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4(2015)년 8월 17일 로동신문
숭고한 도덕의리가 굽이친 력사 이완 야꼬블레비치 노비첸꼬
올해는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70년에 대하여 말하는 해이다. 1945년,나는 운명적인 그해로부터 이태후에 출생한 사람이다.그러나 나도 70년에 대하여 말하고싶다. 내가 말하려는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귀중히 여기는 의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선인민이 잊지 못해하는 나의 아버지 야.떼.노비첸꼬는 평범한 씨비리사람이였다. 위대한 조선의 위대한 수령분들께서 지난 70년간 숭고한 의리의 세계적모범을 창조하시였다는것이 서둘러 하고싶은 나의 주장이다. 조선해방 70돐에 즈음하여 조선의 걸출한 수령분들과 형제적조선인민에 대한 우리 노비첸꼬일가의 도리를 생각하며 나는 이 글을 달리게 된다.
매혹과 숭배가 영웅적위훈을 낳았다
세상에 로씨야사람들만큼 봇나무숲을 사랑하는 민족은 없을것이다.《씨비리의 수도》라고들 하는 노보씨비르스크시를 중심으로 오비강과 예니쎄이강의 류역에는 현대적인 공업지구들이 있지만 우리 고향인 뜨라브노예마을은 주소재지로부터도 360km나 떨어진 대자연속에 자리잡고있다. 무진장한 자연부원을 품고있는 씨비리대지에 바람이 불면 하얀 봇나무숲이 끝없이 설레인다.아버지가 그러하였고 나 역시 봇나무숲의 설레임소리를 들으며 자랐다.우리 고장에는 봇나무숲이 류다르게 소리쳐 설레일 때면 틀림없이 그 어떤 사변이 생긴다는 말이 전하여지고있다. 봄물이 오른 울창한 봇나무숲이 솨- 솨- 소리를 내며 술렁이던 31년전 5월 21일,위대한 20세기를 대표하는 걸출한 위인과 씨비리벽촌에 후반생을 묻은 평범한 전쟁로병과의 상봉은 그야말로 사변적인것이였다. 렬차에서 내리신 인류의 대성인 주위세계를 잊은듯 포옹은 계속되고있었다.얼마나 그리움이 사무쳤으면,얼마나 우정이 진실하고 뜨거웠으면… 주석님을 우러러 열광하던 역구내의 군중들은 그 광경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광대한 씨비리대지를 주름잡으며 특별렬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하였고 봇나무숲은 봄바람에 잎사귀들을 번쩍이며 설레이고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 집은 명절분위기였다.온 가족이 모인것은 물론 마을사람들도 찾아와 아버지를 축하해주며 밤깊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외국의 한 평범한 공민인 아버지를 수십년세월 잊지 않고계신 과묵한 성격의 아버지였으나 그날 밤에는 전설적영웅 아버지는 아버지의 추억은 조선해방전투가 있기 전 쏘만국경에서의 국경경비대시절에 보고 들은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였다. 당시 쏘만국경에는 쏘련 붉은군대와 일제의 관동군 대병력이 대치되여있었는데 조선빨찌산의 국제주의적투쟁은 할힌골격전시에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사하,대장강전투를 비롯하여 쏘련을 옹호하기 위해 조직진행된 조선빨찌산의 대소전투들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붉은군대 군인들만이 아니라 쏘련인민들속에서 큰 화제거리로 되였다고 하면서 할힌골사태와 관련하여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들에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기 위해 적배후교란작전명령서를 내려보내신 국경경비대원으로서 조선빨찌산부대들의 활동을 직접 목격하였던 아버지는 용감하고 자기희생적인 빨찌산들에게서 가장 인상적인것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반일성전의 진두에 선 애국자이실뿐아니라 바다같은 도량과 인덕,국제주의적의리를 지니신 장군,이것이 아버지가 숭배하게 된 젊으신 사람이 사람을 숭배한다는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가장 진실한 숭배는 존경하는 위대한분에게 완전히 매혹되였을 때이다. 1945년 8월 제1원동전선군 제25집단군 34우쑤리기계화련대의 소대장으로 조선인민혁명군과 함께 조선해방작전에 참가하였던 아버지가 해방직후 평양에서 위대한 주석님의 가까이에서 군무생활을 하게 된 행운의 나날들은 해방후 조선의 정치정세는 매우 복잡다단하였다고 한다.그 혼란된 정세를 바로잡으시며 당을 창건하시고 인민의 국가를 세우며 현대적인 정규무력을 건설하는 거창한 위업을 떠메고나가시는 진정 그날 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아버지는 우리들과 마을사람들에게 세월이 흘러가면 모든것이 기억에서 삭막해지기마련이다,10년도 아니고 근 40년,그러니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네번이나 반복된 긴 세월이다,후더운 인정,인간의 상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크고 뜨거운 심장을 지니신 노보씨비르스크에서 주에서 간부들이 찾아오고 신문기자들이 달려왔다.온 쏘련땅이 옛 붉은군대 소위 야.떼.노비첸꼬에 대하여 떠들썩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였다.위대한 의리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위대한 주석님의 초청으로 우리는 조선을 방문하였다.나는 어머니 마리야 노비첸꼬와 녀동생 라이싸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조선땅을 밟게 되였다. 평양국제비행장 국기게양대에서는 두 나라 기발이 나붓기고있었으며 우리를 환영하는 구호들이 드리워져있었다.한 씨비리가정을 마중하려고 나온 조선당과 국가의 간부들과 함께 수많은 환영군중이 꽃다발을 열정적으로 흔들고있었다.우리는 국빈대우를 받고있는것이였다. 조선방문의 나날 우리는 머나먼 지방현지지도의 길에서 우리들을 만나주신 주석님께서는 아버지를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나섰던 대담무쌍한 영웅전사라고 하시면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거듭 말씀하시고는 자신의 존함이 모셔진 금시계를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시였다. 나는 그때 금시계를 받으면서 노보씨비르스크박물관에 전시되여있는 은담배갑을 생각하였다. 《1946년 3월 1일 영웅 노비첸꼬에게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 일 성 》 이라는 주석님의 글발이 새겨진 그 은담배갑은 그이께서 1946년에 조국으로 돌아가는 아버지에게 주신 소중한 보물이다. 은담배갑과 금시계. 세월의 류수는 우정의 열도를 식게 하고 서로 만나지 않으면 있던 정도 없어진다고들 한다.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주석님의 의리는 수십년이라는 시공간속에서도 국경을 초월하여 더없이 숭고한 세계에로 이어지고있는것이였다. 1991년 7월 31일은 아버지가 여섯번째로 조선을 방문하여 위대한 주석님의 접견을 받은 뜻깊은 날이다.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주석님께서는 오랜 시간 아버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시였다. 그때까지 내가 아버지의 위훈에 대하여 알고있은것이란 1946년 3월 1일 평양역전광장에서 열린 경축대회때 그런데 주석님께서 자식들마저 몰랐던 아버지의 위훈의 구체적인 세부까지 손세를 써가며 들려주시는것이 아닌가. 그이께서 당시의 환경으로부터 호위성원들이 서있던 위치,수류탄을 쥐고 땅에 엎드리는 아버지의 모습이며 병원으로 실려갈 때의 상태에 대하여 어찌나 생동하게 이야기하시는지 오래전 일이 화폭으로 펼쳐졌다. 쉬익쉬익- 수류탄이 주석단에 날아오는 소리가 들릴 때에는 손에 땀을 쥐였고 그에 아랑곳없이 주석님께서 연설을 계속하시였다는 대목에서는 너무 긴장하여 심장이 졸아들었다.한손에 수류탄을 들고 달리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는 숨을 죽이였고 아버지가 요행 살아났다고 하실 때에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주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영웅다운 아버지의 모습을 찾게 되였다.지금껏 아버지를 얼마나 모르고 살아왔는가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순간 아버지는 참고참았던 뜨거운 눈물을 쏟고야말았다. 사실 오른팔을 잃고 제대되여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조선에서 겪은 일을 여러번 말하였다.그런데 누구도 곧이듣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거짓말이라고까지 하였다.자기들도 전쟁에 참가하여 싸워보았는데 세상에 수류탄을 배에 깔고 터뜨린 사람이 어떻게 살아날수 있는가고들 하였다.고향마을사람들조차 믿지 않자 아버지는 괴로와하였다.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다시는 그 일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초원에서 묵묵히 말을 몰아갔을뿐이였다. 어린시절 나의 망막에 비낀 아버지의 모습은 세계대전을 겪은 뒤 평화시기에 다른 나라에서 한팔을 잃은 보통의 전상자였다. 청춘을 내대고 피를 바쳐 영웅적위훈을 세웠으나 그것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아버지였다. 그런데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언제인가 사려깊은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그는 수류탄을 배에 대고 땅에 엎드렸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그가 책을 즐겨 읽었는데 그날도 읽던 책을 앞가슴에 넣었댔기때문에 다행히도 그 책이 수류탄파편을 막아주어 생명까지는 잃지 않았지만 손이 하나 잘리우고 살점이 여러군데 떨어져나갔습니다.그가 수류탄을 몸으로 막았기때문에 나도 무사하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무사하였습니다.》 세상에 기적이란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아버지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것이다. 제정로씨야시대에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말몰이군을 하였으며 10월혁명이후와 군대에서 제대된 후에도 뜨라브노예마을에서 땅을 다루어온 아버지는 위험한 순간에 발휘한 자기의 소행에 대해 자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숭고한 의리와 인덕의 체현자이신 해방후 새 조국건설과 조국해방전쟁을 승리에로 령도하시고 사회주의건설위업을 이끄시는 분망한 속에서도 우리 아버지를 잊지 않으시고 찾고찾으시다가 끝내는 감격적인 상봉을 마련하신 《노비첸꼬동지는 나의 생명을 구원한 사람들가운데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노비첸꼬동지는 조쏘친선의 꽃입니다.》 숭고한 의리의 세계가 무겁게 담겨져있는 말씀이였다. 아버지가 오늘까지도 로씨야와 조선인민들속에서 로조친선의 상징으로 사랑받고있는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다.이것은 조선의 위대한 수령분들의 숭고한 의리의 세계를 떠나 절대로 생각할수 없다. 조선에서 조국해방 40돐을 성대히 경축하던 30년전 8월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때 중앙경축보고대회시작을 앞두고 휴계실에서 주석님께서는 수많은 외국대표단 단장들과 악수를 나누시다가 아버지와는 뜨거운 포옹을 하시였다. 아버지는 수십년전 력사의 한순간에 위훈을 세웠지만 국제주의의 화원에 핀 쏘조친선의 꽃으로,로조친선의 상징으로 영생하고있는것이다. 력사의 70년을 말하게 되는 오늘날 세상을 둘러보면 지나온 인생길을 돌이켜보는 사람들의 얼굴표정은 서로 다르다. 나의 아버지는 조선의 령도자들로부터 조로친선의 상징으로 떠받들리우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로력영웅으로 되였다. 나와 우리 가족에게 조선은 제2의 조국으로 되였다. 우리는 만경대고향집에도 가보고 백두산에도 오르면서 사회주의조선의 력사와 정신에 대하여 알게 되였다.개선문과 주체사상탑,서해갑문을 비롯한 기념비적창조물들을 참관하면서 조선인민이 얼마나 위대한분들을 수령으로 모시고있는가를 깊이 새겨안았다.묘향산과 금강산 등 이름난 명승지들에서 즐거운 휴식의 한때도 보냈다.한팔이 없는 년로한 아버지가 젊은이들 못지 않게 오랜 시간 바다에서 해수욕을 하고 사람들은 야.떼.노비첸꼬를 로조친선의 꽃이라고 하는데 씨비리봇나무숲의 설레임소리는 그 참다운 의리의 노래도 담고있기에 그토록 장중하고 순결한것이리라.
이 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력영웅 야.떼.노비첸꼬가 살았다
뜨라브노예에 있는 우리 옛집의 기념현판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다. 《이 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력영웅 야꼬브 찌호노비치 노비첸꼬(1914.4.28-1994.12.8)가 살았다.》 극히 공식화된 단어로 이루어진 알림문장이지만 담고있는 력사적의미는 심오하다.두터운 얼음장밑을 흐르는 격류처럼 거기에는 웅심깊은 정과 열렬한 미래지향이 사품치고있다. 현판의 글발이 담고있는 의미는 노비첸꼬 그 이름우에 력사는 흙을 덮지 않을것이라는것이고 로씨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영원한 형제의 나라로 여기며 두 나라 인민사이에 존재하는 우정과 의리,국제주의는 변함없을것이라는것이다. 기념현판의 글은 아버지 야.떼.노비첸꼬에 대한 다함없는 경의이고 봇나무숲속의 이름없던 집을 후세가 잊지 않게 해주고있다. 이 현판은 아버지의 생일 100돐을 맞으며 노보씨비르스크주정부와 도볼렌스크구역에서 마련해준것이다.그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바이지만 나는 바로 이 현판에 시대의 변천속에서도 아버지를 잊지 않고있는 조선의 우애심이 후광으로 비껴있음을 주장하고싶다. 모스크바와 평양으로부터 아득히 떨어진 씨비리의 옛집에 붙여진 현판에는 력사와 전통을 귀중히 여기는 두 나라 인민들의 우의심이 깃들어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것은 아버지의 생일 100돐의식이 두 나라 정부의 깊은 관심속에 국제적인 행사로 진행되였기때문이다. 사실 우리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생일 100돐을 맞으면서 묘비를 다시 세우고 조선에서 2004년에 성의껏 만들어 보내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력영웅,국제주의전사 야.떼.노비첸꼬》라는 동판의 글을 묘비에 새기는것과 묘주변정리를 계획하고있은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조선의 최고령도자이신 조선로동당 제1비서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말씀에서 국제주의전사인 야.떼.노비첸꼬동지의 생일 100돐을 맞으며 유가족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보낸다고,위기일발의 순간에 자기의 목숨을 서슴없이 내대여 조선혁명의 수뇌부를 결사옹위한 노비첸꼬동지의 고결한 영웅적소행은 우리 인민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되여있다고 하시였다.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조선인민이 영원히 잊을수 없는 혁명전우이며 진정한 혁명동지인 노비첸꼬동지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하시면서 유가족들이 그의 정신을 대를 이어 빛내여나갈것과 부디 행복하고 건강할것을 축원하시였다. 아버지의 생일 100돐의식은 성대하게 진행되였다. 뜨라브노예마을에 또다시 세계의 눈길이 쏠리였다. 모스크바에서 조선대사가 왔고 노보씨비르스크주와 시,도볼렌스크구역의 고위관리들,신문,통신,TV방송기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식에 참가하였다. 주정부 국제관계국장은 이번 행사를 잘 보장할데 대한 련방정부의 지시가 있었다고 하면서 직접 행사 전 과정을 주관하였다. 아버지의 묘에 조선로동당 제1비서이신 조선로동당 제1비서이신 노보씨비르스크주와 도볼렌스크구역에서는 아버지의 생일 100돐행사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조선동지들이 새로 꾸려준 옛집에 기념현판을 붙이는 제막행사를 조직하고 도볼리나야중학교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명된 기념관을 꾸려주었다. 기념현판이 붙여진 옛집이 이제는 로조친선을 상징하는 박물관처럼 되였다. 이 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력영웅 야.떼.노비첸꼬가 살았다는 문구를 곱씹어 읽어보는 나의 생각은 깊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도 오래되였지만 이처럼 크나큰 영광이 계속 안겨지고있는것은 무엇에 기인되는것인가. 주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경애하는 뜨라브노예의 촌장은 조선인민의 위대한 령도자들에 의하여 노비첸꼬는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 명인으로 되였으며 우리 뜨라브노예마을은 유명한 고장으로 되였다고 자랑을 터놓았었다. 뿌리없는 나무에 대해 생각할수 없지만 억세고 깊은 뿌리가 있다 해도 태양의 줄기찬 빛발이 없고 가꾸는 손길이 끊어진다면 세월의 광풍속에서 거목이 될수 없다는것이 지난 70년이 남긴 귀중한 진실이다. 조선의 위대한 수령분들이 계시여 야.떼.노비첸꼬가 세운 위훈의 력사적의의는 날이 갈수록 커가고있다. 오늘날 조선인민은 노비첸꼬를 조선혁명의 수뇌부를 옹위하고 조선의 사회주의위업의 만년대계를 수호한 영웅으로 떠받들고있다. 력사의 증견자의 한사람인 나도 지난 70년을 굽어보며 제나름의 견해를 말하고싶다. 탁월한 령도자를 모실 때만이 나라가 강대해지고 그 민족이 국제주의적의무에 충실할수 있다! 림종을 앞둔 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 젊은 시절 우리가 주소재지에 있는 병원에서 아버지의 령구를 앞세우고 고향마을에 도착했을 때였다.뜻밖에도 모스크바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사관 일군들과 여러 조선동지들이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한 일군이 우리에게 위대한 령도자 고인의 령구앞에 화환이 놓여졌다.댕기에는 이런 글이 씌여져있었다. 《국제주의전사 고 야.떼.노비첸꼬동지를 추모하여 김 정 일 》 뜨라브노예마을이 생겨 처음으로 되는 요란한 장례행사였다. 아버지가 돌아간 이후에도 우리 노비첸꼬일가를 잊지 않으시고 돌봐주시던 그때 우리는 조선의 최고령도자이신 경애하는 《노보씨비르스크 야꼬브 찌호노비치 노비첸꼬동지의 유가족들에게 나는 조선인민의 친근한 벗이며 국제주의전사인 야꼬브 찌호노비치 노비첸꼬동지의 부인 마리야 예브메노브나 노비첸꼬동지가 애석하게 사망하였다는 슬픈 소식에 접하여 고인의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김 정 은 주체102(2013)년 3월 7일 평 양 》 우리들이 받은 충격은 너무도 컸다.어머니의 장례를 조용히 치르려고 하던 우리들은 민족최대의 국상을 당한 슬픔이 아직 가셔지지 않은 조선에서 위문이 올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하였었다. 그런데 진정 씨비리대지처럼 드넓고 봇나무숲처럼 영원한 우정을 끊임없이 주시는 조선의 위대한 수령분들이시였다. 우리들은 경애하는 《존경하는 최근년간에 저희들에게 있어서 슬픈 일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위대한 수령 위대한 령도자 그런데 이번에는 저희들과 조선동지들에게 그렇게 선량하고 부드럽고 다심하였던 어머니 마리야 예브메노브나 노비첸꼬마저 떠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저희 가정은 마치 하나의 큰 국제적인 가정처럼 되였습니다. 저희들은 이 기회에 로씨야인민과 조선인민사이의 국제주의의 력사와 전통의 계승은 바로 조선의 위대한 령도자들의 숭고한 의리심에 기초하고있는것이다. 우리 노비첸꼬일가에 대한 조선령도자들의 보살피심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극진해졌다. 경애하는 로조친선의 력사와 전통은 또 한분의 절세의 위인이신 조선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는 보석화로 형상된 붉은군대 소위 야.떼.노비첸꼬의 초상도 있다.보석처럼 변치 않고 아름다울 로조친선의 력사와 앞날이 여기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은 역시 국제주의적의무에 충실하고 붉은기를 지킬줄 알며 정의를 위해 피와 땀을 바친 사람들을 영원히 추억해줄줄 아는 나라이다. 국제주의적의리를 론하는 나라는 많다.하지만 나는 진정한 국제주의적의리는 바로 조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국제주의는 세계의 평화와 량심,정의를 위한 원칙에 투철하고 그 어떤 양보와 사소한 타협도 모르는 국제주의이다. 수령과 당,군대와 인민이 애국주의로 일심단결된 조선은 련합된 제국주의가 떼지어 덤벼들어도 추호의 양보와 타협이 없이 언제나 강타만을 안겨 나라의 자주권을 지켜내는것으로 세계의 평화수호에 기여하고있으며 그것으로 하여 조선의 국제주의는 자기의 발언권과 영향력을 높여가고있다. 조선의 국제주의는 원쑤와 불의앞에서는 비타협적이지만 형제들과 벗에 대해서는 그릇이 크고 아량있으며 포섭적이다. 지구상에 굽이친 70년은 조선의 국제주의에 진정한 국제주의의 표본이 있고 조선의 위대한 령도자들이 이끄는 이 국제주의에 온 세계가 따라배울 모범이 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나는 아버지의 생일 100돐행사때 마을학교학생들이 아버지가 살던 집앞에서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신 로씨야의 새 세대들도 국제주의의 화원에 피는 꽃망울이 되여 로조친선의 력사와 전통을 변함없이 이어가겠다고 하는것이다.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국제주의의 고귀한 모범을 인류에게 재보로 남기신 나는 두 나라 수뇌분들과 군대,인민들의 진할줄 모르는 노력속에 로조친선의 력사와 전통이 대를 이어 영원히 흐를것이라는것을 확신한다. 정깊은 나라 조선에 행복은 영원히 길고 번영과 영광만이 깃들기를 축원한다. (필자는 국제주의전사 야.떼.노비첸꼬의 아들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