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5월 18일 로동신문

 

혁명전통교양의 대전당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아서(4)

선군혁명의 위대한 개척자이신 백두산청년장군을 우러르며

 

항일혁명투쟁시기관의 4호실 벽면들의 맨우에 부각되여있는 글발들이 이 호실의 사상주제적내용이 무엇인가를 잘 알수 있게 하였다.

《조선혁명군의 정치군사활동, 무장투쟁을 위한 대중적지반축성》, 《무장에는 무장으로!》,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남만진출》.

4호실은 조선혁명군이 결성되던 주체19(1930)년 7월부터 첫 무장대오의 남북만진출에 이르는 주체21(1932)년말까지의 력사적내용들을 포괄하고있었다.벽면들에 도드라지게 형상된 기둥들에는 오각별과 붉은기가 있고 그밑에 엇갈리게 세워진 두자루의 보총 아래우에 권총탄알들과 보총탄알들이 새겨져있어 총대로 개척되고 전진하고 승리해온 조선혁명의 선군행로에 대해 직관적으로 보여주고있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창건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력사상 처음으로 자기의 진정한 군대를 가지게 되였으며 이때로부터 총대의 위력으로 전진하는 조선혁명의 영광스러운 력사가 시작되였습니다.》

우리는 강사의 안내를 받으며 먼저 조선혁명군의 정치군사활동에 대한 자료들부터 보았다.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미술작품앞에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참관자들에게 강사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력사적인 카륜회의에서 불멸의 선군사상을 창시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장투쟁준비를 위한 첫 사업으로 주체19 (1930)년 7월 6일 이통현 고유수 삼광학교운동장에서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시였다.조선혁명군의 첫 대오에는 불요불굴의 혁명투사이신 김형권동지를 비롯하여 차광수, 김혁, 최창걸, 최효일, 공영 등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망라되여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기를 수여하시기에 앞서 연설을 하시였다.그이께서는 조선혁명군은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준비하기 위한 조선혁명가들의 정치 및 반군사조직이라고 하시면서 조선혁명군을 기초로 하여 앞으로 상비적인 혁명무력이 창건될것이라는것을 엄숙히 선언하시였다.

선군의 기치밑에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하는 조선혁명가들의 첫 혁명적무장조직은 이렇게 태여났다.

호실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무장소조원들의 사격훈련을 지도하시는 영상미술작품과 조선혁명군결성과 관련한 회상자료, 이통현 고유수 리가툰의 마을전경사진을 비롯하여 당시의 력사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들이 수많이 전시되여있었다.

조선혁명군의 정치군사활동에 대한 자료들중에서 특히 참관자들의 눈길을 끈것은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권동지의 투쟁내용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혁명군의 무장소조를 공주령, 할빈을 비롯한 만주의 넓은 지역에 파견하시는 한편 이 시기에 벌써 장차 무장투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할 구상을 안으시고 김형권동지를 책임자로 하는 무장소조를 국내에 파견하시였다.

김형권동지께서는 무장소조를 이끄시고 풍산(당시), 리원, 북청, 홍원일대에서 맹렬한 군사정치활동을 벌리시였다.호실의 벽면에는 김형권동지의 사진을 모시고 그이의 투쟁내용에 대한 리인모동지의 수기와 《동아일보》 1930년 9월 4일부, 9월 5일부에 실린 반증자료를 비롯한 중요한 자료들이 전시되여있었다.

참관자들은 풍산군(당시) 파발리주재소습격사건에 대하여 신문에 쓴 《풍산에 돌현한 무장단 4명, 순사부장 사살하고 사라짐.자동차를 뺏어타고 산속으로 자취를 감춤》이라는 보도를 읽으면서 김형권동지께서 벌리신 눈부신 무장소조활동에 대해 통쾌함을 금치 못해하였다.

언제인가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형권삼촌이 파발리주재소를 습격한 사실은 리인모가 잘 안다고 하시면서 그때의 일을 감회깊이 추억하시였다고 한다.

조선혁명군의 다른 무장성원들도 국내와 만주의 여러 지점들에서 전투를 벌려 무기를 마련하고 광범한 군중을 묶어세웠다.그에 대해서는 호실에 전시되여있는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 제1집의 《본군은 김성주, 차광수, 김혁, 최효일 등 청년투사들을 망라하여 길림성 이통현을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청년들의 집합이니만치 그 운동은 대단히 용감하였다.당시 혁명운동선상에 많은 공헌을 남기였다.》라고 쓴 글을 읽으면서도 잘 알수 있었다.

주체19(1930)년 12월 25일 회덕현 오가자에서 열린 조선혁명군 지휘성원 및 혁명조직책임자회의를 지도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미술작품앞에서 강사는 우리에게 이 회의에서 투쟁무대를 동만으로 옮기고 항일무장투쟁준비를 더욱 본격적으로 다그쳐나갈데 대한 방침이 제시되였다고 알려주었다.그러면서 회의후 위대한 수령님께서 혁명조직들의 사업을 지도하시기 위해 장춘쪽으로 가시던 도중 적들에게 체포되시여 20일가량 옥중생활을 하시였는데 《동아일보》에 이 사실이 실리여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이 처음으로 신문에 나게 되였다고 하는것이였다.

강사의 해설을 들으며 참관자들은 우리 수령님께서 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꾸리기 위하여 얼마나 간고하고도 위험천만한 길을 서슴없이 걸으시였는가에 대해 다시금 가슴에 새기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첫 사업으로 조선혁명군 대원들과 혁명조직핵심성원들을 위한 강습을 조직하시고 무장투쟁준비를 본격적으로 다그쳐나가기 위한 방향과 방도를 밝혀주신데 이어 주체20(1931)년 5월 20일 연길현 명월구에서 진행된 당 및 공청간부회의에서 각계각층의 반일애국력량을 하나의 정치적력량으로 단합시킬데 대한 혁명적조직로선을 제시하시였다.그리고 이 로선관철을 위해 흥륭촌, 대사하, 소사하 등 안도일대와 륙읍일대를 비롯한 북부국경일대에서 무장투쟁준비를 위한 혁명력량을 튼튼히 꾸리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가자에서 진행하신 혁명활동에 대하여 말해주는 력사자료들과 혁명사적물, 유물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이께서 대중혁명화를 위해 얼마나 크나큰 심혈을 기울이시였는가를 깊이 느끼게 되였다.

지금도 우리 수령님의 체취가 풍기는듯싶은 호미며 다래끼, 자그마한 앉은책상을 바라보느라니 낮에는 농민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그들을 혁명적으로 각성시키였고 밤에는 밤대로 차광수, 계영춘, 김원우 등 청년공산주의자들과 담화도 하시고 《볼쉐비크》, 《농우》를 비롯한 혁명적출판물들도 발간하시느라 온갖 정력을 쏟으시던 그이의 열정넘친 모습이 어려와 격정을 금할수 없었다.오가자에서 첫 무료교육이 실시되고 《꽃파는 처녀》, 《성황당》과 같은 수많은 혁명적문예작품들이 창작보급된것도 그리고 《교하의 아주머니》에 대한 가슴조이는 일화며 우리 수령님께서 장울화동지의 도움으로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신 이야기도 이 나날에 있은 사실들이라고 강사는 말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정력적인 령도에 의하여 조선혁명군이 결성되고 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이 꾸려지게 됨으로써 앞으로 조직적인 무장투쟁단계에로 넘어갈수 있는 정치군사적준비가 완성되게 되였다.

강사는 1931년 9월 18일 오래전부터 대륙침략의 기회를 노려오던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고 하며 그 자료들을 가리켰다.만주를 강점한 일제는 후방의 안전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무고한 조선인민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일명 9.18사변으로 불리우는 만주사변은 조중 두 나라 인민들의 반일감정을 극도로 격화시켰다.

천리혜안의 예지로 조성된 정세의 긴박성과 혁명의 유리한 환경을 과학적으로 통찰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실천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돌입할 구상을 무르익히시며 주체20(1931)년 12월 16일 연길현 명월구에서 당 및 공청간부회의를 소집하시고 《무장에는 무장으로, 반혁명적폭력에는 혁명적폭력으로!》라는 혁명적구호를 제시하시였다.

이 회의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무장투쟁의 기본형식은 유격전으로 된다는데 대하여 천명하시였다.

겨울명월구회의를 지도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미술작품을 우러르면서 참관자들은 력사상 처음으로 식민지민족해방전쟁에서 유격전이 기본전투형식으로 된다는 독창적인 리론을 내놓으신 우리 수령님이시야말로 선군혁명의 걸출한 개척자, 불세출의 위인이심을 다시금 절감하였다.

강사는 흥분에 젖어있는 참관자들을 무기획득을 위한 투쟁자료들이 전시된 곳으로 안내하였다.

강반석어머님으로부터 김형직선생님의 유산인 두자루의 권총을 물려받으신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미술작품, 무기획득을 위한 싸움에 나선 한 조직성원을 형상한 조각상, 당시의 신문, 사진들과 일제의 반증자료들…

우리는 강사의 해설도 듣고 전시된 자료들도 보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앞장에 서시여 조직령도하신 무기획득을 위한 피어린 투쟁의 나날을 숭엄히 그려보았다.

새형의 혁명적무장력을 창건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빈틈없이 갖추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마침내 주체21(1932)년 4월 25일 우리 나라에서의 첫 혁명적무장력인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시였다.

우리는 참관자들과 함께 그날의 력사적인 화폭을 형상한 영상미술작품앞에 섰다.

한손을 높이 드시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창건을 엄숙히 선포하시는 백두산청년장군 김일성동지,

영상미술작품아래에 조선인민혁명군의 목적과 사명에 대하여 밝혀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가 부각되여있고 불후의 고전적로작 《반일인민유격대창건에 즈음하여》가 전시되여있어 그날의 우리 수령님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금시 들려오는듯싶었다.

벽밑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실 때 메시였던 싸창과 김형직선생님께서 유산으로 물려주신 두자루의 권총중의 하나가 전시되여있었다.

지난 3월 27일 새로 훌륭히 개건된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으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선군혁명력사의 생동한 증견물인 이 사연깊은 권총들을 보시며 안도에서 울린 싸창소리가 오늘은 수소탄의 폭음으로 온 세상을 뒤흔들어놓았다고 참으로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고 한다.

백두의 수림속에서 울린 싸창소리로부터 수소탄의 폭음으로, 여기에 백두산장군들의 슬하에서 무적필승, 백전백승의 력사만을 아로새겨온 영웅적조선인민군, 백두산혁명강군의 85년사가 성스럽게 집대성되여있는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강사의 해설은 참관자들의 사색을 건군의 그날에로 이끌어갔다.드넓은 광장도 아니였고 요란한 주악도 행진도 없었다.한 나라 군대의 창건식이라 하기엔 너무도 소박하였다.이깔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등판의 공지에 강반석어머님의 따스한 온기가 슴배인 새 군복을 떨쳐입고 무기를 멘 100여명의 대원들이 구분대단위로 정렬하였다.

조선혁명의 첫 기슭에서 김일성동지와 피와 목숨을 나눌것을 맹약한 열혈혁명가들의 장한 대오였다.여기 조선혁명박물관에 사진의 모습으로 있는 건군위업에 이바지한 지휘관들인 리광동지, 량성룡동지, 박동근동지, 안길동지, 차룡덕동지의 얼굴도 불멸의 화폭과 더불어 보이는듯싶다.…

그날의 광경을 그려보는 참관자들의 얼굴마다에 자기들도 영광스러운 우리 혁명의 첫 무장대오에 서있는것만 같은 환희와 선렬들의 넋을 이어 경애하는 원수님의 선군혁명령도를 충직하게 받들어갈 비상한 의지가 력력히 비껴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창건은 총대로 조국과 민족의 운명개척을 위한 혁명의 주력군의 탄생을 알리는 장엄한 선언이였으며 우리 혁명이 선군의 길로 승리적으로 전진할수 있게 한 력사적사변이였다.

강사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그때 우리 혁명무장력의 탄생을 온 세상에 알리고싶어했다고 하면서 그로부터 엿새후인 5월 1일 붉은기를 앞세우고 안도현성에 입성하여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면서 보무당당히 열병행진을 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성안의 인민들뿐아니라 반일부대들까지 거리에 떨쳐나와 엄지손가락을 흔들며 환영의 인사를 보내고 축하의 박수를 쳤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백마를 타시고 부대를 사열하시자 열광의 환호는 절정에 달하였다.인민들은 민족이 낳은 절세의 영웅, 조국해방의 절절한 숙망을 이루어주실 위대한 은인을 모신 환희에 넘쳐 목청껏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

주체21(1932)년의 소박했던 그 열병행진이 85년후인 오늘에는 얼마나 장엄하고도 영광스러운 열병식으로 성스럽게 이어졌는가.

조선인민혁명군이 창건되던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이며 5.1절 열병식이 진행되였던 안도현성거리사진과 사적물들, 당시의 출판물을 비롯한 전시된 자료들을 보면서 참관자들은 선군혁명의 위대한 개척자, 백두산의 전설적영웅이신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다함없는 경모심과 대를 이어 누리는 수령복, 장군복에 대한 크나큰 긍지와 자부심에 넘쳐있었다.

강사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남만원정의 길에 오르신데 대하여 이야기하며 우리를 다음벽면에로 안내하였다.

그앞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남만원정을 떠나시기에 앞서 동지들이 마련해준 좁쌀 한말을 드시고 앓는 어머님을 찾으시였던 소사하집이 옛 모습그대로 형상되여있었다.

금시라도 방문을 여신 강반석어머님의 모습이 안겨오는것만 같은 옛 소사하집, 어머님의 체취가 느껴지는듯싶은 독이며 그릇들, 노전을 깐 방안과 이부자리…

숭엄한 추억속에 잠겨 소사하옛집을 바라보느라니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준엄하고도 시련에 찬 길에서 혁명가의 신념을 검열하는 그런 곡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을 남만으로 보내면서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과 흰옷을 입고 나를 바래주던 어머니의 마지막모습을 회고하며 의지를 가다듬군 하셨다고 쓰신 회고록의 구절이 소중히 되새겨졌다.

강사는 벽에 전시된 조선인민혁명군의 남북만진출 주요로정도를 가리키며 우리 혁명군대의 첫 전투승리를 안아온 소영자령전투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소영자령은 안도에서 명월구로 넘어가는 중간지점에 있었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신 후 총을 들고일어난 이상 총성을 울리기로 결심하시고 전투를 직접 조직지휘하시였다.그이의 명령에 따라 대원들은 야간행군으로 소영자령에 도착하여 매복하였다가 일격에 적들을 소탕하고 많은 무기와 식량을 로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소영자령에서의 첫 전승으로부터 이어진 우리 혁명군대의 백전백승의 행로는 얼마나 자랑스럽고도 통쾌한것인가.

조선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것을 보여준 보천보전투, 투사들의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이 높이 발휘된 고난의 행군에서의 승리, 갑무경비도로에서의 일행천리전술로 단행한 무산지구진공작전을 비롯한 항일무장투쟁사의 크고작은 전투들이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안아왔다.

세상에는 장군도 많고 명장들에 대한 이야기도 적지 않지만 우리 수령님과 같이 총대에 의한 민족의 운명개척의 진로를 밝히시고 20대 초엽에 새형의 혁명적무장력을 창건하시여 백전백승의 강군으로 이끄신 절세의 위인은 일찌기 없었다.

그렇다.장군형의 위인을 모실 때에만이 청소한 유격대로 창건된 군대도 백전백승의 위대한 강군으로 빛을 뿌릴수 있다.

우리는 선군혁명의 위대한 개척자, 백두산의 전설적영웅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칭송한 력사의 페지를 읽으며 다음호실에로 참관로정을 이어갔다.

글 본사기자 김준혁
사진 본사기자 리명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