의 세멘트증산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과 피타는 노력을 기울여왔는가를 밤이 새도록 이야기해준 평범한 기술자,기능공들은 김철동무가 련합기업소의 지배인이나 기사장처럼 여겨질 때가 더 많았다고,그는 진정 순천사람이였다고 말했다.

그는 덩지큰 련합기업소의 생산정상화에서 제기되는 크고작은 문제들을 모두 자기가 풀어야 할 문제로 여기고 도맡아안고 뛰여다닌 일군이였다.보수작업에 필요한 용접봉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두팔걷고 달라붙어 용접봉생산능력을 몇배로 끌어올린 그였고 멎어있는 산소발생기를 끝끝내 살려내여 생산정상화의 또 하나의 돌파구를 열어놓은 사람도 바로 김철동무였다.현장에서 알게 된 오랜 기능공이 집구들에 불이 잘 들지 않아 걱정이라고 지나가는 소리로 한 말도 새겨두었다가 자신이 직접 구들을 고쳐놓아주고서야 마음을 놓은 그였다.이렇게 그는 당장 생산실적과 별로 련관이 없어보이는 일도 자기가 풀어야 할 중대사로 여기며 크고작은 일을 다 맡아안고 뛴 련합기업소의 진정한 주인의 한사람이였다.

순천세멘트련합기업소의 생산을 담당하여 사업을 시작한지 몇해만에 김철동무는 성에서 과학기술부문을 맡은 부서의 부국장으로 소환된적이 있었다.그의 폭넓고 풍부한 지식과 과학기술을 대하는 진취적인 사업기풍을 고려하여 성에서 취한 조치였다.가족들도 늘 나가살던 그가 이제는 집에서 출퇴근을 하게 되였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새로운 직무로 소환되여서도 그의 마음은 늘 순천에 가있었다.순천세멘트련합기업소의 생산정상화에서 관건적인 고리가 바로 내화물생산공정을 현대화하는데 있다는 생각을 늘 품고있던 그는 탐구와 사색을 거듭하며 현대화방안을 하나하나 무르익혔다.

이렇게 완성한 설계안을 안고 며칠씩 순천에 내려가 일군들과 협의도 하고 일판을 벌려놓았으나 공사는 좀처럼 생각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퇴근하여 집에 들어온 김철동무는 안해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순천을 담당하여 다시 내려가야 할것 같소.》

무겁게 하는 그의 말에 안해는 웃으며 물었다.

《아무렴 그렇게 큰 련합기업소에 사람이 없어서 당신이 꼭 가야 한단 말이예요? 유리공장에서 기사장을 하던 때처럼 꼭 내가 있어야만 한다는 그 생각을 이젠 버리세요.당신은 련합기업소의 책임일군이 아니라 성일군이란 말이예요.》

그러나 그의 고집은 완강했다.

《바로 성일군이기때문에 내가 가야 한다는거요.기업소를 살릴 방도를 놓고서도 제가 맡은 일이 아니라고 외면한다면 그런 일군이 열,백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다음날 그는 성의 책임일군들을 찾아갔다.당장 걸린 내화벽돌문제를 풀 방도와 전망적인 현대화방안까지 하나하나 사리정연하게 설명하며 자기를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려보내달라고 하는 그의 제의를 책임일군들은 심중하게 받아들였다.현지에서도 련합기업소의 실태를 환히 꿰들고 막히는데가 없는 김철동무를 다시 내려보내달라고 여러차례나 제기해왔던것이다.이렇게 되여 불과 몇달만에 그는 다시 순천으로 내려오게 되였고 련합기업소 일군들과 로동자들모두가 제 집사람이 돌아온듯이 반겨맞았다.

그가 착상하고 발기한 공사들이 하나하나 추진되여 내화물생산공정이 제구실을 하기 시작함에 따라 소성로보수주기가 점차 늘어나고 세멘트생산량도 계통적으로 장성하기 시작하였다.

기업소에서 최근년간 고난의 행군시기에 비해 4배이상이나 되는 세멘트생산실적을 기록하여 건설의 대번영기를 펼쳐가는 우리 당의 웅대한 구상과 의도를 실현하는데 이바지하게 된데는 일군들의 눈길이 미처 미치지 못하는 구석구석에서까지 일감을 찾아 한고리,한고리 풀어나가며 생산활성화의 길을 열어놓은 김철동무의 숨은 노력이 크게 깃들어있다고 련합기업소 당책임일군은 진심으로 말했다.

성,중앙기관 일군들이라면 누구나 지방출장이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리군 한다.하지만 부국장사업 전기간 김철동무에게서는 그런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아니 나올수 없었다.13년간을 순천의 세멘트생산기지에 내려가 사업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오히려 현지를 뜰 때면 이렇게 말하였다.

《한 이틀쯤 평양출장을 갔다오겠는데 그동안 맡은 일들을 더 잘해달라구.》

그는 성일군이기 전에 기업소의 일군이였고 집을 평양에 둔 순천사람이였다.잠간 평양에 갔다오면서도 오래동안 집을 떠나는 세대주처럼 걱정부터 앞세우며 이곳 로동계급에게 하많은 당부를 남기군 하던 일군이였다.

《부국장동지가 살아있을 때에는 너무도 무심히 듣군 하던 평양사람의 평양출장이라는 말을 되새겨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군 합니다.》

김철동무는 아래에 내려가 뒤짐을 지고 목소리를 높이는 행세식일군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방도를 내놓고 앞장에서 실천하는 일군이였다.환갑나이에 불치의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13년동안 그는 한모습으로 살았다.색바랜 수수한 작업복을 입고 현장마다에서 밤낮이 따로없이 앞채를 메고 뛰여다니는 그를 나이많은 사람들은 《우리 부국장》이라고 친근하게 불렀고 젊은 축들은 《우리 부국장아바이》라고 따르며 존경했다.

그러나 그토록 가까이에서 허물없이 지내온 그들도 김철동무가 불치의 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몸이라는것을 현장에 쓰러져 평양의 중앙병원으로 후송되기 전까지 모르고있었다고,그런 불같은 사람이 갔다는것이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단 한사람,련합기업소에 내려와 외래자합숙의 한호실에서 함께 생활한 성일군만이 알고있었다.

평시에도 얼굴에 병색이 돌던 김철동무의 몸상태가 올해에 들어서면서 더 나빠졌다.식사를 거의나 하지 못하고 깊은 밤이면 모진 고통속에 신음하군 하면서도 소화장애때문이라고 웃어넘기는 김철동무를 강제로 끌다싶이 하여 련합기업소병원에 데려간 사람이 바로 그였다.

여러가지 검사가 진행된 후에 열린 의사협의회는 퍽 오랜 시간 계속되였다.협의회뒤끝에 성일군과 마주앉은 기술부원장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알려주었다.불치의 병이라는것이였다.이제는 손을 쓰기 어려운 단계에 이르러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에 성일군은 저도 모르게 어성을 높이였다.

《그럴수 없습니다.그는 죽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저도 부국장동무가 우리 기업소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잘 알고있습니다.그러나 이것은 과학적인 진단이고 의학의 힘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침통한 어조로 안타까움을 호소하던 기술부원장은 이제라도 본인에게는 알리지 말고 안정시키면서 집중치료를 해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너무도 뜻밖의 사실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나온 성일군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김철동무는 이미 모든것을 짐작한듯 태연하게 말했다.

《세상에 오진이라는것도 있지 않소.난 믿지 않소.그리고 내가 쓰러지기에는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있단 말이요.그러니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오.나이많은 사람의 간절한 부탁이요.》

내화물생산공정에 고온공기연소기술을 받아들여 위대한 수령님들의 유훈을 관철하고 당결정을 집행했다고 당당히 말하게 될 그때까지만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달라는 절절한 부탁앞에 성일군은 머리를 숙였다.하여 이 사실은 비밀로 붙여졌다.

이때로부터 그는 두달 남짓하게 병마와의 싸움에서 몸을 버티여냈다.단순히 자신을 지탱해낸것이 아니라 남은 생을 깡그리 불태우며 나라의 내화물공업의 주체화실현에 커다란 공헌으로 되는 뚜렷한 자욱을 새기였다.

심한 아픔으로 쓰러지는 순간까지 자신이 지켜선 전구를 떠나지 않은 그를 두고 순천사람들은 한생을 1선참호에서 산 화선지휘관이라고 뜨겁게 추억하고있다.

위대한 수령님들의 유훈과 당정책관철을 위해 헌신하며 뚜렷한 자욱을 남기고 간 김철동무의 생은 오늘날 성,중앙기관 일군들이 경제강국건설에서 정해야 할 삶과 투쟁의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한 귀중한 진리를 가르쳐주고있다.

너의 위치는 어디인가?

사회주의경제강국건설이 그 어느때보다 격렬히 벌어지고있는 오늘의 벅찬 시대가 제기한 이 물음앞에 김철동무는 한개 성의 일군으로서 참으로 고귀한 대답을 남기였다.

화선!

그렇다.경애하는 원수님의 령도를 가장 충직하게 받들줄 아는 일군의 위치는 바로 화선이다.

 

실적으로 아로새긴 인생의 자욱

 

순천세멘트련합기업소 로동계급이 김철동무를 지금도 그토록 잊지 못해하는것은 그가 기업소의 생산정상화와 내화물공업의 주체화실현을 위한 투쟁에서 뚜렷한 실적을 남겼기때문이다.그것이 없다면 13년이 아니라 20년,30년을 내려와있었다 해도 대중의 기억속에 그렇듯 지울수 없는 모습으로 새겨지지는 못했을것이다.

그는 어떤 어려운 과제도 과학적신념과 실력으로 풀어제끼고야마는 실력가형의 일군이였다.

세멘트공업은 내화물을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다.순천세멘트련합기업소도 례외가 아니였다.소성로가동일수를 원만히 보장할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들의 간곡한 유훈을 관철하는데서 초미의 문제로 나선것이 바로 내화물이였다.

김철동무는 그것을 자진하여 맡아안고 련합기업소의 내화물분공장에서 몇해동안 살다싶이 하였다.

현대적인 굴식소성로를 일떠세우기 위해 설계원들과 함께 앞선 단위들을 돌아보고 한자리에 모여앉은 날이였다.

《어떻소.대담하게 결심하고 통이 크게 해볼만 한 일이 아닙니까?》

김철동무의 물음에 설계원들이 입을 모았다.

《신심이 생깁니다.저 단위들처럼만 하면 문제없습니다.》

늘 과묵하던 김철동무의 얼굴에 웃음이 비끼였다.

《해봅시다.그러되 우리 식으로 더 발전시켜봅시다.저마다 앞선 단위들을 그대로 본따려 한다면 새것은 누가 창조하겠소.》

그는 설계원들과 함께 한장 또 한장 도면을 그려나갔다.앞선 단위들의 경험과 자기들의 새로운 착상을 합쳐 현대적인 굴식소성로설계를 완성하였고 짧은 기간에 훌륭히 일떠세웠다.결과 종전에 비해 2배이상의 질좋은 내화벽돌을 생산하면서도 원가를 훨씬 줄이였으며 소성로보수주기를 근 4배로 늘이게 되였다.이것은 그대로 세멘트증산에로 이어졌다.

김철동무는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위대한 수령님들의 유훈인 내화물공업의 주체화를 완벽하게 실현하기 위해 무연탄가스화에 의한 고온공기연소기술을 도입하는 투쟁에 또다시 뛰여들었다.

1,500℃이상의 온도를 보장해야 하는 내화물소성로에 고온공기연소기술을 받아들였다는 자료는 아직 그 어느 나라 기술서적에도 없었다.고온공기연소기술을 도입하는데 성공한 우리 나라의 어느 한 단위의 경우에도 소성온도는 기업소의 소성로에서 요구하는 온도에 비해볼 때 근 200℃나 낮은 수준이였다.과학계에서도 그만한 온도에 견딜수 있는 축열체개발은 사실상 넘어서기 어려운 극한점으로 여기고있었다.

평시에 그의 높은 실력을 두고 탄복하며 늘 과학기술적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던 련합기업소의 기술일군도 심중히 생각해보고 결심하라고 충고했다.

《전문연구단위에서도 아직 해내지 못한것을 자체로 해보겠다는건 지나친 욕망이 아닐가?》

《이건 결코 욕망이 아니네.누구든지 반드시 해내야 할 과제이고 과학적신념에 관한 문제이네.자네도 공업로들에 고온공기연소기술을 받아들이라는것이 위대한 장군님의 유훈이라는것을 잘 알지 않나.난 이미 결심이 섰네.》

김철동무는 첨단돌파의 초행길에 주저없이 나섰다.

그때부터 그의 발걸음은 과학원의 해당 연구단위와 인민대학습당에로 끊임없이 이어졌고 지칠줄 모르는 탐구와 사색의 나날이 흘렀다.그 과정에 그는 연구사,기술자들과 창조적지혜를 합쳐 독특하고 기발한 착상으로 끝끝내 새로운 축열체를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다.무연탄가스화를 위한 알탄성형에 필요한 점결제문제도 그렇게 풀었다.

그의 피타는 탐구와 노력이 깃든 과학기술성과들이 하나둘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지금은 가스화공정이 마감단계에서 일떠서고있다.비록 그는 우리곁에 없지만 사람들은 그 창조물에서 김철동무의 모습을 보고있다.

실력은 타고나는것이 아니다.그는 실력이 없는 사람은 일군의 자격을 상실한 존재이며 어제날의 실력만으로는 발전하는 현실에 따라설수 없다는 신조를 안고 한생 피타는 노력으로 꾸준히 지식의 탑을 쌓아왔다.

몇해전까지만도 련합기업소에서는 설비보수작업에 필요한 산소의 부족으로 애를 먹고있었다.백수십리 떨어진 여러 단위에서 산소를 구입해오군 했지만 그 량은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사실 기업소에는 산소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작업반이 있었다.그런데 설비가 수십년전의것이고 또 너무 낡아 가동을 못하고있는 상태였다.

김철동무는 산소생산설비를 무조건 살려내기로 결심하였다.팔소매를 걷어올리고 앞장에서 해체전투를 벌리는 그에게 함께 일하던 성의 일군이 물었다.

《부국장동지는 기계공학을 전공한적도 없는데 이 설비를 살려낼 자신이 있습니까?》

스파나를 쥐고 수걱수걱 일손을 다그치며 김철동무는 짧고도 명백히 대답했다.

《배워야지요.우리가 새로 만든다는 립장에서!》

규산염공학을 전공한 그에게 있어서 산소생산설비를 살리는 전투는 또 하나의 새로운 분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기도 했다.그 나날 김철동무가 찾은 단위들과 전문가들,긴장한 시간을 쪼개가며 탐독한 기술서적들은 그 얼마인지 모른다.비록 전공분야가 아니라 할지라도 현실이 절박하게 요구하는 문제앞에서는 주저나 외면을 모르고 그것을 다름아닌 자기가 앞장에서 풀어야 한다는 일군의 관점은 숨죽었던 산소생산설비를 단순히 원상복구하는것이 아니라 새롭게 개조하는 결실을 안아왔다.그의 피타는 노력으로 기업소에서는 설비보수에 필요한 산소를 자체로 보장하고도 남아 다른 단위들에까지 보내주게 되였다.

김철동무는 3개의 외국어를 소유한 사람이였다.한해에 몇번 평양에 올라올 때에도 성의 사무실이나 집이 아니라 인민대학습당에 가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세멘트증산에 이바지할수 있는 새로운 기술자료들을 하나하나 수집하여 기업소생산활성화와 현대화사업에 적극 리용하였으며 콤퓨터로 쉽게 볼수 있도록 종합하여 기술일군들에게도 넘겨주었다.그의 노력이 스민 자료들을 기업소의 기술일군들이 지금도 리용하고있다.

한생토록 지식의 탑을 쌓으면서도 만족을 몰랐던 그는 예순을 가까이한 나이에 련합기업소의 범위를 벗어나 수직소성로에까지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다.우리 나라 어디에나 있는 중소규모의 세멘트생산공장들에서 찾아볼수 있는 수직소성로들까지 모두 현대화할 꿈을 안고 그에 대한 착상을 부단히 무르익혀왔던것이다.김철동무는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실력이 없는 일군들은 현장에 내려갔다고 해도 유람식으로 돌아보거나 겉멋만 부리게 된다.혹 성사무실을 떠나 아래단위에 내려갔다 해도 현실이 해결을 기다리는 대책안을 내놓을수 없는 일군,실력이 없는 일군은 또다시 사무실을 찾아 틀고앉게 된다.그러한 일군들에게서는 아무런 실적도 기대할수 없으며 오히려 시끄러운 존재,장애물로 된다.

실력으로 조국을 받들고 실력으로 조국을 사랑하라.김철동무가 많은 사람들에게 한 이 말은 결코 훈시가 아니였다.

굴식소성로를 일떠세우는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있던 어느날이였다.김철동무가 벽돌축조를 하고있는 한 돌격대원에게 급히 다가왔다.

《뭘하고있소? 강의시간이 다 되여오는데 빨리 대학에 가지 않구.》

김철동무의 말에 함께 일하던 돌격대원들의 눈빛이 일시에 그들 두사람쪽으로 쏠리였다.그 돌격대원은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 망라된 청년이였다.

《모두가 땀흘리며 긴장하게 일하는데 나만 빠지기가 미안해서…》

《무슨 소릴 하오.대학공부는 이것보다 더 큰 전투야.기업소의 래일이 동무와 같은 청년들한테 달려있소.》

김철동무의 말은 그 청년뿐이 아닌 다른 돌격대원들에게도 깊은 여운을 남기였다.

김철동무는 어느 생산현장에서나 기다리는 일군,누구나 먼저 찾는 일군이였다.

련합기업소 기술일군들은 물론 책임일군들도 걸린 고리가 있으면 그에게로 먼저 달려오군 하였다.중요한 과학기술적문제가 론의되는 협의회에서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볼수 없었으나 그는 늘 일군들과 기술자들에게 현실성있고 뚜렷한 기술적방안을 내놓고 귀중한 조언을 주군 하였다.

《아마 그의 노력으로 현실에 도입된 과학기술성과들을 묶어 론문을 쓴다면 박사론문이 되고도 남았을것입니다.하지만 그는 모든 성과를 고스란히 우리 기술자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내화물분공장에서 만난 기술일군의 이야기였다.

사실이 그랬다.10여년을 그와 함께 일하며 기술혁신과제들을 수행해온 기술자들이 적지 않은 발명증서와 과학기술성과등록증,창의고안증서를 받아안았지만 김철동무에게는 그런것이 없었다.기술일군들에게 많은 착상과 방법론을 튕겨주고 제기되는 기술적문제들을 해결한 그였으나 일군에게 있어서 그것을 너무도 응당한 일로,마땅한 본분으로 여기였다.

김철동무는 실력의 높이를 바로 조국에 대한 사랑의 높이로 여긴 사람이였다.

기업소일군들이나 종업원들보다도 세멘트생산을 위해 더 많은 고심과 노력을 기울인 성일군,실력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놓을수 없는 많은 창조물마다에 남겨놓은 김철동무의 실적을 그들은 오늘도 소중히 추억하고있다.

 

가장 고귀한 재산과 유산

 

김철동무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리용하던 철궤안에서는 많은 기술문건들과 함께 그가 신던 신발 한컬레도 나왔다.

터진 부위를 깁고 뒤축을 덧붙인 그 신발을 쓰다듬는 로동자들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세멘트증산을 위해,로동자들을 위해 바닥이 닳도록 신고 다닌 그 신발이 기술문건들과 더불어 김철동무가 남긴 재산의 전부였다.세멘트먼지가 푹 배인 신발등에 눈물방울들이 점점이 떨어졌다.

《부국장동지!》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귀중한 일군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위대한 수령님들의 유훈을 하루빨리 관철하자고 언제나 땀에 절고 먼지오른 작업복을 입고 일하던 일군,로동자들과 강냉이국수도 달게 들고 한가지 별식이 생겨도 함께 나누던 그의 모습은 상급기관의 일군이라기보다 한가마밥을 같이 먹는 평범한 로동자의 모습이였다.

언제인가 가스화공사장에 찾아왔던 기업소의 일군이 김철동무에게 수고한다면서 좋은 담배 한갑을 내놓은적이 있었다.

그는 고급담배이니 혼자서 피우라고 가벼운 롱까지 섞어가며 권하였다.

담배갑을 받아들고 한동안 눈여겨보던 김철동무는 그것을 도로 내밀며 말했다.

《이왕이면 담배가 아니라 사탕 한봉지면 더 좋겠구만.》

아이들처럼 사탕은 왜 찾는가고 핀잔하는 일군에게 김철동무는 대답했다.

《스무대밖에 안되는 담배 한갑을 누구 코에 바르겠소.사탕 한봉지면 한알씩이라도 골고루 차례지겠는데…》

담배 한갑과 사탕 한봉지,

내것과 우리의것이라는 상반되는 의미속에 오직 우리라는 고상한 세계에서 사는 일군의 깨끗한 량심이 비껴있었다.

단 한g의 세멘트,한장의 내화벽돌도 오직 기업소를 위한 일에만 쓰는 일군,사업과 생활에서 그 어떤 특전도 바라지 않는 청렴결백한 일군이였기에 로동자들은 김철동무를 두고 언제나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사는 일군이라고 말하군 하였다.

몇해전 설비보수에 필요한 자재구입으로 어느 한 공장에 찾아갔던 그에게 그 단위의 일군이 자재를 턱대고 많은 량의 세멘트를 요구한적이 있었다.

그때 김철동무는 지금 백두산선군청년발전소건설장에서는 우리 아들벌 되는 청년들이 삶은 감자로 끼니를 에우면서도 쌀이 아니라 세멘트를 더 요구한다고,그래서 우리 로동자들이 세멘트 한줌이라도 더 내자고 땀흘리며 일하고있다고 나직이 말하였다.

부탁이나 하듯이 조용히 하는 말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던지 그 일군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자재를 내주었다고 한다.

티없이 깨끗한 량심을 지닌 일군의 모습은 가정이라는 거울속에 더욱 선명하게 비쳐지는 법이다.

지금도 락랑구역 관문2동 28인민반에 있는 김철동무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한 일군이 지녔던 청렴결백한 성품에 머리를 숙인다.

80고령의 어머니와 남편을 대신하여 집안살림을 도맡아하느라 나이보다 겉늙은 안해,30살이 넘은 두 아들이 함께 사는 두칸짜리 살림집.

수많은 기술혁신안을 도입하여 나라에 수억원에 달하는 리익을 주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푼의 리익도 탐내지 않은 청렴결백한 일군이 사랑하는 안해와 자식들에게 물려준것은 나라에서 준 집과 수십년전 이사올 때 들여놓은 얼마간의 집세간들뿐이다.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가족사진조차 별로 남기지 못했다.

그것은 수십년전 중앙동물원에서 가족들과 함께 찍은 자그마한 흑백색사진 한장뿐이다.

그 사진에서는 30대 한창나이의 김철동무가 웃고있다.

자그마한 유리공장의 기사장으로부터 련합기업소의 생산을 지도하는 성기관의 부국장에 이르는 그 수십년세월 조국땅 방방곡곡에 일떠선 대기념비적창조물들에 자기 인생의 흔적을 무수히 남긴 그였지만 자기 가정에 남긴 사진은 색날은 그 사진뿐이다.

사진을 보여주며 김철동무의 둘째아들 김광명동무는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들어오는 날이 명절이나 같았습니다.

부엌에서 어머니의 칼도마소리가 유별나게 크게 울리는 날이면 오늘 아버지가 오는구나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군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명절》이 1년에 몇번이나 있었던가.

지난해 어머니날도 김철동무는 기술개건공사에 참가한 돌격대원들과 함께 보냈다.

기술개건공사가 계획대로 진척되지 않아 맥을 놓고있던 그때 김철동무가 조직한 들놀이는 돌격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었으며 특히 돌격대에 망라된 녀성로동자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날 김철동무가 돌격대원들을 고무해주기 위하여 오랜 기간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에게도 찾아가보지 못하고 들놀이를 조직했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최학문동무를 비롯한 몇몇 성일군들뿐이였다.

그때 일을 돌이켜보며 김철동무의 안해 김복인동무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저녁 집에 전화가 왔습니다.

여느때는 꼭 필요한 말이나 몇마디 하고 전화를 끊던 사람이 그날은 미안하다는 말을 곱씹으면서 전화를 놓지 못하더군요.오죽 마음이 무거웠으면… 그때 노여움이 앞서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한게 후회됩니다.》

이것이 김철동무가 자기 가정에 남긴 추억의 전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 가장 훌륭한 아버지가 남길수 있는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다.

그것은 당과 수령을 충정다해 받드는 진실한 인간만이 지닐수 있는 정신적재부였다.

그가 불치의 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때로부터 얼마후 출장차로 집에 잠간 들렸을 때였다.

아버지의 병이 깊어졌다는것을 알게 된 맏아들 김인철동무는 지방에 있는 료양소에 가서 안정치료를 받자고 했다.

하지만 김철동무는 아들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이제 치료를 받으면 혹 1년쯤은 견딜수도 있겠지.하지만 난 못 가겠다.당앞에 결의다진 그날까지는 넉달밖에 안 남았는데 내가 이제 목숨이 아까와 물러서면 내화물공업의 주체화가 그만큼 늦어지고 당결정도 지킬수 없게 된다.

설사 치료를 받고 10년,20년을 더 살수 있다고 해도 난 이 넉달과 바꿀수 없구나.》

그러면서 그는 심한 아픔을 가까스로 이겨내며 또다시 순천으로 떠났다.

걱정어린 눈길로 아버지를 바래우는 두 아들에게 김철동무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도 당원이니 이 아버지를 리해하리라고 믿는다.》

그는 수령의 유훈관철,당정책관철을 삶의 전부로 간직하고 생명이 다할 때까지 당의 뜻에 참되려는 로당원의 불같은 열망을 두 젊은 당원의 심장속에 심어주었다.

어찌 그뿐이랴.

두 아들을 실력으로 당을 받드는 기둥감으로 내세우려는 마음이 누구보다 뜨거웠기에 군사복무를 마친 맏아들이 평양건축종합대학에 입학하였을 때 그리도 기뻐했으며 로동자로 일하는 둘째아들도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 망라되도록 적극 떠밀어준 김철동무였다.

그는 어쩌다 집에 들리면 다른 일은 못해도 두 아들의 학습정형만은 엄격하게 검열하군 하였다.

정녕 그는 두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이기 전에 참된 당원이였고 훌륭한 스승이였다.

이런 인간이 후대들에게 물려준 숭고한 정신과 넋이야말로 그 어떤 재부에도 비길수 없는 크나큰 정신적유산인것이다.

가스화생산공정확립을 위한 공사가 마감단계에 이르렀을무렵인 지난 4월 자신의 생명을 깡그리 연소시키며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던 김철동무는 끝내 현장에서 쓰러졌다.

건설건재공업성 당책임일군인 김철순동무가 림종을 앞둔 그를 찾아왔을 때 김철동무는 혼미해지는 의식속에서도 책임일군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힘겹게 말했다.

《당결정을 집행하지 못한채… 결승선에 다 와서 넘어졌다고 생각하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김철순동무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들이 김철동무의 손에 떨어졌다.

《부국장동무,용기를 내라구.이렇게 쓰러져선 안돼.》

언제나 힘을 주고 용기를 주며 자기를 떠밀어주던 미더운 당일군의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려는듯 한참이나 김철순동무를 올려다보던 김철동무는 온몸의 힘을 모아 부탁했다.

《내화물…주체화 꼭 실현… 당창건 70돐에 선물로…드려주십시오.》

이 말을 남기고 의식을 잃은 그는 다시 깨여나지 못했다.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불같은 충정과 뛰여난 실력,깨끗한 량심으로 당을 받들고 대중을 이끌어온 김철동무를 우리 시대 일군의 전형으로 높이 내세워주시였으며 그의 유가족들에게도 대를 두고 길이 전할 뜨거운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참다운 인간은 아름다운 추억속에 영생한다.

살아서는 백옥같이 순결한 량심을 재산으로 안고 살며 죽어서는 아름다운 추억을 유산으로 남기는 사람이 바로 우리 시대가 바라는 진짜배기일군이라는것을 김철동무는 자신의 한생을 통하여 증명하였다.

 

* *

 

오늘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바라시는 일군은 바로 김철동무와 같이 자기 수령을 사심없이,변함없이 충정과 실력으로 받드는 일군들이다.

강성국가건설의 한개 전선을 통채로 맡겨도 마음이 놓이고 없으면 빈자리가 크게 나는 사람,바로 그런 일군이 경애하는 원수님과 팔을 끼고 어깨를 겯고 한전호에 설수 있는 전우,동지이다.

김철동무는 위대한 수령님들 가까이에서,경애하는 원수님 가까이에서 단 한번도 기념사진을 찍은적이 없다.

하지만 수령의 유훈관철전,당정책옹위전을 위해 한몸을 초불처럼 불태운 그는 사실상 위대한 수령님들과 경애하는 원수님을 가장 가까이에 모시고 살며 투쟁한 우리 당의 참된 전우,동지였다.

일군들이여!

모두다 김철동무처럼 당과 수령을 충정과 실력,량심으로 받드는 일군이 되자.

본사기자 김진수
본사기자 김충성
본사기자 승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