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6월 9일 로동신문
추녀낮은 귀틀집에서 펼쳐주신 황금산의 력사 위대한 수령님께서 양덕군 은하리 구지골에 새기신
조국을 선조의 땅이라고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나라의 강산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아오는 옛대로의 산천이 아니다. 황금산,황금벌,황금해! 우리 조국강토의 인민적성격을 규정짓는 이 시대어들에는 얼마나 심오한 력사적의미와 풍부한 사료,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담겨있는것인가. 그것은 그대로 백두산절세위인들의 불멸의 령도사적이고 고결한 애국정신의 정화이며 숭고한 인민사랑의 응결체이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황금산의 력사를 펼쳐주신 구지골. 력사의 그날로부터 세월은 어느덧 69번째의 년륜을 감아가고있다. 우리는 흐르는 세월도 감히 망각의 이끼를 덮지 못하는 양덕군 은하리의 구지골이야기를 삼가 더듬어 어버이수령님께서 어떤 심혈과 로고를 바쳐 황금산의 력사를 창조하셨는가를 세상에 전하게 된다.
화전민들을 찾아 걸으신 력사의 오솔길
구지골의 추녀낮은 귀틀집앞에 우리는 서있다. 통나무로 사개를 맞추어 벽체를 쌓고 초가이영을 올린 어설픈 귀틀집.바깥벽체 여기저기에 걸려들있는 피나무껍질로 만든 초신이며 호미와 낫이 든 망태기,새초와 나무줄기로 엮은 닭둥지… 해방전 화전민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안겨오는 귀틀집이다. 강태죽과 고콜불,등거리가 화전시대를 특징짓는 3대상징물이라는것을 어느 책에선가 보았던 우리였지만 원상대로 보존되여오는 이 귀틀집앞에 서고보니 화전생활의 비참상에 가슴이 뻐근해왔다. 우리와 동행하였던 은하혁명사적지관리소 소장 김명숙동무는 이 귀틀집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실 때까지만 하여도 리로인네 3대에 달하는 식구들이 살고있었다고 하였다.왜놈들의 극악한 징병과 징용,강제공출을 피하여 리로인네가 1940년 1월에 이 귀틀집을 짓고 숨어살기 시작했는데 그후 화전민귀틀집들이 구지골의 여기저기에 생겨났다고 한다.구지골은 은우리(오늘의 은하리는 은우리와 하청리가 합쳐진 리)의 지경안에 있었는데 그 지명은 골짜기가 깊고 숲이 무성하여 소가 숨어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붙은것이라고 한다. 왜놈의 미운 꼴을 보지 않게 된것은 좋았지만 인간세상과 떨어져 올망졸망한 산비탈의 부대기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자니 늘쌍 궁핍에 쫓기우는것이 화전민들이였다.리로인네 아래방 장농우에는 노닥노닥 기운 포단 하나가 있었는데 추운 겨울에는 그 포단이 손자들에게 차례지고 어른들은 화로불을 피워놓고 긴긴밤을 보냈으며 막부득하여 바깥출입을 할 때에는 옷 한벌을 엇바꾸어입었다고 한다. 일제는 망하고 나라는 해방되였으나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곳을 찾으신 그날까지도 구지골사람들의 화전민생활은 계속되고있었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어이하여 궁벽한 산골군인 양덕군,양덕치고도 심심두메 화전민들의 부락인 구지골에 오시였던가. 바로 거기에서부터 만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사연이 깃들어있다. 우리는 수십년간 이곳 사적지에서 일해온 김명숙동무의 이야기를 들으며 력사의 사연을 더듬어갔다. 해방된 이듬해 11월 평양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도밑에 평안남도인민회의가 열렸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도인민위원회 위원장의 보고가 끝나자 평남도에서 제일 잘사는 군과 못사는 군이 어디인가고 물으시였다. 도인민위원회 위원장이 잘사는 군은 안주군(당시)이고 못사는 군은 양덕군이라고 말씀드렸다.그의 말을 주의깊게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그럼 양덕군위원장부터 토론하라고 하시였다. 양덕군위원장은 토론에서 식량은 군안의 인구 한사람당 한해에 90㎏ 차례진다는것과 공부해야 할 나이인 4,000명중에서 1,000명밖에 배우지 못하는 군의 실정을 그대로 보고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양덕군인민들의 생활을 두고 못내 가슴아파하시면서 양덕군과 같이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군들은 국가적으로 크게 구제해주어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순간 회의장에는 감격의 파도가 일어번졌다.산골군인민들의 생활을 념려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뜨거운 사랑이 가슴에 미쳐와서였다.하지만 그때까지도 일군들은 우리 수령님의 심중에서 어떤 구상과 계획이 무르익고있으며 그이의 정력적인 령도에 의해 장차 산골군인민들의 생활에서 어떤 전변이 일어날것인지 예측할수 없었다. 백성의 가난구제는 나라도 임금도 못한다는 격언이 수천년을 내려오며 세상에 굳어지지 않았던가. 주체36(1947)년 9월 동해안의 수십개 단위를 련이어 현지지도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피로가 겹쌓이셨지만 이번 길에 양덕에 들려보자고 하시며 로정을 바꾸시여 평양이 아니라 양덕으로 향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타신 승용차가 아호비령을 넘어 양덕군에 들어섰을 때 그이께서는 이런 산골을 볼 때마다 가난하게 살던 화전민들의 모습이 선히 떠오른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나는 지금도 화전민들의 생활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이곳 인민들의 생활형편도 알아보고 산골사람들이 산을 잘 리용하여 벌방부럽지 않게 잘살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갑시다.》 동양면(당시)의 네거리에 차를 세우시고 조마당질을 하는 농민들과 농사이야기를 나누시는 과정에 수령님께서는 양덕군치고 제일 못사는 리가 어디인가,화전민들이 제일 많은데가 어디인가를 또다시 물으시였다.농민들은 은우리 구지골이라는 곳에 《감자바우》로 불리우는 화전민들이 사는데 그들의 생활이 제일 한심하다고 말씀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타신 승용차는 은우리 구지골로 향하였다.은우리의 도로는 울퉁불퉁한 달구지길이였다.강에는 다리가 따로 없었다.더미여놓은 통나무우로 사람과 소발구가 다니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지를 걷어올리고 건느기도 하시고 차를 밀기도 하시면서 구지골어귀에 당도하시였다.그나마의 길마저 여기에서 끊기였다. 수령님께서는 차를 세우시고 산비탈로 난 오솔길에 들어서시였다. 그 오솔길은 이따금씩 장에 소금을 사러 가는 화전민들밖에는 누구도 다닌적이 없는 길이였다. 물때가 오른 징검돌을 건느기도 하시고 우거진 덤불을 헤치며 걸음을 옮기기도 하시였고 무성한 나무아지는 휘여가르며 험한 산비탈길을 톺아오르시는 위대한 수령님, 우리 수령님의 한평생은 인민을 위해 세월의 눈비를 다 맞으며 걸으신 위대한 사랑의 길이였다.새 나라의 주인으로 내세우신 인민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살게 하는것을 정치의 천하지대본으로 삼으신 우리 수령님께서 심혈과 로고를 바치여 내신 첫길이 이 나라 방방곡곡에 얼마나 많은가. 해방된 이 땅에서 제일 못사는 화전민들을 찾아 위대한 수령님 굳이 헤치신 구지골의 오솔길,력사의 그 오솔길을 따라 산골사람들에게 복리를 안겨줄 황금산이 다가오고있었다.
그날은 추석이였다
오후 6시가 되였을무렵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구지골어귀의 리로인네 귀틀집에 이르시였다.장정들은 밭에 나가고 팔순에 이른 리로인이 수령님을 맞이하였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사를 하시며 로인의 험한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런 깊은 산골에까지 오시리라고는 생각 못했던 리로인은 그이의 인자하신 인품에 이끌려 어디선가 꼭 한번 뵈온분같은데 군에서 오신 간부인가고 물었다. 수령님께서는 웃으시며 볼일이 있어서 부락에 들렸다고 하시였다.그러시고는 집구경을 좀 하자고 하시며 아래방과 웃방,창고,외양간까지 다 돌아보시였다.그런데 소구유와 작두까지 마련된 외양간에 소는 없었다.사연을 물으시는 그이께 로인은 소를 가지고 농사를 짓는것이 소원이여서 외양간을 지어놓았는데 소를 사매지 못했다고,소방울도 마련해놓고 시장에 여러번 다녔는데 돈이 모자라 소를 사지 못했다는것을 말씀드렸다. 벌방사람들은 분여받은 땅에서 첫해 농사를 지어 다 소를 사맸는데 여기 산골사람들은 두해 농사를 지으면서도 아직 소를 사매지 못했다고 생각깊으신 어조로 일군들에게 교시하시는 우리 수령님의 안색에 그늘이 비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웃방 터실터실한 멍석에 허물없이 앉으시여 로인과 이야기를 나누시였다.산과실은 무엇이 있는가,산나물과 나무는 어떤것이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물으시는 위대한 수령님께 리로인은 산열매는 머루,다래,돌배,잣도 있고 도토리도 있는데 도토리는 조나 감자에 섞어서 식량으로 보태 먹고 다른 산과실들은 아이들의 군입질로나 쓰이며 약초도 있는데 짓찧어서 상처에 붙인다는것을 자초지종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앞으로 산과실이나 산나물,약초들은 밑천을 들이지 않는 큰 수입으로 될수 있다고 하시며 약초나 산과실,산나물들을 채취하여 국가에 팔면 국가에서는 그것으로 인민들의 건강증진에 필요한 약품과 식료품들을 생산하게 되므로 산골사람들은 밑천을 들이지 않고 따서 팔기만 하면 되니 많은 수입을 얻을수 있다는것을 구수하게 이야기하시였다. 처음에 리로인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그것은 안사람의 용돈이나 되지 무슨 세간살이에 도움이 되겠는가고 하는 로인이였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무라지 않으시고 친절하게 그 리유를 설명하시였다. 그제서야 로인은 어른의 말씀을 듣고보니 이 앞산이 다 돈낟가리로 보인다고 무릎을 철썩 쳤다.그런 구수한 이야기를 우리 동네사람들에게도 해달라고 스스럼없이 말씀드리던 로인이 뜻밖에도 수령님께 그런데 어른의 태생은 과연 어디인가고 묻는것이였다. 자신께서도 농촌에서 자랐다고 하시며 우리 수령님께서는 빙그레 웃음지으시였다. 로인은 내 예측이 꼭 맞았다고,어쩐지 농사물계에도 훤하고 산리용에도 밝다고 생각했다면서 더없는 친근감을 나타내였다. 그리고는 어른같은 농촌태생이 군에 있어야 합지요,그러지 않고서야 천하지대본인 농사를 옳게 지도하겠습네까,허기야 지금 우리 기관에는 어른같은분들이 많으니 농사일도 나라일도 바로잡혀간다고 하면서 어느덧 시간이 흘러 황혼이 깃들무렵이였다.위대한 수령님께서 로인과 겸상하시였는데 한 젊은이가 문앞에서 어쩔바를 몰라하는 로인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할아버지,어서 진지를 드십시오.이제는 서로 알게 되였고 또 면위원장동무도 왔으니 더욱 좋지 않습니까.저에게도 할아버지와 같은 조부가 계십니다.어서 드십시오.자,면위원장동무도 같이 식사를 합시다.》라고 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에 창황하던 마음이 좀 가라앉은 로인은 장군님,참말로 죄송합니다,장군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그만… 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할아버지,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할아버지께서 천하지대본인 농사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저도 이런 고장의 형편을 잘 알아야 할게 아닙니까.》 《장군님! 그런데 어찌하여 소문없이 이런 벽지에까지 찾아오셨습니까.참,장군님께서 우리 집에까지 오시다니.》 잠시후 로인은 협낭에서 자그마한 목책을 꺼내 그 책에 실로 매단 꽁다리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정히 쓰고나서 여기에다 그러는 로인에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말씀하시였다. 《할아버지,그보다도 모든 산에서 황금을 따내라고 적어서 자손들에게 물려주십시오.》 모든 산에서 황금을! 우리 수령님의 말씀에 담겨있는 사랑의 무게가 로인의 가슴을 지르르 울리였다.해빛마저 스며들기 저어하는 심심산골 막바지에까지 찾아오시여 주시는 사랑,천만번 력사에 기록되여야 할 절세위인의 사적이건만 그것은 뜻하지 않으시고 지지리도 못살던 화전민들이 대대로 유족한 생활을 누릴것만을 념원하시며 그 밝은 앞길을 열어주시는 한없이 은혜로운 사랑,세상에 사랑이라면 이보다 더 크고 따사로운 사랑이 언제 있어보았던가고 로인은 생각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귀틀집로인에게 하신 그 교시가 유명한 명제가 되여 황금산의 력사를 펼쳐가도록 온 나라를 힘있게 추동하였으니 사람들이여,황금산,황금벌,황금해의 인민을 위한 그 모든 황금의 시원이 구지골의 화전민귀틀집에서부터 열리였음을 부디 잊지 마시라. 그날 저녁 귀틀집에는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었다.수령님께서는 등잔심지를 돋구어가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 들어주시고 잘살 방도를 밝혀주시였다.산을 잘 리용하여 밑천이 들지 않는 부업들을 크게 하라고,이 산들에 황금이 가득 쌓여있다고 하시는 어버이수령님, 우리 수령님께서는 한평생을 이렇듯 인민들속에 계시였다.인민들과 언제나 같은 공기를 호흡하시며 때로는 그들의 몸에서 나는 땀냄새,거름냄새도 허물치 않으시고 친근하게 담배도 권하시면서. 인민의 생활형편을 누구보다 깊이 헤아려주신분이 수령님이시였고 인민의 걱정,근심을 자신께서 푸셔야 할 문제로 차곡차곡 심중에 쌓아놓으시고 로고를 바치신분이 우리 수령님이시였다.인민과 생사를 같이하신 그이이시였기에 그들의 소박한 이야기에서,평범한 생활체험의 실마리들에서 인민을 위한 정책을 이끌어내시며 정치를 펴나가신 우리 수령님이시였다. 그날 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로인네 귀틀집에서 쉬게 되시였다.그이께서는 리로인이 내놓는 포단을 끝내 사양하시였다. 항일의 전장도 아닌 해방된 조국땅에서 귀틀집에,그것도 변변한 이부자리도 없이 수령님을 모시게 된 수행일군들의 심정은 민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밤은 바닥없이 깊어가는데 그이께서는 웃방에 들여놓은 화로불을 이리저리 뒤지기도 하시고 목침을 세웠다눕혔다하기도 하시였으며 마당에 나오시여 오래동안 거닐기도 하시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시였다.결코 자리가 불편하시여서가 아니였다. 9월 29일,그날은 바로 추석이였다.이날이면 우리 수령님 세상의 그 누구보다 생각이 많으시였다.수령님 한생토록 잊지 못하시여 그들의 사후에까지 태양의 은혜로움으로 보살펴주신 지사들과 선렬들,전사들이 천이였던가,만이였던가. 더우기 그날의 추석만은 수령님께서 꼭 만경대에 가셔야 하였다. 바로 두달전,석달전에 이국땅에 안치되였던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어머님의 유해를 만경대에 옮겨모시였기때문이였다.천묘하여 첫 추석이였다. 항일혁명투사들은 우리 인민의 절절한 념원을 반영하여 해방직후부터 여러차례나 위대한 수령님께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어머님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올데 대하여 말씀드리였었다.조국에 개선하신 후 렬사들의 유가족을 찾는데 마음쓰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마다 지난날 산에서 같이 싸우던 동지들과 그 부모들도 적지 않게 이국땅에 묻혀있는데 어떻게 자신의 부모님이라고 하여 먼저 모셔오겠는가고 하시며 미루어오시였다. 그러던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경대에 다녀오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로부터 조부모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내용을 전해듣게 되시였다. 이제는 우리 나이도 많다보니 생각이 깊어진다고,너의 시부모로 말하면 다 나라찾는 일에 몸을 바쳤는데 광복이 된 오늘에는 죽은 넋이라도 제 나라 땅에 묻어주어야 우리 마음도 편할게 아닌가고,나라가 해방된지 두해가 잡히도록 이국땅에 남아있는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하셨다는 조부모님의 말씀… 하여 푸른 소나무들이 설레이는 만경봉기슭,대동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부모님을 모시였는데 첫 추석마저 가보지 못하신채 멀리에서 그 긴긴밤을 보내셔야 하는 우리 수령님의 마음 어떠하시였으랴. 그리운 고향 만경대에 가시여 부모님 생전에 못다한 효성을 얼마간이라도 바치여도 되시련만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어머님의 맏아드님이실뿐아니라 만경대가문의 맏장손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느 집 자제들처럼 선친들의 묘소에 갈수 없으시였다.가난에 쪼들리는 이 나라 화전민들의 생활처지를 그대로 두고서는 발걸음을 돌릴수 없으시였던것이다.하여 추석날 밤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산골인민들이 산을 잘 리용하게 하실 방도를 하나하나 사색해가지 않으시였던가. 우리 수령님도 인간이시였다.자제분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주시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 거대한 업적을 남기신 부모님을 찾으셔야 할 아드님이시였다. 시일이 갈수록 벅차지는 해방의 환희에,공장을,땅을 받아안은 기쁨에 인민은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보며 년중 가장 큰 민속명절을 즐기고있던 그 시각에 우리 수령님께서는 삶의 권리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한가슴에 묻으시고 삭여가시며 산골사람들의 복리를 위해 한밤을 지새우시였다.
치마대여,길이 전하라
다음날 사위가 아직 어둑어둑한 이른새벽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귀틀집을 나서시였다.전날 밤 귀틀집주인들과 담화하실 때 치마대등판에 풀판이 있다는 이야기를 새겨두시고 그곳에 다녀오실 결심을 하신것이다. 시오리가 넘는 치마대로 오르시는 우리 수령님,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일군들이 길이 험한데 이제는 그만 내려가시자고 말씀드렸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더 올라가자고,인민들을 하루빨리 잘살게 하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이렇게 새벽이슬도 차야 하고 덤불길도 먼저 걸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앞장서 걸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뒤를 따라 산을 오르는 일군들은 그이의 천만고생이 너무도 눈물겨운것이여서 눈앞이 뿌잇해졌다. 스무해 긴긴 세월 눈보라만리,혈전만리를 헤치시여 우리 민족을 구원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인민의 행복을 위해 이렇듯 험한 길을 또다시 걸으셔야 하는가.눈앞에 둔 건군위업,건국위업때문에 그처럼 바쁘신 우리 수령님께서 한 산골짜기의 화전민들이 벌방 못지 않게 살게 하시려고 한밤을 지새우신데 이어 날새들도 깨지 못한 이 어뜩새벽에 해발 1,000m를 헤아린다는 산등판을 톺으셔야 하는가. 인민의 행복은 어이하여 우리 수령님의 천만로고끝에 따르는것인가! 우리 수령님앞에는 무연하게 펼쳐진 치마대등판이 나졌다.그 옛날 기마용말을 훈련주던 곳이라 하여 치마대라 불리우는 등판에 동터오는 려명에 뻘겋게 물든 풀판이 펼쳐져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동무들,보시오,얼마나 좋습니까,이 좋은 풀판을 왜 그냥 버리겠습니까,이 풀판만 하여도 수백마리의 초식동물을 기를수 있겠다고 하시며 치마대풀판을 방목지로 리용할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그이께서는 치마대풀판이 인가와 멀리 떨어져있으니 청년들에게 맡겨 공동으로 소나 양,염소와 같은 짐승들을 기르게 하자고,축산기사들도 양성하고 필요한 설비들은 일군들이 제때에 책임적으로 풀어주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때 부글부글 끓는듯 한 아침해가 솟아올랐다. 해돋이를 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산에서 보는 아침해돋이는 바다가에서 보는것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시며 일군들에게 우리모두 힘을 합쳐 인민들이 다같이 잘사는 인민의 락원을 건설하자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치마대에서 내리시는 길에 수령님께서는 자작등에 오르시여 산중부원을 잘 리용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고 목축장터전을 잡아주시였다.더 내려오시면서는 오미자를 비롯한 약초들을 효과있게 리용할데 대하여,산에 자라는 나무를 잘 리용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고 여러채의 화전민농가들도 찾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리로인네 집에 도착하시였을 때 그이의 옷은 새벽이슬에 흠뻑 젖어있었다. 귀틀집로인이 화로불을 가져다드리면서 젖은 옷을 어서 말리우시라고 말씀드리자 그이께서는 평생을 이런 산골에서 고생하신 할아버지와 같은분들이 벌방사람들 부럽지 않게 살수만 있다면 새벽이슬이 아니라 한밤중의 눈비를 맞으면서라도 치마대같은데를 몇번이고 다녀오겠다고 흔연히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귀틀집마당에 편 멍석우에서 다시금 이곳 인민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 구지골인민들은 숨소리마저 죽여가며 그이의 가르치심을 귀담아들었다.우리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듣느라니 눈앞이 확 트이였고 모든것이 황홀하기만 하였다.나무를 찍어 숯이나 굽고 부대기나 일구어먹던 그 산이 그토록 황금산,보물산이였단 말인가. 그들의 가슴속에는 산중부원을 종합적으로 리용할뿐만아니라 그것을 잘 보호하고 새로 조성하여 귀중한 재부를 더욱 늘여갈 결의가 차넘쳤다. 력사의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마을의 13명 아이들이 학교가 멀어 공부하지 못한다는것을 아시고 그들을 데리고 걸어내려가시다가 양지바른 곳에 학교터전을 잡아주시고 교원문제도 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떠나실 때 온 부락 인민들이 멀리에까지 따라나와 바래드리며 장군님의 말씀을 꼭 지켜가겠다고 결의다지였다. 장군님! 이런 두메산골까지 찾아오셔서 우리 생활을 살펴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장군님,부디 안녕히 다녀가시기 바랍니다라고 울먹거리는 리로인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말씀하시였다. 《할아버지,신세를 많이 지고 갑니다.할아버지께서 부탁하시던 화학비료를 해결해보내겠습니다. 할아버지,이 좋은 세상에서 오래오래 앉아계셔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산을 리용하여 벌방사람들 부럽지 않게 잘살게 될 때 또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차가 산굽이를 돌아섰으나 《 은하혁명사적지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언제인가 외국의 한 기자가 이곳에서 해설을 듣고 귀틀집앞에서 걸음을 옮기지 못하였다.강사에게 그는 주석님께서 진짜 이 집에서 쉬셨는가를 조용히 물었다.믿어지지 않는가고 하는 강사의 말에 그는 세상사람들이 잘 믿으려 하지 않고 믿을수도 없어하는 인민적수령의 위대한 사적이 깃들어있는 구지골, 우리 수령님의 로고가 이곳에 깃들어 산골에 살면서도 보지 못하였고 알지 못하였던 황금산이 구지골화전민들,온 나라 산간지역 인민들의 눈앞에 펼쳐졌고 후손대대로 덕을 입게 되였다. 오늘날 흰구름도 산허리를 감도는 치마대등판에는 소방목의 노래소리 흥겨웁고 어버이수령님의 은정을 전하며 양떼가 흐른다.산은 산마다 보물산이 되여 잣을 비롯한 산열매들과 산나물,약초들이 인민들의 살림살이에 보탬을 주고 윤기가 흐르게 하고있다. 우리는 아담한 농촌문화주택의 주인들,어제날 화전민들의 후손들로부터 지난 고난의 시기에 황금산이 자기들을 살려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세세년년 대를 이어가며 보물산의 덕을 크게 입는데 대한 자랑넘친 이야기들도 감명깊게 들을수 있었다. 황금산의 력사속에 산골사람들의 정신세계는 또 얼마나 달라졌는가.지난날 산이 많은탓에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한탄하던 그 사람들이 산을 행복의 명줄로 여기면서 어버이수령님 잊지 못할 그날에 주신 가르치심을 지켜가고있다.온 나라에 첫 청년분조로 소문낸 긍지를 오늘도 빛내여가고있는 사실만 보아도 그것을 잘 알수 있다. 은하리인민들은 추녀낮은 귀틀집옆의 츠렁바위에 다음의 글발을 새겨넣었다. 《모든 산에서 황금을 따내라고 적어서 자손들에게 물려주십시오 류수같은 세월의 눈비도 지울수 없는 귀중한 글발, 그것을 어찌 위대한 수령님께서 귀틀집 리로인에게 주신 교시라고만 하랴. 진정 그것은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로 되여있는 이 나라의 인민 그 누구나가 받아안은 불멸의 유훈이다.이 땅에서 생을 받은 새 세대모두가 심장에 지니고 사는 사랑과 믿음,격려의 글발이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오늘도 인민의 행복한 생활을 기원하시며 축복해주신다. 인민은 황금산의 력사를 펼치여주신 우리 수령님의 하늘같은 은덕을 천만년세월이 흘러도 대를 이어 전해가며 본사기자 박일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