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4월 7일 로동신문

 

김일성상계관도서 《인민들속에서》를 펼치며 (1)

인민은 영원히 목메여 부르리라, 아! 우리 어버이

 

한없는 위대함과 고매한 덕성에 가슴이 젖어들어 책을 읽다가도 머리를 들고 하염없이 우리 수령님 생각을 하게 하는 김일성상계관도서 《인민들속에서》!

어느 권, 어느 갈피를 번지여도 위대한 어버이에 대한 가슴뜨거운 이야기들이 다가든다.

진정 위대한 수령님은 창시하신 사상에 있어서나, 혁명과 건설을 승리에로 이끄신 비범한 령도에 있어서나, 자애로운 인민적수령의 풍모에 있어서나 인류력사에 전무후무한 대성인이시였다.우리 수령님께서는 한평생 인민들속에 계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50돐을 맞으며 1권을 낸 때로부터 오늘까지 106권이나 출판된 도서 《인민들속에서》에 실린 회상실기들은 그대로 인민의 마음속에 뜨겁게 간직되여있는 위대한 어버이의 자애로운 모습, 거룩한 자욱자욱이다.인민에게 주신 위대한 어버이의 다함없는 정과 열의 세계,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인민사랑의 서사시를 영원히 잊을수 없어 각계층의 우리 인민들은 앞을 다투어 수령님께서 계실 때보다 더 많은 회상실기들을 심장의 붓으로 써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김일성동지의 한생은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고 사상과 령도에 구현하여 현실로 꽃피우신 인민적수령의 숭고한 한생이였다.》

화창한 4월, 산천의 봄꽃들이 망울터치는 이 계절 우리는 도서 《인민들속에서》를 다시금 펼친다.

하많은 력사의 사연들이 물결쳐온다.설사 수천권일지라도 못다 담을 위대한 수령님의 고매한 풍모와 덕망가운데서도 우리는 물과 관련된 우리 수령님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려 한다.14권, 28권, 40권, 79권을 비롯한 도서 《인민들속에서》의 여러 회상실기들에는 마타리물과 련관된 눈물없이는 대할수 없는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예로부터 산좋고 물맑아 금수강산이라 불리워온 우리 나라에서 벌방, 두메 그 어디에나 흔한것은 물이다.하건만 조국해방의 열파로 강산이 설레이던 시절에 마타리물로 목을 추기던 사람들도 있어 우리 수령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도 태웠으니 열두삼천리벌의 숙천군 창동리(당시)의 남동마을은 그때문에 위대한 수령님과 류다른 인연을 맺은 고장들중의 하나이다.

주체37(1948)년 9월 중순이였다.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으로 사업하던 강량욱선생이 밤중에 위대한 수령님을 찾아와서 조용하고 침착한 평시의 성미와는 다르게 《장군님, 어제 남동마을에 가서 마타리물을 마셨다는게 사실입니까?》 하고 다급히 물었다.

수령님께서는 누구한테서 그런 말을 들었는가고 반문하시였다.

그때 방에는 손님 몇명이 와있었는데 그들은 강량욱선생의 안타까운 말을 듣고 모두 놀랐다.

장군님께서 남동마을이란 곳에 가서 마타리물을 마시셨다는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그런 몹쓸 물을 무엇때문에 마시셨단 말인가?

서해기슭 한끝에 있는 숙천군 창동리에서도 동떨어진 남동마을은 해방전엔 일제의 학정아래 쌀걱정에 물고생까지 겹친 사람 못살 고장이였다.겨우 씨붙임을 한 농작물포기마저 소금기에 절고 가물에 말라죽는 이 고장에서는 우물을 파도 짠물밖에 나오지 않아 별수없이 곤두벌레가 와글거리는 웅뎅이물을 채로 밭아서 먹지 않으면 안되였다.웅뎅이에 고인 비물을 민간에서는 마타리물이라고 하였고 식자가 있다는 사람들은 그 물이 병마를 끌어들이는 사탄의 오줌이라고 하였다.남동사람들은 가난한 살림에 물까지 어지러운것을 마시며 살다나니 이름모를 토질병에 걸려 제명을 못 채우고 피를 토하다가 죽어가군 하였다.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 남동마을에 들리신것은 사실이였다.그이께서는 마을에서도 제일 가난해보이는 잔디로 벽을 쌓은 떼장집에 가서 주인을 찾으시였다.바다바람에 얼굴이 탄 녀인이 지게문을 열고나오다가 수령님을 뵈옵고 굳어졌다.

안녕하십니까.아주머니, 나 물 한사발 좀 주십시오 하고 청하시는 수령님, 녀인은 어쩔바를 몰라 집안에 대고 《아부님!》 하고 불렀다.머리가 소금빛처럼 하얀 늙은이가 기침을 깇으며 지게문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니, 나라의 임금님께서?!》

로인은 신발도 못 찾아신고 토방에서 굴러내려 넙죽 엎드리였다.수령님께서는 사시나무떨듯 하는 로인을 부축하여 일으켜세우시였다.

로인님, 해방된 우리 나라엔 임금이란 없습니다.이제 임금처럼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은 로인님과 같은분들입니다.

그이께서 다시 물을 청하시자 로인은 자기 귀를 의심하였다.이 고장에 와 물을 청하는 손님은 마을이 생긴이래 처음이였기때문이였다.

로인은 죄송스럽게 머리를 조아리였다.

《장군님께 물 한사발도 드리지 못하는 이 못난 백성을 용서하십시오.이 남동리물은 어지러워서 마시면 아니되옵니다.군에서 일보시는 어른들도 어쩌다 이 마을에 올 때면 물병을 차고옵니다.》

하지만 수령님께서는 그럼 이 마을사람들이 어떤 물을 마시고 사는지 보기라도 하자고 하시였다.

며느리가 이빠진 사발에 뿌연 마타리물을 담아가지고나왔다.물사발을 받아드신 수령님께서 그것을 천천히 기울여 한모금 넘기시자 로인이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나라의 임금님께 마타리물을 마시게 했으니 이제 남동마을이 천벌을 받게 됐다고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로인님은 아직도 나를 임금이라고 합니까, 우리 나라에서 임금은 인민이고 나는 그 임금의 신하입니다, 로인님이 한평생 마신 물을 한모금 넘겼는데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러십니까, 로인님이 허락만 하신다면 나는 오늘밤 이 댁에서 자고 가려고 합니다라고 하시였다.

그 말씀에 로인은 오열을 터뜨리였다.여태 외지에서 오는 손님들은 기침을 깇고 피가래를 뱉는 이 마을사람들을 전염병자처럼 멀리하였는데 위대한 수령님께서만은 사람대접을 해주시니 감격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날 저녁 수령님께서는 그 떼장집에서 마타리물에 끓인 시래기장국으로 음식을 드시고 마을농민들과 밤이 깊도록 담화를 하시였다.

알고보니 80고령으로 보이던 떼장집로인은 남동마을에서는 유일하게 60나이에 이른 《장수자》였다.마을농민들은 수령님을 모신 자리에서도 장작을 패듯이 저마다 요란스럽게 기침을 깇었다.조용히 앉아있다가도 한사람이 기침을 하면 모두 백날기침병을 앓는 아이들처럼 숨이 넘어갈듯 줄기침을 깇었다.

토질병으로 해서 생긴 기침이였다.

그밤 우리 수령님께서는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시였다.남동마을사람들의 고통스러운 기침소리가 가슴을 아프게 파고드시였기때문이다.

나라는 해방되였으나 할 일은 얼마나 많고많은가.과연 어느 문제부터 풀어나가야 할것인가.풀벌레우는 가을밤이 깊어갈수록 떼장집의 방등불밑에서 우리 수령님의 사색은 깊어만 갔다.

물이자 생명이고 물은 모든 생명체의 근본이다.새 나라의 주인으로 된 인민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살게 하는것을 정치의 천하지대본으로 삼으신 우리 수령님이시기에 력사의 그밤 인민들의 생활에서 물고생, 물걱정부터 영원히 없애버릴 결심을 하시고 백년대계의 관개공사를 구상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튿날 평양에 돌아오시자 곧 내각협의회를 열고 평남관개공사에 대한 문제를 토의에 붙이시였다.이렇게 되여 시작된것이 평남관개공사였다.

어찌 평남관개만이였으랴.기양관개, 어지돈관개…

그때 우리 수령님의 심중에 어찌 남동마을만이 깃들어있었으랴.

겨울이면 얼음이나 눈을 녹여 밭아낸 물마저 아껴 사돈에게만 대접한다고 하여 그 물을 《사돈물》이라고 부른다는 어러리벌농민들, 나쁜 물때문에 토질병에 걸려 30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하직한다는 해발고높은 오수덕의 사람들 아니 온 나라 인민에게 수질좋은 먹는물을 주고 물이 발라 옹근소출을 내지 못하는 전야들에는 푸르른 생명수가 철철 넘쳐흐르게 하실 웅지가 자리잡고있었다.

반만년력사에 처음 보는 기적을 창조하는 일이라 난관과 시련은 꼬리를 물고 맞섰다.종파사대주의자들이 방해를 놀고 대국주의자들이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우리 수령님께서는 그 모든 력사의 중압을 자신께서 걸머지시였다.남들에게 덜어주지 않고 온갖 고생을 묵묵히 감수하시며 단신으로 모든것을 감당하신 우리 수령님의 헌신의 밑바탕에 과연 무엇이 있었던가.마타리물때문에 줄기침을 깇는 인민의 고통, 물이 없어 꼬장모를 내고 하늘에 기우제를 올려야 하는 농민들의 걱정과 근심…

인민의 고통을 고스란히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신 우리 수령님이시였다.새 조선건설의 나날에 이어 한평생 수령님께서는 인민을 위한 고생이라면 스스로 맡아안으시였다.창조와 건설의 벅찬 년대가 이어질수록 위대한 수령님의 고생은 더욱 커만 갔다.그것은 어찌할수 없는 우리 수령님의 천성이고 숙명인듯싶었다.

《인민들속에서》 10권에 실린 다음의 제목들만을 보아도 물문제, 관개용수문제를 푸시기 위하여 기울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심혈과 로고를 다소나마 헤아릴수 있다.

《〈모든 힘을 100만정보의 관개면적확장에로!〉》, 《평남관개건설을 위한 수령님의 원대한 구상》, 《높고 험한 산발을 몸소 오르내리시며》, 《〈열두삼천리벌에 해마다 풍년이 들게 되였으니 이 저수지를 〈연풍호〉라 부릅시다〉》, 《기양관개는 이렇게 마련되였다》, 《〈농민들의 물에 대한 숙망을 우리 시대에 다 풀어주어야 합니다〉》, 《어지돈관개공사를 우리의 설계와 기술, 우리의 힘으로》 …

평남관개 2계단공사기간에 수령님께서는 무려 100여차례나 현지지도를 하시였다.마타리물의 력사, 기우제의 력사를 끝장내고 물에 대한 농민들의 세기적숙망을 풀어주시는 나날에 우리 수령님 겪으신 고생 그 얼마였고 력사도 모르게 바치신 심혈과 로고 그 얼마였던가.

창동리(오늘의 열두삼천농장)에만도 8차례나 위대한 수령님의 거룩하신 자욱이 새겨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62(1973)년 6월의 어느날 해질녘에 또다시 창동마을을 찾으시였다.군일군으로부터 마을들의 수도화를 끝냈다는 보고를 들으시고 《집집마다 수도물이 다 들어간단 말이지!》라고 하시더니 물맛이 어떤가고 물으시였다.

일군은 어버이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연풍호에서 오는 관개수와 지하수를 가지고 수도화를 했기때문에 물맛이 좋다고 대답올렸다.수령님께서는 여기 관개수는 청천강물이기때문에 물맛이 좋을것이라고 하시면서 만족해하시였다.

석달전에 창동마을의 수도화를 위하여 몸소 현지에 찾아오시여 배관과 양수기, 세멘트를 비롯한 설비, 자재를 보장해주시였던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급수탑앞을 거니시던 수령님께서는 수행한 일군에게 수질검사를 해볼수 있게 물시료를 떠가자고 하시는것이였다.남동저류지대와 리소재지에서 물시료를 떠가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길로 전문기관 일군들을 부르시여 수질검사를 맡기시였고 물의 질이 매우 좋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못내 기뻐하시면서 빨리 검사결과를 창동사람들에게 알려주라고 일군을 내려보내주시였다.

해방직후 남동부락에 와서 마타리물을 마시였던 사실을 잊지 않고계시던 우리 수령님께 언제인가 한 일군이 마타리물만 마시던 숙천군 창동리사람들이 수령님의 은덕으로 수도물로 흰쌀밥을 지어놓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는 사연을 말씀올렸을 때 《그것 보시오.일하는 보람이 있지 않습니까.인민들이 기뻐할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을 맛볼수 있습니다.》라고 하시던 그이이시였다.

그 말씀을 듣는 일군들은 창동리에 깃든 어버이수령님의 현지지도의 자욱자욱을 생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폭양이 쏟아지는 포전에서, 궂은비내리는 들길에서 현지지도의 시간을 보내시고 농민들에게 페를 끼친다고 점심식사, 저녁식사마저 건늬신채 마을을 떠나시던 우리 수령님, 새로 일군 간석지벌을 보시려고 길이 없으면 길을 내서라도 가고 그것이 안되면 걸어서라도 가자고 하시며 바다바람사나운 간석지 한끝까지 가신 우리 수령님, 밤늦게 마을을 떠나시다 눈쌓인 고개길에서 차바퀴가 미끄러지자 손수 차를 미시던 우리 수령님, 그이의 고생이 너무도 가슴에 저려와 일군들이 농민들을 불러오려고 하자 수령님께서는 그들이 단잠에 들었겠는데 이 추운데 불러내서야 되겠는가고 하시며 말씀하시지 않으시였던가.

《괜찮소.우리가 인민을 위하여 이런 고생을 하는거야 뭐랍니까.》

진정 우리 나라에서 임금은 인민이였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민이라는 임금의 신하이시였다.우리 인민의 행복의 크기는 우리 수령님의 고생의 크기였다.우리 수령님 신고하신 덕으로 국력은 날로 커지고 인민의 얼굴은 나날이 밝아졌지만 우리 수령님의 심신에는 과로가 덧쌓여졌으니 인민이여, 우리 진정 력사의 이 사연을 그때에는 알고나 있었던가!

오늘 이 행성에서는 공해로 수억의 인구가 오염된 물을 먹으며 병마에 시달리고 물문제가 초미의 문제로 나서고있지만 이 땅의 크고작은 물줄기들을 다스려주신 우리 수령님 은덕에 인민은 물걱정을 모른다.

서해갑문, 우리 수령님께서 물을 다스린 력사를 론할 때 어찌 서해갑문을 말하지 않을수 있으랴.

40권에 실린 《날바다를 휘여잡으신 위대한 령도》를 비롯한 회상실기들은 20리 날바다를 막으시여 인민의 안전을 수호하시고 인민의 복리를 끝없이 늘여주는 수십억t에 달하는 귀중한 재부-단물을 마련해주신 우리 수령님의 은덕을 감명깊게 전하고있다.

서해갑문건설을 발기하셨을 때 우리 수령님의 머리에는 이미 흰서리가 내려있었다.하지만 수령님께서는 대동강을 길들이는 웅대한 대자연개조전투를 결단코 펼치시였다.

우리 나라의 어머니강인 대동강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신데도 있었지만 수령님의 마음속에는 해방전 토성랑물란리나 60년대의 평양수해가 지울수 없는 아픔으로 남아있었기때문이였다.위대한 어버이께서는 우리 인민들이, 이 땅의 후손들이 다시는 그런 아픔을 당하게 하실수 없으시였다.

건설이 한창 진행되고있을 때 엄중한 문제가 나섰다.지금의 위치에 갑문을 세우면 감탕이 쌓여 퇴적층이 생기고 그 후과로 언제인가는 한개 도시가 물에 잠길수 있다는 문제였다.이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의 심중이 오죽했으랴.

건설자들과 수리공학자들속에서는 끝없는 론쟁이 계속되였다.그때 우리 수령님의 단호한 결론이 내렸다.

우리가 갑문을 건설하고있는것은 인민들에게 복을 주자는것인데 화를 주면 안됩니다.지금뿐아니라 먼 후대에 가서도 복을 주는 갑문이 되여야 합니다.…

갑문의 조속한 완공을 얼마나 념원하시였던 우리 수령님이신가.

과학자들과 설계집단이 20년안을 내놓았다가 줄이고줄여서 지금 10년계선에 머물고있다고 하였을 때 그래, 10년은 억지를 부린것이고 15년은 걸릴것 같다는 소린데, 그러면 내 생전에는 못 보겠구만이라고 하시며 한생 어떤 역경과 시련속에서도 비관을 모르시였던 우리 수령님안광에 비끼는 한가닥 그늘.평생 자신을 위해서라면 하나도 바라신것이 없으신 그이이시였건만 이번만은, 인민을 위해 자신께서 하실수 있는 큰일중의 하나인 갑문건설을 빨리 끝내기를 우리 수령님께서는 바라고바라시였다.

그러나 수령님께서는 건설의 완공이 늦추어지더라도 먼 후날에 가서도 손색이 없는 그러한 갑문으로 건설할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훌륭히 일떠선 세계굴지의 서해갑문, 그것은 천리혜안, 선견지명과도 관련되겠지만 영원히 인민의 운명, 인민의 행복을 후손만대로 책임지시려는 우리 수령님의 량심의 기념비이고 이민위천리념의 물질적표현이다.

우리 수령님께서 배를 타시고 강바람에 옷자락을 날리시며 오늘의 명당자리, 서해갑문자리를 직접 잡아주시였다.

됐소.여기요! 여기가 령(0)선이요.이 물을 보시오.아래쪽은 바다이기때문에 물이 파랗고 웃쪽은 강이기때문에 물이 흐려있지 않소.이 선이 바다와 강의 계선이요.그리고 저 섬을 보시오.피도라고 했지? 저게 보배섬이요.여기에 갑문을 세우라고 저 섬이 이제껏 기다리고있었구만.됐습니다.저 섬이 없으면 여기에 갑문을 세우기 힘듭니다.저 섬을 거점으로 전개하면 됩니다.정말 보배섬이로군.이런 보배섬이 있을줄이야…

위대한 수령님의 기쁨은 끝이 없으시였다.그이께서는 갑문건설의 설계가, 건설주, 시공주가 되시여 끝없는 헌신과 로고를 날바다에 묻으시였다.광란하는 바다 한복판을 둘러막고 그안의 물을 퍼낼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수령님 가르쳐주신 새 가물막이공법때문이였고 벨트콘베아를 운반작업에 받아들여 갑문건설속도를 높이게 하신분도 우리 수령님이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현실로 펼쳐가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서해전역을 맡아안으시고 인민군대만이 아니라 전당, 전국, 전민을 불러일으키시여 서해갑문건설을 5년만에 끝내는 기적을 창조하시였다.

날바다 20리를 가로막고 천리 대동강의 마지막자락을 눌러 덧없이 바다로 흘러가던 27억t의 물을 인민의 재부로 전변시키는 20세기의 기적을 낳던 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내 력사앞에 몇줄의 글을 남기겠소 하시며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쓰시였다.

《서해갑문은 우리 인민의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으로 이룩한 위대한 창조물이다.

갑문건설자들에게 영광이 있으라!

김일성 1986. 5. 22》

모든 영광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고스란히 인민에게 돌리시였다.

력사적인 준공식의 날 테프를 끊으신 수령님께서는 피도의 정점에 올라 갑문으로 통과하는 대형짐배를 내려다보시며 환한 미소를 지으시였다.한생에 제일 밝게 지은 미소를 그이께서는 서해갑문에 남기시였다.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때의 사진을 원화로 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서거하신 후 태양상을 형상하도록 하시였다.

뜻깊은 4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서해갑문을 보시고 세상이 환하도록 웃으시던 그 모습으로 인민의 마음속에 찾아오신다.인민은 꿈결에서도 우리 어버이의 태양의 모습을 뵙고있다.그러면 인민의 마음은 하많은 추억으로 뜨겁다.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치시여 조국을 찾아주시고 마을에 들리셨던 수령님께 마타리물 한사발밖에 올릴수 없었던것이 이 나라 인민이 아니였던가.그런데 그런 인민에게 우리 수령님께서는 수십억t의 물을 주셨다.아니 자신의 평생로고를 다 바치시여 인민이 바라는 소원이라면 모두 꽃피는 인민의 락원을 펼쳐주시였다.

자식이 자기 부모를 제일 잘 아는것처럼 인민은 자기 수령을 제일 잘 안다.말로써가 아니라 실생활을 통하여 수령님이 어떤분이신가를 잘 알고있는 우리 인민은 심장의 목소리로 그이를 어버이라 불러왔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있다.우리 수령님을 칭송한 많고많은 부름중에서도 어버이란 이 말처럼 가장 친근하고 적중한 부름을 인민은 알지 못한다.세월이 갈수록 인민을 위해 천신만고 마음쓰시며 주고주신 위대한 사랑을 못 잊어 인민은 목메여 부르고부른다.

아, 우리 어버이!

본사기자 박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