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3월 7일 로동신문

 

《동지애의 노래》와 함께 영생하는 작가

위대한 장군님의 품속에서 리종순동지가
누려온 영광의 인생을 더듬어보며

 

김일성상계관인이며 김일성훈장수훈자,로력영웅인 작가 리종순동지는 우리의 주체문학사에 수령형상영화문학창작의 대가로 그 이름 빛나고있다.

리종순동지는 생전에 40여편에 달하는 우수한 희곡 및 영화문학작품들을 창작하였다.그가운데서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를 계기로 창작된 혁명영화 《조선의 별》과 그 주제가인 《동지애의 노래》는 작가 리종순의 가장 특출한 대표작인 동시에 수령과 전사간의 숭고하고 고결한 동지애로 개척되고 승리해온 조선혁명의 위대한 력사를 길이 전하는 불멸의 기념비와도 같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리종순동지에 대하여 회고하시며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리종순동무는 재간이 있는 작가였습니다.

리종순동무는 혁명영화 〈조선의 별〉에 대한 영화문학을 썼습니다.

노래 〈동지애의 노래〉의 가사도 그가 썼습니다.

리종순동무는 〈동지애의 노래〉와 함께 우리 당의 기억속에 살아있습니다.》

《동지애의 노래》와 함께 영생하는 작가!

이 고귀한 부름에 리종순동지의 한생의 총화가 비껴있다.

리종순동지는 영광으로 빛나는 한생을 통하여 그리고 순결하고 열렬한 영생의 넋과 숨결이 맥맥히 높뛰는 한편한편의 명작들을 통하여 새 세대 문예인들과 후대들에게 가르쳐주고있다.

우리 당의 위대한 동지애의 세계에 넋을 합치고 심장을 합치라.그 위대한 세계에 가장 숭고한 문학의 세계도 있고 가장 고귀한 인생의 영광도 있다!

 

수령님의 영화를 위하여,당의 영화를 위하여!

작가의 수기집을 펼치고

 

우리의 위대한 동지애의 세계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가.

그것은 믿음이다.전사에 대한 수령의 값높은 믿음,령도자에 대한 전사의 절대적인 믿음…

주체53(1964)년 12월 21일은 리종순동지의 생애에서 참으로 의의깊은 날이였다.오래전부터 흠모하여마지 않던 위대한 장군님을 처음으로 몸가까이에서 만나뵙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았던것이다.

천재적인 예지와 비범한 령도력으로 문학예술사업을 지도하시는 젊으신 그이를 몇차례 뵈온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뵈옵기는 처음인 리종순동지는 설레이는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협의회가 끝난 후 한 일군이 다가와 리종순동무는 좀 기다려달라고 하는것이였다.

일군들을 다 바래워주고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문가의 한쪽켠에 서있는 그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시며 왜 남의 집에 온것처럼 그러는가,앞으로는 이 방문이 닳도록 오게 될것이라고 하시며 그의 손을 따뜻이 이끌어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시였다.그러시고는 영화문학창작사 주필사업에 영화인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사업까지 맡았는데 힘들지 않은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리종순동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의 신임은 큰데 능력이 딸린다고,그 기대에 보답을 하지 못해 늘 죄스럽다고 자기의 심정을 그대로 말씀드리였다.

첫눈에 벌써 말에서 꾸밈이 없고 차림새와 거동이 단정한 그가 마음에 드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문득 《이렇게 만나기는 처음이지만 우리는 이미 구면입니다.》라고 하시는것이였다.그러시고는 4년전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모란봉극장에서 연극 《조국산천에 안개개인다》를 처음 관람하였을 때부터 작가에 대하여 알게 되였다고,그러니 리종순동무와는 초면이자 구면이라고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던 주체49(1960)년 12월 항일무장투쟁시기 위대한 수령님을 형상한 연극 《조국산천에 안개개인다》가 성황리에 공연되였다.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이 연극을 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작품에 대한 깊은 감동과 함께 작가인 리종순동지의 이름이 인상깊이 새겨지셨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말머리를 돌리시며 리종순동무는 해방전에 조국광복회산하 반일혁명조직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고 하던데 그때부터 수령님을 숭배하여왔는가고 물으시였다.잊지 못할 그 시절을 더듬으며 그는 그때는 그저 암담한 일제의 식민지통치에서 조선을 찾아주실분은 오직 김일성장군님뿐이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미력하게나마 투쟁에 나섰댔다고,자기가 의의있는 작품을 쓸수 있은것은 몇해전에 어버이수령님께서 친히 무어주신 항일무장투쟁전적지답사단에 망라되여 자료취재를 한 덕분이라고 말씀드리였다.

주체48(1959)년 5월부터 몇달동안 그는 답사단성원으로 우리 나라 북부국경지대와 중국동북지방을 편답하면서 수많은 혁명전적지와 유격근거지,주요회의장소들을 발굴고증하고 항일혁명투쟁참가자들과 연고자들,목격자들을 만나 력사적사실들을 취재하였다.그때 답사단성원들을 몸소 만나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리종순동지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며 작가는 누구보다 자기 나라 혁명력사를 잘 알아야 한다고 하시며 험한 길도 걸어보고 빨찌산생활을 한번 체험해보라고 하시였다.

혁명전적지답사과정의 취재와 체험은 리종순동지를 흥분시켰고 그로 하여금 《항일무장투쟁전적지를 찾아서》라는 도서를 집필편찬하는 한편 밤새워 희곡작품 《조국산천에 안개개인다》를 창작하게 하였던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주의깊이 듣고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혁명전적지로정을 밟아본것은 생활체험이 많아야 하는 작가에게 더없는 행운의 기회였을것이라고 하시면서 로동계급의 문학예술이 사람들을 수령의 혁명사상으로 무장시키고 수령의 위업에 충실하도록 교양하는 힘있는 무기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서는 수령의 혁명활동을 깊이있게 형상하여야 한다고 뜻깊은 교시를 하시였다.

수령형상을 창조하자면 미리 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그래서 나는 늘 그 생각에 골몰하게 된다고,이제 수령형상창조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될 날이 올것이라고 하시는 그이의 확신에 넘치신 음성이 방안에 우렁우렁하게 울려퍼졌다.

주체문학사의 위대한 새시대가 바야흐로 펼쳐지는 력사적인 순간의 체험자가 된 리종순동지의 심장은 세차게 고동쳤다.그는 오래전부터 품고있던 마음을 담아 수령형상작품창작에 심혼을 바치겠다는 불같은 결의를 다지였다.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종순동무,수령님의 영화를 위하여,당의 영화를 위하여 우리 함께 손잡고 일을 잘합시다.… 나는 오늘 이 말을 하자고 동무를 찾았습니다.》

수령님의 영화를 위하여,당의 영화를 위하여!

이렇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리종순동지에게 령도자가 작가에게 주실수 있는 가장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수령형상영화창조라는 성스러운 위업을 위하여 손잡고 함께 일하자는 우리 장군님의 하늘같은 그 믿음을 리종순동지는 한생토록 간직하고 살았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자신께서 구상하시는 수령형상영화창조사업에서 핵심적역할을 하게 될 리종순동지의 창작활동을 품을 들여 이끌어주시였다.

예술영화 《한 지대장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여러 작가,예술인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영화의 사상예술적성과를 높이 평가하시며 작가 리종순동지를 곁에 세우고 기념사진까지 찍으시였다.영광의 그 자리에서 리종순동지의 심장은 이렇게 웨치고있었다.

(영화의 주제와 소재,력사자료들까지 몸소 잡아주시고 여러차례 초고와 완성된 원고도 보아주시며 정력적으로 지도해주신분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이십니다.영광은 응당 우리의 스승이신 친애하는 그이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주체56(1967)년 2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뜻밖에도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주시였다.그이께서는 영화부문의 창작가,예술인들과 한식솔처럼 허물없이 마주앉으시여 참으로 뜻깊은 대화를 나누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력사적사실로 보나 우리 인민들의 간절한 념원으로 보나 영화예술에서 어버이수령님을 형상하는것은 합법칙적요구라고 하시며 때문에 자신께서는 지난해말에 당중앙위원회 해당 부문 일군들에게 수령님의 혁명활동과 혁명적가정을 영화에 그리는 사업을 맡아보는 창작기관을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을 다그칠데 대하여 이야기하였다고,조만간에 우리는 그런 창작기관을 가지게 될것이라고 하시였다.

이것은 인류문예사에 일찌기 없었던 위대한 발기였다.

검소한 저녁식사도 함께 나누시며 밤깊도록 문학예술혁명을 일으키는데서 나서는 중요한 문제들과 리종순동지가 앞으로 해야 할 사업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고나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그때로부터 보름이 지난 2월 26일,백두산창작단의 창립이 온 세상에 선포되였다.얼마후 리종순동지는 백두산창작단의 작가,부단장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리종순동지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믿음과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깊어만 갔다.그것은 평범한 작가를 수령결사옹위의 견결한 투사로,누구도 따를수 없는 실력가형의 재사로,유능한 창작지도일군으로 키워주시는 한없이 숭고하고 열렬한 동지애였다.

일부 편협한 일군들에 의해 기관에서 나타난 결함들이 책임일군인 리종순동지에게 있는듯이 과장되고 엄중히 처리할데 대한 문제가 제기되였던적이 있었다.자신의 집무실에서 그를 만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책상우에 놓인 문건을 한옆으로 밀어놓으시며 이것이 아래에서 나에게 올려보낸 동무에 대한 자료이다,그러나 나는 이 자료를 보지 않았다,앞으로도 보지 않겠다고 하시였다.나는 이 문건보다 동무를 더 믿는다,나는 동무의 량심을 믿는다고 하시는 그이의 음성이 온 방안을 가득채우며 울려왔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격해지는 심정을 진정하지 못하신채 절절히 교시하시였다.

첫째로는 수령님께서 동무를 믿으시기에 나도 믿는다,둘째로는 이 문건을 작성한 사람들보다 나는 동무와 함께 여러해 일하면서 동무를 더 잘 알고있다,셋째로는 누구나 자기의 결함을 자신이 제일 잘 아는데 동무는 량심이 있어 자기 결함을 꼭 고칠수 있기때문이다.…

한생토록 잊을수 없는 그날에 리종순동지의 심장속깊이 뿌리내린 위대한 믿음의 철학이 바로 혁명영화 《조선의 별》 제3부의 명장면에 그대로 담겨졌다.

서정애가 적들에게 체포되였을 때 박도범이 혁명의 수뇌부의 안전을 걱정하면서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기지를 옮기자고 제기하는 장면이 있다.그 순간 한별동지의 안광이 노기로 번뜩인다.

《만약 도범동무가 적들에게 잡혔다면… 어떻소? 자신을 믿소? 그래도 내가 혁명기지를 옮겨야 하겠소?!》

리종순동지가 살던 보통강구역의 집에 오늘도 놓여있는 초대에는 참으로 가슴뜨거운 사연이 깃들어있다.

어느해인가 리종순동지의 생활에서 심중한 문제가 제기되였을 때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를 몸가까이 불러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동무에 대한 당의 신임과 기대는 크다고,동무는 절대로 과오를 범하여서는 안될 동무이기에 미리 충고를 주려고 불렀다고 하시면서 절절히 교시하시였다.

대가를 바라거나 리해관계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람은 충신이 아니다.초불처럼 살라는 말이 있다.초불은 자기 온몸을 녹여 불태우며 어둠을 가셔주지만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광명을 주기 위하여 자기의 온몸을 깡그리 바치며 불탄다.내가 초불처럼 살라는것은 당과 수령을 위하여,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자기의 온몸을 바쳐 투쟁하자는것이며 그렇게 투쟁할 때만이 참된 혁명가가 될수 있다는것이다.이것을 하나의 좌우명으로 삼고 생활하여야 한다.…

그날 리종순동지는 위대한 장군님으로부터 한생을 두고 잊지 못할 참으로 뜻깊은 교시를 받아안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주체적인 문예로선을 받드는 한길에서 동무와 나는 뜻을 같이한다.동지가 되였다.이 길에서 생사를 같이하자.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는 이 길로만 갈것이다.동지를 위해 죽을수 있는 사람만이 참된 동지가 된다는것을 명심하고 변치 않을 신념과 의지를 지켜 혁명에 분발하자.…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리종순동지는 초를 꺼내놓았다.그의 서재에는 《초불처럼 살자!》라는 족자가 걸렸다.

일단 동지로 삼은 사람은 한생토록 온갖 정을 쏟아 사랑해주시고 세월의 끝까지 절대적으로 믿어주시는 우리 장군님의 믿음의 철학을 생의 좌우명으로,명작창작의 지침으로 심장깊이 간직하였기에 리종순동지는 앉으나서나,걸을 때에도,밥술을 뜰 때에도 장군님의 뜻을 받들기 위한 창작의 사색과 탐구를 중단할줄 몰랐다.30대에야 작가생활을 시작한 그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예술부총장,조선영화문학창작사 주필,4.15문학창작단 부단장,백두산창작단 단장 겸 조선영화인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명작창작의 붓대로 당의 위업을 충직하게 받들어올수 있은것은 나의 운명은 장군님께서 지켜주고계신다는 절대적인 믿음이 억척의 신념으로 자리잡고있었기때문이였다.

고령에 접어드는 작가에게 깊이 마음쓰시는 우리 장군님의 은정은 그끝을 모르는 샘과 같았다.언제인가 70고령의 리종순동지를 만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솟구치는 격정을 누르지 못하는 그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세월은 흘러가지만 나는 리종순동무를 한시도 잊은적이 없었소.동무는 나를 잊고 지낸 때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시면서 자신께서는 작가,예술인들을 아낀다고,레닌은 좀 늦어서 고리끼와 사귀였는데 그와의 사업을 많이 하였다고,자신께서는 20대에 백인준,리종순동무들을 알게 되였다고 그 나날을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세월이 흘러가도 잊을수 없는 동지,20대에 사귄 오랜 동지!

바로 이것이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고 오히려 더욱 열렬해지고 각별해지는 리종순동지에 대한 우리 장군님의 동지애였다.정녕 그 위대한 동지애의 세계는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는 무한대의 세계였다.

 

다진 맹세 변치 말자 한별을 우러러보네

백두산창작단 일군들이 들려준 이야기

 

당 제6차대회에 드린 주체문학예술의 가장 고귀한 선물인 혁명영화 《조선의 별》이 창작되던 시기에 대한 취재때문에 백두산창작단을 찾았던 우리는 그곳 일군들로부터 참으로 감동적인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그들이 혁명영화 《조선의 별》의 작가 리종순동지에 대하여 한결같이 이야기한것은 그의 남다른 문학관이였다.리종순동지는 위대한 인간에 대한 매혹과 사랑의 감정을 그리는것이 곧 문학이라고 간주했다는것이였다.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를 맞으며 세상에 나온 혁명영화 《조선의 별》과 조선혁명의 영원한 주제가로 불리워지는 《동지애의 노래》의 창작과정은 그대로 작가 리종순만이 아닌 당시 온 나라 인민의 가슴에 불타고있던 열렬한 사상감정,우리 당과 혁명을 동지애의 힘으로 승리와 영광에로 이끌어오신 위대한 수령님들에 대한 다함없는 전인민적매혹의 분출이였으며 수령,당,인민이 혈연의 정으로 뭉쳐진 우리의 혼연일체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훌륭한 예술적반영이였다.

당 제6차대회가 열리는 뜻깊은 주체69(1980)년의 1월 해당 부문 일군들을 만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혁명송가 《조선의 별》이 발굴된데 대하여 무척 기뻐하시면서 초기혁명활동시기 령도자를 진심으로 받들고 칭송한 청년공산주의자들의 충정심과 혁명적의리에 대하여 뜻깊은 교시를 주시였다.그후 리종순동지를 만나 창작정형을 료해하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동지애를 주제로 영화문학을 구상하고있다는 그의 말을 들으시고 수령과 혁명전우,수령과 혁명전사들사이의 관계를 잘 파고들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사실 그때 리종순동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김혁동지의 수첩에

 《잊지 말자! 혁명에 다진 그 맹세

이역만리 오두막에서

1930.6.20

너는 김혁

나는 성주》

라는 글발을 써주신것을 비롯하여 천금같은 자료들을 가지고 영화문학창작에 골몰하고있었지만 아직까지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있었다.

그는 영화문학을 쓸 때마다 구상이 완벽하게 무르익고 전일적인 형상체계가 잡히기 전에는 절대로 펜을 들지 않았다.《설익은 열매는 건드리지 말라.》,《글은 사색을 깊이하여 앙금이 앉은 다음에 펜을 들라.》는것이 창작에서 그의 원칙이였다.일단 책상에 마주앉으면 매 문장과 표현에 이르기까지 흠잡을데 없는 원고를 써내군 하는 그다보니 위대한 장군님께서 주신 믿음을 받아안고 낮에 밤을 이어 사색을 거듭하면서도 선뜻 펜을 들지 못하고있었다.수령형상작품은 가장 완벽해야 한다는것은 그의 문학관,창작관의 정수이며 인생관의 핵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때 리종순동지는 《조선의 별》노래를 종자로 하여 영화를 하나 잘 만들면 당 제6차대회를 더 의의있게 빛내일수 있을것이며 또 수령님께서도 기뻐하실것이라고 하시였다는 위대한 장군님의 교시에 또다시 접하게 되였다.

리종순동지는 책상을 쾅- 하고 치며 환성을 올렸다.막혔던 물목이 터진듯 리종순동지는 불과 20일만에 혁명영화의 영화문학 1,2부의 원고를 내놓았다.10부작으로 된 《조선의 별》의 영화문학이 완성된것은 그때로부터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대로 해방전 불우한 식민지청년의 처지와 민족적울분을 수필 《잠자는 사자》에 담아야 했던 그자신이 용약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 뛰여들어 조국광복회산하의 반일혁명조직에서 활동하는 나날에,조국해방전쟁시기 내무성예술단 부단장으로 사업하는 나날에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전적지답사단의 한 성원으로 항일전장들을 직접 밟아보는 나날에 체험한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흠모의 분출이였다.동시에 문학예술의 걸출한 영재이시며 위대한 인간이신 김정일동지에 대한 작가로서,인간으로서의 매혹의 폭발이였다.

혁명영화 《조선의 별》의 창작은 예술창조라기보다 위대한 력사의 재현이였다.철두철미 력사적진실에 의거하라! 보태지도 덜지도 말고 력사적사실을 그대로 필림에 옮기라! 이것이 위대한 장군님의 요구였다.

당대회에 드리는 최대의 선물작으로 혁명영화를 완성시키도록 하시기 위하여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영화창작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우선적으로 풀어주도록 하시였으며 현지지도의 길에서 영화들을 몸소 보아주시며 구체적으로 지도하시였다.그이께서 혁명영화를 위하여 얼마나 커다란 심혈을 기울이고계시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리종순동지였기에 창작가,배우들에게 늘 이렇게 강조하군 하였다.

《우리가 뭘 명심해야 하는가.지금은 이 영화가 예술영화이지만 후세에 가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초기혁명활동에 대한 실사화면으로 남아야 한다는 그것이요.》

그러나 위대한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높은 수준에 비해볼 때 창작가,예술인들의 수준은 아직 미약하였다.

영화창조과정을 지도하시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무엇보다도 김혁의 내면세계를 깊이있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1부 마지막에 마차를 타고 가면서 김혁이 차광수에게 성주동지를 만날 때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고 물어보는 장면에서 차광수가 김혁에게 이제 우리가 어떤분을 모시고있는가를 보라,네가 10여년동안 떠돌아다녔지만 성주동지 같으신분은 처음 뵙게 될것이다,그래서 내가 너를 여기로 불렀다고 말하게 하고 그 장면을 김혁이 수령님과 만나는 장면과 잘 련결시켜야 하겠다고 가르치시였다.참으로 명철한 가르치심이였다.

김혁,차광수동지를 비롯한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어버이수령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왜 모두가 그이를 령도자로 높이 우러러모시고 철저히 옹호보위하였는가.바로 그것을 진실한 생활의 화폭으로 감동깊게 보여주어야 하였다.그러자면 위대한 수령님과 청년공산주의자들사이의 의리관계,동지적관계를 깊이있게 생활적으로 그리는데 방점을 두어야 했다.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안을 때마다 리종순동지는 늘 과시 그이는 문학예술의 천재이시다고 경탄하군 하였다.그러나 우리 장군님의 천출위인상에 대한 매혹 못지 않게 리종순동지의 심장을 더욱 꽉 그러잡은것은 혁명전사 한사람한사람에게 그토록 뜨거운 정을 부어주시고 천만자루 품을 들여 키워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그 숭고한 동지애를 그대로 지니신 장군님의 거룩한 인간세계였다.한별동지와 청년투사들의 관계처럼 우리 장군님과 수천수만의 전사들의 혼연일체가 동지애의 새 력사를 펼치고있는 오늘의 현실,그 벅찬 현실의 주인공의 한사람이 된 격정과 흥분이 리종순동지의 심장에서 어제날 김혁동지가 토로했던 불같은 웨침이 메아리되여 뿜어나오게 해주었다.

《내 꺼꾸러져 혁명은 더 못하게 된다 한들 한별! 그대의 곁은 죽어서도 떠나지 못하리라.》

오늘도 사람들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혁명영화 《조선의 별》에서 김혁동지의 최후장면에 대한 촬영을 지도해주시는 영화문헌의 장면을 보면서 감동을 금치 못해한다.우리의 영화예술인들이 잊지 못해하는 그날은 주체69(1980)년 9월 13일이였다.

당 제6차대회준비사업과 100일전투를 진두지휘하시느라 그토록 바쁘시였지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오랜 시간을 바쳐 야외촬영장을 돌아보시며 촬영소사업과 영화창조사업정형을 일일이 료해하시고 제기되는 문제를 풀어주시였다.그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리종순동지를 비롯한 창작가,예술인들에게 혁명영화창작에서 지침으로 되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오늘도 백두산창작단에 소중히 보관되여있는 위대한 장군님의 혁명활동일지에는 혁명영화 《조선의 별》의 창작을 위해 그이께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시였는가에 대한 력사적사실들이 부피두텁게 기록되여있다.

이렇듯 그이의 정력적인 지도로 수령형상영화창작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혁명영화 《조선의 별》은 시대의 기념비적명작으로,혁명적대작의 본보기로 세상에 태여나게 되였다.그 창조과정은 위대한 장군님의 슬하에서 리종순동지를 비롯한 또 한세대의 당에 충직한 혁명전사들의 대오가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리종순동지를 당의 충직한 작가로,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지로 키워주시였다.리종순동지가 가슴뜨겁게 추억한바와 같이 위대한 장군님은 성공의 태양이시였고 지혜와 재능의 광원이시였다.

주체혁명의 새시대의 김혁과도 같은 당의 작가를 키워낸 그 위대한 동지애의 세계는 드디여 조선혁명의 영원한 주제가인 명곡 《동지애의 노래》를 탄생시켰다.

원래 혁명영화 《조선의 별》에는 다른 주제가가 없었다.그 영화에서는 불멸의 혁명송가 《조선의 별》이 기본주제가이고 그 노래를 따를만 한 노래가 없다고 여기고 따로 주제가를 지으려고 하지 않았던것이다.

어느날 영화의 제1,2부 작업필림을 보시며 이런 사실을 료해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영화에도 반드시 주제가가 있어야 한다,그것도 명곡으로 된 주제가가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영화문학을 쓴 작가자신이 직접 가사를 써보는것이 좋겠다고 하시였다.

리종순동지는 당황해져서 어쩔줄 몰라하였다.시나 노래에는 소질이 없어 몇해전 뜻깊은 좌석에서 두세번 위대한 장군님의 권유를 받고도 시 한수 읊지 못해 진땀을 뺀 일까지 있는 그였다.

하지만 위대한 장군님께서 직접 주신 과업앞에서 주저할수가 없었다.당에서 영화문학을 쓰라면 영화문학을 쓰고 가사를 만들라면 가사를 만들어내는것이 당의 작가의 충정이고 실력이 아니겠는가.

리종순동지는 당과 혁명,시대와 인민앞에 지닌 력사적인 사명감을 뼈저리게 자각하며 결연히 가사창작에 달라붙었다.

아직은 당도 정권도 없고 많은 사람들이 조국의 해방과 혁명의 승리에 대하여 확신을 못 가지고있던 암담한 시기 위대한 한별동지를 령도자로 받들어모시고 그이에 대한 송가까지 지어부른 청년투사들의 정신세계는 어디에서 출발한것이겠는가.그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동지들에게 부어주신 한없는 사랑과 믿음에 뿌리를 두고있지 않겠는가.

그의 사색은 오늘날 우리 인민들이 위대한 장군님을 어버이수령님과 꼭같으신 령도자로,태양으로 끝없이 흠모하며 높이 받들고있는 가슴벅찬 현실도 결국은 장군님의 하늘같은 사랑과 믿음,숭고한 동지애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있다는 철리에로 집중되였다.그의 눈앞에는 위대한 장군님의 한량없는 동지적믿음과 사랑속에 흘러온 인생의 나날이 영화화면처럼 떠올랐다.

언제인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리종순동지의 안해가 중병으로 앓아누웠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몸소 추운 겨울 한지에 계시며 귀한 약재를 마련하여 보내주시였다.그때 그이께서는 옛날 속담에 팔백금으로 집을 사고 천금으로 이웃을 산다고 했지만 천금을 주고도 살수 없는것이 혁명동지이다,한가할 때는 처자이지만 어려울 때는 동지라고 나는 생각한다,편안히 잘살 때는 처자가 제일 살뜰한것 같지만 시련의 시기에 생사운명을 같이할 사람은 혁명동지밖에 없는것이라고 참으로 가슴뜨거운 교시를 하시였다.

작가의 뇌리에는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의 메아리와 더불어 번개의 섬광처럼 시상이 떠올랐다.

천금주고 살수 없는 그이의 한없는 사랑,돌우에도 꽃을 피우는 그이의 지극한 정성…

뇌리를 스치는 시상을 쫓는 그의 눈앞에는 위대한 장군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일군들이 둘러앉았던 잊을수 없는 그날의 일이 떠오르며 문득 뜨거운것이 고여올랐다.

그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저쯤 앉아서 웃고 떠들고있는 어느 한 일군을 오래도록 지켜보고계시였다.불치의 병진단을 받은 전사를 두고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그이께서는 고개를 숙이시고 손수건을 눈가로 가져가시였다.그러시고는 웃고있는 저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다고 하시며 눈굽을 닦으시였다.

마침내 작가의 심장에서 명가사의 주옥같은 구절구절들이 불길처럼 분출하기 시작했다.

가는 길 험난하다 해도 시련의 고비 넘으리

불바람 휘몰아쳐와도 생사를 같이하리라

천금주고 살수 없는 동지의 한없는 사랑

다진 맹세 변치 말자 한별을 우러러보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혁명영화 《조선의 별》에 나오는 주제가 《동지애의 노래》는 명곡이라고,들으면 들을수록 혁명동지에 대한 사랑과 의리감이 안겨온다고 하시면서 이 노래를 영화가 나가기 전에 먼저 방송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보급하도록 하시였다.

이듬해 1월초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당과 국가의 책임일군들이 모인 자리에 리종순동지를 불러주시고 이 동무가 혁명영화 《조선의 별》을 쓴 작가동무라고 소개해주시였다.그러시면서 《작가동무,새해에도 좋은 작품을 많이 쓰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시며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과분한 치하와 고무에 몸둘바를 몰라하는 그를 미덥게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혁명영화 《조선의 별》의 주제가 《동지애의 노래》는 생활이 있고 철학이 있고 정서가 있는 명가사이기때문에 부를 때마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정말 수고가 많았다고 거듭 치하하시였다.그러시고는 몇해전에는 시라고는 읊을념도 못하던 작가동무가 어떻게 《동지애의 노래》같은 훌륭한 가사를 썼는지 정말 엉뚱하다고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일군들을 향해 어떻게 그런 명가사를 쓸수 있었는지 작가동무의 경험담을 들어보는것이 어떤가고 하시였다.

가슴속에서 뜨거운것이 자꾸만 솟아올라 한동안 말머리를 찾지 못하던 작가는 두손을 모아쥐고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가사창작에 달라붙어 막상 쓰자고 하니 저의 나이로 보나 더구나 생활을 해온 환경으로 보나 항일혁명투쟁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였기때문에 그때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의 정신세계,말하자면 혁명적수령관의 깊이를 알수 없는것이 제일 큰 고충이였으며 그것때문에 며칠을 두고 모대기였습니다.

그때 피끗 떠오르는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 우리들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어떤 자세와 립장에서 모시고있으며 지도자동지와 우리들의 관계,수령과 전사들간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동지들의 호상관계는 어떻게 맺어졌는가 하는것들이였습니다.저는 특히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비범한 예지와 위대한 풍모,끝없는 인간애와 동지애를 근 20년간 받아안으며 지나온 력사의 갈피를 더듬으면서 제가 직접 체험하였거나 보고 들은것들을 속속들이 파고들었습니다.그리고 그 주옥같은 사실들을 1920년대와 30년대로 옮기여 당시의 청년공산주의자들,주체형의 첫 세대들도 한별동지를 민족의 태양으로 모실 때 바로 그렇게 하였으리라고 상상하면서 쓰니 저절로 흥분되고 열정이 솟아 〈동지애의 노래〉를 짧은 기간에 쓸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먼저 박수를 쳐주시였다.

《동무들,혁명영화 〈조선의 별〉의 작가를 축하합시다.》…

리종순동지는 생의 마지막나날에 위대한 장군님께 이런 구절이 담겨진 편지를 삼가 올리였다.

《…백조가 죽음을 앞두고 가장 아름다운 울음을 운다고 합니다.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리종순이 백조의 울음처럼 위대한 장군님을 받들어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드리겠습니다.…》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알았을 때 리종순동지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마지막부탁을 하였다.

《〈동지애의 노래〉를 불러다오.》

 

* *

 

사람들은 흔히 작가는 작품의 생명력만큼 영생한다고 한다.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리종순동지가 창작한 《동지애의 노래》에 대하여 평가하시면서 우리는 2000년대에도 《동지애의 노래》를 높이 부르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야 할 혁명의 길을 변함없이 걸어나가야 하며 수령님께서 이룩하신 혁명적동지애의 전통을 대를 이어 더욱 빛내여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수십년전 리종순동지의 집을 찾으시여 자식들의 희망에 대하여 귀기울여 들어주시던 그 사랑으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의 세 아들모두를 아버지가 섰던 문학예술부문의 중요직책에서 일하도록 하시였다.

지난해 10월 조선로동당창건 70돐을 성대히 경축하는 대동강의 대공연무대에서는 혁명영화 《조선의 별》에서 울려나온 최창걸,차광수동지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메아리쳤다.

《아,내 사랑하는 한별! 아,이 창걸이는 죽지 않소.죽지 않을테요!-》

《한별 만세!》

아마도 리종순동지가 그날의 《동지애의 노래》를 들었다면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 백발을 숙여 삼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또 드렸을것이다.

조선혁명의 영원한 주제가와도 같은 《동지애의 노래》는 오늘날 당 제7차대회를 위대한 승리로 빛내이기 위해 산악같이 떨쳐나선 문학예술인들과 인민들의 심장을 세차게 두드리고있다.어버이수령님의 믿음에 《조선의 별》로 화답한 김혁동지처럼,위대한 장군님의 육친적인 사랑에 《동지애의 노래》로 보답한 리종순동지처럼 우리 당의 위대한 력사를 믿음과 의리의 력사,사랑과 충정의 력사로 길이길이 빛내이자고.

본사기자 백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