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4(2015)년 10월 1일 로동신문

 

[정세론해설]

덮어버릴수 없는 극악한 조선민족말살책동

 

일제가 우리 나라를 비법적으로 강점하고 악독한 식민지《총독정치》를 실시한 때로부터 어언 105년세월이 흘렀다.흔히 세월이 흐르면 모든것이 삭막해지고 잊혀지기마련이다.그러나 한세기가 넘는 오늘까지도 일본은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아픈 상처를 남긴 백년숙적으로 깊이 새겨져있다.우리 인민은 결코 일제에 의해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강요당한 수난의 력사를 잊을수 없다.

1910년 8월 강도적방법으로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한 일제는 《조선통감부》를 식민지파쑈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로 간판을 바꾸고 그해 10월 1일부터 포악무도한 《총독정치》를 실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인민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억압하는 폭압기구였을뿐만아니라 군사적강권에 의거하여 조선의 기본경제명맥을 지배하기 위한 강도적인 경제적략탈기구였으며 민족교육과 민족문화를 억압말살하기 위한 통치기구였다.

일제는 전조선을 력사상 류례없는 파쑈적폭압과 공포정치로 뒤덮고 우리 인민을 야수적으로 가혹하게 탄압,학살하였다.

우리 인민의 반일의식을 말살하고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유지할 목적으로 헌병경찰제도를 조작해낸 일제는 이에 기초하여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일제의 무단통치체제는 세계력사가 일찌기 알지 못했던 가혹한 식민지파쑈폭압통치체제였다.

일제는 우리 나라의 가는 곳마다에 군대,헌병,경찰을 비롯한 각종 폭압기구를 수많이 만들어놓고 극악한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초대《조선총독》이였던 데라우찌는 《조선사람은 일본의 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라고 떠벌이면서 우리 인민을 닥치는대로 체포,투옥하고 학살하도록 하였다.1918년에 일제에 의한 조선인검거건수가 1912년에 비해 10배이상 늘어난 사실 하나만 놓고도 당시 일제가 우리 인민에 대한 탄압,학살만행에 얼마나 미쳐날뛰였는가 하는것을 잘 알수 있다.이 시기 일제는 헌병 및 경찰기구의 우두머리들에게 법적수속이나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조선사람들을 마음대로 처형할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하였다.

일제는 우리 나라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의 자유의 마지막흔적까지도 허용하지 않았다.우리 인민의 모든것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이전부터 실시해오던 《보안법》,《출판법》 등 각종 악법들의 효력을 계속 유지하는 한편 《집회취체령》을 비롯한 새로운 악법들을 련이어 조작하였다.일제의 중세기적이며 야만적인 폭압정책의 강행은 우리 인민을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식민지노예로 만들려는 잔악무도한 범죄행위였다.실로 일제는 전조선을 무시무시한 파쑈적폭압과 공포정치의 살벌한 분위기로 뒤덮었다.

우리 인민은 일제의 무단통치를 반대하는 투쟁에 떨쳐나섰다.1919년 3월 1일 일제의 무단통치로 하여 쌓이고쌓인 우리 인민의 민족적울분과 사무친 원한이 전인민적봉기로 폭발하였다.애국적인민봉기는 삽시에 온 나라 방방곡곡에 퍼져갔으며 국내뿐아니라 조선사람이 살고있는 해외의 많은 곳에서 일어났다.

이에 겁을 먹은 일제는 종래의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는 놀음을 벌려놓았다.1919년 8월 일제는 《조선총독부 관제개혁에 관한 조서》라는것을 발표하였다.당시 일제는 《관제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종래의 《총독》을 현역무관만이 하게 되여있던것을 문관도 할수 있게 만들었다.또한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개편하였으며 도장관을 도지사로 바꾸고 지방경찰권을 그의 권한하에 넘기였다.이렇게 함으로써 일제는 마치도 《총독정치》에서 그 무슨 변화라도 일어나는것처럼 떠들었다.그러나 그것은 저들의 악독한 식민지《총독정치》의 범죄적목적을 가리우기 위한 한갖 기만술책에 불과하였다.일제가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개편한 후 경찰기관은 종전보다 줄어든것이 아니라 훨씬 더 늘어났다.일제는 종래의 로골적인 헌병,경찰대신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비밀경찰을 대폭 늘이는것과 함께 헌병보조원을 수많이 두고 무고한 인민들을 닥치는대로 검거,투옥,학살하였다.

일제는 방대한 규모로 확장된 경찰폭압기구에 의거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야수적으로 탄압하는 한편 경제적략탈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1920년대 우리 나라에 대한 일제의 경제적략탈에서 기본은 농촌수탈이였으며 그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룬것이 《산미증식계획》의 간판밑에 감행된 쌀의 대량적략탈이였다.《산미증식계획》은 조선의 비옥한 토지에서 거두어들인 쌀을 대량적으로 일본에 실어갈것을 내용으로 한 략탈계획이였다.이 계획에 따라 일제는 1927년부터 1931년까지의 기간에만도 우리 나라에서 660여만석의 쌀을 략탈해갔다.일제의 악착한 쌀략탈책동으로 조선사람들은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다 못해 정든 고향을 떠나 류랑의 길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는 《총독정치》시기 우리 나라에서 악독한 식민지노예교육정책과 민족문화말살정책을 실시하여 조선인민의 민족자주의식과 투쟁정신을 거세하며 우리 인민을 무지하고 미개한 인민으로 만들려 하였다.

일제는 우리 나라에서의 식민지노예교육을 식민지통치의 근본문제의 하나로 내세웠다.일제가 추구한 식민지노예교육정책의 목적은 우리 인민의 민족교육을 말살하고 우리 인민을 《우민화》하여 제놈들의 식민지통치정책에 복종시키며 나아가서 《일본화》하려는데 있었다.

야만적인 식민지통치시기 일제는 우리 인민에게서 고유한 민족성,민족적자각과 긍지감을 송두리채 빼앗아내고 그대신 《일본정신》을 불어넣어 우리 인민을 《황국신민화》하기 위해 악랄하게 책동하였다.놈들은 《…조선사람은 먼저 자연에 돌아가 새롭게 세상에 나타나며 새로 발족하는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되며 따라서 모든 〈낡은 사상〉,모든 〈나쁜 습성〉을 타파하고…일본식으로 동화되려는 큰 각오가 있어야 한다.》라고 떠벌이면서 우리 인민에게 악독한 식민지노예교육정책,민족교육말살정책을 강요하였다.

우리 인민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우리 인민에게 영원히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강요하려고 한 일제의 책동은 민족문화말살정책에서도 나타났다.우리 나라의 민족문화유산을 파괴략탈한 일제의 죄행을 꼽자면 끝이 없다.

력사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수세기전부터 우리 나라를 침략해온 일본침략자들은 20세기 초엽 비법적으로 우리 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고 우리 인민에게 이루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들씌운 범죄자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그것을 인정하고 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또 자기의 죄과에 대해 책임지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배상하여야 한다.이것은 법률적으로 보나 도덕적으로 보나 너무나도 응당한것이다.나라들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때문에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는것은 하나의 국제관례로 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반동들은 죄악에 찬 과거침략범죄에 대해 성근하게 인정하고 반성할 대신 오히려 엄연한 력사적사실들을 부인하고 미화분식하면서 그 책임에서 벗어나보려고 모지름을 쓰고있다.

현 집권자가 《태평양전쟁패전 70년 담화》에서 침략력사에 대한 성근한 인정과 사죄의 내용을 담지 않고 요리조리 회피하면서 말장난질을 한 사실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일본반동들은 《일미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고 《안전보장관련법》을 제정하는 등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을 이루어보려고 어리석게 놀아대고있다.

군국주의부활에 환장이 되여 미쳐날뛰고있는 일본반동들의 움직임은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의 경계심을 자아내고있다.

일본이 저들의 과거죄악에 대한 청산을 한사코 회피하며 침략력사를 외곡하고 군국주의재침의 길로 나간다면 70년전에 당한 참패보다 몇갑절 더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될것이다.

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