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3월 20일 로동신문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그는 (권영벽동지를 회상하여)
나는 수도 평양의 거리를 거닐 때마다 혁명가요를 부르며 행진하는 천리마기수들과 용감하고 슬기로운 우리 인민군전사들의 대렬을 보고는 그들과 함께 노래부르며 벅찬 감격에 잠기군 한다.
동무들아 준비하라 손에다 든 무장 제국주의침략자를 때려부시고 용진용진 나아가세 용감스럽게 억천만번 죽더라도 원쑤를 치자 … 이 노래와 함께 나의 눈앞에는 그중에서도 나는 《…우리들의 심장뿐만 아니요.전체 조선사람들의 심장마다에 이 말은 권영벽동지가 1937년 5월말 보천보전투직전에 우리가 사업하던 장백현 17도구 뒤등에 있는 보리밭에서 김을 매다가 쉬는 참에 조국의 산천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조국, 조국땅,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말인가! 우리 유격대원들은 조국땅의 한줌의 흙, 한포기의 풀을 가슴에 품고다니며 고난속에서도 행복을 느꼈다. 권영벽동지는 혁명투쟁에 나선 그날부터 자기의 생애를 마치는 순간까지 조국과 《나를 낳아준것은 어머니이고 혁명투쟁에서 나를 가르쳐주고 키워준 권영벽동지는 자기의 수첩에 적혀있는 이 말과 같이 조국과 혁명에 대해 충성을 다했고 내가 권영벽동지를 알게 된것은 1933년 10월부터였다.그를 처음 만난 곳은 연길현 왕우구 막치기에 있는 사방대였었고 그가 옹구에 당사업을 책임지고왔을 때 나는 현부녀회의 순시원으로 공작하면서 그의 지도를 받았다. 당시 이 지방에는 그리스도교신자들과 아편중독자들이 많았으며 그나마도 일제놈들의 허위선전에 의해서 대부분이 적들의 통치구역인 성시로 이주하고 빈집이 많았다.남아있다는 사람들은 두판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두판치는 사람들이란 화전을 일구어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있는 극빈자로서 땅을 버리고는 떠날수 없는 빈농민들을 말한다.그들은 《우리같은 부대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팔자에 어디를 가나 매한가지지 별수 있나.가다오다 죽지 말고 죽어도 한곳에서 살다가 죽는것이 그래도 우리에게는 상팔자야.》 하는 사람들이였다. 때문에 이 두판치는 사람들인 빈농민들중에는 살아서 고생은 타고난 팔자니 할수 없지만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당에 간다니 죽은 후에라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념원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더구나 《유격대는 먹을것이 없어 농민들의 집을 털어가고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인다.》는 일제놈들의 악선전에 의해서 이곳 사람들은 의심과 공포에 사로잡혀있었다. 이와 같은 형편에서 처음부터 이와 같이 하는 과정에 동리에서는 그를 친절하고 말 잘하고 례절바른 청년으로 불렀으며 목사, 집사 등 예수교 교인들까지 그를 존대했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친목회를 조직하여 그들의 생활, 성격을 료해하면서 활동을 시작했고 3개월만에는 혁명적군중단체인 농, 반, 호3단체를 위시해서 부녀회, 청년단체, 아동단 등을 조직하고 이에 기초하여 당소조까지 내올수 있었다. 그뿐만아니라 그는 차투거우를 비롯하여 명월구, 옹석라자 등 아직 혁명적영향이 덜 미치고있는 지방에 공작원들을 파견하여 그곳 군중들을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로 조직결속시켰으며 어렵고 힘든 곳에는 자신이 직접 들어가 군중들을 교양하였다. 《난 자네하고 처음 대할 때 자네가 공산주의자인줄 알았다면 애당초 상대도 하지 않았을것이고 지금두 량반감투를 쓰고있었을걸세.》 하며 완고했던 한 로인이 밀짚모자를 벗어 언제 깎았는지 상투머리가 없어진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어보이더라고 권영벽동지는 나에게 말했다. 권영벽동지는 군중과의 사업에서 언제나 능숙했다.그 당시는 일제놈들이 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작전을 대규모적으로 감행하던 시기였고 적들의 앞잡이가 유격근거지내에까지 기여들던 때였으므로 군중과의 사업은 참으로 힘이 들었다. 그러나 권영벽동지는 공산주의자는 오직 인민의 리익을 위해서 몸바쳐 싸우고 인민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라고 하신 1936년 2월 녕안현 남호두회의가 있은 후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구름을 뚫고 하늘높이 솟아있는 백두산, 꿈속에서도 잊어본적이 없는 조국땅을 눈앞에 바라보는 대원들의 가슴은 터질듯 흥분과 감격으로 벅찼다.그이께서는 장백지구에 도착하면서 새로운 근거지창설에 착수하였다.이해 10월에 권영벽동지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장백에 진출하면서 대덕수전투와 소덕수전투에서 적들을 섬멸하였으며 10월에는 반절구, 20도구, 이도강을 계속 공격하여 적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주었다.이때로부터 백두산근거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정치활동의 중심지로 되였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적들은 1936년 10월 도문회담을 열고 악명높은 일제조선총독 미나미와 관동군 압록강, 두만강연안의 국경지대의 요소마다에는 포대를 구축했고 강제로 인민들을 동원하여 경비도로를 확장하였으며 집단부락을 설치하고 인민들이 혁명의 영향을 받지 못하도록 밤에 낮을 이어 감시하였다.이러한 환경에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적을 섬멸하였으며 적들의 《토벌》작전을 그때마다 격파하고 빛나는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 모든 사업을 적들의 경비가 삼엄한 적통치구역내에서 진행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그러나 권영벽동지는 1937년초라고 생각된다.나는 나는 여기에서 이날 우리가 곰의골밀영을 떠나기 직전 《장백지구인민들의 중요농작물은 감자, 강냉이, 보리, 귀밀, 조와 같은 주로 산간지대곡식이요.그중에서도 감자는 떡, 국수, 엿을 비롯해서 열두가지 음식을 만들수 있는 아주 좋은 곡식이요.이 엿은 어제저녁 권동무가 가져온 감자엿이요.》 《금옥동무, 자 먹어보오.맛이 어떤가? 찹쌀엿과 무엇이 다른게 있소.특히 장백은 감자가 잘되오.사발에 감자 한알이상 더 담지를 못하오.이렇게 좋은 곡식을 지어 농민들은 잘 먹을수 있소.그러나 일제놈들때문에 굶주리고 말할수 없는 박해속에서 고생하고있는것이요.바로 그 인민들을 해방의 길로, 조국독립의 길로 조직동원해야 하오.권영벽동무와 함께 많은 사업을 하고 돌아오시오.》 우리는 그길로 산을 내렸다.산을 내리며 권영벽동지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내가 권영벽동지와 또하나의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에게서 들은 첫 말이였다. 그후 그와 함께 사업하는 기간 권영벽동지는 백두산준령의 두메산골에도 봄이 찾아와서 눈이 녹고 밭갈이가 시작되자부터 사업은 밭머리에서도, 숲속에서도 가림없이 어디서나 진행되였다. 이 기간 혁명력량은 날을 따라 눈부시게 장성하였다. 이리하여 국내에서도 물샐틈없는 적들의 경계망을 뚫고 식량, 피복, 의약품 등 많은 군수물자들이 우리를 거쳐 밀영으로 전달되였다. 장백은 그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거나 폭우가 쏟아지는 밤중에도 수십리 산길을 오르내리며 각 지부를 지도했고 적정을 탐지하여 이 모든 사업을 조직진행함에 있어서 그의 사업조직은 주도세밀하였다.사업보고를 청취함에 있어서도 사업경로와 결과만을 듣고 그치는것이 아니라 매개 대상의 성격, 취미, 사소한 긍정이나 부정적경향성까지 놓치지 않고 청취한 후에야 그에 대한 대책과 새로운 과제를 주군 하였다.무슨 임무를 줌에 있어서도 아주 세밀하게 지어는 기후조건까지 타산하여 분공하고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제2, 제3의 대책까지 세워주었다. 그는 언제나 잊지 않고 공작원들에게나, 조직군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정신만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목숨을 바쳐 고수하여야 하오.》 이와 함께 그는 100만대군의 적들도 사실 그 당시 적들은 권영벽동지는 공작원들의 학습문제에 대해서도, 군중들에게 선전사업을 진행하는데 있어서도 《우리가 군중을 대상하여 사업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말은 중요한 무기이다.군중앞에 나가 아무리 백과사전을 푼대도 군중이 알아듣지 못할 때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나는 그의 지도를 받으며 부녀회사업을 책임지고 일했다.밤중에 압록강을 건너 삼수나 호인으로 가서 유격대에 보낼 물자를 구입했고 부녀들의 학습도 지도했다.권영벽동지의 지도에 의하여 진행되는 부녀회사업은 매일과 같이 전해지는 유격투쟁의 승리의 소식과 함께 발전되였다. 이와 같이 권영벽동지는 모든 사업에 주도세밀하였다. 군중과의 사업에서도 대상의 환경, 성격, 취미를 료해하는것은 누구나 다 알고있는 일이지만 장백지구의 수많은 조직군중들가운데서 만나도 보지 않은 사람의 성격, 취미도 그는 낱낱이 알고있었다.누구는 술을 좋아하고 누구는 떡, 누구는 단것, 매운것, 심지어는 그 집 가족들의 식성까지 료해하고있었던것이다. 때문에 그는 군중과의 사업에서 어디서나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들의 사업은 보천보전투가 있은 후 적들의 삼엄한 경계와 탄압속에서도 계속 진행되였다. 1937년 가을 적들은 집단부락을 설치하고 강제로 인민들을 몰아넣었다.이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이 치렬해지자 적들은 닥치는대로 인민들을 검거투옥학살하였다.이 과정에 조직의 일부가 드러나 권영벽동지와 나는 일제의 경찰에 체포되였다. 적들의 고문은 실로 사람이 상상할수 없는 악착한것이였다.나는 적들의 고문을 당할 때마다 그전에 권영벽동지가 한 말을 상기하면서 고문을 이겨냈다. 《혁명의 길은 참으로 험난하오.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것 없소.만일 우리가 적들에게 체포되면 적들은 모진 고문과 갖은 흉계를 다해서 우리의 조직, 우리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할것이요.우리는 항상 나는 이 말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 1941년 5월 권영벽동지는 함흥지방법원에서 사형 구형을 받았고 1941년 8월 28일에는 검사의 구형대로 사형이 언도되였다. 권영벽동지가 함흥형무소에서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던 날 일제의 교형리들은 나와 그를 대면시켰다. 《4번.》 간수가 나의 번호를 부르며 감방문을 열고 나오라고 호통을 쳤다.나는 이미 놈들이 무엇때문에 불러낸다는것을 알고있었기에 먼저 눈물부터 앞섰다.감방복도에 나서자 권영벽동지는 나에게 눈웃음을 보내며 말을 했다. 《금옥동무, 울지 마오.나는 사형을 언도받았다고 주먹으로 땅을 치며 통곡할 사람이 아니요.혁명을 위해서 흘리는 피가 무엇이 아깝겠소.걱정하지 말고 몸을 주의하오.》 나는 무엇이라고 그의 말에 대답할수 없었다. (다시는 이 세상에서 그의 목소리,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아 목놓아 울기만 했다. 3년이 지난 1945년 3월 중순 어느날 나는 권영벽동지가 놈들의 교수대에서 자기의 최후를 마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진심으로 추모하였다. 오늘 권영벽동지는 우리의 곁에 없다.그러나 권영벽동지는 자기의 생애를 끝마치는 최후순간까지 어머니조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