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4월 20일 로동신문
력사에 길이 빛날 민족단합의 숭고한 모범
지금 우리는 력사적인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련석회의가 성대히 진행되였던 주체37(1948)년의 갈피들을 더듬어보고있다.세월이 흐르면 모든것이 삭막해진다고 하지만 우리 민족은 지금으로부터 69년전 외세에 의해 국토분렬의 비운이 무겁게 드리웠던 시기에 전민족적인 정치협상을 소집할것을 몸소 발기하시고 그 실현을 위해 정력적인 령도의 자욱을 새기신 련석회의가 가지는 력사적의의는 결코 북과 남이 한자리에 모여앉았다는 그자체에만 있는것이 아니다.비록 사상과 리념이 다르고 정견과 신앙에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각이한 정치세력과 각계각층이 민족공동의 위업을 위한 투쟁에서 얼마든지 단결할수 있으며 온 민족이 단결하면 나라의 통일을 반드시 이룩할수 있다는것을 확증하였다는데 남북련석회의가 가지는 거대한 의의가 있는것이다. 《해방직후의 복잡다단한 정치정세속에서 극소수 민족반역자들을 내놓고는 남조선의 거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대표들과 완고한 반공민족주의자들까지 참가한 폭넓은 민족적대회합이 마련되고 이 회합에서 일치한 합의를 이룩하여 거족적인 애국투쟁을 벌리게 된것은 남북련석회의가 열리던 시기로 말하면 미제의 불법적인 《단선단정》책동에 의하여 우리 조국에 민족분렬의 검은구름이 짙게 드리우고있던 때였다.조성된 엄혹한 현실은 외세와 그 주구들의 민족분렬책동을 짓부시기 위한 대책을 절실히 요구하고있었다.그 무엇보다 중요한것이 민족단합을 실현하는것이였다. 하지만 민족대단결위업은 누구나 이룰수 있는것이 아니였다.그것은 오직 바다보다 넓은 도량과 천하를 끌어당기는 인덕, 천리혜안의 예지와 세련된 령도예술을 지니신 우리 그해에 그러나 남북련석회의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뿌리깊은 반공의식이 화석처럼 굳어진 남조선의 우익정객들까지 련북애국에로 돌려세울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당시 우익정객들속에는 남조선정치무대에서 무시할수 없는 존재로 알려졌던 민족주의거두들도 있었으며 미군정청 《과도립법의원》의 요직을 차지하고있던 인사도 있었다.인생행로도 제각각이고 주의주장도 제나름이던 이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한다는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남북련석회의소집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더우기 남조선을 강점한 미국은 우익정객들의 평양방문의 길을 차단하기 위해 갖은 위협공갈과 리간책동을 다하였다.그로 하여 련석회의소집에 대해 큰 관심을 표시하던 인사들까지도 회의의 성공에 대해 도리머리를 치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마침내 평양에서는 해방후 처음으로 사상과 리념, 정견과 신앙, 주의주장이 서로 다른 북과 남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구국대책을 토의하는 력사적인 사변이 마련되게 되였다.뜻깊은 련석회의의 나날 남측의 우익정객들은 민족을 첫자리에 놓으시고 애국의 뜻을 품은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과거를 불문에 붙이시며 사랑과 믿음의 한품에 안아주시는 진정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는 온 겨레를 한품에 안으시는 후날 주체87(1998)년 4월 평양에서는 력사적인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련석회의 50돐기념 중앙연구토론회가 진행되였다.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 69돐을 맞이한 지금 온 겨레의 가슴마다에는 민족대단결을 조국통일의 천하지대본으로 내세우시고 그 실현을 위해 모든것을 다하신 정세는 엄혹하고 조국통일의 앞길에는 시련과 난관이 의연히 겹쌓이고있지만 우리 민족은 통일위업의 승리를 확신하고있다.사상도 령도도 풍모도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는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주체적인 조국통일로선과 민족대단결사상을 높이 받들어 이 땅우에 부강번영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기 위한 전민족적인 애국투쟁을 더욱 힘차게 벌려나가야 할것이다. 본사기자 박철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