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2월 15일 로동신문
[정세론해설] 절대로 부정할수 없는 성노예범죄의 강제성
과거 일제가 우리 인민에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들가운데는 20만명에 달하는 조선녀성들을 일본군성노예로 만들고 전쟁터에 끌고다니며 그들의 인권과 존엄,생명까지 무참히 앗아간 특대형국가범죄도 기록되여있다.그 피비린내나는 과거범죄사를 어떻게 하나 덮어버리려고 책동해온 일본은 지난해말 남조선괴뢰당국과 일본군성노예문제와 관련한 협상을 벌려놓고 국제법적요구와 절차에 따르는 공식문서도 남기지 않은채 그 무슨 《합의》라는것을 황급히 발표하고서는 그것을 빗대고 저들의 과거범죄사를 력사의 흑막속에 매장해버리려고 어리석게 획책하고있다. 일본반동들의 이런 철면피한 책동에서 가장 엄중시하지 않을수 없는것은 일본군성노예범죄의 강제성을 한사코 부인하고있는것이다.얼마전에도 일본당국은 성노예범죄와 관련하여 유엔의 한 위원회가 제기한 질문에 답변하면서 《전면적인 진상조사》결과 그 어디에서도 《군과 정부기관에 의한 〈위안부〉의 강제련행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우기였다.그야말로 간특하고 교활하면서도 파렴치한 섬나라족속들의 본성을 다시금 드러낸 망동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일본군성노예범죄의 강제성은 우선 그것이 피해당사자들의 자발적의사가 아니라 랍치,유괴,사기와 협잡에 의한 강제징발 등의 강압적방법으로 감행된것을 통해 잘 알수 있다. 일본군성노예피해자들은 성노예《모집》의 대부분이 군경에 의한 강제랍치와 유괴였다고 증언하였다.김군숙녀성은 서울시내에서 학교에 다니던 1938년 9월 어느날 동창생들과 공원에 나갔다가 일제군경들의 《처녀사냥》에 걸려 짐짝처럼 유개화차에 실린 후 100여명의 처녀들과 함께 중국 심양지방에 끌려가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하였다.황선옥녀성도 17살 되던 1941년 가을 중국 장춘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상점에 아이보개로 들어갔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에 의해 7명의 다른 처녀들과 함께 자동차에 실려 일본군병영에 끌려가 성노예로 되였다.이러한 실례는 일본군성노예피해자진술에서 수없이 찾아볼수 있다. 일제가 조선녀성들을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준다.》,《돈을 벌수 있다.》는 등의 감언리설로 유인하여 성노예로 끌어간것도 성노예범죄의 강제성을 폭로해주고있다. 윤경애녀성은 일본인들이 자기를 비롯한 처녀들에게 좋은 일자리가 차례지게 되였다,잘 먹고 잘 입고 돈을 많이 버는 곳에 소개해주겠다고 회유하면서 《로동안내소》라는데 끌고갔지만 자기들을 호송하러 온것은 일제경찰들이였고 그후 부산에서 7척의 군함에 수천명의 처녀들과 함께 승선하여 싱가포르에 도착할 때까지만 하여도 일본본토에서 간호부나 시키려는가 하고 천진하게 생각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노예범죄의 강제성을 한사코 부인하는 일본반동들의 경악스러운 망동에 대해 증언자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면서 《설사 천만금을 준다 한들 청춘과 존엄을 빼앗기고 짐승만도 못한 성노예로 살겠다고 할 녀성이 어디에 있겠는가.》,《조선녀성들중 일생을 망치는 그러한 곳에 제발로 찾아갈 사람이 누구이며 그러한 곳에 사랑하는 딸자식을 보낼 부모들이 이 세상 그 어디에 있단 말인가.》고 절규하였다. 일본군성노예범죄의 강제성은 또한 성노예들에 대한 일제침략군의 포악하고 야만적인 인권유린행위가 항시적으로 동반된데서 뚜렷이 립증된다. 로현화녀성은 당시 《위안소》에 끌려간 첫날 저녁 한 일본군장교가 《이제부터 일본군장교들에게 절대복종하라.조선녀자들은 우리 말을 듣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고 지껄이면서 항거하는 자기를 사정없이 구타하고 수욕을 채웠다는데 대하여 증언하였다.10대에 일본군성노예로 끌려가 10년세월 고통을 강요당한 원룡화녀성은 《정말 일제는 상상할수 없이 우리들을 학대하였고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개처럼 취급당하였다.》고 하면서 함께 끌려갔던 나어린 처녀들이 매맞아죽고 병들어죽었다고 증언하였다. 리현숙녀성은 싱가포르의 어느 한 곳에 있던 《위안소》에서의 지옥같은 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폭로하였다. 《일본군의 행위로 극도의 정신적 및 육체적고통을 느낀 처녀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도망치거나 필사적으로 반항하였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일제침략군은 성노예로 끌려간 조선녀성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초보적인 인격과 존엄도 허용하지 않았다.조선녀성들은 속옷도 없이 일본옷을 입고있어야 하였고 조선사람의 이름대신 《가네꼬》,《하루꼬》,《도끼꼬》 등 일본식이름으로 불리우든가 아니면 《위안소》의 방번호로 불리우며 참을수 없는 치욕을 강요당하였다.그에 항거하는 경우 목숨까지 빼앗겨야 했다.김영실녀성은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하던 어느날 《〈도끼꼬〉라고 불리우던 소녀가 조선말을 하자 장교는 우리들을 모아놓고 그의 목을 칼로 내리쳐 떨구었다.》고 증언하였다. 일본군성노예범죄는 철두철미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무참히 유린말살한 특대형범죄로서 그 강제성은 론의할 여지조차 없다. 일본반동들이 성노예범죄의 진상을 가리우고 그것을 영원히 력사의 흑막속에 묻어버리려고 발광해도 소용이 없다. 일본당국은 지난날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강제적인 성노예범죄의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수 없으며 그 대가를 반드시 천백배로 치르게 될것이다. 위광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