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2월 3일 로동신문
력사의 땅 보천보에 추억을 불러오는 흰눈이 내린다 백두산지구에 새겨진
백두산관문도시를 떠난 우리의 취재길은 영광의 땅 보천보로 이어졌다. 혜산시를 떠날 때에는 하나둘 눈꽃이 날리기 시작했는데 보천군 소재지에 들어설무렵에는 하늘을 가득 메우며 큰 눈송이들이 내려쌓이고있었다. 흰 눈발사이로 보천보의 옛 시가가 안겨들었다.흰 눈송이들이 빙설천지를 어루쓸며 유정한 전적지의 강산을 뒤덮고있었다. 보천보의 하늘가에 가득한 눈송이들은 우리 《우리는 혁명전통교양을 강화하여 우리는 보천보혁명전적지에 높이 모신 지금도 귀기울이면 암흑에 잠긴 삼천리강토를 밝히며 활활 타오르는 삼단같은 불길을 가리키시며 이 나라 동포들에게 하시던 빨찌산 《여러분! 저 불길을 보십시오.…저 불길은 우리 민족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날강도 일제놈들과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는것을 온 세상에 보여주고있습니다.》 진정 보천보에 홰불을 올리시여 일제를 격멸하고 조국해방의 날을 불러오신 우리 어느새 달려나와 사적지구역의 눈을 치고있는 사람들속에서 우리는 보천보혁명박물관의 오랜 학술일군인 황만청동무를 만날수 있었다. 우리들사이에는 자연히 보천보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되였다.그의 말에 의하면 보천땅은 자연경관이 뛰여나고 천험의 요새지로서 전설같은 이야기 또한 많은 고장이라고 한다. 조종의 산 백두산에서 길고 험한 협곡을 따라 내려오느라면 울창한 수림에 가리워 좁아졌던 하늘이 이곳에 이르러서야 넓어졌다고 하여 그 이름도 보천, 우리 선조들은 혜산땅에 진을 설치하였다면 여기 보천땅에는 그보다 작은 군사적행정단위인 보를 두어 외적을 막았다고 한다. 아름다운 숲속을 흘러흐르는 물이라고 하여 가림천, 수려한 덕지대라 하여 려수덕, 계곡에 구슬같은 물이 흐른다는데로부터 옥계동이라는 지명이 있는 보천땅에는 곤장덕의 지명유래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18세기에 있은 일이라고 한다.그때 백두산일대의 국경을 이웃나라 관리와 함께 확정할 사명을 지녔다는 봉건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이 고장을 지나게 되였다.음풍영월만을 알던 사대부들인지라 멀고 험한 백두산길을 꺼려 하층관리들에게 소임을 떠맡기고는 저들은 사인교를 타고 건들거리며 주색잡기에 빠져있었다.결국 나라의 지경이 그릇되게 정해졌다고 한다.백성들은 격분을 금치 못해하였고 그 사실은 왕에게도 닿아 죄를 따지라는 령이 내렸다.귀로에 오른자들이 어지에 따라 현지에서 즉시 곤장을 맞게 되였는데 그래서 곤장덕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되였다.… 이야기를 듣는 우리의 생각은 깊어졌다.오늘날 이 땅의 누구나 보천보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그것은 결코 보천땅의 수려한 자연이나 군사적중요성, 력사이야기때문이 아니다.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 성스러운 보천보에 울린 멸적의 총성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큰 메아리를 울리며 천만군민의 마음속에 자리잡고있다.그것은 보천보가 보천보를 여러차례 찾으시여 력사의 땅 보천보를 혁명의 성지로, 혁명전통교양의 거점으로 빛내여주신 보천보전투가 있은 때로부터 어언 80년세월이 흘렀다.학술일군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 보천군에는 보천보전투의 목격자, 구시산까지 로획물자를 지고갔던 사람들이 한명도 없다고 한다.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렀기때문이다. 허나 어이하여 보천군인민들만이 아닌 온 나라 인민들이 보천보전투 전과정을 잘 알고있는것인가. 그것은 우리 력사의 땅 보천보에 눈이 내린다.보천보의 흰눈은 우리 백두의 혁명전통을 고수하고 빛내여주시려 험난한 력사의 숫눈길을 헤쳐가시던 우리는 보천보 옛 거리에서 보천보혁명박물관 관장으로 일하고있는 리영옥동무를 만날수 있었다. 여전히 정열적인 그는 60여년전에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조국해방전쟁의 불길이 타번지던 간고한 시기였지만 보천보전투를 승리에로 이끄신 그리하여 갓 조직된 군당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00리 떨어진 심산속에서 100년 자란 잣나무를 정히 나르고 다듬어 보천보전투지휘처자리에 표식비를 세워놓았다.거기에 《조선인민의 영명한 보천군주민들과 우리 인민의 순결한 충정의 마음에 의하여 주체44(1955)년 8월에 보천보혁명전적지에는 하지만 그때 당안에 숨어있던 반당반혁명분자들은 항일혁명투쟁전통외에 그 어떤 다른 《전통》이 있는것처럼 떠벌이면서 제각기 자기의 《전통》을 내세우며 인민들을 우롱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인 주체45(1956)년 6월 보천보에 도착하신 길로 어찌 그뿐이랴.년대가 바뀌우고 혁명이 전진할수록 주체52(1963)년, 지금의 보천보혁명박물관이 개건된지 두달후에 이곳을 찾으신 주체61(1972)년의 그날에는 보천보혁명전적지를 돌아보시며 보천보를 만경대수준으로 꾸려야겠다고 하시였고 주체65(1976)년의 그날에도 보천보에 오시여 보천보혁명전적지를 잘 꾸려야겠다고, 혁명사적비를 세워야겠다고 하시며 사적비에 어떤 내용을 담을것인가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밝혀주신 그이의 심중에는 과연 어떤 웅지가 자리잡고있었던가. 혁명전통교양은 당대에 끝마칠 사업이 아니다.이 사업을 일시라도 중단하면 혁명은 곧 좌절을 겪게 되고 목적하고 떠나온 길에서 탈선하여 결국은 간고하게 개척해온 혁명의 전취물을 죄다 말아먹게 된다. 혁명전통교양이야말로 혁명이 승리하는 날까지 계속해야 하며 혁명이 승리한 후에도 중단하지 말아야 할 영원한 사업이다! 하기에 보천보혁명전적지를 그토록 중시하시고 온 나라 곳곳에 혁명전적지, 혁명사적지를 원상대로 잘 꾸리고 그를 통한 혁명전통교양의 바람을 세차게 일으켜주신 우리 보천보혁명박물관 관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보다싶이 우리 보천군은 몰라보게 전변되였습니다.하지만 보천보의 옛 거리는 원쑤격멸의 총성이 울려퍼지던 전투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있습니다.》 사실이 그러하였다.경찰관주재소를 비롯한 적통치기관들과 보천보의 옛 거리는 전투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있다.가림천너머 현대적으로 건설된 보천군 소재지의 전경과는 강한 대조를 이루고있다. 과연 그 어디에 해방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거리가 있던가. 언제인가 량강도당 책임일군들, 항일혁명투사들과 하신 담화에서 보천보는 그때의 맛이 나게 옛날모습을 살려야 하며 보천읍을 꾸린다고 하면서 전적지구역안에 고층건물을 망탕 짓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신 우리 일행은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답사길개척의 나날에 있었던 유서깊은 력사의 땅 보천보에 흰눈이 내린다.끝없이 이어지는 답사대오앞에 붉은기들이 나붓긴다. 백두산칼바람이 터졌다.백두산칼바람에 붉은기들은 더욱 세차게 펄럭이고 답사대오는 앞으로, 앞으로 힘차게 전진하고있다. 글 본사기자 박일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