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1월 26일 로동신문
인민들속에서 《인민들이 조밥을 먹을 때에는 우리도 조밥을 먹어야 합니다》 강덕수
인민을 위해 일한다는 정신이 희박하고서는 진정으로 인민을 사랑할수 없으며 인민과 고락을 같이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아파하는 점,즐겨하는 일을 알아낼수 없습니다. 인민의 충복이 되려면 우선 인민들속에 들어가 그들과 고락을 같이 나누면서 인민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할줄 알아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 1951년 봄. 당시 나는 어버이수령님을 직접 몸가까이 모시고 사업하고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전쟁승리를 위하여 불면불휴의 로고를 바쳐오시면서도 항상 자신의 한몸보다 먼저 인민을 생각하시며 인민을 위함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으시였다. 어느날 저녁이였다.어버이수령님께서 우리들을 가까이 부르시더니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지금 인민들은 미국놈들과 전쟁을 하느라고 어려운 경제형편을 극복해나가고있소. 앞으로 우리의 생활을 더욱 검박하게 조직하고 모든 부문에서 더 절약하며 식생활도 보다 검소하게 하여야겠소.남새도 우리자체로 심어먹고 농민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어야 하겠소. 계속하시여 앞으로의 생활을 어떻게 조직할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하나하나 가르쳐주시고나서 어버이수령님의 식사를 념려하는 우리들의 심정을 헤아리시고 일없다고 하시면서 《인민들이 조밥을 먹을 때에는 우리도 조밥을 먹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우리들은 항상 인민들과 고락을 같이하시려는 어버이수령님의 높은 뜻을 가슴깊이 느끼며 머리를 숙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몸소 추리나무에 농약도 뿌리고 남새밭을 가꾸시는 일을 거의 일과처럼 하시였다. 전날 밤에 아무리 늦게 주무셨다 하더라도 그이께서는 언제나와 같이 아침 일찌기 일어나시여 산보와 독서를 끝내시고는 포전으로 나가군 하시였다. 1951년 3월 25일 아침이였다. 그날도 우리는 어버이수령님을 따라 밭에 나가 일을 하고있었다. 한참 일을 하고있을 때였다. 《덕수동무,좀 쉬였다 하지 않겠소?》 어버이수령님의 말씀에 나는 그이의 가까이에 삽자루를 깔고앉았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나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시였다. 《덕수동무는 일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소?》 나는 이때 딱히 생각한것이 없었으므로 얼른 대답을 못했다.머뭇거리고있는 나의 심정을 알아보신듯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나는 일제놈들과 싸우던 때의 일을 생각했소. 장백현에는 우리 유격대원들의 밀영이 많았소.거기서 우리들은 매일과 같이 적과 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농사를 지었소.곤난한 조건이 많은데다가 땅도 매우 척박했소. 그러나 우리 유격대원들은 적과 싸우는 기세로 전투의 여가를 타서 땅을 갈아엎고 거기에 남새도 심고 감자농사도 지어 식량을 보태였소.…그때에 비하면 지금이야 조건이 얼마나 좋소. 그이께서는 검은 흙을 한웅큼 쥐시고 이 땅이 얼마나 좋은가.여기에는 아무걸 심어도 다 잘될거요.이 좋은 땅을 묵여서는 안되오. 남자대장부들만 사는 이 골안에서 녀성이 절대다수인 농민들에게 남새까지 부담시켜서야 되겠소?농민들의 부담을 다소나마 덜어줘야 하오. 앞으로 이 골안에서는 남새를 자체로 해결하여 농민들에게서 남새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하겠소. 땅이 녹았으니 얼른 씨를 뿌려야 가물도 덜 가는 법이요.자,그럼 또 일을 시작해볼가라고 말씀하시며 삽을 들고 일어서시였다. 우리들도 그이를 따라 모두 일어섰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삽을 힘있게 내려디디시며 땅을 깊숙이 뚜져놓군 하시였다. 당과 국가의 전반사업을 돌보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로동을 가장 신성하고 영예로운 일로 여기시며 몸소 삽을 쥐시고 일을 하시는 그이의 이러한 모습을 우러르는 나의 가슴은 무한히 뜨거워지는것이였다. 어버이수령님과 함께 우리들이 가꾼 약 500평의 밭에는 시금치,오이,배추,마늘,파,가지,호박,도마도,부루 등 여러가지 남새들이 철을 따라 싱싱하게 자랐다. 오이를 따던 어느날이였다. 땀을 흘린 보람이 얼마나 큰가,이렇게 농사가 잘되여 잘 먹으니 좋고,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니 좋고,몸이 건강해지니 좋고,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팔뚝만큼씩 하게 자란 오이를 한아름 따안으시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이해에도 또 이듬해에도 파 한뿌리,고추 한꼬투리 공급받지 않고 모두 자체로 해결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린근의 인민군부대들은 물론 적지 않은 부대들에서도 부식물을 자체로 해결하기 위하여 일떠섰다. 1952년 5월 10일,나는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대동군 동암면 원화리(지금의 평원군 원화리)에 나간적이 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 부락형편을 이미전부터 잘 알고계시였다. 1952년 3월에 있은 대동군당위원회 전원회의때 그이께서는 농민들과 담화를 하신 일이 있었는데 그때 원화리녀맹위원장도 참가하였었다. 그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녀맹위원장으로부터 그 부락의 형편을 일일이 료해하시였던것이다. 70호가량 되는 이 부락은 일제시기에 모두 소작농이였다.광복후 토지개혁에 의하여 생활형편이 어느 정도 펴이기는 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청장년들이 대다수 군대에 탄원하여나가게 되였으며 더우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감행된 적들의 야수적만행과 략탈로 말미암아 영농토대는 매우 빈약하였었다. 우리가 마을에 도착하였을 때는 새별이 반짝이는 이른새벽이였다. 나는 부락에 도착하자마자 어버이수령님께서 들어가실 방을 마련하려고 리녀맹위원장의 집을 찾아갔다. 내가 그 집 뜰안으로 막 들어가려는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덕수동무,집주인을 깨우지 마오.단잠을 자는 사람을 깨우면 얼마나 곤해하겠소.이제 얼마후이면 날이 밝겠으니 주인이 일어날 때까지 우리는 마당에 앉아 쉬기요라고 하시며 나를 만류하시는것이였다. 《여기서야 어떻게.》 괜찮소.마당에 앉아 이렇게 아침공기를 마시는것이 더욱 좋소.…짚단이나 얻어오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웃으시며 말씀하시였다. 나는 오도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만 있었다. 그이께서는 주변에 있는 짚단우에 앉으시며 우리들에게 모두 와앉으라고 하시였다. 아직 싸늘한 새벽바람이 키낮은 수수바자를 넘어 마당으로 불어들었다. 나는 짚단우에 앉아 이렇게 생각했다. (잠자는 인민들을 깨울가 념려하시여 북만의 엄혹한 야밤을 한데서 새우실 때에도 곤히 잠든 대원들을 한시간이라도 더 재우기 위하여 이 불무지 저 불무지 돌아보시면서 꺼져가는 불무지에 나무를 지펴주셨다는 어둠은 서서히 가셔져갔다.이윽고 집주인이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눈을 비비며 마당에 내려선 리녀맹위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걸어오시는 어버이수령님을 알아보고 움씰 놀라며 멈춰섰다. 《아니,수상님께서…》 그는 너무나 뜻밖의 일이여서 말끝을 맺지 못한채 서있었다. 《집안식구들은 다 무사하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다정하게 물으시고나서 밭머리에 나가 이야기하자고 하시며 앞서 발걸음을 옮기시였다.우리들도 그이를 따라 밭으로 나갔다. 아침해살이 산마루에 퍼지고 들판에서는 구수한 흙냄새가 풍기고있었다. 소잔등에 위장을 한 농민들도 밭갈이할 준비를 갖추고 들판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넓은 밭뚝에 빼곡이 들어선 뽕나무의 아지들을 젖히면서 밭가운데로 들어가 자리를 잡으시였다. 녀맹위원장은 어느새 준비하였던지 풀밭에 그냥 앉으시려는 어버이수령님께 깔개를 권해드렸다. 《괜찮소.풀밭에 그냥 앉는것이 더욱 편하고 좋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풀밭에 편히 앉으시더니 밭갈이형편은 어떠하며 파종은 얼마나 진행했는가,씨앗은 어떤것을 준비했는가,부족한 로력과 축력은 어떻게 해결하고있는가에 대하여 일일이 물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농사형편을 일일이 료해하시고나서 나를 부르시더니 같이 온 군인들을 모두 모이게 하라고 하시였다. 우리들이 그이앞에 모여서자 그이께서는 《농촌에 나왔는데 우리도 오늘은 농민들을 도와 파종을 하는것이 어떻소?》하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좋습니다.》 우리들의 기운찬 대답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만족해하시면서 몸소 일차비를 하시는것이였다.웃옷을 벗은 군인들이 다시 그이의 둘레에 모였다. 파종을 하는것만큼 더욱 정성담아 일을 해야겠소.씨앗을 지나치게 배게 뿌리거나 드물게 뿌려서는 안되오.더우기 귀중한 씨앗을 땅에 흘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오.그리고 홈을 좀 깊이 째는것이 좋소.그래야 가물도 이길수 있고 씨앗도 잘 붙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손수 씨앗도 뿌리시고 삼태기를 들고 퇴비를 주는 방법까지 우리들에게 세세히 가르쳐주시였다. 《이제는 할만 하오?》 《할수 있습니다.》 《그럼 일을 시작하기요.》 우리들은 일제히 밭으로 헤쳐갔다. 적기들은 우리의 상공으로 계속 돌아치고있었다. 그러나 이런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계속 우리와 함께 일을 하시였으며 밭을 돌아보시기도 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과 함께 밭일을 하게 된 이곳 농민들의 기쁨은 한량없었다. 《이런 일이 어디 있겠수.글쎄 수상님께서 우리 마을에까지 오시여 손수 씨를 뿌리시고 두엄을 놓으시다니…늙기는 했으나 나도 일을 해야 되겠수다. 우리를 잘살게 하자고 수상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라고 말하며 늙은이들도 떨쳐나와 두엄도 나르고 종자를 묻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모두가 새 힘이 솟는듯 걸싸게 일손을 다그쳤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농민들과 함께 일을 하시면서 그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농사를 잘 지어야 미제강도놈들을 때려부시고 전쟁에서 이길수 있다고 차근차근 말씀하시였다. 《오늘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하는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식량이 많아야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으며 령락된 인민생활을 안정시킬수 있습니다.그렇기때문에 우리 당에서는 〈식량을 위한 투쟁은 조국을 위한 투쟁이며 전선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한 투쟁이다.〉라는 구호를 제기하고 식량증산을 위한 투쟁에 농민대중을 힘있게 조직동원하고있습니다. … 지난날에는 농민들이 뻐꾹새가 울기 시작해야 봄밭갈이를 하였는데 이제는 파종을 좀더 일찍 하여야 합니다.그래야 립종이 제대로 될수 있고 곡식이 잘 여물수 있습니다. … 녀성들이 보잡이를 하는것은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지금 농촌에는 청장년들이 거의다 전선에 나가고 녀성들과 로인들밖에 없습니다.그러므로 오늘 농촌의 주인은 녀성들이며 녀성들이 일을 더 잘하여야 합니다.녀성들은 보잡이도 하여야 합니다.앞으로 녀성들속에서 보잡이를 더 많이 키워내야 하겠습니다.》 농민들은 어버이수령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놓칠세라 명심해 듣고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녀성보잡이들도 만나보시고 로인들과 함께 농량과 대여곡에 대하여서도 의논하시였다. 농민들은 처음에는 좀 어려워하는듯 하였으나 인차 한집안식구처럼 자기들의 농사형편을 털어놓고 말씀드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농민들의 말을 다 들으시고나서 녀맹위원장에게 물으시였다. 《동무들도 품앗이반을 무었소?》 《예.》 《원화리에서 소겨리반과 품앗이반을 뭇고 서로 도우면서 농사를 짓고있는것은 좋은 일입니다.품앗이와 소겨리를 하여 서로 힘을 합치고 도우면서 농사일을 하는것은 우리 농민들의 전통적인 미풍입니다.품앗이반과 소겨리반을 무어 여러 집이 서로 힘을 합치면 일하기도 헐하고 소와 농기구도 합리적으로 리용할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소겨리반과 품앗이반을 무어 힘을 합쳐서 서로 도우며 일해야 하겠습니다.이것은 앞으로 농촌경리를 협동화하는데도 아주 필요한 일입니다.》 농민들은 한결같이 그이의 말씀대로 서로 힘을 합쳐 꼭 농사를 잘 짓겠다고 저저마다 말씀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원화벌을 둘러보시면서 장차 원화리일대의 밭을 논으로 풀고 밭에는 관수를 하도록 하며 주변야산들에는 과일나무와 뽕나무들을 심으며 아담한 주택에 전기까지 끌어들일데 대한 휘황한 전망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할 일은 많지만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농민들이 하나로 단합되여 일한다면 문제없이 할수 있으며 협동조합을 조직해야 농민들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수 있다는데 대하여 그리고 그 준비로서 처음에는 너무 크게 하지 말고 30호가량으로 조직하되 자원하여 들어오겠다는 사람만 받아야 하며 조합이 강화됨에 따라 다른 사람들도 점차로 받아들여야 한다는것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는것이였다. 이처럼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때 벌써 농촌을 협동화할데 대한 구체적인 방도를 구상하고계시였던것이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였다. 부락으로 돌아오시던 그이께서는 곧바로 녀맹위원장의 집으로 발길을 돌리시며 학교교실을 보자고 하시는것이였다.(당시 녀맹위원장네 집 일부를 소학교 2학년 교실로 사용하고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학생들의 의자에 앉으시여 교실을 세세히 살펴보시다가 교원들에게 여러가지 물으시고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어린이들은 우리 혁명의 대를 이어나갈 미래의 주인공들이며 사회주의,공산주의건설의 귀중한 보배들입니다.그러므로 우리 일군들은 전쟁의 어려운 환경에서도 어린이들에게 공부할수 있는 조건을 잘 지어주어야 합니다.》 어버이수령님의 이 말씀속에는 자라나는 후대들을 나라의 훌륭한 역군으로 키우며 그들에게 제일 좋은것을 마련하여주시려는 어버이의 따뜻한 사랑이 넘쳐흐르고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다시 녀맹위원장네 살림방쪽으로 걸음을 옮기시다가 안방에서 새여나오는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안색을 흐리시며 녀맹위원장에게 물으시였다. 《집에 앓는 사람이 있소?》 《예,어머니가 앓고있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어머니가 언제부터 어떻게 앓는가고 세세히 물으시고 곧 의사를 부르시였다. 의사를 환자에게 보내시고도 그이의 얼굴에서는 근심어린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고 약을 내여준 다음 그이께서는 의사에게 환자의 병세가 어떠한가고 친히 물어보시고서야 마음을 놓으시는것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마당으로 나오시면서 부드럽게 말씀하시였다. 너무 걱정마오.어머니의 병이 곧 나을거요.고생을 많이 하신 어머님이 오래오래 사시도록 더욱 잘 모셔야 하오. 녀맹위원장은 목이 메여 아무 말씀도 올리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농민들과 한자리에서 점심식사를 하신 다음 원화리에 있는 늪을 돌아보시였다. 이때 녀맹위원장이 폭약으로 고기를 잡자고 어버이수령님께 말씀드렸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녀맹위원장을 돌아보시며 간곡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늪을 양어장으로 만들고 물고기를 길러야 하겠습니다.물고기를 잘 기르면 농민들의 밥상에 더 많은 물고기반찬이 오르게 될것입니다. … 늪이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에는 반드시 그물로 큰것만 잡고 작은것은 놓아주었다가 큰 다음에 잡도록 하여야 합니다.폭약을 가지고 물고기잡이를 하면 귀중한 폭약이 랑비될뿐아니라 사람이 다칠수도 있고 물고기종자를 없앨수 있습니다.그러므로 폭약을 가지고 물고기잡이를 하여서는 안됩니다.》 날도 밝기 전인 이른새벽에 이 마을을 찾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처럼 농민들의 생활을 세심히 보살피시고 저녁늦게야 마을을 떠나시였다. 그때로부터 오늘까지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수시로 이 원화마을에 나가시여 농사일과 농민들의 생활을 돌보시며 어렵고 힘든 일을 몸소 풀어주시였다.그리하여 그곳에서는 세인을 놀래우는 천지개벽이 일어났던것이다. 오늘 원화마을 농민들은 협동으로 농사짓는 하나의 대가정속에서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있다. 조국해방전쟁시기 소잔등에 위장을 하고 보습을 잡던 처녀들이 오늘은 뜨락또르를 몰고 협동벌을 달리고있다.농민들의 식탁마다에는 새로 푼 논에서 거두어들인 흰쌀밥에 협동농장의 양어장에서 길러낸 물고기반찬이 오르고있다. 이렇듯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전쟁의 어려운 시기에도 그리고 전후복구건설의 복잡한 일이 제기되였을 때에도 항상 인민들속에서 인민들과 함께 고락을 나누시며 우리를 오늘의 행복에로 이끄시였다. 1962년 3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