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2월 28일 로동신문

 

치마에 장도칼을 찬 현대판 돈 끼호떼

 

언제 봐야 까욱소리가 청승맞게 울리는 암울한 북악산기슭에 커다란 합장묘의 봉분마냥 푸른 기와를 씌운 청와대의 안주인이 요즘은 현대판 돈 끼호떼라는 오명을 더 선사받았다고 한다.

청와대를 차지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한 모든 짓거리들이 신통히도 그렇게밖에 달리는 부를수 없게 되였다는것이다.

돈 끼호떼라면 시대착오의 대명사로 이 세상에 통칭되고있다.

에스빠냐의 17세기 작가 쎄르반떼스 싸아베드라가 인류발전과 문명개화를 한사코 거역하면서 시대에 역행하는 허무하고 맹랑한짓을 해대는 인간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해학적으로 보여준 돈 끼호떼가 그때로부터 무려 4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민족안에 생겨나 활개치고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꼬인 나무저가락같이 앙상한 다리,가물든 웅뎅이마냥 움푹 패인 가슴팍과 삐죽이 솟구친 두어깨,병적으로 이그러진 뱁새눈과 얻어맞아 문드러진듯 한 코,심술궂게 굳어진 주걱턱 등 외형만 놓고보아도 돈 끼호떼와 신통하다.

놀아대는 볼썽사나운 꼬락서니는 더 말할나위가 없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성별이 다른것인데 실지행동은 박근혜가 훨씬 더 릉가하고있다.

박근혜가 몰념하는짓을 보면 하나에서 열까지 시대의 요구에 역행하고 민족의 지향을 거역하는 불망종짓으로 일관되여있기때문이다.

문제는 사물현상에 대한 병적인 투시와 기형적인 사고이다.

적대를 《신뢰》로,대결을 《원칙》으로 삼고있는 박근혜는 북남관계를 더 악화시키면서도 《개선》한다고 떠들고 이 땅,이 민족을 영영 둘로 갈라놓으려고 발광하면서도 그것이 민족분렬의 비극을 《치유》한다고 요염을 떨고있다.

청와대문고리를 잡은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행적중 극히 일부만 상기해보아도 잘 알것이다.

그 무슨 북남관계를 한계단 도약시키기 위한 명처방으로 내놓았다는 《한반도신뢰프로세스》라는것도 그러하고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드레즈덴선언》이라는것도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발전시키자면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조성을 중지하고 6.15공동선언과 그 실천강령인 10.4선언을 리행하면 될것이다.

박근혜는 이 엄연한 진리를 외면하고 보기에도 낯설고 듣기에도 거북한 《프로세스》요,《드레즈덴》이요 하는 조선말사전에도 없는 해괴한 낱말을 도용해댔다.

겉으로는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민족통일을 해결하겠다는 간판을 들고 실지로는 동족이 아닌 남의 나라들을 동분서주하며 동족대결을 위한 《국제공조》를 애걸복걸해댄 박근혜의 몰골이 세계해방을 꿈꾸며 비루먹은 로시난떼를 타고 여기저기 분주하게 싸다닌 돈 끼호떼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온 겨레가 바라는 관계개선은 결코 그 어떤 밀실에서 꾸며진 음모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의 전도를 열어나가려는 진정한 의지에 의해 해결된다.

민족의 통일은 서유럽 한쪽끝에 가서 구걸할 물건도 아니며 청탁으로 해결될 일은 더욱 아니다.

이 행성에 자기 나라의 통일을 부르짖으며 수만리 떨어진 외국의 한 도시이름을 달아놓는 그런 례는 눈을 까밝혀 살펴보아도 없다.

오물통의 쓰레기들도 비웃을 그따위 제안을 마치 《대북정책》의 대들보마냥 붙잡고 놓지 않는 박근혜가 과연 시대착오에 걸린 정신병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력대 미국의 개우리로 락인된 청와대 주인치고 리승만역도의 《북진통일》과 박정희군사깡패의 《승공통일》을 비롯하여 상전이 시킨대로 《대북통일》을 짖어대지 않은적이 없었다.

그러나 박근혜와 같이 《제도전복》,《체제통일》을 이루어보려고 피를 물고 일년 열두달 제정신없이 이 행성의 여기저기를 개싸다니듯 돌아친적은 없었다.

박근혜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옳바른 선택》과 《진정한 변화》타령만 놓고보자.

오늘날 우리 민족이 걸어가야 할 길은 민족의 리익을 최우선시하는 자주의 길,자립의 길,자위의 길이다.

바로 이것이 온 겨레가 소원하는 가장 옳바른 선택이다.

이러한 우리더러 《옳바른 선택》을 하라는것은 남조선을 통채로 미국의 아가리에 떠밀어넣은 제놈들처럼 사대매국의 전철을 밟으라는것이며 동족대결과 민족분렬,외세공조에 혈안이 되고있는 제놈들처럼 민족반역의 길에 들어서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일뿐이다.

《진정한 변화》 역시 그러하다.

경제건설과 핵무력강화의 위대한 병진로선의 기치를 들고나가는 우리에게 《성공불가능》과 《변화》를 떠드는 희떠운 수작도 현실부정의 능수 박근혜만이 늘어놓을수 있는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강권과 권모술수에 의한 선거쿠데타로 《대통령》직을 강탈하고 《유신》과 독재를 일삼는 박근혜에게 전적으로 타당한 말이다.

너무나도 동족대결을 부르짖다못해 비틀어진 락엽같은 입술을 앙증스레 놀리면서 험상한 칼자리흉터가 있는 주걱턱으로 개성공업지구를 핵과 위성개발의 근원으로 매도하며 장도칼을 빼여든 박근혜이다.

말이 난김에 한마디 한다면 박근혜의 장도칼은 민족을 해치고 통일을 가로막는 적대와 대결의 수단이다.

민족의 공리공영을 위한 개성공업지구의 정상가동을 음으로 양으로 훼방하던 나머지 끝끝내 되살아날수 없게 무덤속에 몰아넣은것이 박근혜이다.

오죽하면 박근혜를 가리켜 《세월》호참사를 비롯하여 온 남녘땅을 하나의 큰 무덤으로 만들어놓고도 부족하여 이북에까지 살기를 뻗친 《산당집녀주인》이라고 단죄하는 목소리가 일년 열두달 끊기지 않고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술을 담은 가죽부대를 괴물로 착각하고 창을 휘두르며 요정내고 마차를 타고 가는 무고한 녀인과 일행을 목격하고는 도적떼가 공주를 랍치하였다고 지레짐작하고 《공주해방》을 웨쳐대며 입에 거품을 물고 덤벼드는 돈 끼호떼 그대로가 아닐수 없다.

우리가 북남관계의 개선과 발전을 위해 련이어 내놓은 공명정대한 제안들에 대해 박근혜는 또 어떻게 악담질을 해댔던가.

무턱대고 《위장평화공세》,《대외선전용》,《남남갈등유발용》이라고 매도하면서 악질적으로 도전해나오군 하였다.

우리의 긴장완화의 제의에 대결광기로 맞서고 화해분위기마련요구에 전쟁고취로 대응해나선 역적패당에 대해 민심이 《동포애적감각이 전혀 없는 박근혜식오판》,《북을 리해하기엔 력부족한 박근혜정부》,《전략부재의 저급한 대북대응》,《체제대결에서 살길을 찾는 궁여지책》이라고 한것은 우연치 않다.

동족을 주적으로,대결과 전쟁의 상대로 여기는 병적속통,사대의존과 외세굴종의 체질을 가진 박근혜는 정상적인 사고기능과 안목을 소유하지 못한 선천적인 정신적불구자에 불과하다.

변화되는 력사의 흐름도 의식하지 못하고 《기사도》적인 환상에 들떠 머나먼 고행의 길에 나선 돈 끼호떼는 마을의 얼뜨기인 싼쵸 빤싸에게 앞으로 식민지총독자리를 주겠다는 감언리설로 그를 데리고 나선다.

치마두른 현대판 돈 끼호떼를 모시느라 극성인 인간오작품 싼쵸 빤싸들도 없는것이 아니다.

현대판 돈 끼호떼의 치마꼬리를 부여잡고 하수인으로 따라나선 김관진과 윤병세,홍용표와 같은 《싼쵸 빤싸》들은 동족대결과 권력에 눈이 어두운 한갖 시녀에 불과한지라 갈길은 오직 하나 무덤행뿐이다.

우리가 단행한 첫 수소탄시험도 약육강식의 험악한 이 세상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한 자위력강화의 합법적인 조치이며 위성발사도 주권국가의 정정당당한 권리이다.

반만년민족사에 특기할 거창한 사변에 축하를 보내오지는 못할망정 혼비백산하여 청와대 지하실로 뛰여들어간다,전선일대에 비상경계령을 내린다,《대북확성기방송》을 재개한다 하며 복닥소동을 피워댄 박근혜의 망동을 보면 기가 막혀 혀가 차돌처럼 굳어질 정도이다.

이를 어찌 들판에서 유유히 풀을 뜯는 양떼를 100만대군으로 착각하고 온몸을 식은땀으로 적시며 녹이 쓴 장도칼을 마구 휘둘러대는가 하면 도적을 묶어가는 주인에게 달려들어 매질을 하려다가 되려 머리칼이 앙상한 대갈통이 터져 혹이 생기고 검은 피자욱이 내배인 돈 끼호떼의 정신착란증에만 비유할수 있겠는가.

더우기 치마에 장도칼을 찬 현대판 돈 끼호떼의 군사적망동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무모하기 그지없다.

앙상한 몸뚱이에 어울리지 않는 얼룩무늬전투복을 걸치고 쩍하면 군사분계선일대에 나와 돌아치면서 게거품을 물고 《죽음을 각오하고 자유민주주의체제하의 통일을 이루자.》고 고아대며 《단호한 응징》을 떠드는 박근혜의 몰골은 해괴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이다.

미국상전의 온갖 핵전쟁살인장비들을 꺼리낌없이 끌어들여 온 남녘땅을 북침전쟁의 전초기지로,핵전쟁발원지로 전변시켜놓고도 조선반도의 《안보위기가 북으로부터 산생된다.》고 떠벌이고 끊임없는 핵전쟁연습을 벌려놓으면서도 《위협》과 《도발》의 주범이 마치 우리인듯이 여론을 그릇되게 조성하고있는것도 다름아닌 박근혜이다.

그가 누구든 비루먹은 개가 투구를 쓰고 다닌다고 상상해보라.

이보다 더 추한 꼴불견이 어디 있겠는가.

반공일선에 나서 미쳐돌아가던 애비의 뒤를 이어 어울리지도 않는 전투복을 걸치고 전연지대를 게바라다니며 기염을 토하는 현대판 돈 끼호떼-박근혜의 꼬락서니만큼 희비극적인 몰골은 없을것이다.

만약 17세기 돈 끼호떼의 령혼이라도 배회한다면 수단과 방법,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족대결에 광분하면서 희세의 악한으로 오명을 떨치고있는 박근혜의 이 광경앞에 너무 창피해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을것이다.

아니 걸죽한 침을 내뱉았을것이다.

그럴수밖에 없다.

소설의 돈 끼호떼는 개인의 명성을 위해 시대의 흐름을 오판한탓에 기사도정신을 발휘하며 인생을 무의미하게 허송하였다.

그래도 그는 자기의 시대착오적인 행동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삐뚤어진 일을 바로잡고 피해를 없애는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던가.

하다면 박근혜는 어떠한가.

눈까풀이 쪼개지고 닫길 때까지 골몰하는것은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동족을 해치는것으로 상전의 비위를 맞추고 흡족하게 만들어주겠는가 하는것이다.

그래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동족대결에 전심전력하면서 민족분렬의 아픔을 가중시키는것뿐이다.

수소탄까지 보유한 세계핵강국의 전렬에 올라서있는 우리 공화국에 덤벼들어보겠다고 치마를 걷어올리며 악을 써대는 박근혜의 몰골은 거대한 수차를 향해 제 죽을지도 모르고 용감무쌍하게 돌진하는 돈 끼호떼를 방불케 한다.

시대착오적인 대명사로,변화를 외면한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준 소설속의 돈 끼호떼는 숨을 거두는 순간 후세에 《다시는 기사소설을 읽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였다.

민족을 등지고 시대의 추세를 외면하는자는 기필코 력사의 시궁창에 처박힌다는 고견이라고 하겠다.

대결의 시퍼런 장도칼을 휘두르며 민족의 고귀한 전취물을 도륙내고 북남관계를 악몽속에 몰아넣은 박근혜의 죄악은 이미 천벌을 받고도 남으리만큼 용서받을수 없게 되였다.

지금이라도 권고하건대 박근혜는 돈 끼호떼의 불우한 운명을 통하여 자기 생의 말로를 직감하는것이 좋을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박근혜가 무엇때문에 비명에 횡사당한 애비보다 더 참혹한 운명을 고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느낄수 있는 마지막기회로 될수 있기때문이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사 리군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