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2월 19일 로동신문
민족유산의 보물고를 더욱 빛내이는 자랑찬 성과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고 대를 이어 전해오는 가치있는 창조물들과 미풍량속을 귀중히 여기고 시대적요구에 맞게 계승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력사학부의 연구집단은 남포시 온천군 원읍로동자구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3km정도 떨어진 논판가운데에 있는 흙둔덕들에서 소금생산과 관련된 5기의 돌시설물들을 찾아내고 연구사업을 심화시켜 그중의 하나가 고구려에 통합된 조선후국의 소금생산유적이라는것을 과학적으로 해명하였다. 소금생산과 관련된 시설물은 땅겉면으로부터 120cm깊이에서 발견되였다.시설물은 돌로 쌓은 원형뚝모양으로서 웃부분은 높은 열을 받아 굳어져있었고 안쪽에는 두터운 재층이 있었다.시설물의 남쪽에는 불을 때던 아궁이흔적이 있다.그러므로 이 원형의 돌시설물은 당시 가마를 걸고 불을 때던 가마터시설이였다고 볼수 있다. 가마터시설로부터 동남쪽으로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타원형의 물웅뎅이시설이 발견되였는데 그 밑부분에는 검은색의 재층이 두텁게 깔려있었다.가마터시설의 주변에서는 검은색, 회백색, 갈색의 질그릇쪼각들과 주머니식쇠도끼를 비롯한 여러점의 쇠쪼각들이 발견되였다.유적에서 발견된 질그릇쪼각들은 지난 시기 고조선유민들이 남긴 유적들에서 많이 드러난것들과 일치하며 특히 회백색단지쪼각은 전형적인 조선후국시기의 유물이다. 주머니식쇠도끼 2점도 이 유적의 년대를 해명하는데서 의의를 가지는 유물이다.주머니식쇠도끼들은 주머니부분을 단조하여 접는 방법으로 만든것으로서 2세기경부터 쓰이던 유물이다.그러므로 새로 발굴된 유적의 년대는 1~2세기경으로 볼수 있다.이 시기에 온천일대에는 조선후국이 존재하였다. 조선후국은 A.D.37년에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조선일대에 세워져 2세기 말경까지 존재하다가 고구려에 의하여 통합된 우리 민족의 소국이였다. 이번에 고구려에 통합된 조선후국의 소금생산유적이 새롭게 발굴됨으로써 우리 나라 력사에서 4세기경의 고구려소금생산유적이 처음으로 발굴고증된데 이어 그보다 더 이른시기의 소금생산기술이 밝혀지게 되였다. 세계적으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소금의 생산력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있다. 조선후국의 소금생산유적을 새롭게 발굴하고 그 발전면모를 해명함으로써 당시 소금생산기술의 발전수준과 독자성을 뚜렷이 하였을뿐아니라 우리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더욱 빛내일수 있게 되였다. 이번에 발굴된 조선후국의 소금생산유적과 당시 이웃나라들의 소금생산과 관련한 고고학적인 자료를 대비하여보면 조선후국문화의 독자성과 높은 발전수준을 잘 알수 있다.발굴된 소금생산유적들은 당시 조선후국의 소금생산공정과 시설들이 이웃나라의것들과 뚜렷한 차이를 가지며 소금생산기술도 당시로서는 높은 경지에 있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고구려소금생산유적에 이어 이번에 또다시 조선후국의 소금생산유적을 처음으로 발굴한것은 교원 최승일동무를 비롯한 온천군 원읍고급중학교의 일군들과 교직원들도 높은 애국심을 안고 소금생산유적발굴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많은 방조를 주었다. 고구려소금생산유적에 이어 이번에 또다시 이룩된 조선후국의 소금생산유적에 대한 발굴 및 연구성과는 민족유산의 보물고를 보다 풍부히 하고 사회주의강국건설에 떨쳐나선 온 나라 인민들에게 크나큰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게 될것이다. 본사기자 강진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