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4월 27일 로동신문

 

김일성상계관도서 《인민들속에서》를 펼치며(3)

우리 수령님의 한생의 지론-혁명도 건설도 인민을 위하여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그리움속에 해가 뜨고 날이 저무는 우리 조국의 4월,

4월의 봄명절을 성대히 경축한 인민의 마음은 뜨겁다.

지나온 력사를 론하기는 쉬운 법이다.그러나 쉽게 말할수도 평가할수도 없는것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인민사랑의 력사이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민위천사는 세월이 흐를수록 보다 심오한 의미를 안고 보다 심원한 인민사랑의 세계를 펼쳐주며 우리 인민의 심장마다에 흘러들고있다.

새기면 새길수록 위대한 수령님의 절세의 위인상에 끝없이 감복하며 우리는 도서 《인민들속에서》의 갈피를 계속 번져간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는것으로부터 혁명활동을 시작하시였으며 수령님의 혁명활동은 언제나 인민대중을 터전으로 하여 진행되고 그 전과정이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는데 바쳐졌다.》

2만 600여개!

어버이수령님께서 위대한 생애의 전기간 현지지도하신 단위를 말하여주는 수자앞에서 이 세상 누구나 격동을 금치 못한다.혁명으로 삶을 시작하시고 혁명으로 전생애를 관통시키셨으며 위대한 생애도 혁명의 길에서 마감지으신 우리 수령님에 대한 못 잊을 추억을 불러오기때문이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어이하여 평생토록 혁명의 길에 계시였던가.오직 우리 인민의 리익을 위해서가 아니였던가.

혁명도 건설도 오직 인민을 위하여, 바로 여기에 우리 수령님의 이민위천의 리념이 있고 목표가 있었으며 지향이 있었다.

언제인가 우리 수령님께서 하신 귀중한 교시가 쟁쟁히 메아리쳐온다.

우리는 지금 혁명을 하고있다.그것은 바로 인민들모두가 잘사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이다.거창한 대자연개조사업도, 수많이 일떠세우는 건설물도 다 인민을 위한것이다.때문에 일군들은 모든 사업의 첫자리에 항상 인민의 리익을 놓고 사색을 해야 하고 완강히 실천해야 한다.…

인민의 리익을 모든 사업의 첫자리에,

이것은 인민을 하늘처럼 여기고 인민들속에 계시며 인민에게 의거하고 인민을 위하여 혁명하신 우리 수령님께서 자신에게 내리신 명령이였고 한번 어긴적 없이 지켜오신 사업원칙이며 삶의 륜리였다.

도서 《인민들속에서》에 있는 회상실기들인 《민족의 유산은 나라의 재부라고 하시며》, 《80고령에 우리 공장에 찾아오시여》, 《수령님 모시여 유구한 민족사가 빛납니다》에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주체81(1992)년 5월 개성시를 현지지도하신 사실들이 실려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80고령임에도 머나먼 길을 달려 개성시의 인민경제 여러 부문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시며 로고에 로고를 바치시였다.

인민을 위한 우리 수령님의 현지지도의 그 길에 어떤 가슴뜨거운 사연이 새겨져있는지 사람들은 다는 모른다.

그날 어뜩새벽에 평양을 떠나 안개짙은 새벽길을 달리던 승용차들은 잡관목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길가의 비탈진 공지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멈춰서게 되였다.어버이수령님께서 아침밥을 먹고가자고 하신것이였다.

이제 10여분이면 가닿을수 있겠는데 어버이수령님께서 길가에서 아침식사를 드시게 하다니.

어버이수령님께서 도로에서 얼마간 떨어진 야산기슭의 잔디밭으로 걸음을 옮기시자 일군들은 더욱 당황해났다.한 일군이 그이께 어떻게 풀밭에서 밥을 드시겠는가고, 개성에 아침밥을 준비시켰다고 말씀올리였다.

사실 그들은 지방당일군들에게 최대의 성의를 다해 준비를 하도록 《특별지시》를 주었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근엄하신 표정으로 국가주석의 현지지도라고 해서 왕님행차하듯 해서는 안된다, 옛날에는 시골의 사또만 행차해도 숱한 아전나부랭이들까지 묻어가서 음식상을 차려놓고 진탕망탕 먹고 돌아치며 인민들의 피땀을 빨아내군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인민우에 군림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인민의 심부름군이다라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오늘은 자신께서 내겠다고, 어제 저녁에 곽밥을 준비시켰으니 그걸 하나씩 나누어주겠다고 하시면서 그러면 인민들에게 페를 끼치지 않으니 좋고 시간을 절약해서도 좋다고 하시는것이였다.

너무도 옹색하고 목이 꽉 메여와 아무 말도 못하고 곽밥을 받아든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것은 과연 무엇이였던가.식은 밥에 반찬이라야 콩나물과 도라지무침이 전부였다.

손에 든 곽밥을 내려다보며 모두가 눈굽을 적시는데 우리 수령님의 음성이 다시금 들려왔다.

찬밥을 마른대로 그냥 먹으면 체할수 있으니 더운물을 한모금씩 마시고 밥을 들라고…

간소한 야외식사는 15분간도 못되여 끝났다.마지막 한사람이 저가락을 놓을 때까지 기다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럼 시간도 없는데 더운물로 입가심들을 하고 어서 떠납시다 하시며 일어서시였다.

이때 두명의 일군이 팔뚝만 한 나무토막을 얻어다놓고 돌아앉아 손칼로 열심히 껍질을 벗기고있었다.그건 뭘 하자고 그러는가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물으시자 한 일군이 어줍은 웃음을 지으며 여기가 뜻깊은 자리여서 표적을 해두고싶어 그런다고 말씀드리였다.

뜻이 깊다는건 무슨 소리요! 이런데까지 표식빌 세우자고 동무들은 묻어다니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인민들을 더 잘 먹이고 더 잘 입히겠는지 그거나 연구하시오.

어버이수령님의 발자취가 무수히 찍혀진 이 나라의 산과 들에 이러한 야외식사자리가 얼마인지 그들이 어찌 다 알수 있으랴.

길없는 심산속에도, 갈대 설레이는 길섶, 머나먼 섬마을 도래굽이에도 우리 수령님의 발길은 수없이 깃들어있는것이다.

혁명과 건설도 오직 인민을 위하여,이것은 력사교과서나 당회의문건에 남은 문구가 아니였다.

우리 수령님께 있어서 인민의 리익은 혁명의 근본이고 혁명의 요구였다.

도서 42권에는 이런 이야기가 서술되여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탄생 60돐을 맞으신 바로 그해 여름이였다.

신포항에 랭동공장이 일떠섰다는 보고를 받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제는 산골사람들도 사철 생선국을 먹을수 있게 되였다고 못내 기뻐하시며 만사를 제끼고 현지로 찾아가시였다.사업소에 도착하신 그이께서는 다리쉼도 하지 않으시고 곧장 랭동공장 극동실로 향하시였다.

극동실안은 동토대와도 같은 얼음세계였다.하지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일군들이 만류하는것도 뿌리치시고 극동실까지 들어가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령하 30℃의 저온속에서도 랭동능력이며 설비상태들을 일일이 알아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극진히 보살펴주시던 한 녀성도 그이를 따라 극동실에 들어갔다가 꽁꽁 얼어 밖으로 나오고야말았다.

그날 그는 숙소에 돌아와 수령님께 감기라도 들면 어쩌자고 홑옷바람으로 극동실에 그토록 오래동안 계셨는가고 걱정스럽게 말씀올렸다.

《걸려도 할수 없지.인민들을 배불리 먹이자면 궂은데 마른데를 가리지 말아야 한단다.제 한몸을 생각해서는 아무 일도 못하거든.》

산골사람들에게 생선국을 먹일수 있게 되였다는 기쁜 생각에 추운것도 몰랐다고 즐겁게 웃으시며 그를 안심시키시는 어버이수령님.

하지만 그날 그이께서 장밤 고열에 시달리신줄 인민이여, 정녕 알고있는가.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 논밭머리와 기대앞에서 언제든지 만나볼수 있는 사람들을 우리 수령님께서는 하늘로, 선생으로 내세우시였고 인민의 복리를 위해 국가가 당하는 《손실》에서 더 큰 만족을 찾으시였다.

《대포로 참새를 쏘는 격이지만 물을 끌어줍시다.》,

이것은 주체65(1976)년 9월 안주군(당시) 상서리를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하신 교시이다.

사실 이 농장으로 관개수를 넘겨오자면 3단양수로 평률리까지 올라온 물을 또다시 여러 계단으로 퍼올려야 하였다.많은 설비와 자재, 로력이 들어야 했다.거기에 비해 관수되는 면적이란 극상해서 산골밭과 다락논 몇십정보에 지나지 않는것이였다.투자의 효과성을 놓고본다면 위대한 수령님께서 말씀하신것처럼 정말 대포로 참새를 쏘는 격이였다.하지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상서리농민들이 가물피해를 모르고 농사를 더 잘 지어 벌방사람들 부럽지 않게 살게 해주시려 이렇듯 산골논밭에까지 물을 끌어다주도록 하시였다.

《건설비는 공장을 다 지은 다음에 계산합시다》,

이 회상실기에도 만사람을 울리는 가슴뜨거운 사연이 새겨져있다.

주체51(1962)년 1월 평양제사공장(당시)을 찾으시고 새로 지을 공장의 터전까지 잡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 한 일군은 제사공장은 실이나 뽑는 공장으로서 생산되는 제품에 비해볼 때 건설비가 너무 많이 든다고 말씀드리였다.

그때 우리 수령님께서는 어떻게 결론하시였던가.

동무들, 로동자들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맙시다.건설비는 공장을 다 지은 다음에 계산합시다.로동자들에게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해준 다음에 계산합시다.…

돌이켜보면 이 세상의 정치가들과는 달리 우리 수령님께는 독특한 계산방법이 있었고 저울이 있었다.혁명과 건설을 전진시키고 나라의 살림살이전반을 돌보셔야 하는 우리 수령님의 천평에는 언제나 인민의 리익이 무겁게 놓여있었다.

로동자도 농민도 지식인도 그리고 체육인, 예술인, 가정주부를 비롯하여 이 나라 어디에서나 만나볼수 있는 평범한 인민들이 잊지 못할 추억을 안고 뜨거운 그리움을 담아 집필한 도서 《인민들속에서》!

한권 펼치면 어리여온다.인민들이 리용하게 될 밥가마는 물론 수저에 이르기까지 관심하시던 어버이수령님의 인자하신 영상이.

또 한권 펼치면 인민들의 먹는기름문제를 두고 마음쓰시며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토론하자고 하시던 우리 수령님의 그날의 음성이 들려오는듯싶고 또 다른 한권의 글줄을 더듬느라면 이른아침 두부공장에까지 나오시여 그 맛까지 보시며 인민생활문제로 마음쓰신 수령님의 미소가 눈물겹게 안겨온다.

《수도시민들의 식생활을 풍족히 해주시려고》, 《화진상점에 새겨진 어버이사랑》, 《모내는기계의 동음이 높이 울리던 날에》, 《류다른 정원이 꾸려진 사연》…

인민이 사는 곳 어디에나 뜨겁게 찍혀있는 우리 수령님의 발자욱, 그것을 다 이으면 우리 조국의 지도가 되리라.인민이 주인된 이 나라의 력사가 되리라.

언제인가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외국의 한 문필가를 위해 오찬을 마련하신적이 있었다.그때 그 문필가는 위대한 수령님께 슬기로운 조선인민의 번영을 위하여 부디 건강하시기를 축원한다고 정중히 인사를 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민을 위해서 오래 살라니 참으로 고맙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후날 그 문필가는 이 사실에 대하여 감동적으로 전하면서 인민이라는 두글자만 화제에 오르면 금시 활기를 띠시는 김일성주석님에 대한 글은 마땅히 인민적인 송가로 되여야 할것이라고 자기의 심정을 절절히 토로하였다.

자신의 삶 전체를 인민을 위한것으로 생각하시며 오직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오신 위대한 수령님이시기에 그이께서 구상하고 이룩하신 모든 일들은 다 인민을 위한것이였다.

얼마전 온천군 석치리를 찾았던 우리에게 이곳 사람들은 도서 《인민들속에서》에는 자기들의 진정도 들어있다고 하였다.그러면서 78권에 있는 회상실기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 석치리에도》를 펼쳐보이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40여년전 4월 어느날 이곳을 찾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한창 건설중에 있는 살림집들을 돌아보시다가 류달리 큰 건물을 띄여보시고 무슨 집인가 물으시였다.

탁아소라는 대답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탁아소를 작업반마다 분산시켜놓지 않고 한곳에 저렇게 덩실하게 지어놓으면 애기어머니들이 아이를 업고 먼곳까지 오게 된다고 하시였다.시간맞춰 아이들을 찾아보아야 하는 애기어머니들의 마음을 어버이의 심정으로 헤아려주시는 우리 수령님이시였다.난방보장이 제기될것이라는 사실도 대뜸 아시고 지적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건설중에 있는 유치원에도 들리시였는데 유치원은 탁아소보다 훨씬 더 크고 요란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이들이 추워할수 있다는것을 고려하여 창문을 작게 낸것을 보시고 아이들이 광선을 받지 못하게 되였다고 하시며 바로잡도록 하시였다.수령님께서는 설계일군을 가까이 부르시여 허리를 굽히시고 땅바닥에 금을 그어가시며 새로 지을 유치원형태를 자세히 그려까지 주시였다.그런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어버이수령님께서 또다시 석치리에 오실줄 어떻게 알았으랴.

그날도 그이께서는 유치원에 이어 탁아소를 돌아보시며 많은 시간을 바치시였다.이 농장 어린이들이 704명이니 710명으로 보고 그들에게 매일 200g씩 우유를 먹이려면 하루 142kg, 10일이면 1 420kg, 한달이면 4 260kg이라고 하시며 소 한마리가 한해에 젖이 4t 나오니까 젖소 12마리면 되겠소라고 하시던 우리 수령님.

그후 농장마을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뜨락또르들이 퉁탕거리며 도착하였다.부림소를 젖소로 바꾸는 대신 농사일을 하라고 우리 수령님 보내주신 뜨락또르들이였다.하여 아이들에게 우유를 매일 먹일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을 젖줄기로 하여 이 땅의 아이들이 자라고자라 조국의 방선을 지켜선 인민군대의 장령도 되고 선군조선을 우주강국, 핵강국으로 떠올리는데 기여한 과학자, 기술자들로 된것을 비롯하여 나라를 떠받드는 기둥감들이 되였다.

진정 어린이로부터 백발의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인민모두를 최우선시하시고 생의 마지막순간에조차 인민을 위한 멸사복무의 길에 계신 우리 수령님 같으신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인민과 함께 혁명의 머나먼 길을 걸어오신 어버이수령님께서 자신의 한생의 총화와도 같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쓰신 글발이 떠오른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였다.…

《인민들속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가리울수 없는 우리의 빛, 감출수 없는 우리의 태양이시라고 혁명시인도 열렬히 칭송하였건만 수령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을 인민의 아들이라 하시며 인민, 인민들속에 계시였다.

정녕 위대한 인민의 태양이시고 불세출의 위인이신 우리 수령님의 한평생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는 이 나라 인민과 세계 진보적인류의 고귀한 추억이 《인민들속에서》, 이 여섯글자속에 그대로 담겨져 빛을 뿌린다.

모든것을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인민대중에게 의거하여!

인민의 리익을 최우선, 절대적으로!

한평생 인민들속에 계시며 만복을 불러오신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지니시였던 인민사랑을 그대로 체현하고계시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의 이 드팀없는 신념과 의지로 하여 인민이 주인된 이 땅우에 더 큰 행복이 마중오고있다.

그렇다.위대한 한평생, 위대한 력사는 끝나지 않았다.더욱 줄기차게 흐르고있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하늘처럼 여기신 우리 인민을 수령님과 장군님의 영상으로 정히 새겨안으시고 수령님들을 모시듯이 받들어나가시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를 높이 모시여 어버이수령님은 태양으로 영생하시며 오늘도 래일도 영원히 인민들속에 계신다.

그 절절한 마음과 마음들에 받들려 김일성, 김정일조선의 국보이며 자랑인 김일성상계관도서 《인민들속에서》의 발행은 계속될것이다.

본사기자 백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