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4(2015)년 6월 29일 로동신문

 

전쟁 3일만에 빛나는 승리를 안아온 천재적지략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우리 군대와 인민이 이룩한 자랑찬 승리의 력사에는 미제가 전쟁을 도발한 후 즉시적인 반공격으로 넘어가 3일만에 서울을 해방한 혁혁한 전과도 아로새겨져있다.

미제침략자들은 전쟁을 도발하면서 3일만에 북조선을 점령할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남조선주재 미국대사 무쵸가 바로 그런 나발을 불어댄자들중의 하나였다.상전의 비호와 부추김을 받은 리승만괴뢰도당은 기고만장하여 《북벌》을 단행하면 아침은 해주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것이라고 줴쳐댔었다.

3일!

리승만괴뢰도당을 총알받이로 내세워 짧은 기간에 우리 공화국북반부 전지역을 강점하려던 미제침략자들의 조선침략계획은 전쟁도발초기부터 파탄되고 서울을 통채로 우리에게 내주지 않으면 안되는 참패를 당하였다.지구상에 생겨난 첫날부터 끊임없이 침략전쟁들을 감행하면서 령토를 확대해왔다고 하여 국기에 게딱지같은 별들을 따닥따닥 그려붙여 만든 성조기의 피묻은 력사를 가지고있는 미국은 세대와 세기를 넘어 전통으로 흐르게 될 수치스러운 패배의 첫 페지,첫 장을 쓰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 인민군대가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이 불의에 감행한 무력침공을 분쇄하고 즉시 반공격으로 넘어가 3일만에 서울을 해방할수 있은것은 결코 우리가 적들보다 군사적으로 우세하였거나 력량이 많아서가 아니였다.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군사적지략과 령도예술이 낳은 빛나는 결과였다.

오늘도 우리 군대와 인민,세계 진보적인류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을 빛나는 승리에로 이끄신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에 대하여 경탄과 감동을 금치 못해하고있으며 그이께서 지니신 특출한 천품과 전법,령군술에 대하여 길이길이 전하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인류력사에는 우리 수령님처럼 한평생 혁명의 총대를 틀어쥐고 반제대결전의 최전방에서 특출한 군사전략과 령군술로 백승을 떨쳐온 만고의 령장,문무를 겸비한 장군형의 수령은 일찌기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제의 사촉하에 리승만괴뢰도당이 무력침공을 개시한 첫날 인민군대가 적들의 공격을 완전히 저지시키고 즉시적이며 결정적인 반공격으로 넘어갈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시였다.인민군부대들은 적들이 침공해들어왔던 공화국북반부의 지역을 인차 수복하고 남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지난날의 전쟁경험들과 교훈,그를 체계화한 군사학의 견지에서 볼 때 적의 공격을 좌절시키고 반공격으로 넘어가려면 적의 공격력량보다 몇배의 력량이 준비되여있어야 한다.제2차 세계대전의 전과정을 놓고보아도 크지 않은 나라들은 모두 적들의 불의적이고 전면적인 침공에 견디지 못하고 강점당하였다.많은 정규무력과 커다란 경제군사적잠재력을 가지고있는 대국들도 예상치 않았던 첫 타격을 받으면 한동안 혼란에 빠져 시련을 겪으며 방어에 매달리다가 력량을 수습하고 반공격으로 넘어갔다.

적들의 무력침공을 받은 후 즉시적이고 전면적으로 단행한 반공격은 전쟁사상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것이였다.

특히 우리와 적들의 무력대비상태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있었다.미국도서 《현대조선사》 1권은 《1948년 10월까지 미국의 전쟁도발계획에 따라 우익청년단원으로서 군사훈련을 받은 남조선청년들의 수는 125만명에 달하며 그 목적은 북의 인민군무력에 대한 〈10:1〉의 우위를 보장하기 위한데 있다.》라고 밝혔다.일본도서 《조선전쟁》도 미제가 전쟁을 도발하기 직전의 《38°선에는 5개 사단이 제1제대로 전개되였으며 3개 사단은 작전예비로 서울부근에 배치되였다.》라고 폭로하였다.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이 전쟁을 도발할 당시 38°선일대에 배치되여있는 인민군대와 경비대의 력량은 적은 수의 방어력량에 지나지 않았다.우리 혁명무력은 정규군으로 개편된지 두해밖에 안되며 현대전에 대한 경험도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처럼 불가능한 속에서도 우리 인민군대의 정치사상적우월성으로 적들을 때려부실 반공격명령을 하달하시였다.그러시고는 인민군부대들을 빨리 전선에 진출시켜 반공격력량을 증강하며 인민군대의 진공속도를 높이도록 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그런데 반공격으로 이행한 인민군대의 주타격방향을 어디로 정하겠는가 하는것이 심각한 문제로 나섰다.

전선동부인가 아니면 전선서부나 전선중부인가?

다른 나라들의 전쟁경험을 그대로 본받으면 적의 가장 약한 고리를 찾아 주타격방향으로 정하여야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기성관례를 깨뜨리시고 적의 심장부인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전선서부로 주타격방향을 정해주시였다.

당시 38°선 제1제대의 괴뢰군무력 5개 사단중 3개 사단과 1개 련대를 전선서부에 들이밀었던 미제는 패주하는 그 력량을 전선서부 이남방향으로 고스란히 퇴각시켰으며 괴뢰륙군본부 예비대의 3개 보병사단을 서울부근에 집결시켜놓았다.그외에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전선서부에는 괴뢰륙군본부를 비롯한 적의 군사지휘기관들과 군사학교,비행장,군사보급기지들,군사시설들이 집중되여있었을뿐아니라 서울로 향하는 서부의 큰길을 따라 괴뢰군의 기본집단이 전개되여있었다.

전선서부는 적의 가장 약한 고리가 아니라 가장 강한 고리였다.기성관례대로 그 방향으로 반공격을 하자면 적들보다 3배의 력량이 보장되여야 하였다.하지만 아군의 력량은 너무나 적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군이 적은 력량을 가지고도 적의 약점을 리용하여 련속 된타격을 안기면서 공격속도를 높여 적의 아성인 서울을 해방하고 적의 기본집단을 전면적으로 와해시키면서 전반적인 통치체계와 지휘체계를 일대 혼란에 빠뜨릴수 있도록 작전지휘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현명하게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한 밤에 전투를 벌리면 서울시민들의 생명재산이 심한 피해를 입을수 있으며 귀중한 문화유물들이 파괴될수 있으리라는것을 념려하시여 서울해방을 위한 공격개시시간을 6월 28일 새벽 5시로 정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작전적구상에 따라 인민군대의 반공격집단은 괴뢰군의 방대한 방어력량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미제가 해공군무력을 동원하여 맹포격과 폭격을 들이대는 속에서도 드센 공격으로 적들의 방어선을 허물고 의정부를 해방하였으며 미아리계선을 돌파하여 서울의 최종방어선에 큰 구멍을 뚫어놓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서울에 대한 총공격전에 앞서 일부 땅크부대와 보병구분대로 편성된 소부대가 서울시내에 들어가 한바탕 휘저어놓아 적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게 하시였다.

이어 서울해방작전이 시작되였다.

인민군련합부대들이 노도와 같이 서울시내로 진격하였다.인민군대에 대한 공포감이 생겨나고 패배의식에 물젖기 시작한 괴뢰통치배들과 괴뢰군무력은 인민군대가 서울로 들어가기 전에 벌써 자기부터 살겠다고 들고뛰기 시작하였다.서울에 들어박혀 전쟁에서 이길것처럼 큰소리를 치던 남조선주재 미국대사 무쵸와 리승만역도는 도적고양이처럼 꼬리를 사리고말았다.

어찌나 급했던지 적들은 인민군땅크부대가 접근한 다음에 폭파하기로 되여있는 한강다리를 제편이 시내에서 욱실거리는것을 뻔히 알면서도 폭파해버리고말았다.그에 대해 알지 못하고 남으로 나가기 위해 한강다리우에 올라선 숱한 차들과 사람들의 흐름은 뒤에서 도망쳐오는 차들과 사람들이 련속 들이닥치며 떠미는 힘에 의해 동강난 다리짬으로 폭포처럼 쏟아져내려 물속에 수장되고말았다.서울상공에 날아든 적비행대는 한강기슭에서 살구멍을 찾느라 돌아치는 괴뢰군에 대고 기총사격을 가하고 폭탄을 마구 퍼부어 보기 드문 피의 수라장을 펼쳐놓았다.

6월 28일 11시 30분에 서울은 완전히 해방되였다.

서울해방작전에서 우리 인민군대는 적 2만 1 000여명을 살상포로하였으며 각종 포,저격무기,땅크,자동차,비행기 등 수많은 전투기재들을 파괴,로획하였다.

당시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은 저들의 병력을 수습하고 《전체의 반이상이 서울함락전 3일간에 전사하고 부상,포로당하였다.》,《륙군본부는 9만 8 000명이 올라있던 25일의 병적부에서 불과 2만 2 000명밖에 확인할수가 없었다.》고 개탄하였는가 하면 《단지 패배한것만이 아니였다.붕괴된것이였다.》라고 비명을 질렀다.

서울해방작전의 빛나는 승리는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 독창적으로 제시하신 주타격방향의 정확한 선택,력량과 기재의 집중,포위섬멸원칙과 방도,대부대전과 소부대전의 배합에 관한 탁월한 군사예술의 자랑찬 결실이였다.그 승리는 7.27의 전승으로 빛나는 우리의 조국해방전쟁사의 첫 페지에 긍지스럽게 기록된것이였다.

본사기자 리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