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5월 4일 로동신문

 

혁명전통교양의 대전당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아서(1)

비운이 드리웠던 이 땅에 력사의 새벽을
불러온 《남산의 푸른 소나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탄생 105돐을 맞으며 개관된 혁명전통교양의 대전당 조선혁명박물관으로 천만군민의 물결이 굽이치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가 집대성된 조선혁명박물관은 위대한 수령님들의 혁명사상과 불멸의 업적을 천추만대에 길이 빛내이며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의 령도따라 주체혁명위업의 최후승리를 앞당겨나가는 우리 군대와 인민의 사상정신적기둥, 태양조선의 국보중의 국보, 혁명의 교과서이다.

뜻깊은 태양절을 앞두고 새로 꾸려진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으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혁명전통은 혁명의 명맥을 이어주는 피줄기이며 우리 혁명의 만년초석이라고 하시면서 조선혁명박물관을 가지고있는것은 우리 당과 인민의 크나큰 자랑이고 긍지이며 박물관에 보존전시된 모든 사적물들과 자료들은 대대손손 길이 전해가야 할 가장 귀중한 재보이라고 말씀하시였다.

본사편집국은 백두의 혁명전통을 뼈와 살로 새기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두리에 일심단결하여 주체혁명위업의 최후승리를 앞당기려는 전체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한결같은 의사를 반영하여 조선혁명박물관의 100여개 호실들에 대한 참관기를 련재하여 싣게 된다.

 

얼마전 조선혁명박물관을 참관하는 우리의 마음은 숭엄한 감정에 휩싸이였다.

참관자들과 함께 총서관에 들어서니 정면에는 백두산에 서계시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형상한 미술작품이 정중히 모셔져있었고 량옆벽면에는 우리 혁명사를 상징적으로 형상한 부각군상들이 있었다.

조국과 민족의 창창한 앞날을 축복해주시는듯 환히 웃으시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우러러 우리는 삼가 인사를 드리였다.

조선혁명의 전로정이 응축된 조선혁명박물관이 명실공히 우리 수령님의 혁명박물관, 우리 장군님의 혁명박물관으로 훌륭히 꾸려지도록 크나큰 심혈을 기울이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숭고한 뜻을 가슴깊이 새기며 우리들은 1호실에 대한 참관을 시작하였다.

1호실에는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초까지 우리 인민들이 벌린 반침략, 반봉건투쟁자료들과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의 혁명활동자료들이 전시되여있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지정학적위치는 변함이 없지만 렬강들의 각축전마당으로 무참히 짓밟히던 어제날의 약소국이 오늘은 당당한 정치군사강국으로 전변되였으며 우리 인민은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수 없는 자주적인민으로 존엄떨치고있습니다.》

1호실에서 첫눈에 안겨오는것은 1866년 침략선 《셔먼》호침입사건을 보여주는 자료들이였다.

벽면에는 평양인민들을 힘있게 불러일으키시며 손에 불뭉치를 틀어쥐시고 화공전술로 침략선 《셔먼》호를 불태워버리기 위한 투쟁의 앞장에 서계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증조할아버님이신 김응우선생님을 형상한 미술작품이 모셔져있었다.우리 나라 력사에서 처음으로 반미봉화를 높이 추켜드시고 반미투쟁력사에 승리의 첫페지를 써넣으신 김응우선생님의 애국적풍모가 뚜렷이 안겨오도록 새로 형상된 작품에서 참관자들은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그때 《셔먼》호에서 로획한 대포 두문중 한문이 호실바닥에 전시되여있었다.그것은 백수십년전부터 체질화된 미제의 침략적본성을 참관자들에게 실물로 깨우쳐주고있었다.그옆에 전시된 《척화비》가 19세기 후반기 우리 나라의 정세를 그대로 말하여주고있었다.

서양오랑캐들이 침범하니 싸우지 않는것은 화친하는것이요.화친을 주장하는것은 나라를 파는것이다.우리의 천만년 자손들에게 이것을 경고한다.병인(1866)년에 이 글을 지었고 신미(1871)년에 비에 새겨 전국에 세운다.

비문에도 있는바와 같이 서양오랑캐들의 침략책동이 계속되는 속에 망국의 낭떠러지에 간신히 웅크리고있었던것이 당시의 조선이였다.

지구상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부르죠아혁명의 세찬 기류속에 근대적발전이 이루어지고있었지만 봉건조선은 기나긴 중세의 암흑속에서 아직 깨여나지 못하고있었다.

남들이 군함과 기차를 타고 세계를 돌아칠 때 이 나라의 봉건통치배들은 갓쓰고 하늘소타고 음풍영월로 수백년세월을 헛되게 보냈다.그러다가 동서방의 침략세력이 함대를 끌고 접어들자 그렇게도 완고하게 닫아매였던 쇄국의 문을 열어놓았다.조선봉건왕조는 외세가 마음대로 롱락하는 리권쟁탈의 흥정판으로 되였다.

우리를 안내한 강사 김경희동무는 1866년에 프랑스침략자들이 큰 규모의 무장함대를 뭇고 수천명의 병력으로 우리 나라에 강도적으로 쳐들어왔던 《병인양요》, 미국침략자들이 1871년 5척의 군함과 80문의 대포, 천수백명으로 감행한 《신미양요》에 대하여 보여주는 전시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그 함선들이 당시 미국이 해외에 파견할수 있는 최대의 함선력량이였다는 사실은 우리 나라를 기어코 정복하려는 놈들의 침략야망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있었다.

《척화비》, 그 비석들이 전국각지에 세워지고 거기에 새겨진 비문의 격조가 아무리 높다 한들, 인민의 반외세, 반침략투쟁기세가 아무리 높다 한들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어찌 버티여낼수 있으랴.

실로 통분함을 금할수 없었다.

력대로 사대주의를 일삼아오던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이른 때에조차 큰 나라들의 조종밑에 당파싸움만 하였다.

우리 나라를 둘러싸고 수십년간에 걸쳐 벌어진 외세의 쟁탈전은 20세기초 청일, 로일전쟁에서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이긴 일제가 사기협잡의 방법으로 날조한 1905년의 《을사5조약》과 1910년의 《한일합병조약》으로 일단 막을 내리게 되였다.

유구한 력사와 풍요한 자연부원, 수려한 산천경개를 자랑하던 우리 조국강토는 왜놈의 군화와 대포바퀴밑에서 짓이겨졌고 조선민족은 국권을 강탈당한 슬픔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된 곳에서 우리는 한장의 사진에 주의를 돌리였다.봉건통치배들이 릉지처참한 갑신정변의 지도자 김옥균의 시신우에 《대역부도옥균》이라고 씌여진 천필이 걸려있는 사진이였다.

봉건의 질곡으로부터 나라를 혁신과 근대화에로 이끌려던 진보가 일제의 간특한 책동으로, 사대와 외세굴종에 환장한 반동의 칼에 맞아 《3일천하》의 운명을 면치 못하고 역적으로 심판당한 당대의 사회상은 우리가 돌아본 갑오농민전쟁자료들에서도 알수 있었다.

력사적사실자료들로써 조선의 자주적발전을 극도로 저해하고 우리 나라를 식민지화한 장본인이 미국과 일본 그리고 당시의 주변대국들이며 사대주의는 침략의 길잡이, 망국의 근원이라는것을 명백히 깨우쳐준 김경희강사는 다음전시물들에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수난많던 반일의병운동자료들에 이어 쇠고랑과 채찍을 비롯한 중세기적인 살인흉기들에 칭칭 감겨 철창속에 들어앉은 조선지도를 형상한 전시물은 우리 인민이 탁월한 수령의 령도를 받지 못한탓에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노예로 전락되였으며 온 나라가 하나의 감옥으로, 인간생지옥으로 되였음을 참관자들에게 생동하게 보여주고있었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기정사실로 공포된 1910년 8월 29일을 우리 나라 력사에서는 치욕스러운 날이라 하여 국치일이라 불렀다고 하면서 강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제에게 강요당한 민족의 치욕을 두고 울분을 터뜨리던 그때로부터 89년이 지난 주체88(1999)년 8월 29일 마라손선수 정성옥이 세계륙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쟁취하고 람홍색공화국기발을 창공높이 휘날렸다.민족수난의 력사에 국치일로 기록되였던 이날에 경기에서 우리 선수가 결승선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대결한것은 일본선수였다.온 나라 인민이 결승테프를 끊은 정성옥선수에게 환호를 보냈다.

력사는 일제의 마라손노예가 되여 베를린올림픽경기장에 나왔던 손기정의 불우한 모습도 기억하고있다.망국민의 울분을 가리우려는듯 경기때에는 볼수 없었던 색안경을 끼고 시상대에 올라 죄인처럼 머리를 푹 숙인 식민지나라의 체육인, 그때 우리 인민은 가슴터지는 그 광경에 얼마나 서러운 피눈물을 씹어삼켰던가.

손기정과 정성옥의 모습을 통해 우리 민족의 운명에서 일어난 극적인 사변을 투시해보게 한 강사의 이야기는 탁월한 수령을 모셔야 민족의 존엄도 강성번영도 있다는 철의 진리를 새겨주는것이였다.

적대세력들은 19세기와 20세기뿐만아니라 21세기가 흐르고있는 오늘도 조선에 대한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피눈이 되여 날뛰고있다.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지정학적위치도 변함이 없다.

한세기전에는 대국들의 짬에 끼워 식민지약소국의 비참한 운명을 강요당하였던 조선이였지만 오늘은 주체의 정치군사강국으로 누리에 존엄떨치며 세계중심에 거연히 솟아있다.수난도 많던 이 땅에는 백두산대국의 력사가 용용히 굽이치고있다.

우리는 참관자들과 함께 불요불굴의 혁명투사이신 김형직선생님의 혁명활동자료들이 전시되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의 영상을 중심으로 푸른 소나무를 형상한 미술작품과 거기에 부각된 《남산의 푸른 소나무》의 가사가 확 안겨들었다.

눈서리를 이겨내고 사시장철 푸르른 소나무에서 꿋꿋하고 대바른 뜻과 불굴의 기상을 보시였으며 그것을 지원의 사상에 담으시고 높은 뜻과 굽히지 않는 기개로 력사의 새벽길을 헤치신 김형직선생님.

다음벽면에는 주체6(1917)년 3월 23일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시는 김형직선생님의 열정넘친 모습을 형상한 미술작품이 주화로 모셔져있었고 조선국민회와 관련한 자료들이 전시되여있었다.

지원의 높은 뜻을 안으시고 평양숭실중학교시절에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일심친목회를 무으시고 동맹휴학을 승리에로 이끄신 사실, 의주양실학교, 만경대순화학교, 수안 등 국내는 물론 상해까지 오가시며 정력적으로 벌리신 대중계몽활동…

김형직선생님께서 몸소 조직지도하시고 정력적으로 이끄신 사업들은 하나하나가 조선국민회결성과 조직의 확대발전을 위한 든든한 디딤돌이였고 초석이였음을 전시된 자료들은 전하고있었다.

남조선에서 발행된 도서 《년표로 보는 현대사》도 1917년 3월 23일 조선국민회가 김형직선생님에 의해 조직되였다는것을 명백히 밝히고있었다.

《너무도 알려지지 않은 조선》이라는 일본에서 발행된 도서자료가 전시된 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수 있었다.

《1917년 로씨야혁명의 반년전, 조선에 로씨야혁명의 영향이 충분히 파급되지 않은 시기 다시말하여 맑스-레닌주의사상이 계통적으로 들어오지 않은 단계에서 김형직씨에 의하여 〈조선국민회〉가 결성되였다.…자기 나라의 로동자, 농민에 의거하여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비상히 높은 정치의식이 조선인민들속에서 합법적,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줄기차게 전해져 배양되였다.실로 〈조선국민회〉는 … 조선의 민족해방투쟁을 피압박인민자신들이 일으키고 자주, 주체로선으로 전환시킬 토양을 구축하였다.》

참관로정을 이어가던 우리는 일제의 《재판》에 항거하여 싸우시는 김형직선생님의 영상이 모셔진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제교형리들의 강도적인 궤변을 민족자주의 사상과 론리로 추상같이 단죄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눈서리에 파묻혀서도 천신만고를 이겨내고 푸른 잎새를 떨치는 소나무의 굳건한 기상을 보는듯싶었다.

주체7(1918)년 가을 감옥을 나서신 선생님께서 파괴된 조선국민회조직을 복구하기 위하여 만경대를 떠나시면서 지으신 노래가 《남산의 푸른 소나무》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투쟁에서 참된 보람과 행복을 찾는 혁명적인생관, 대를 이어 싸워서라도 기어이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이 집약된 지원의 사상을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노래 《남산의 푸른 소나무》의 구절구절에 담으시였던것이다.

조국과 민족의 운명은 그 어떤 외세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민족자체의 힘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민족자주사상과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는 몸이 찢겨 가루가 된다고 하여도 불사신처럼 굴함없이 싸우겠다는 백절불굴의 혁명정신, 대를 이어 싸워서라도 금수강산 삼천리에 밝은 세상을 안아오겠다는 계속혁명의 사상이 노래의 구절마다에 얼마나 세차게 맥동치고있는것인가.

이어 참관자들은 주체8(1919)년의 3.1인민봉기당시 시위투쟁에 참가하였던 한 애국자가 입었던 옷을 주의깊게 보았다.색은 비록 바랬어도 그날의 피자욱이 력력한 유물도 인상적이였지만 선조의 선혈이 물든 유물을 오랜 세월 대를 이어 정히 보존하였다는 이야기 또한 감동적이였다.

3.1인민봉기가 남긴 피의 교훈으로부터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에로 방향전환시켜야 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내리시였다고 하면서 강사는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어갔다.

그해 8월에 열린 력사적인 관전회의를 지도하시는 김형직선생님을 형상한 미술작품앞에서 참관자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동진, 강제하, 장철호, 리관린을 비롯한 조선국민회 각 구역장들과 련락원들, 독립운동단체책임자들이 참가한 회의에서 선생님께서는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에로 방향전환할데 대한 방침을 정식으로 선포하시였으며 시대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어 민족자력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승하고 무산민중의 권익을 보장하는 새 사회를 건설할데 대한 과업을 제기하시였다.…

강사의 해설은 참관자들로 하여금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새로운 단계에로 발전시키신 김형직선생님의 불멸의 업적을 가슴깊이 새기게 하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새로운 무장활동준비와 무장단체들의 단합을 실현하기 위한 사업에 선차적인 힘을 넣으시였으며 광범한 인민들속에 선진사상을 보급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신데 대한 당시의 사진자료들과 신문자료들이 많았다.

신문 《동아일보》에 실렸던 만화가 눈길을 끌었다.

《시대》라는 비탈길로 《사상》이라는 바위가 맹렬히 굴러내리는데 당황망조하여 《치안유지법》이라고 쓴 종이장을 펼쳐들고 막아나선 일제를 풍자한 만화였다.

지원의 원대한 포부를 안으시고 력사의 새벽길을 걸으시며 그처럼 열렬히 싸우시던 김형직선생님께서 조국해방의 뜻을 유언으로 남기시는 모습앞에서 우리모두는 애석함을 금할수 없었다.

《부자 2대의 불령.…동변도를 근거지로 혁명운동을 일으켰는데 김일성 부친은 이미 그 운동의 수령으로 되여있었다.》고 쓴 일제의 《조선총독부》기관지 《경성일보》의 기사를 보면서 우리는 김형직선생님께서 력사에 길이 빛날 불멸의 업적을 쌓으신 반일민족해방운동의 공인된 지도자이시였음을 다시금 절감하였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유산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바라보는 우리의 귀전에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들려오는것 같았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수령님께 물려주신 두자루의 권총은 선군혁명의 시원이며 노래 《남산의 푸른 소나무》는 조선혁명에 관통되여있는 민족자주사상과 백절불굴의 혁명정신, 계속혁명사상의 시원이라고.

조선혁명의 시원이 열린 력사의 새벽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높이 울리였으며 영원토록 울려갈 조선혁명의 주제가인 《남산의 푸른 소나무》!

김일성민족, 김정일조선의 부강번영, 이 땅의 후손만대를 위하여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참으로 고귀한 유산을 남기시였다.

참관자들의 얼굴마다에는 노래 《남산의 푸른 소나무》에 맥박치고있는 사상과 정신으로 전진하는 우리 혁명대오의 앞길을 가로막을 힘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확신이 력력하였다.

혁명의 길이 아무리 험난해도 이 노래 높이 부르며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 따라 끝까지 가리라!

우리는 원대한 포부와 리상을 안겨주는 노래 《남산의 푸른 소나무》를 다시금 심장으로 부르며 참관자들과 함께 다음호실로 참관을 이어나갔다.

본사기자 한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