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3월 30일 로동신문

 

위대한 당의 추억속에 영생하는 일군

선군혁명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박송봉동지의 성장의 갈피를 더듬어

 

위대한 장군님의 진정한 동지가 되여 진심으로 당을 받든 당의 기초축성시기의 열혈충신들이 우리 장군님의 곁에 있었기에 1970년대 우리 당의 강화발전에서 력사적인 전환이 이룩되였고 혁명과 건설의 모든 분야에서 일대 전성기가 펼쳐졌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있다.

우리 당력사에 총포성없는 전쟁으로 수록된 고난의 행군,강행군시기에도 박송봉동지와 같은 일군들이 위대한 장군님을 충정의 신념과 의리,비상한 실력으로 받들었기에 조국앞에 드리웠던 시련의 먹장구름을 가시고 강성국가건설의 활로를 열어놓을수 있었다.

전대미문의 시련의 나날 매일같이 전해지는 혁명활동보도와 함께 사람들의 뇌리에 인이 박힌 박송봉동지,

그가 무슨 일을 얼마나 하였는가를 아는것도 중요하다.그러나 보다는 그가 어떻게 되여 우리 장군님의 선군정치사와 더불어 빛나는 충신들의 군상속에 서게 되였는가를 아는것이 더 중요하다.

그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우리 당력사에 기록된 숭고한 동지애의 일단을 정히 펼친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박송봉제1부부장은 혁명의 길에 나선 첫 시기부터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변함없이 당을 충실하게 받들어온 나의 참된 혁명동지이며 전우였습니다.박송봉제1부부장처럼 당에 충실한 사람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것입니다.》

위대한 장군님의 품은 어제날 길가의 돌처럼 버림받던 인간도 혁명의 용용한 대하속에서 충정과 실력,혁명열과 투쟁열을 지닌 혁명가로 키운 위대한 은인,은혜로운 스승의 품이였다.

 

위대한 손길

 

성스러운 조선혁명은 령도자의 위인적풍모에 매혹된 불타는 심장들이 천겹만겹의 성새를 이루고 동지애의 위력으로 류례없는 성공탑을 쌓아올린 위대한 혁명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슬하에서 인민과 혁명을 알고 선군정치의 정당성을 새기였으며 삶과 투쟁의 진리를 터득한 나날은 박송봉동지에게 있어서 혁명의 대성인에 대한 열화같은 매혹과 흠모심으로 심장을 불태운 잊을수 없는 나날이였다.

피눈물의 해를 보내고 맞은 새해 첫날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친히 보내주신 친필서한을 자자구구 뼈에 새기는 박송봉동지의 가슴에서 무한한 힘과 열정이 활활 타번지였다.

종일 달아오른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며 새해에 수행할 전투목표와 그 집행대책을 세우느라 밤늦게 퇴근한 그였다.

갑자기 전화종소리가 울리였다.위대한 장군님께서 걸어오신 전화였다.

오늘 다박솔초소를 찾아 인민군전사들과 함께 설을 쇠고 저녁에는 현지지도총화를 하고 이렇게 밤늦게 전화를 들게 되였다고,자신께서는 이제부터 군대와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려고 하는데 동무가 많이 도와주오라고 다정히 이르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음성이 그의 페부에 흘러들었다.

크나큰 믿음을 받아안은 박송봉동지는 이름할수 없는 격정에 넘친 어조로 숨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장군님의 뜻을 충정으로 받들며 따르겠다고 말씀올리였다.그때 그의 심정은 장군님께서 바라신다면 당장 타래치는 불속에라도 뛰여들 열망으로 불탔다.

이렇게 피눈물의 언덕에서 박송봉동지는 위대한 장군님의 각별한 믿음을 받으며 장군님의 선군길을 따랐으며 그 길에서 시련도 영광도 장군님과 함께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선군길에서 체험하는 가슴뜨거운 모든것은 박송봉동지로 하여금 불세출의 선군정치가이신 장군님의 참된 동지로 성장할수 있게 하는 선군혁명대학과정이기도 하였다.

겨울이면 눈바람에 소가죽처럼 꽛꽛해진 야전솜옷,성에가 허옇게 얼어붙어 고드름이 달린것처럼 보여 가슴미여지는 그 인상적인 털모자차림으로,여름이면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시면서 병사들이 나를 기다린다고 흔연히 걸음을 재촉하시는 장군님,

전 전선을 종횡무진하시는 길에서 강냉이죽 한공기와 무우오가리찬이 전부인 식탁을 마주하시고도 항일유격대원들은 식량이 떨어지면 눈을 끓여 허기진 배를 달래면서도 누구 하나 비관하지 않았다고,우리가 별의별 고생을 하여서라도 기어이 위기에 처한 조국을 수호하고 최악의 조건에서 생활하는 우리 인민들에게 하루빨리 락원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하시며 달게 드시던 장군님,

열백번도 더 쓰러질번 한 혁명과 인민을 한가슴에 안으시고 우리 장군님 헤치지 않으시면 안되는 선군혁명의 길은 얼마나 가렬처절하였던가.

걸음걸음에 피눈물이 고이는 우리 장군님의 선군길은 박송봉동지의 가슴에 우리가 흘린 피의 대가를 절대로 헛되이하지 말아야 함을 천연바위의 글발마냥 새겨주는 력사의 길이였다.

주체85(1996)년 6월 어느날도 그런 하많은 날들중의 하루였다.

아침부터 대줄기같은 찬비가 퍼부어져 사위가 온통 스산한 날 위대한 장군님께서 타신 차가 안변청년발전소건설장을 향하여 달리고있었다.서방세계가 수십억US$이상이 투자되였을것이라고 산출한 서해갑문 총공사량의 두배가 넘는 엄청난 공사,일부 나라들까지도 《도저히 불가능한 무모한 공사》라고 할 정도로 시공공정 또한 많은 과학기술적문제들을 안고있는 어려운 공사였다.이런 방대한 공사를 위대한 장군님께서 인민군대에 맡겨주시였던것이다.

발전소구조물들을 일일이 돌아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물길굴로 향하실 때였다.

갑자기 군인건설자들쪽에서 《최고사령관동지!》 하는 격정의 함성이 터졌다.장군님께서 위험천만한 곳에 절대로 들어서시여서는 안된다는 애원에 찬 눈길들이 일시에 그이를 우러렀다.

우리 인민군전사들이 희생을 무릅쓰고 건설한 물길굴인데 들어가보자.앞으로 발전소를 조업하면 물길굴을 영영 보지 못한다.물길굴에 물이 차있으면 자동차를 타고서라도 꼭 들어가보겠다!

군인건설자들도,동행한 일군들도 이름할수 없는 격정으로 설레였다.

이윽고 그이께서 타신 차가 무릎을 넘게 넘실거리는 물길굴을 누벼나갔다.

물길굴에 슴배인 사랑하는 전사들의 불굴의 희생성과 영웅적위훈을 더듬어보시는 장군님의 가슴에는 불덩이가 이글거리였다.장군님께서는 손수건을 꺼내여 눈굽을 찍으시였다.

좀더 천천히,더… 천천히 가자.우리 병사들이… 피와 땀으로 건설한 이 물길굴을 끝에서 끝까지 자세히… 보자.

위대한 장군님의 갈리신 음성에 박송봉동지의 두볼로는 뜨거운것이 줄줄이 흘렀고 심장은 금시 터질듯 높뛰였다.솟구치는 격정은 위대한 장군님의 선군정치를 받드는 결사의 길에 한몸을 초불처럼 바칠 불타는 맹세로 이어졌다.

(우리 군대의 절대성,무조건성,자력갱생,자기희생정신을 페부로 절감하라고 나를 데리고 오신 그 뜻을 내 한생 심장에 안고 우리 장군님의 선군정치를 결사의 신념과 투지로 받들리라.)

박송봉동지를 곁에 두시고 인민군대처럼 당의 의도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혁명열을 심어주시며 당정책관철에서 끝장을 보는 실천력이 강한 일군으로 키워주시는 나날에 위대한 장군님께서 들이신 품과 로고는 정녕 끝이 없었다.

온 나라가 강행군을 하던 어느해 10월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전화로 박송봉동지를 찾으시여 아무래도 다시 자강도에 가야 할것 같다고 하시면서 차비를 하고 나오라고 이르시였다.

방금 돌아온 1,000여리길이였다.

사연인즉 현지지도를 마치고 돌아오신 위대한 장군님을 기다리는 문건중에 다이야수입과 관련한것도 있었다.그 문건을 보시며 장군님께서는 참으로 많은것을 생각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생전에 다이야공장을 훌륭히 꾸려주시였는데 그 공장을 세워놓고도 비싼 값을 주고 다른 나라에서 다이야를 사온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았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다시 그 먼 1,000여리길을 되돌아갈 결심을 내리시였던것이다.

달리는 차안에서도 줄곧 다이야문제를 놓고 심려하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믿음어린 시선으로 박송봉동지를 바라보시며 다이야생산이 완전히 정상화될 때까지 동무가 책임지고 추켜세워야 하겠다고 그루를 박아 교시하시였다.

다음날 아침 드디여 목적지에 도착하였다.곧바로 공장에 갈것으로 여기였던 박송봉동지는 일순 의아해하였다.위대한 장군님께서 고산진으로 가자고 하시였기때문이였다.그러한 박송봉동지를 바라보시며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오늘 공장에 대한 현지지도에 앞서 고산진혁명사적지를 찾게 되는것은 바로 그곳이 어버이수령님께서 조국해방전쟁시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그 엄혹한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킬 위대한 구상을 무르익히신 력사의 땅이기때문이라고 강조하시였다.다이야생산에서 장훈을 부를 신심이 력연하신 위대한 장군님을 경건히 우러르는 박송봉동지의 가슴에서는 이 전투는 이미 승리한것이라는 확신으로 만세의 환호가 터져나왔다.

혁명전사에게 있어서 령도자의 믿음보다 더 고귀하고 값높은 영광은 없다.

박송봉동지의 성장의 걸음걸음에 지칠줄 모르는 활력을 부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사려깊은 손길은 류례없는 동지적믿음의 정화였다.

동무가 기본임무만 수행하재도 헐치 않다는것을 알면서도 일감이 제기되면 동무에게 과업을 주는데 량해하여달라.

동무에게 너무 많은 과업을 주어 미안한 생각뿐인데 어떻게 하겠소.나라의 경제를 추켜세우자니까 동무에게 또 과업을 주게 되는구만.참고 견디며 함께 일해나가자구.…

이렇게 믿음을 주시고 걸음걸음 이끌어주시기를 그 몇번이던가.그때마다 어머니품에 안기는 어린애처럼 어버이장군님의 품에 온몸을 묻고 그이의 옷섶을 뜨거운 눈물로 적신 박송봉동지였다.

박송봉동지를 알고있는 사람들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언제든지 그를 부르시면 튕겨일어나 달려가던 모습,장군님께서 과업을 주시면 차렷자세를 취하고 《알았습니다.어떤 일이 있어도 꼭 해내겠습니다!》라고 맹세를 다지던 습관적인 모습을 잊지 않고있다.

박송봉동지의 한생은 언제나 그 한자세,한모습이였다.

 

생의 자욱

 

령도자의 위대성을 절대불변의 신념으로 옹호하고 결사의 투신으로 받드는 혁명전사의 일편단심처럼 진실하고 순결한 감정은 없다.박송봉동지가 남긴 생의 자욱을 밟아보면 그 철리를 터득하게 된다.

원쑤들의 미친듯 한 고립압살책동,사정없이 들이닥쳐 모든것을 휩쓸어가는 대홍수,말끔히 말리는 왕가물의 계속…

박송봉동지는 나라가 위기의 최후계선에 이르렀던 시기에 위대한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민족의 존엄과 번영의 만년초석을 쌓는 길에 한몸바친 애국자이다.

끝없는 믿음이 박송봉동지의 어깨우에 덧쌓이던 주체85(1996)년 봄 어느날이였다.위대한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은 박송봉동지는 한달음에 그이께서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내가 동무를 만날적마다 강조하는바이지만 우리의 인민군대를 무적필승의 강군으로 준비시키는데서 중요한 몫을 맡아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고무격려해주시였다.

《장군님,저는 이 한몸 깡그리 바쳐 장군님께서 바라시는대로 나라의 국방력강화에 적극 이바지하겠습니다.》

평소에 수집음을 잘 타는 그였지만 위대한 장군님앞에서 맹세를 다질 때면 결사전에 나서는 병사의 자세를 방불케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으시고 충정의 결의가 담겨진 동무의 말을 들으니 힘이 솟는다고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시련의 나날 앉으나서나 그의 심장을 자석처럼 끌며 높뛰게 한 위대한 장군님의 교시가 오늘도 우리 일군들의 가슴에서 불이 이글거리게 한다.

우리 일군들이 중요한 단위들을 하나하나 타고앉아 걸린 문제들을 풀어나가면 나라의 경제를 추켜세울수 있습니다!

나는 일군들로부터 맡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는 보고를 받을 때가 제일 기쁩니다!

박송봉동지의 심장은 일군들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이런 믿음과 기대로 순간순간 뜨겁게 고동쳤다.

(나에게 맡겨진 과업만이라도 충실히 수행한다면 분과 초를 쪼개가시며 헌신하시는 우리 장군님의 부담을 얼마간이라도 덜어드릴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책임감으로 그의 마음은 늘 큰 연덩어리를 안은듯 무거웠다.

박송봉동지와 함께 일한 일군들은 그를 두고 군수산업이면 군수산업,민수산업이면 민수산업에서 막히는데가 없는 만능가였다고 말한다.하지만 그는 결코 타고난 인재가 아니였다.동력기사자격밖에 다른 전문가자격을 받은것은 없었다.

그러나 박송봉동지는 자신의 피타는 노력과 헌신으로 당앞에 다진 전사의 맹세가 법으로 되여야 한다는것을 실천으로 보여준 일군이였다.

모든 부문에 전문가이상으로 밝고 정통해야 위대한 장군님께 다진 맹세를 훌륭하게 실천할수 있다는 각오로 그는 실력을 높이기 위하여 자신을 모질게 채찍질하였다.우선 어버이수령님의 유훈과 위대한 장군님의 령도업적을 심장에 쪼아박고 모든 분야의 책을 거의나 탐독하였기때문에 그는 장군님께서 주시는 과업을 신속정확히 집행할수 있었다.

그는 우선 전반적인민경제를 추켜세우기 위한 위대한 장군님의 전략을 뼈에 새기고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이바지할수 있는 부문에서부터 돌파구를 열기 위한 결사전에 뛰여들었다.

어떤 때는 몇달이 걸려야 한다는 공장,기업소들의 실태를 단 며칠동안에 전면적으로 료해하느라 입술이 부르트고 온몸에 멍이 들 때도 있었다.추위가 뼈속까지 스며드는 날 종일 현지를 밟아보며 한지에서 일을 모색하고 작전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젊은 사람들도 베찬데 그러다가 쓰러지지 않겠는가고 걱정하는 일군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덤덤한 표정이였다.그 표정속에 위대한 장군님의 의도에 자기를 따라세우지 못하는 고충이 깔려있었다는것을 사람들은 알수 없었다.

고난의 강행군도 바야흐로 끝나가던 해 12월 어느날이였다.

온 한해 전선시찰과 현지지도의 길에 계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날씨가 제일 사나운 날에 길을 떠나시였다.여러 부문에서 자동차,자동차 하며 비싼 자금을 내여 다른 나라에서 사오는 문제를 방관하실수 없었기때문이였다.

벌써부터 관심하고 해결하였어야 할 문제때문에 또다시 위대한 장군님께서 먼길을 걸으시게 하는것이 죄송하여 장군님을 수행하는 전기간 그의 마음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공장의 실태를 료해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것을 귀중히 여기고 모든것을 자립적민족경제발전에 복종시켜야 한다고,지금단계에서는 세워놓았던 기계설비들을 가동시키고 공장을 돌리기 위한 투쟁을 벌려야 한다고,분사구도 자체의 힘으로 개조하여 앞선 나라들을 따라앞서야 한다고 하시며 공장을 살릴 방도를 밝혀주실 때 박송봉동지는 장군님의 뜻을 받들지 못하는 자기같은 일군이 열이면 뭘하고 백이면 뭘하겠는가 하는 량심의 가책으로 못내 민망스러웠다.

모든것을 자립적민족경제발전에 복종시켜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간곡한 당부가 뇌리를 치며 그를 더욱 분발시켰다.

박송봉동지는 위대한 장군님의 현지지도에 무한히 고무되여 일떠선 공장일군들과 기술자,로동자들과 지혜와 힘을 합쳐 생산활성화의 동음을 높이고 련관된 수십개의 공장,기업소들을 돌아가게 하는데 자기의 힘과 지혜를 다 바치였다.

그때의 충격적인 일을 계기로 박송봉동지는 사업에서 절대로 만족을 몰랐으며 장군님의 의도대로 자립경제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새로운 일감을 찾고 끊임없이 전개하느라 동서남북을 메주밟듯 하였다.

그는 언제 한번 생산정상화문제를 놓쳐본적이 없었다.

때로는 전화로 일군들을 만나 실태를 알아보고 제기되는 문제를 위대한 장군님께 보고드려 대책을 세웠으며 필요하면 먼길을 되돌아가서라도 대중속에 들어가 생산을 높이기 위한 투쟁에로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남들이 눈앞의 가시적성과를 놓고 자만할 때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나라의 방위력강화와 경제활성화에 묵묵히 한생을 바친 일군이였다.

그런 전사를 대견해하시며 동무도 이젠 나이가 많은데 젊은 사람들처럼 밤낮으로 뛰여다니게 하여 미안하기 그지없다고,힘들겠지만 어쩐지 일감이 생기면 동무에게 맡기게 된다고 하시며 크나큰 믿음으로 활력을 부어주신 우리 장군님이시였다.

그무렵의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박송봉동지에게 한 공장의 실태를 료해하고 오라는 과업을 주시였다.

순간 박송봉동지는 그 공장이 나라의 전력생산과 관련하여 위대한 장군님께서 관심하시는 단위인데 미리미리 실태를 보고드리지 못하여 걱정을 끼쳐드렸다는 가책으로 가슴이 저려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이런 진심의 고백을 읽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마음을 눅잦혀주시면서 동무도 여기저기 뛰여다니며 고생을 많이 하는데 함께 힘을 합쳐 오늘의 경제난국을 헤쳐나가자고 도리여 고무해주시였다.

박송봉동지로부터 공장의 실태를 보고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곧 공장을 현지지도하시고 생산을 정상화할데 대한 과업을 그에게 맡겨주시였다.

하늘같은 믿음을 받아안은 박송봉동지는 노도와 같이 일떠선 공장로동계급과 함께 위대한 장군님께서 주신 전투임무를 무조건 제기일안에 관철하고 장군님께 충정의 보고를 삼가 드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대단히 기뻐하시며 동무의 수고가 많았다고 그를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박송봉동지의 마음은 하늘을 날듯 즐거웠고 기뻤다.위대한 장군님의 전사는 이런 멋에 혁명을 하는것이라는 끓어오르는 행복감에서였다.

국사중의 국사인 백두산대국의 무진막강한 군력강화와 전력,기계공학,첨단과학기술,농업…

박송봉동지는 어느 분야나 손금보듯 환히 꿰들고있는 다재다능한 일군이였고 이를데없이 정확하고 어떤 조건과 환경속에서도 일을 흠잡을데없이 해제끼는 팔방미인형의 일군이였다.

충정과 실력,헌신적인 실천력을 완벽하게 갖춘 전사였기에 시련의 나날 위대한 장군님께서 그를 남달리 사랑하시였고 인민경제 여러 부문 사업에 대한 과업을 많이 주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믿음과 사랑이 더해갈수록 고개를 숙이는 잘 익은 벼이삭처럼 자세를 더 낮추고 많은 일감을 받기를 바란것이 그의 진모습이였다.

언제인가 위대한 장군님께서 일군들에게 사회주의를 지키고 최후승리를 위한 전환적국면을 열어나가자면 무엇보다도 농사를 잘 짓는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실 때 그이앞에 서있는것조차 죄스러워 몸둘바를 몰라한 일군,

위대한 장군님께서 전기문제를 푸시기 위하여 허리치는 눈길도 헤치시고 야밤삼경에도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실 때 자기가 일을 쓰게 하지 못하여 장군님께서 고생하시는것이라고 눈물에 젖은 얼굴을 팔소매로 훔친 일군,

자기가 오늘처럼 혁명가로 자라날수 있은것은 혁명가유자녀들을 마음껏 공부시켜 훌륭한 일군으로 키우는것을 숭고한 의리로,평생의 소원으로 여기신 어버이수령님께서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우리 유자녀들에게 아낌없이 쏟아부어주신 사랑과 은정을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다고 쪼아박은 자서전을 자나깨나 잊지 않고 혁명의 수뇌부가 내놓은 로선과 정책을 어떻게 관철하여야 하는가를 실천적모범으로 보여준 충신,

우리 당과 인민의 추억속에 고난의 행군,강행군시기의 충신으로 영생하는 박송봉동지는 오직 령도자의 사상과 뜻에 살고 자기의 령도자와 진정으로 생사운명을 함께 한 우리 당의 참된 아들이였다.

우리 혁명의 선군정치사에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긴 박송봉동지의 불타는 충정과 비상한 헌신의 원천에 대하여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박송봉동지가 천만금보다 귀중한 령도자의 믿음을 받아안은 혁명전사에게는 령도자를 신념과 의리로 받들려는 진심,오직 이것만 있으면 무에서 유도 창조할수 있다는 혁명가의 인생철학,백두에서 개척된 주체혁명의 길에는 혁명화된 일군,실천가형의 일군만이 요구된다는 철리를 체질화하였기때문이였다.

 

사랑의 대하

 

고난의 행군,강행군시기를 대표하는 일군인 박송봉동지가 조국과 인민앞에 공적을 세울수 있은 비결은 명실공히 천금주고 살수 없는 위대한 동지의 사랑이였다.

자기를 모래알같은 존재로 느끼던 전사도 불사신으로 키워주고 산악도 격랑도 넘고 헤쳐 선군혁명의 대업을 이룰수 있다는 필승의 신념을 억척으로 다져준 위대한 동지의 품이 우리 장군님의 웅심깊은 정과 열의 품이였다.

조국이 시련을 겪던 어느해 겨울이였다.

아침일찌기 위대한 장군님께서 주신 임무를 받은 박송봉동지가 막상 길을 떠나려고 밖에 나서니 바람이 불고 진눈이 내리고있었다.

멀리 떠나는 전사를 바래주려고 밖으로 나오시다가 점점 굵어지는 눈발을 보신 장군님께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였다.

《가지 마시오.이런 날씨에 길에 나섰다가 큰일을 치겠소.》

순간 박송봉동지의 뇌리에 번개처럼 떠오르는것이 있었다.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해 초겨울 어느날에 있은 일이였다.

그날도 위대한 장군님께서 주신 과업을 집행하기 위하여 먼 지방에 갔다 돌아오던중 그는 뜻밖의 차사고로 하마트면 큰일을 당할번 하였다.혈육처럼 아끼는 전사의 신상에 닥친 사실을 아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다리시다가 마침내 그가 도착하자 와락 껴안으시고 눈물에 젖은 음성으로 곱씹으시였다.

《살아왔구만,살아왔어.》

장군님께서는 다시 어버이품에 안긴 행복으로 눈물범벅인 그의 두볼을 씻어주시고 쓰다듬어주시면서 다시 꼭 품어주시였다.잃을번 한 자식을 찾은 어머니의 모습그대로이시였다.

《동무가 잘못되면… 내 어디 가서… 동무같은 사람을 만날수 있겠소.》

수건으로 젖어든 눈굽을 찍어내시다가는 다시 가까스로 말씀을 이으시는 위대한 장군님,

정말 상한데가 없는지 안심치 않으시여 서둘러 전사의 어깨며 팔이며 다리를 세세히 만져보시기를 그 몇번…

《아버지!》

박송봉동지는 저도 모르게 꼬꾸라지듯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목놓아울었다.세상에 태여나 처음 불러보는 아버지였다.

그를 부여잡으신 장군님의 어깨도 그냥 들먹이고있었다.…

그날의 일을 상기할수록 우리 장군님의 어깨우에 실린 무거운 짐을 덜어드리는 길에서 날씨를 가린다는것은 상상할수 없는 일이였다.

전사의 얼굴에서 이런 각오를 읽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러니까 기어이 가겠단 말이지라고 외우시더니 잠간 있으라고 하시고는 급한 걸음으로 방으로 되돌아가시는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의 손에 종이에 싼 자그마한 꾸레미를 들려주시면서 로상에서 무슨 일이 생겨 지체되면 필요할것이라고,꼭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고 명령조로 당부하시였다.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점도록 눈발속에 서계시는 장군님의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박송봉동지는 오열이 북받치는것을 금치 못하였다.

차가 얼마쯤 달리였는지… 종이꾸레미에 눈길이 미치여 펼쳐보는 순간 박송봉동지의 목에서 뜨거운것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시장하실 때마다 드시는 강냉이펑펑이가 아닌가.

그의 두볼로는 물목이 터진듯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리였다.

사랑하는 자식을 남에게 맡기고 혁명의 길을 떠나는 날 치마괴춤에서 사탕을 꺼내 손에 쥐여주며 울지 말라고 달래던 어머니,수십년세월이 흐른 오늘 그 어머니의 어렴풋한 모습이 다시금 우렷이 떠올랐다.

점점이 떨어지는 눈물이 종이꾸레미를 화락하니 적시였다.…

위대한 평민의 귀감으로 전사들을 키우신 장군님의 슬하에서 자란 박송봉동지는 한생 사업과 생활에서 성실하고 검소하였으며 그의 마음속에는 사심이 앉을 자리가 없었다.함께 일하는 일군들의 신상에 대하여서는 그처럼 다심하게 관심한 일군이였지만 안해가 10여년간 중병으로 앓아 자리에 누워있는 사정은 좀처럼 내비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결곡하고 고정한 성품을 귀중히 여기신 우리 장군님께서만은 전사의 가정에 대하여 늘 사려깊이 관심하고계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박송봉동지가 앓는 안해때문에 마음이 가볍지 못할것이라는데 대하여 늘 생각하고계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함경북도안의 인민경제부문을 현지에서 지도하고계시던 어느해 3월이였다.

하루는 박송봉동지가 어느 한 공장을 료해할데 대한 장군님의 과업을 집행하고 장군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장군님의 안색이 여느때없이 어두우신게 아닌가.가슴속에 이름 못할 불안이 갈마들었다.

이윽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동무의 안해가 뇌혈전이 재발되였다고,여기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먼저 평양에 돌아가라고 이르시였다.어조는 담담하였지만 기색은 단호하시였다.

하지만 끼니마저 번지시며 현지지도의 길에 계시는 위대한 장군님께 뒤일을 다 맡기고 먼저 돌아갈수는 없었다.

그의 이런 내심을 읽으신듯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러지 않아도 동무가 먼저 혼자 갈리 없고 또 혼자 간다 해도 내가 마음을 놓을수 없다,계획하였던 대상들을 빨리 돌아보고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시였다.

그의 가슴으로는 위대한 어버이의 품에 온 가족의 운명을 다 맡기고 사는 행복의 파도가 끝없이 밀려들어 벅차오름을 금할수 없었다.

귀로에 올라 평양으로 달리는 렬차안에서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줄곧 전사에게 마음이 쏠리시여 위로하고 격려해주시며 육친적인 사랑을 부어주시였다.

어느덧 렬차가 평양에 도착하였을 때는 새벽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안해가 입원중인 그의 집사정을 헤아리시고 자신과 함께 가자고 하시였다.

당황해난 박송봉동지가 거듭 사양의 말씀을 올리였지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의 손목을 이끌어 댁으로 데리고 가시였다.그러시고는 간소하지만 함께 식사하자고 그를 식탁으로 이끄시였다.

박송봉동지는 참았던 눈물을 터치며 어린애처럼 소리내여 울었다.

위대한 어버이의 품에 안겨사는 혁명전사들만이 흘릴수 있는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행복의 눈물이였다.

《너무 걱정말고 어서 드시오.벌써 몇끼를 번지였는데 속이 비면 탈이 날수 있소.동무가 건강해야 앓고있는 안해도 반가와할게 아니요.》

못내 갈리신 장군님의 음성이 그의 귀전에서 울리였다.

《장군님,그래서 그런게 아…닙니다.》

내 동무의 마음을 다 안다.그러니 한술이라도 들라.그래야 내 마음도 편할게 아닌가.…

장군님께서도 전사도 끝내는 한술도 들지 못한 아침식사였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의 안해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전사의 등을 떠밀어주시였다.

병원에서 최선을 다하여 치료해주는데 자기가 찾아간댔자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는 생각,전사의 위치는 항상 장군님께서 주신 과업을 한시바삐 수행하는 주로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는 곧장 사무실로 갔다.

그런데 잠시후 갑자기 전화종소리가 다급히 울리였다.위대한 장군님께서 걸어오신 전화였다.

내가 생각한게 틀림없구만.병원에 가라고 그만큼 부탁하였는데 왜 가지 않고 도대체 무얼 하고있소.그렇게 간곡히 부탁하면 들어주는척이라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엄한 질책이였지만 그 곡진한 진정에 전사의 심신은 막 녹아내리는것 같았다.

(아,어버이장군님! 백천번 불러도 또 부르고싶은 우리 장군님!

과연 어떤 진정을 고이면 대해같은 그 사랑에 다소나마 보답하게 될것인가.)

심장에 불을 안은듯 한 그의 가슴에는 이런 불타는 맹세가 고패쳤다.

박송봉동지의 한생은 그날의 맹세를 사무치게 간직하고 열화같은 충정,불굴의 노력으로 실천한 충신,의리,량심의 한생이였다.

행복에 눈물짓고 맹세속에 분발하여 마치 강변의 막돌이 쉬임없는 물결에 정갈하게 다듬어지듯 위대한 장군님의 충직하고 미더운 선군혁명동지로 성장한 값높은 생이였다.

이런 충신이였기에 졸지에 그를 잃은 우리 장군님께서는 억장이 무너지는것 같고 눈앞이 캄캄하시였다.

3살때에 연길대대 정치위원으로 활동하던 아버지 박길을,5살때에는 지하혁명투쟁에 참가하였던 어머니마저 일제놈들에게 무참히 빼앗기고 거치른 이국땅에서 별의별 고생을 다한 박송봉,

평소에는 눈에 잘 띄지 않게 조용하였지만 일단 일에 착수하면 무서운 질군인 전사,금시라도 부르면 힘차게 대답하며 달려올것만 같은 사랑하는 동지,

너무도 일찍 부모를 잃고 혈육의 사랑을 모르고 산 전사여서인가,늘 일감을 부여안고 일에 다몰려 단란한 휴식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전사여서인가 시련의 나날 그와 함께 헤치신 멀고먼 길에 아픈 추억을 얹으신 그이의 애석함은 형언할수 없으시였다.

《그는 지난 6년간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강행군시기에 나를 따라다니면서 숱한 일감을 맡아가지고 한몸바쳐 일하였습니다.그가 수행하던 과업을 누가 대신할수 있겠는지 모르겠습니다.정말 아까운 일군을 잃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어려울 때 힘을 준 동무입니다.

박송봉동무만큼 나에게 충실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 당의 훌륭한 아들이며 나의 가장 충직한 전우!

나의 6년동안의 혁명활동에서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는 일군!

이것은 조국과 혁명,당과 인민을 위하여 생의 흔적을 뚜렷이 남긴 충신의 한생의 총화인 동시에 혁명전사들이 죽어서도 떠나지 못할 위대한 동지의 추억의 세계에 깊이 뿌리내린 박송봉동지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영원한 사랑이고 최상최대의 평가였다.

 

* *

 

무릇 인생은 짧아도 사랑은 길다는 말이 있다.

우리 매 전사들의 고귀한 삶도 그 품에서 꽃펴났고 천만의 철의 대오를 일심으로 뭉쳐주는 사랑도 그 품에서 영원한 위대한 장군님의 품,

은혜로운 그 태양의 품에서 혁명전사들의 생이 빛나고 조국의 부강과 전진에 이바지한 전사들의 공적도 영원한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영원한것은 혁명의 지휘성원들을 당과 인민을 위하여 헌신하는 혁명가로 키워주시고 혁명적성장의 눈부신 경지를 개척하신 위대한 령도자,위대한 스승의 불멸의 업적이다.

위대한 태양의 품에 안기고 뜨거운 손길에 이끌리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태여나 시대의 절정에서 만민의 각광을 받는 삶을 빛내여가고있는것인가.

조선의 첫 세대 공산주의자들이 지니였던 한별정신을 계승하여 위대한 장군님을 받들어 로동당시대를 빛내인 당의 기초축성시기의 일군들과 고난의 행군,강행군시기 강성국가의 초석을 억척같이 다진 일군들,

경애하는 우리 원수님께서 자주 그 이름 외우시는 일군,그이의 추억속에 나라의 국방력강화에 특출한 공적을 남긴 일군으로 영생하는 박송봉동지,

위대한 조선로동당의 품에서 교양육성된 충신들의 빛나는 삶은 최후승리를 향하여 혁명열과 투쟁열로 피를 끓이며 산악같이 떨쳐나선 위대한 김정은시대의 일군들의 투쟁을 과감히 고무추동할것이다.

본사기자 량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