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4월 24일 로동신문

 

백두산혁명강군의 성스러운 력사를 개척하신 건군의 위대한 어버이

조선인민혁명군이 창건되던 85년전의 잊지 못할 나날을 더듬어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창건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력사상 처음으로 자기의 진정한 군대를 가지게 되였으며 이때로부터 총대의 위력으로 전진하는 조선혁명의 영광스러운 력사가 시작되였습니다.》

백두산혁명강군의 힘찬 발구름소리가 울렸다.어버이수령님의 탄생 105돐을 맞으며 김일성광장에 높이 울린 우리 군대의 발구름소리.

백두산혁명강군은 성스럽고 영광넘친 85년을 이렇게 걸어왔다.

력사의 광장에 차넘치던 열병대오를 보며 누구나 조선인민혁명군이 태여나던 백두밀림속의 광경을 생각하였으리라.

우리 혁명군대의 85년사는 건군의 위대한 어버이에 대한 가장 경건한 추억이다.백두의 수림속에서 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로 주체형의 첫 혁명군대를 창건하시여 백두산혁명강군의 위대한 력사를 창조하신 어버이수령님의 불멸의 건군업적을 되새겨주며 선군조선의 4.25가 마중오고있다.

 

주체건군사의 닻이 오를 1932년을 향하여

 

지난 3월 27일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105돐을 앞두고 훌륭히 개건된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으시였다.항일혁명투쟁시기 호실들에도 들리시여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해방업적에 대해 감회깊이 추억하시던 그이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창건을 선포하시는 백두산청년장군의 거룩하신 영상을 형상한 미술작품앞으로 다가가시였다.

우리 혁명무력건설사와 조국청사에 중요한 리정표를 새기며 백두산혁명강군이 탄생하던 건군의 그날의 환희를 느끼시듯 숭엄한 격정에 잠겨계시던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진렬대에 따로따로 전시되여있는 두자루의 권총에서 시선을 멈추시였다.한켠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실 때 착용하시였던 싸창이, 그옆에는 김형직선생님께서 유산으로 물려주신 두자루 권총중의 하나가 전시되여있었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선군혁명력사의 생동한 증견물인 사연깊은 권총들을 한동안 바라보시다가 안도에서 울린 싸창소리가 오늘은 수소탄의 폭음으로 온 세상을 뒤흔들어놓았다고 참으로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백두의 수림속에서 울린 싸창소리가 수소탄의 폭음으로, 여기에 백두산장군들의 슬하에서 무적필승, 백전백승의 력사만을 아로새겨온 영웅적조선인민군, 백두산혁명강군의 85년사에 대한 총화가 있다.

돌이켜보면 망국의 비운이 무겁게 드리웠던 20세기 초엽에 주체의 태양으로 솟아오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혁명의 길에 나서신 때로부터 헤치신 력사의 나날은 주체의 기치높이 선군혁명령도의 장엄한 닻을 올릴 1932년에로 향한 과정이기도 하였다.

지금도 잊지 못할 그 나날의 갈피를 삼가 번지느라면 우리 군대의 조직을 위해 사색과 탐구를 기울이시고 무수한 혈전과 사선의 고비를 헤치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거룩한 자욱자욱이 력력히 어려온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통쾌한 전투들을 그려보느라면 식민지민족해방혁명에서 유격전이 무장투쟁의 기본형식이라는 독창적인 리론을 내놓으시기 위해 선행고전가들의 저서와 수많은 병서들을 밤새워 탐독하시던 우리 수령님의 열정넘친 모습이 어려오고 저 멀리 고유수 삼광학교에로 추억의 노를 젓느라면 상비적인 혁명무력창건준비를 위해 첫 무장조직인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시던 백두산청년장군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금시 들려온다.조국의 북변 온성땅에 가면 그이께서 로동자들과 함께 자갈도 부리우고 모래도 나르며 《함바》집에서 숙식하시면서 그들을 진정한 무장투쟁의 길로 이끌어주신 감동깊은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투사들의 회상실기를 펼치면 야장간에서 자체로 무기를 제작하고 소리폭탄을 만들어내도록 이끌어주신 우리 수령님의 손길을 느낄수 있다.김혁동지와 같은 청년공산주의자들이 혁명송가 《조선의 별》을 지어부르며 그이를 한별동지로 높이 모시였고 《변뜨로쯔끼》령감이라고까지 불리우던 변대우로인을 비롯한 오가자인민들이 10대의 우리 수령님의 존함을 저 하늘의 태양이라는 의미에서 김일성》으로 고치자고 발기한것도 총대에서 조선혁명의 진로, 조국해방의 불변궤도를 찾으신 백두산청년장군에 대한 끝없는 매혹과 흠모의 분출이였다.

그 하많은 이야기들중에는 이런 사실도 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터졌을 때였다.

어느날 동무들이 위대한 수령님을 찾아와 이제는 어쩌면 좋은가고 락심천만해하였다.다른 나라 땅에서 무장투쟁준비를 한다는것도 헐치 않은데 그런 조건마저도 일제에게 빼앗긴것이다.일제의 만주강점은 이곳에 울짱을 박고 살아온 수십만을 헤아리는 조선사람들의 생활도 도탄에 몰아넣을것이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9.18사변을 두고 불리한것만 생각하지 않으시였다.오히려 《범의 굴에 가야 범을 잡는다.》는 조선속담이 그이의 뇌리에 새겨졌다.

만주는 범의 굴로 되였다.이 굴에서 일본제국주의라는 범을 잡아야 한다.이제는 무장을 들고 투쟁할 때가 되였다.이런 때에 싸워서 결판을 짓지 못하면 우리는 영영 사람구실을 못한다.…

이것이 그때 우리 수령님의 심중이시였다.그이께서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일어서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하시였다.한것은 일제가 전쟁에서 이기겠다고 식민지통치를 강화하고 전쟁물자보급을 위한 경제적수탈에 미쳐날뛸수록 민족적 및 계급적모순은 극한점에 달할것이며 조선민족의 반일기운은 고조될것이기때문이였다.

우리가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항일전쟁을 시작하면 인민대중이 물심량면으로 적극 지지성원해줄것이다.온 세계가 일본제국주의를 침략자로 규탄하게 될것이며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을 면치 못하게 될것이다.이 모든것이 우리 혁명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게 될것이다.…

그이를 찾아왔던 동무들은 놀라움과 경탄을 감추지 못하였다.한쪽에서는 독립군들이 손때묻은 총을 땅에 묻고 어깨를 움츠렸고 다른쪽에서는 독립선언을 련발하면서 구국항쟁을 웨치던 우국지사들이 황황히 해외로 망명하고있을 때 천리혜안의 예지로 조성된 정세의 긴박성과 혁명의 유리한 환경을 과학적으로 통찰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실천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할 구상을 무르익히신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그해 12월 16일부터 력사에 겨울명월구회의로 알려진 당 및 공청간부회의가 소집되였다.항일무장투쟁의 시초를 열어놓은 회의였다.카륜에서 반일민족해방운동을 그 최고단계인 무장투쟁에로 이행시키려는 조선혁명가들의 의지가 확인되였다면 명월구에서는 그 의지가 거듭 확인되고 《무장에는 무장으로, 반혁명적폭력에는 혁명적폭력으로!》라는 구호밑에 일제를 격멸하기 위한 항일전쟁이 정식으로 선포되였다.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할데 대한 명월구회의 결론에 따라 무장대오를 꾸리기 위한 사업은 본격화되였다.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장대오를 꾸리는데서 사람과 무기를 가장 중요한 두가지의 필수적요소로 보시였다.다시말하여 군사정치적으로 준비된 청년들과 실지 적을 쓸어눕힐수 있는 총대였다.그런데 이 두가지가 다 부족하였다.위대한 수령님곁에 있는 조선혁명군출신의 청년은 차광수동지 한사람뿐이였다.

그러니 우리 수령님께서 마음고생인들 얼마나 하시였으랴.

다행히 황포군관학교출신의 박훈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적위대원들의 교련을 지도하게 되였다.그런데 그의 교련방법이 너무나 군벌주의적이여서 우리 수령님께 근심을 끼쳐드리게 되였다.그는 제식동작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거나 규률을 어기는 훈련생들이 있으면 눈살을 찌프리며 욕설을 퍼붓든가 벌을 주든가 하였다.혁명군대내에서 체벌은 금물이라고 아무리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었다.게다가 나뽈레옹식종대대형과 영국식일선형서렬이 무엇인가를 납득시키고 스무명이 되나마나한 훈련생들로 그런 대형을 지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어느날 교련을 참관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휴식시간이 되자 그에게 박훈동무, 동무가 방금 집행한 그 영국식일선형서렬훈련은 간단히 설명으로 굼때고 생략해버리는게 어떻소? 우리가 여기서 와떼를로격전과 같은 전쟁을 한다면 몰라도 산악을 끼고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적과 당장 유격전쟁을 해야 할 판인데 그런 구시대의 병법을 배운다고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고 조용히 일깨워주시였다.

그이께서는 훈련을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 실정에 맞지 않는것은 밀어던지고 유격전쟁에 필요한것부터 먼저 배워주어야겠다, 특히 산악전이 요구하는 훈련을 선행시켜야겠다, 우리한테 맞지 않는것은 대담하게 뜯어고치고 교범에 없는 병법은 우리끼리 지혜를 합쳐서 하나하나 만들어내자고 하시였다.

그후부터 유격전쟁에 필요한것들을 기본으로 하여 훈련이 진행되였다.초보적인 제식동작이나 무기조작법은 물론 위장법, 신호법, 창사용법, 적정탐지법, 산길을 타는 법, 곤봉을 다루는 법, 무기를 탈취하는 법, 야간전투시에 적아를 식별하는 법 등 당장 써먹을수 있는 군사지식부터 배워주었다.

박훈교관은 후날 이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자기가 황포군관학교에서 배운 군사는 모두 세계5대군사강국에 속하는 나라들의것이였다, 그것은 동서고금의 병법을 집대성한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군사지식이였다, 나는 현대중국의 군사교육의 전당이라고도 부를수 있는 유명한 황포군관학교에서 이런 지식을 배운데 대하여 자부심을 느끼고있었으며 동만에 와서 그것을 보급하게 되면 모두가 나에게 박수갈채를 보낼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오산이였다, 나는 박수갈채가 아니라 랭담한 반응에 부딪치였다, 청년들은 나의 강의를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상식으로만 받아들이였지 사활적인것, 필수불가결의것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지난 몇해동안 내가 섭취한 군사가 비록 세계적인것이기는 하지만 유격전을 위해서는 별로 쓸모가 없는 반편짜리 지식임을 통감하고는 그것을 무슨 만능의 법전처럼 절대시한 자기자신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였으며 유격전이 요구하는 군사론을 새롭게 창조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였다, 나는 그때부터 교조에서 벗어나 조선혁명에 적응한 우리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였다고 솔직히 고백하였다.

무장을 갖추기 위한 투쟁은 더욱 간고하였다.유격대소조가 조직되고 무기획득을 위한 싸움이 시작되던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급히 안도에 가시였다.그이께서는 도착하시자마자 김형직선생님께서 강반석어머님께 맡기시였던 두자루의 권총을 땅속에서 파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들앞에서 그 두자루를 쳐드시고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자, 이것이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유산이다.아버지는 의병도 아니고 독립군도 아니였지만 세상을 떠나시는 날까지 이 총을 가지고있었다.왜? 무장투쟁이야말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수 있는 최고의 투쟁형태라고 인정하였기때문이다.아버지의 총적인 지향은 무장투쟁을 하자는것이였다.나는 이 두자루의 권총을 물려받을 때 아버지가 지향했던것을 내가 대신하여 실현시키고야말리라는 결심을 굳게 다지였다.이제는 때가 되였다.이 두자루를 밑천으로 삼아 독립행군을 시작해보자.지금은 이 두자루가 전부이지만 이것이 새끼를 치고 또 쳐서 200자루, 2 000자루, 2만자루로 될 날을 생각해보라.총 2 000자루만 있으면 능히 나라를 해방할수 있다.밑천이 있으니 이것을 자꾸 굴려 2 000자루, 2만자루가 되게 하자!》

이런 비장한 각오를 안으시고 우리 수령님께서는 무장을 탈취하기 위한 직접적인 전투행동을 이끄시였다.공격목표로는 어느 한 지주의 집이 선정되였다.그의 수하에는 40명가량 되는 보위단이 있었는데 단장은 후날 《신선대》 대장으로 악명을 떨치다가 최현동지 부대에 의해 녹아난 리도선이라는자였다.

보위단병실은 지주집 토성안과 밖에도 있었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전정찰에 기초하여 유격대소조 성원들과 적위대원들로 습격조를 편성하시고 지주집을 불의에 기습하여 많은 총을 탈취하시였다.

그이의 뒤를 따라 유격대소조 성원들과 적위대원들, 소년선봉대원들, 지방돌격대원들을 선두로 하여 남녀로소 할것없이 떨쳐일어나 일제침략군과 일만경찰들, 친일지주들과 반동관료배들의 무기를 빼앗는 투쟁을 결사적으로 벌리였다.오태희로인이 밥상다리로 만든 가짜권총을 들고 경찰과 자위단원들을 위협한 다음 무기를 빼앗아 적위대에 보내주었다는 일화도 이때 생겨났다.

자기 무기는 자기가 해결하라고 한 호소는 도처에서 큰 생활력을 발휘하였다.물론 이 투쟁행정에 많은 혁명동지들이 희생되였다.그때 첫 무장대오의 조직을 위해 마련한 한자루한자루의 총에는 혁명동지들의 뜨거운 피가 스며있었고 그들의 불타는 애국심이 깃들어있었다.선군혁명의 력사는 백두산청년장군의 령도밑에 온갖 시련과 난관을 이겨내며 주체건군사의 장엄한 닻을 올릴 주체21(1932)년의 사변을 향하여 줄달음치고있었다.

 

그날은 1932년 4월 25일이였다

 

우리 군대의 탄생을 앞둔 1932년 봄은 세상을 뒤흔드는 사변들로 하여 매우 소란스러웠다.만주를 강점한 일제는 청나라의 마지막황제를 내세워 괴뢰만주국을 조작해냈다.9.18사변의 발발원인과 그 책임을 해명할 사명을 지니고 방금 일본에 도착한 국제련맹조사단의 활동이 마실방 늙은이들의 입에까지 오를 정도로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있었다.그러나 안도지구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사업에 더욱 열중하시였다.정세가 어지러울수록 도탄에 빠진 인민들의 신음소리가 귀전에 들려오는듯싶으시여 그이께서는 군대를 조직해야 할 사명감에 대하여 더욱 자각하시였고 자신께 끝없는 요구성을 내세우며 분발하시였다.소사하부녀회원들은 매일같이 점심밥을 함지에 담아이고 토기점골등판으로 올라와 군사훈련을 하는 소조성원들을 고무해주었다.

백두산이 바라보이는 안도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기 위한 조선혁명가들의 활동본부로, 중심으로 되였다.백두산청년장군께서 안도에서 유격대를 조직한다는 소문이 한입건너 두입건너 국내에까지 퍼져나갔다.그 소문을 듣고 조선과 만주 각지에서 20살안팎의 열혈청년들이 사선을 헤치며 안도에 모여와 입대를 청원하였다.

그러나 우리 수령님앞에는 아직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할 중대한 과제가 놓여있었다.그것이 바로 조선의 혁명가들에게 많은 류혈을 가져다주고있던 구국군부대와의 사업이였다.구국군 우사령을 비롯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조선의 혁명가들을 일제의 앞잡이로 보면서 조선사람들이 만주대륙에 일제침략군을 끌어들인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있던 때였다.그들은 조선사람이라면 보기만 해도 적대시했고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

우리 군대의 창건준비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지만 구국군부대와의 사업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남아있었다.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혁명군이 창건되였다고 해도 항일대전이라는 자기의 사명을 다 할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 구국군과의 담판에 나설것을 결심하시였다.모두가 결연히 반대해나섰다.하지만 그이께서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시였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날 자신께서 그렇게 고집한것은 남들보다 뛰여난 외교술을 가지고있거나 우사령을 굽혀낼 특별한 처방이라도 있어서가 아니였다, 이 고비를 잘 넘기고 무장투쟁을 시작하지 못한다면 조선의 남아로서 살 보람도 없고 살아야 할 리유도 없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고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그이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면 혁명을 하지 못한다고 하시며 불과 4명을 데리고 우사령을 찾아 떠나시였다.아무런 신변안전담보도 없는 모험의 길이였다.각오했던대로 일행은 구국군을 만나자마자 구금되다싶이 어떤 농가에 들어가게 되였다.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길림육문중학교시절 위대한 수령님의 스승이였던 류본초선생이 그 집으로 들어왔다.그는 일제가 만주로 쳐들어오자 교단을 떠나 우사령부대에 들어와 참모장으로 활동하고있었다.일찍부터 위대한 수령님의 출중한 인품과 뛰여난 위인적풍모에 대하여 잘 알고있으며 남다른 애정을 품고있던 그는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시게 된 사연을 간단히 설명하시자 그는 부하들에게 《이 사람들을 잘 대접하라.나도 여기서 점심을 함께 먹겠다.잘 차려오라.》 하고 큰소리로 지시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함께 온 동무들은 역경에서 구원된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며 역시 우리 대장은 하늘이 낸분이라고, 하늘이 도와나서기에 죽음을 각오했다가 귀인을 만나 진수성찬을 대접받는다고 기뻐하였다.

류본초선생의 안내로 거침없이 우사령을 만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의 의견을 제기하시였다.백두산청년장군의 걸출한 위인상에 반한 우사령은 대번에 위대한 수령님의 주장을 긍정해나섰다.백두산청년장군의 결사의 각오와 담대한 배짱, 기발한 착상과 림기응변의 지략에 의하여 난문제로 되였던 구국군과의 사업이 성과적으로 해결되자 혁명군창건사업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기 위한 최종회의에서 100여명의 입대지망자들에 대한 마지막심사와 함께 유격대결성식날자와 장소에 대한 토의를 하시였으며 당면한 활동지역을 확정하고 그와 관련한 전반적대책을 수립하시였다.

명칭은 《반일인민유격대》로 하였다.위대한 수령님께서 대장 겸 정치위원으로 추대되시였다.군복은 가둑나무물을 들인 천으로 짓고 왼쪽가슴에 다섯모가 난 붉은 천을 오려붙이기로 하였으며 거기에 중대번호를 써넣기로 하였다.군모에는 붉은별을 달고 다리에 흰 행전을 치기로 했다.강반석어머님께서는 앓으시면서도 부녀회원들과 함께 온갖 정성을 기울여 군복을 마르기도 하고 재봉침을 돌리기도 하시였다.

주체21(1932)년 4월 25일 아침 백두의 수림속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창건식이 엄숙히 거행되였다.드넓은 광장도 아니였고 요란한 주악도 없었다.한 나라 군대의 창건식이라 하기엔 너무도 소박하였다.

이깔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등판의 공지에 새 군복을 떨쳐입고 무기를 멘 100여명의 대원들이 구분대단위로 정렬하였다.조선혁명의 첫 기슭에서 김일성동지와 피와 목숨을 나눌것을 맹약한 조선의 열혈혁명가들의 장한 대오였다.공지의 한쪽변두리에는 인민들이 모여있었다.혁명군대원들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지주집 꼴머슴으로, 자본가들의 채찍밑에 막돌인생으로 버림받다가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겨 혁명을 배운 인민의 우수한 아들들이였다.그들이 바로 수령결사옹위의 전통을 창조하고 무적강군의 새 력사를 쓰기 시작한 우리 혁명군대의 첫 세대였다.

대원들의 어깨에 빛나는 총은 자기 나라 왕궁조차 변변히 지키지 못한 눈물겨운 력사가 물려준 화승대가 아니였다.한때 독립성전에 나섰던 의병대나 독립군, 의렬단을 비롯한 독립운동의 선각자들이 넘겨준 구식무기도 아니였고 군자금으로 마련한 무장은 더더구나 아니였다.위대한 수령님께서 력사상 처음으로 제시하신 무장투쟁로선을 높이 받들고 새 세대 혁명가들이 피와 목숨까지도 바치면서 마련한 자력자강의 산물이였다.그 총대가 이제 일제침략자들을 전률시킨 연길폭탄을 낳고 미제를 쳐부신 선군혁명의 병기창을 탄생시키며 주체조선의 자위적국방력을 과시하고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각종 핵무기와 수소탄의 폭음까지 울리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이날 대원들의 름름한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눈앞에는 가지가지의 회억들이 구름처럼 떠오르시였다.일찌기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시여 세계제국주의와의 대전을 선포하시고 카륜과 명월구에서 무장한 적과는 오직 무장으로 맞서 싸워야만 승리할수 있다는 혁명투쟁의 진리, 총대중시, 군사중시사상과 로선을 제시하시였으며 무력건설을 혁명의 근본문제로 보시고 무장대오의 조직과 강화발전에 선차적힘을 넣으신 그이이시였다.

그 나날 우리 수령님께서 모임은 얼마나 가지시였으며 넘으신 험산준령은 얼마이고 그 과정에 당한 가슴아픈 희생은 또 얼마였던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나온 나날들에 대한 깊은 감회를 안으시고 가슴에 차넘치는 격정을 터뜨려 연설을 하시였다.

《인민유격대의 목적과 사명은 조선에서 일제식민지통치를 뒤집어엎고 조선인민의 민족적독립과 사회적해방을 달성하는것입니다.》

그이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창건을 선포하시자 대원들은 목청껏 만세를 부르고 인민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였다.원쑤격멸의 총대를 억세게 틀어잡은 선군의 첫 세대들의 심장마다에 격정의 환희가 얼마나 세차게 파도쳤던가.

수치스러운 치욕과 굴종을 강요당하며 강한 군대, 강한 총대를 뼈에 사무치도록 갈망해온 우리 민족이였다.

총대가 약하면 민족이 멸망하고 강국에로 가는 길은 오직 총대를 틀어쥐는 길밖에 없다는 철의 진리를 심장에 새겨안으신 우리의 빨찌산대장 김일성장군님!

끝없는 환희로 달아오른 천고의 밀림속 등판으로 진정한 우리 군대의 탄생을 학수고대하며 구름같이 모여든 인민들은 서로서로 키돋움을 하며 20대의 청년장군에 대한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이렇게 태여났다.위대한 수령님께서 추켜드신 혁명의 총대와 더불어 우리 인민은 약소민족의 비극적력사에 영원한 종지부를 찍었고 조선혁명은 총대와 뗄수 없는 혈연을 맺었다.총대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있다는 철의 진리가 백두밀림에 숭엄히 빛발쳤고 총대로 전진하는 우리 혁명의 새시대가 뜻깊은 이날과 더불어 위대한 탄생을 알리였다.그때까지만 해도 만주의 각지에는 반일을 목적으로 무어진 무장부대들이 수없이 많았다.그러나 조선인민혁명군처럼 자기 령도자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을 생명으로 삼고 조국해방, 제국주의타도의 뚜렷한 목표와 성스러운 사명을 지니고 조직된 무장대오는 없었다.총대에서 민족의 운명개척을 위한 진로와 혁명승리의 비결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의 천리혜안의 예지와 비범한 위인적자질, 특출한 정치실력이 백두산혁명강군의 탄생이라는 선군혁명의 귀중한 열매를 맺었던것이다.

반만년민족사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태여난 이 사변을 어찌 온 세상에 전하지 않을수 있으랴.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열병행진을 하여 우리 혁명무장력의 탄생을 웨치고싶었다.그리고 열병행진을 하는 그날에 백두산청년장군을 백마에 모시기로 하였다.엿새후인 5월 1일 조선인민혁명군은 붉은기를 앞세우고 안도현성에 입성하여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면서 보무당당히 열병행진을 하였다.성안의 인민들뿐아니라 반일부대들까지 거리에 떨쳐나와 엄지손가락을 흔들며 환영의 인사를 보내고 축하의 박수를 쳤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백마를 타시고 부대를 사열하시자 열광의 환호는 절정에 달하였다.인민들은 저저마다 소문으로만 들어온 위대한 수령님을 뵈오려고 야단법석이였다.그무렵 김대장은 키가 구척이고 수염이 한발인데다가 갑옷같은것을 입고 백마를 타셨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막상 우러러보니 20대의 젊으신 청년장군이 아니신가.

인민들은 민족이 낳은 절세의 영웅, 조국해방의 절절한 숙망을 이루어주실 위대한 은인을 모신 환희에 넘쳐 목청껏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

주체21(1932)년의 소박했던 그 열병행진이 85년이 되는 오늘 얼마나 장엄하고도 영광스러운 열병식으로 성스럽게 이어졌는가.조국청사에 불멸의 리정표를 아로새긴 주체21(1932)년 4월 25일이 그때 벌써 이 력사의 사변을 약속해주고있었다.

그렇다.우리 조국과 혁명의 모든 승리와 영광은 위대한 선군혁명령도의 시작을 알린 주체21(1932)년 4월 25일과 잇닿아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건하시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한생을 바치시며 무적의 혁명무력으로 키워주신 백두산혁명강군은 오늘 영광스러운 김정은시대 최정예혁명강군으로 그 이름 더욱 빛나고있다.

위대한 수령님들의 불멸의 태양기를 진두에 모시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의 현명한 령도따라 백두산혁명강군과 함께 전진하는 조선혁명은 영원히 필승불패이다.

본사기자 김준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