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4(2015)년 8월 7일 조선중앙통신

 

일제의 백년죄악을 결산하는데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정당한 조치

 

(평양 8월 7일발 조선중앙통신)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소장 후보원사 교수 박사 조희승의 글 《일제의 백년죄악을 결산하는데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정당한 조치》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올해 8월 15일은 조국해방 70돐,일제패망 70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을 맞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일제에 의하여 말살되였던 우리 나라의 표준시간을 되찾기 위한 조치로서 종전시간보다 30분 늦은 동경 127°30′자오선을 기본자오선으로 하는 시간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표준시간으로 정하고 그것을 평양시간으로 명명하는 정령을 발표하였다.

일제에 의해 말살되였던 조선의 표준시간을 되찾은것은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일제잔재를 완전히 숙청하는데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민족사적장거이다.

 

유구한 력사,발전된 천문학과 우리 민족의 고유한 시간제도

 

시간은 인간생활과 국가사회활동의 기초이다.

슬기롭고 재능있는 우리 인민은 오랜 옛날부터 자연과 사회를 정복하고 개조하기 위한 창조적활동과정에 천문학을 발전시키고 그에 기초하여 당시로서는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고 시간제도를 사용해왔다.

고조선사람들은 일찍부터 천체에 대한 자세한 관찰을 진행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200여개의 고인돌무덤 뚜껑돌에 새겨진 별자리그림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어떤 고인돌무덤 뚜껑에는 큰곰별자리,룡별자리,오리온별자리 등으로 인정되는 10여개의 별자리와 80여개의 크고작은 별들이 새겨져있다. 또 어떤 고인돌무덤에는 북두칠성은 물론이고 은하수를 새긴것도 있다.

세나라의 발전된 천문학과 시간측정제도는 중세문화사에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한다. 특히 고구려의 발전된 천문학은 세나라천문학과 시간측정제도에서 선도적역할을 한것으로 하여 그 의의는 더욱 부각되고있다.

고구려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후 왕궁가까이에 천문대인 첨성대를 설치하여 평양을 지나는 자오선을 기준자오선으로 하는 시간을 측정하였다. 왕궁인 대성산 안학궁성 서문가까이의 릉선(오늘의 평양민속공원자리)에 4각으로 된 중심시설과 그밖으로 7각으로 된 고구려첨성대가 있었고 586년에 대성산으로부터 수도를 옮긴 평양 장안성에는 왕궁가까이인 오늘의 모란봉 을밀대부근에 고구려첨성대가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51 평양부 고적)

고구려사람들은 일식과 태양흑점을 정확히 관측하였다. 태양흑점을 삼족오(세발까마귀)로 표현한것이 그러한 실례의 하나이다. 동시에 별의 운행에 대해서도 정확히 관찰하였는데 덕화리2호무덤벽화에 그려진 성수도와 28수를 비롯한 136개의 별을 그린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4호무덤의 벽화 등을 통하여 당시 천문관측의 높은 발전수준을 엿볼수 있다.

《천상렬차분야지도》는 고구려천문학의 높은 경지를 반영한 석각천문도로서 조선천문학사연구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현재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보존전시되여있는 《천상렬차분야지도》는 본래 고구려석각천문도에서 찍어낸 천문도를 14세기말에 발견하고 그것을 조선봉건왕조초기 실정에 맞게 다소 수정하여 석각도를 만든 다음 인쇄한것이다. 이 석각천문도는 세로 약 2m,가로 약 1.2m되는 큰 돌판우에 북극이 중심에 놓이도록 천구(둥근 지구)를 평면에 투영한 후 1 475개(혹은 1 467개)의 별들을 307개(혹은 282개)의 별자리로 묶어서 표시한것이다. 천문도에는 중심원(북극원)과 적도원,황도원,경도원이 명백히 밝혀져있고 은하수도 그려져있다.

백제와 신라의 천문학 역시 발전하였다.

백제의 발전된 천문학과 시간측정과 루각박사(시간을 전문맡아보는 학자),일관(천문기상관측자),력박사(시간과 일수,년력을 맡아보는 학자) 등에 대한 자료와 기록을 통해 잘 알수 있다. 이들은 살별(혜성),별찌(류성),행성들에 대하여 날자와 시간,위치와 방향,그 크기 등을 자세히 관측하고 기록에 남기였다. 백제사람들은 일상적인 해와 달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진행함으로써 일식과 월식,5개의 행성과 살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장악할수 있었으며 그에 기초하여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고 력서를 만들어썼다.

신라에서도 천문학이 발전하면서 정확한 시간측정이 진행되였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천문대인 첨성대(높이 약 9.1m)는 비록 7세기 전반기에 건설되였다고 하지만 신라에서는 건국초기부터 기상기후와 천문현상에 대한 관측을 전문으로 하는 천문대가 있었던것으로 추측되고있다.

그리고 일찍부터 시간도 측정하였다. 경주의 성벽밑에서 2세기의것으로 추측되는 해시계(일구)의 일부 쪼각들이 발견되였는데 반경이 약 33.4cm인 화강암원반으로 된 이 해시계는 원이 15°를 단위로 하여 24갈래로 나뉘여져있고 거기에 시간을 표시하는 글자들이 새겨져있다. 관측자는 이 원반을 수평으로가 아니라 지구의 적도에 평행되게 경사지게 세워놓음으로써 원반의 중심에 설치한 표시막대기가 북극을 향하도록 하였으며 그 막대기의 그림자가 원반우에 비치는 자리에서 시간을 알아낼수 있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봉건국가(918년-1392년)는 왕궁인 개성 만월대와 린접한 서쪽언덕에 천문대를 설치하여 기상관측과 천문,시간과 력서작성을 일상적으로 진행하였다. 이러한 사업을 맡아보는 기관으로서는 사천대(서운관) 등의 중앙전문기관이 있었고 지방들에도 서경(평양),남경(경주)을 비롯한 여러 고을들에 천문기상관측기구들이 설치되여있었다.

고려의 발전된 천문학은 일식과 월식,해무리,달무리,별찌,태양흑점 등을 정확히 관찰하였는데 그 연구성과는 《고려사》에 자세히 기록되여있다.

고려의 발전된 천문학과 시간측정제도는 조선봉건왕조에로 이어졌다.

15세기의 천문학은 중세봉건사회의 천문학발전을 집대성한 연구성과들로 빛을 뿌리고있다. 15세기의 재능있는 기술자들인 리천,장영실 등에 의하여 혼천의,간의,일성정시의,자동물시계,각종 해시계 등 천문관측기구들과 발전된 형태의 시간측정기구들이 창안제작되여 리용되였다.

일성정시의는 말그대로 태양시와 항성시를 관측하는 측정기구로서 1437년에 창안제작되였는데 낮에는 해그림자를,밤에는 별의 자리를 관측하여 시간을 재는 관측기구였다. 해시계로는 현주일구,천평일구,정남일구,앙부일구 등이 있었다. 일구라는것은 해시계라는 뜻이다.

조선봉건왕조시기 해시계와 함께 여러가지 물시계도 창안제작되였다. 자격루는 1434년에 설치리용되였던 자동물시계로서 두시간사이를 두고 인형이 하루에 12번 종을 치도록 되여있다. 그리고 하루에 12번 종을 칠뿐아니라 더욱 세분화된 시간을 알리도록 자주 북을 칠수 있게 되여있으며 북과 북사이에도 시간간격을 또다시 세분하여 알릴수 있게 징을 치도록 정밀한 전동장치가 되여있었다. 1438년에 흠경각에 설치된 자동물시계인 옥루기륜의 구조는 자격루보다 더 복잡하고 정밀하였다. 많은 장치들과 정밀한 그 동작원리들로 하여 물시계로부터 오늘날의 기계시계에로 전환하는 과정의 산물이라고도 할수 있는 옥루기륜은 계절에 따라 매일 달라지는 해돋이의 위치와 운동속도까지 정확히 보여줌으로써 천문관측기구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우리 민족은 발전된 천문학에 기초하여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고 그에 기초한 시간제도를 확립하여 국가사회생활에 활용한 슬기롭고 우수한 민족이다.

 

조선의 표준시를 말살하고 일본의표준시를 강요한 일제의 백년죄악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과거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사람들을 식민지노예로 만들려는 목적밑에 〈내선일체〉요, 〈동조동근〉이요 하면서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외곡하고 유린하였으며 우리의 말과 글, 조선사람의 이름과 성까지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침략무력에 의한 로골적인 위협과 공갈,모략적인 방법으로 《을사5조약》을 날조한 일제는 조선의 표준시간을 점차적방법으로 강탈하는 각본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였다.

이를 위하여 일제는 앙부일구를 비롯한 조선의 발전된 시간측정기구들과 천문관측기구들을 략탈해가는 한편 우리 나라의 표준시간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켰다. 이에 토대하여 일제는 《을사5조약》의 날조로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이듬해인 1906년 6월 2일부터 잠정적으로 일제《통감부》를 비롯한 한양에 있는 일제의 모든 관청들에서 이제까지 써오던 동경 127°30′을 지나는 자오선을 기준자오선으로 하여 설정한 조선의 표준시대신에 그보다 30분 빠른 동경 135°를 지나는 자오선을 기준자오선으로 한 일본표준시를 쓰도록 하였다. 일제가 이렇게 한양에 있는 일본의 모든 통치기관들에서 일본시간을 사용하게 한것은 일본정부의 침략적지시와 지령이 원활하게 집행되도록 하려는 의도와 함께 일본시간에 조선사람들이 점차적으로 《익숙》되게 하려는 교활한 술책에서 나온것이였다. 그 결과 조선의 수도를 비롯한 여러곳들에서는 정오가 12시인 시간과 12시 30분이 정오인 괴이한 이중시간이 적용되게 되였다.

우리 나라는 국제적인 시경대로 볼 때 8경대와 9경대사이에 놓여있다. 경대시(시간)란 영국 그리니치천문대를 지나는 자오선을 본초자오선으로 하여 24개(0-23)의 시경대로 나누고 매개 시경대의 주자오선을 기준으로 한 지방평균태양시를 표준시로 설정한 시간을 말한다.

우리 나라는 8경대와 9경대에 위치한 나라로서 8경대에는 평양과 서울을 비롯한 우리 나라 륙지면적의 55%(약 12만㎢)가 속하며 9경대에는 45%(약 10만㎢)가 놓여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는 8경대와 9경대의 경계선인 동경 127°30′을 기준자오선으로 하는 표준시를 쓰는것이 정확하다. 1884년 국제적으로 시경대가 설정된 이후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8경대와 9경대의 경계선인 동경 127°30′을 기준으로 하는 경대시가 표준시간으로 고착되여 쓰이여왔다.

이때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종전의 12시간제를 24시간제로 고쳐 사용하여오고있다.

일제는 바로 이러한 조선의 표준시간을 무시하고 1906년 6월부터 《통감부》를 비롯한 일제침략기관들에서 일률적으로 조선표준시간보다 30분 더 빠른 일본표준시간을 적용함으로써 우리 나라 시간제에 혼란을 조성하고 나아가서 우리 나라 시간제를 말살하려고 획책하였던것이다.

일본표준시의 조선에서의 적용도입은 시간리용에서 조선인민의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흉심으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조선봉건왕조는 이에 대처하여 자기의 주권을 행사하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서 1908년 2월 7일 황제칙령 제5호를 발표하여 일본시간과 30분의 시차(시간차이)를 가진 우리 나라 표준시간을 법적으로 고착시켜 선포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종래 늘 써오던 한양의 시간은 영국의 그리니치관상대(천문대)의 자오선을 중심으로 한것으로서 그 기본은 동경 127°30′을 기준한것이였다. 이것을 표준시간으로 삼아서 륭희2년(1908년) 4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하였다.》(《순종실록》권2 륭희2년 2월 7일)

이 조치는 우리 나라의 표준시간을 법적으로 고착시키고 우리 나라의 기관들과 사람들이 조선의 표준시간을 유일적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황제칙령 제5호의 내용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것은 《종래 늘 써오던 한양의 시간》,《그리니치관상대(천문대)의 자오선을 중심으로 한것으로서 그 기본은 동경 127°30′》이라고 못박은 사실이다.

조선봉건왕조는 일제의 조선표준시말살책동을 단호히 물리치고 조선의 독자적인 표준시간을 고수하기 위해 칙령에 의한 법적조치로 맞섰던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1910년 8월 조선을 완전히 병탄한 후 조선의 강토와 우수하고 찬란한 민족문화유산들을 강탈하는것과 함께 조선의 표준시간마저 말살하는 천추에 용납 못할 범죄행위를 감행하였다.

1911년 11월 16일 일제와 《조선총독부》는 《고시 338호》라는것을 발표하여 1912년 1월 1일부터 조선의 표준시간을 일본의 《표준시간》에 맞출데 대한 지시를 내리먹임으로써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표준시간을 없애고 일본의 《표준시간》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조선의 표준시를 말살하면서 그것을 《병합후 내지와의 관계가 더욱더 밀접해지고 상호의 교통이 빈번해지는데 따라》(《시정25년사》 185페지) 시간을 《통일할 필요》로부터 실시하는듯이 합리화하여 나섰다.

그러면 일제가 우리 나라의 표준시간을 말살한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를 보다 원활하게 하고 우리 민족을 영원한 저들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종주국인 일본에 있어서 식민지조선의 시간이 저들과 같아야 식민지지배략탈을 위한 모든 강도적지령과 지시,통제가 유일적이고 통일적으로 진행될수 있었다. 보다 중요하게는 국가사회생활과 밀접한 련계를 가진 시간의 중심이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 되여야 하며 식민지조선은 자기의 독자적인 시간을 가질 권리조차 없다는것이다.

《황국신민화》의 일환으로 감행된 《정오묵도》는 그러한 대표적실례였다. 일제는 조선에서는 11시 30분이지만 일본표준시간으로는 정오(12시)가 되면 일본뿐아니라 조선에서도 고동을 울려 다같이 일본의 《황거》(옛날의 도꾸가와《쇼궁》이 살던 집으로서 《명치유신》이후 력대일본왕이 살았다. 보통 궁성이라고 불렀다.)를 향하여 《묵도》(정오묵도)를 하게 하거나 《궁성요배》를 강요하였다. 조선민족을 《황국신민화》하기 위해서도 시간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일제의 조선표준시말살로 하여 우리 민족은 남의 나라 시간에 맞추어 《정오묵도》와 《궁성요배》를 강요당하고 아침 7시의 고동소리에 맞추어 노예로동을 강요당하는 말그대로 《남의 나라 시간에 얽매인 노예》가 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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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조선은 일제의 폭압통치에서 해방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통치의 후과와 잔재는 사회생활의 이모저모에 뿌리깊이 남아있었다.

해방후 지난 70년간은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일제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줄기찬 투쟁의 력사이기도 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조국해방 70돐,일제패망 70년이 되는 8월 15일을 계기로 동경 127°30′을 지나는 자오선을 기준자오선으로 표준시간을 정하고 그것을 평양시간으로 명명할데 대한 정령을 발표하였다.

우리 나라의 표준시간을 제정하고 평양시간으로 명명한것은 조선의 지리적위치와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의 요구에 부합되는 매우 정당한 조치로서 우리 나라 력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민족사적사변으로 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