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4(2015)년 12월 13일 로동신문

 

민족단합의 새 력사를 펼친 위대한 광폭정치

 

12월의 날과 날들이 하루하루 흐르고있는 지금 온 겨레의 가슴마다에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에 대한 다함없는 그리움이 대하마냥 굽이치고있다.

열렬한 민족애와 동포애,바다와 같이 넓은 도량을 지니시고 온 겨레를 차별없이 한품에 안아주시던 민족의 위대한 태양 김정일동지,그이의 한없이 숭고한 인덕정치,광폭정치가 있어 조국통일의 주체적력량이 튼튼히 마련되고 6.15통일시대와 같은 벅찬 시대가 열리게 되였으며 우리 겨레는 민족대단결의 기치높이 자주통일대진군을 힘차게 다그쳐올수 있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민족대단결을 위한 우리 당의 로선과 정책은 애국,애족,애민의 광폭정치이다.》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는 통일애국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사상과 리념,정견과 신앙,계급과 계층의 차이를 초월하여 따뜻한 사랑의 품에 안아 조국과 민족을 위한 참다운 애국의 길에 내세워주고 그들의 삶을 빛내여주시였다.장군님의 품이야말로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며 조국통일의 길에 나서는 사람이라면 과거불문의 원칙에서 차별없이 따뜻이 대해주시고 그들을 손잡아 민족의 단합과 자주통일의 길로 이끌어주신 위대한 태양의 품이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다심한 사랑과 은정속에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에 생의 자취를 남긴 사람들가운데는 남조선의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였던 정주영선생도 있다.

일찌기 《기업으로 애국한다.》는 나름대로의 뜻을 품고 자기 식의 길을 걸어온 그가 인생말년에 《참다운 애국은 통일》이라는 확신을 안고 극적인 인생전환을 하게 된것은 공화국북반부를 방문한 때부터였다.그립던 고향에도 가보고 추억이 깃든 금강산도 돌아보면서 그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분렬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정주영선생은 위대한 장군님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자》에 접하게 되였다.

민족적량심을 가지고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지어 남조선의 집권상층이나 대자본가,군장성들과도 단합할것이라는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뜻을 로작을 통해 받아안은 그는 격동을 금할수 없었다.조국통일을 위한 그이의 한없이 넓은 도량과 포옹력은 정주영선생에게 분렬된 우리 조국에서 참된 애국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뚜렷이 새겨주었다.드디여 그의 가슴속에서는 애국의 불씨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제라도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번영에 헌신하는 애국적인 기업가가 되자.)

이렇게 결심한 그는 자기의 기업전략을 우리 공화국과의 협력교류로 내세우고 그 실현을 위해 힘껏 노력하였다.

대결광신자들의 악랄한 비방과 방해책동을 물리치며 결단코 통일애국의 길에 나선 그의 마음속진정을 헤아려주신분은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주체87(1998)년 10월 30일 자정이 가까와오는 깊은 밤 그이께서는 선군혁명령도의 길을 이어가시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공화국북반부를 방문하고있던 정주영선생을 만나주시였다.장군님께서는 그를 《명예회장선생》으로 정답게 불러주시며 체류기간 불편한 점들은 없었는가고,선생이 다리를 불편하게 쓰는것 같은데 어떻게 되여 그렇게 되였는가고 따뜻이 물어도 주시였다.

정주영선생은 여직껏 그 누구에게서 받아본적 없는 따뜻한 인정에 가슴이 후더워짐을 금할수 없었다.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겸허하게도 정주영선생을 가운데 세우고 영광의 기념사진까지 찍어주시였으며 우리 민족이 잘살게 하자는 사람들과는 그 누구와도 언제나 손잡고나갈것이라고 하시며 북남사이의 협력교류와 관련한 그의 결심을 적극 지지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교시를 자자구구 새길수록 정주영선생의 눈앞에는 통일의 아침이 보이는것만 같았고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싶은 열정이 샘솟았다.그는 위대한 장군님의 한량없는 믿음과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금강산관광개발을 다그쳐 동해의 푸른 물에 첫 관광선을 띄움으로써 북남경제협력의 물고를 터놓았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력사적인 6.15공동선언발표후 공화국북반부를 방문한 정주영선생을 또다시 만나주시였으며 건강한 몸으로 오래오래 앉아있으라고 하시며 은정깊은 사랑도 베풀어주시였다.혈육의 정을 초월하는 이처럼 뜨거운 사랑과 믿음을 받아안은 정주영선생이였기에 그는 반통일분자들의 압력과 회유에도 굴함없이 통일애국의 길을 꿋꿋이 걸을수 있었다.

주체90(2001)년 3월 그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시며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길에 남긴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주시였고 민족분렬사에 류례없는 조의대표단과 함께 자신의 명의로 된 조전과 화환까지 보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보통강기슭에 그의 애국심이 깃든 체육관이 일떠섰을 때에는 그것을 《류경정주영체육관》으로 명명하도록 하시여 정주영선생이 민족을 위한 길에서 영생하는 삶을 누리도록 해주시였다.그에게 베풀어진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고결한 동포애적의리는 영원한 전설로 오늘도 겨레의 기억속에서 지워지지 않고있다.

어찌 정주영선생뿐이랴.어버이수령님의 뜨거운 민족애와 위인적풍모에 매혹되여 그이의 넓은 품에 안긴 재북인사들도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위한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뜻에 떠받들려 영생의 삶을 누리고있다.

민족의 운명을 지키고 사회주의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선군령도의 바쁘신 길을 이어가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느해 이미 세상을 떠나간 재북인사들의 묘소를 잘 꾸려주며 천연화강석묘비에 그들의 생전의 모습을 돌사진으로 형상하여 새기도록 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재북인사들로 말하면 대부분이 해방직후 남조선정계의 요직에 있던 인물들로서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사상과 뜻을 받들어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온 사람들이였다.어버이수령님의 자애로운 사랑의 품에 안기여 값높은 삶을 누려온 재북인사들,그들이 생을 마친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하지만 수령님의 숭고한 인덕을 그대로 체현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다심하신 친어버이의 사랑으로 재북인사가족들의 생활을 세심히 돌봐주시였다.그러시고도 못다 주신 사랑이 있으신듯 재북인사들의 묘소와 묘비,거기에 새길 사진문제에까지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으니 정녕 장군님의 숭고한 인덕,따사로운 사랑은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는 위대한것이다.애국의 길에 바쳐진 삶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고 빛내여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과 다심하고 은정어린 조치에 의하여 평양시교외의 아늑하고 풍치수려한 곳에 60여명의 재북인사들의 묘소가 잘 꾸려지고 천연화강석비에는 그들의 생전의 모습이 돌사진으로 새겨지게 되였다.

해내외의 수많은 각계각층 동포들을 민족대단합의 기치아래 묶어세우신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인덕정치,광폭정치는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에 의해 빛나게 계승되고있다.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조국통일에 대한 숭고한 사명감을 안으시고 온 겨레를 단합과 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애국투쟁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시는 그이의 탁월한 령도가 있어 조국통일의 주체적력량은 날로 더욱 강화되고있으며 자주통일의 찬연한 아침은 반드시 밝아오고야말것이다.

본사기자 리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