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5월 31일 로동신문

 

혁명의 길에 바쳐진 고귀한 한생

리보익녀사의 탄생 140돐을 맞으며

 

우리 조국땅 그 어디에나 만경대혁명일가분들의 애국의 넋이 살아숨쉬고 불멸의 발자취가 력력히 어려있어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준다.

얼마전 우리는 모진 가난과 고역속에서도 지조와 절개를 지켜 굳세게 사신 열렬한 애국자 리보익녀사의 탄생 140돐을 맞으며 오류혁명사적지를 찾았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할머니가 품고있던 소박하나 간절한 꿈은 나라의 독립이였습니다.조선의 독립을 기다리며 그 독립을 위해 싸우는 자손들을 돌보아주고 그들의 뒤바라지를 성실하게 해주는것이 할머니의 일이고 락이였습니다.》

우리가 오류리소재지마을을 지나 나지막한 둔덕에 오르니 정갈하게 꾸려진 혁명사적지가 한눈에 안겨왔다.

우리 나라 농촌 그 어디서나 볼수 있었던 수수한 농가였다.

우리는 사적지의 교양마당에서 이곳 강사 리광희동무를 만났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녀사께서 탄생하신 추녀낮은 초가집으로 걸음을 옮기던 우리는 혁명사적표식비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거기에는 리보익녀사께서 1876년 5월 31일 이 집에서 탄생하시였으며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께서 이 집에 자주 오시여 청소년들과 독립운동자들을 반일애국사상으로 교양하시였다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비문에 씌여진 글줄을 한자한자 새겨가는 우리의 가슴에 리보익녀사에 대한 잊지 못할 추억이 뜨겁게 되새겨졌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초가집은 몇㎡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단칸방과 부엌으로 되여있었다.방으로 드나드는 문조차 웬만한 어른은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될만큼 낮았다.

이 좁은 단칸방에서 리보익녀사의 다섯식구가 생활하였는데 방이 너무 좁아 쪼그리고 자지 않으면 안되였다고 한다.

이처럼 눈물겨운 생활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신 리보익녀사께서는 1880년대 말경에 만경대로 가게 되시였다.

만경대에 시집을 오시여서도 가난한 생활은 여전하였다.후날 식솔많은 집안의 큰살림을 맡아안으신 리보익녀사께서는 가정생활이 곤난하였지만 자제분들과 손자분들을 조국해방을 위한 혁명의 길에 내세우시였다.결코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한 가정을 돌보자고 해도 힘들었던 당시로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혁명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자신보다 먼저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열렬한 애국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용단을 내릴수 있겠는가.

자손들에 대한 리보익녀사의 사랑은 극진하였다.

그것은 가정에서의 부모의 사랑에 국한된것이 아니라 자손들을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참된 혁명가로 키우는 뜨거운 정이였고 손길이였다.

그처럼 고결한 뜻을 지니시였기에 리보익녀사께서는 사랑하는 아드님들과 손자분들을 혁명의 길로 서슴없이 떠나보내실수 있었고 그 길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실수 있었다.

리보익녀사께서 먼길을 걸으시여 무송의 양지촌에 있는 김형직선생님의 묘소를 찾으신것은 주체15(1926)년,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께서 서거하신 해였다.

리보익녀사께서 무송의 양지촌에 있는 김형직선생님의 묘소를 찾으시였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였으랴.

하지만 리보익녀사께서는 절망하거나 락심하지 않으시였다.

그날 리보익녀사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 증손아,이제는 아버지가 메고있던 짐을 네가 메야겠구나,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어이 나라를 찾아야 한다,나나 어머니에게 효도를 못해도 좋으니 조선을 독립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거라라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를 잊지 못하시며 자신께서는 할머님의 그 말씀에서 큰 충동을 받았다고,만일 그때 할머니가 조선독립이 아니라 앞으로 부자가 되거나 출세할 생각이나 하라고 하였더라면 나는 그다지 큰 감동을 받지 못했을것이라고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가난하고 불행하고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그지없이 상냥하고 부드럽지만 사람같지 않은자들에게는 추상같이 무서운것,그 어떤 강권이나 불의앞에서도 휘여들지 않는것이 바로 리보익녀사의 성미이고 기개였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귀순공작》사건은 리보익녀사의 강의한 신념과 굳은 절개를 보여주는 전설같은 이야기로 오늘도 만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고있다.

일제는 리보익녀사께 여러차례 《귀순공작》에 응하라고 설교도 하고 강제로 끌어내기도 하면서 어떤 때는 1년가까이 서간도의 산악지방으로,그후에는 만주벌판으로 끌고다니였다.

이때에도 리보익녀사께서는 힘들어도 내 손자가 싸우고있는 산천을 보니 기운이 솟는다고 하시며 원쑤들을 전률케 하시였다.

년로한 몸으로 온갖 고생을 다 겪으시면서도 혁명일가의 존엄과 기개를 조금도 굽히지 않으신 강의한분이시기에 일제의 강요로 다시 만주땅을 밟으시였을 때에도 항일유격대가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으시면 《내 손자가 장하다! 어서 왜놈들을 다 잡아치우고 우리 나라 땅에서 왜놈들의 씨를 말려라!》라고 기세를 올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할머님의 강직한 성품을 너무도 잘 알고계시였기에 일제가 할머님까지 만주의 설한풍속에 끌어내였다는 소식을 들으시였을 때에도 사사로운 인정에 묻히신것이 아니라 일제에 대한 천백배의 복수심을 굳히시며 원쑤격멸의 총성을 더 높이 울리시였다.

리보익녀사께서 남기신 고생의 흔적은 오늘도 만주의 산야에 점점이 찍혀있다.

리보익녀사께서 총 한자루 없는 몸으로 적들을 전률시킬수 있은것은 신념과 의지가 강하고 미래에 대한 신심이 확고하시였기때문이다.

일제의 폭압이 절정에 달하였던 시기에 늙으신 몸으로 적들의 강권과 위협에 휘여들지 않고 혁명가의 할머님으로서의 존엄과 지조를 끝까지 지킨다는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만주땅에서 돌아오신 리보익녀사께서는 한동안 여기 오류리에 계시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조국해방의 그날을 그려보며 굳세게 사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회고하신것처럼 리보익녀사는 직업적인 혁명가가 아니였다.

학교를 다니신적도 없었고 조직적인 교양을 받으신 일도 없다.

하지만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혁명은 반드시 승리할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안고계시였기에 원쑤들의 그 어떤 박해와 고초,모진 시련과 난관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적들과 그처럼 당당히 맞설수 있었으며 마침내 해방의 날을 맞으실수 있었다.

해방후 고향집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을 부둥켜안으시고 아버지,어머니는 어데다 두고 이렇게 혼자 왔느냐,… 같이 오면 못쓴다더냐라고 하시며 눈물지으시던 리보익녀사,

끌끌하던 자손들이 조국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스무해사이에 한줌 흙이 되여 낯선 산천에 뿔뿔이 흩어졌으니 녀사의 심정이 그 얼마나 아프고 쓰리시였으랴.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20년만에 고향집에 오면서도 할아버지,할머니앞에 빈손으로 왔다고 말씀드리자 녀사께서는 왜 빈손이란 말이냐,독립이 얼마나 큰 선물이냐! 네가 성한 몸으로 해방을 안고왔으니 나는 그이상 더 바랄게 없다,네가 크고 해방이 크지 세상에 더 큰게 뭣이 있겠니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렇듯 녀사께서는 쓰라린 아픔,겪으신 고생은 한가슴에 다 묻어두시고 나라의 해방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가장 크고 귀중한것으로 여기신 열렬한 애국자이시였다.

그 어떤 특전특혜도 바람이 없이 끝없는 헌신과 열렬한 애국의 넋으로 심장을 불태우신 리보익녀사의 한평생은 우리 천만군민의 가슴마다에 이런 불변의 진리를 새겨주고있다.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끝없는 헌신성,그것이 곧 가정을 위하는 길이며 혁명위업의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만 있으면 두려울것도 없고 못해낼 일도 없다는것을!

조국과 인민을 위한 성스러운 혁명의 길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신 리보익녀사의 고귀한 혁명생애는 오늘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높이 모시여 더욱 빛나고있다.

본사기자 전광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