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5월 26일 로동신문
혁명전통교양의 대전당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아서(5) 두만강연안에 혁명의 붉은기 휘날리는 유격구를 창설하시여
4호실을 나서서 5호실로 가는 복도를 걸으며 우리는 생각하였다. 백두의 수림속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시고 강대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전면대결전을 선포하신 인민이 국가이고 인민이 후방이며 인민이 정규군이 되는 인민유격전쟁의 진두에 서시여 항일대전의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신 우리 5호실에서 강사 강진아동무는 참관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호실에서는 두만강연안에 유격구가 창설되고 유격구역들에 인민혁명정부가 세워졌으며 제반 민주개혁이 실시된데 대해서와 무장투쟁이 국내에로 확대발전된데 대하여 보겠습니다.》 그는 남북만진출을 마치시고 소왕청에 오신 우중충한 산발들을 배경으로 흰눈이 내리는데 붉은기를 휘날리며 마을에 들어서는 반일인민유격대오를 남녀로소모두가 떨쳐나 맞이하고있다.대오의 앞장에서 아동단원과 함께 걸으시는 우리 《유격근거지를 창설하는것은 조선혁명의 책원지를 마련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사업입니다.》 두만강연안일대의 산악지대와 혁명화된 농촌지역들에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인 유격구역을 창설하여야 한다고 하신 당시 두만강연안의 산악지대는 조선에서 이주한 가난한 농민들이 주민의 80%이상을 차지하고있었다.그리고 혁명조직들이 확대되여 수많은 대중이 그에 결속되였으며 대중운동이 급속히 발전한 곳이였다.또한 험산계곡들과 무성한 삼림으로 뒤덮여있어 적들이 최신무기를 가지고도 공격하기에는 어렵고 유격대가 방위하기에는 유리한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있었다. 소왕청유격구역, 삼도만유격구역을 비롯한 여러 유격구역들의 지형을 보여주는 사진자료들이 이를 잘 보여주고있었다. 강사는 강사의 이야기를 듣느라니 어떤 녀인은 《토벌대》가 근처에 와서 돌아칠 때 등에 업힌 갓난아이가 울음소리를 낼가봐 입에 젖꼭지를 물리고 품에 꼭 그러안았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의 총구앞에 놓여있는 수십수백명에 달하는 혁명군중의 신변안전을 지켜낼수가 없었다.《토벌대》가 돌아간 다음 아이를 보니 그 어린것은 벌써 숨져있었다.… 태양의 품을 찾아오는 우리 인민의 앞길을 일제는 막지 못하였다.그리하여 수많은 각계층 군중이 안전지대로 모여들었다. 강사의 해설에 의하면 주체21(1932)년 5월말 안도현 소사하에 첫 유격구역이 창설되였는데 유격구창설의 훌륭한 본보기인 이 구역으로부터 부채살같이 뻗어나가면서 짧은 기간에 두만강연안에 유격구역들이 창설되였다고 한다. 두만강연안유격구분포도를 감동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참관자들에게 강사는 이 눈부신 성과는 유격근거지창설의 지대와 형태문제에 가장 옳바른 대답을 주시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정력적으로 이끌어주신 반증자료가 참관자들의 눈길을 모았다. 《만주에 있어서 공산주의운동의 출발점을 이룬것은 조선사람이였으며 그 중심은 두말할것도 없이 재만조선인 약 80만의 반수가 집중되였던 간도지방이였다.》, 《이곳이야말로 〈조선인정치운동의 책원지〉이다.》… 다음벽면에는 주체22(1933)년 소왕청 마촌에서 진행된 당 및 공청지도간부회의에서 연설하시는 수수한 책상옆에 앉으시여 회의를 지도하시는 벽면앞에 전시된 그 불빛은 참관자들을 못 잊을 력사의 그 나날에 세워주었다. 남북만진출에서 쌓인 피로도 푸실 사이없이 사령부귀틀집에서 밤이 새도록 등잔불의 심지를 돋구시며 유격구인민들에게 참다운 민주주의적권리와 자유를 안겨주기 위한 사업을 설계하신 발걸음을 옮기는 우리의 눈앞에 인민혁명정부를 수립하는 집회에서 연설하시는 강사는 이 작품은 주체22(1933)년 3월 18일 가야허유격구역의 사수평마을에서 왕청5구인민혁명정부를 수립하는 첫 선거집회를 지도하시는 토지를 분여받은 근거지농민들과 담화하시는 우리의 귀전에 유격구의 하늘가에 울려퍼지던 인민혁명정부 만세의 환호성이 들려오는듯 하였다.유격구인민들은 분여받은 땅에 두볼을 부비며 울고웃었다.그들은 인민혁명정부가 나누어준 분여지에 말뚝을 박아놓고 꽹과리를 울리며 춤을 추었다. 무료교육, 무상치료, 남녀평등권과 8시간로동제의 실시… 유격구의 문화는 우리 인민이 수천년을 두고 부를 명가요들을 수많이 창작해내였고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에로 이어지는 연극예술의 개화기를 마련하였다. 유격구는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웃음소리 랑랑한 하나의 화목한 대가정이 되였다. 《…이상과 같이 간도지방의 유격구역은 토지, 인민, 주권 세가지를 완전히 갖추고있으며 이것을 운영하여… 단일국가를 형성하고있다.》… 반증자료들은 두만강연안의 천험의 요새들에 자리잡고 민족해방의 장엄한 새 력사를 개척해가는 유격구를 세계가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에 대해 말해주고있었다. 강사는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하는것은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벽면의 맨우에 부각된 이 글발을 바라보는 참관자들에게 강사는 가슴뜨거운 이야기를 하였다.당시 주체22(1933)년 3월 11일 왕재산에서 온성지구 지하혁명조직책임자 및 정치공작원회의에서 연설하시는 눈덮인 왕재산, 손을 드시고 열정적으로 연설하시는 강사는 참관자들에게 왕재산회의에서 반유격구는 형식상 적들이 통치하고있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와 같이 유격대가 장악하고 지도하는 혁명화된 지역이였다. 강사는 반유격구를 형성하기 위한 과업과 방도를 밝혀주시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힘있게 밀고나가신 오중화동지는 계속하여 강사는 다음벽면에서 참관자들은 지성어린 원호물자를 가지고온 온성인민들을 따뜻이 맞아주시는 강사는 언제인가 참관자들은 국내에 파견된 정치공작원들이 활동거점으로 리용한 회령 쏙새골밀영, 무산군 가라지봉밀영을 보여주는 사진, 온성지구 인민들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적극 원호한데 대한 회상자료 등을 주의깊게 보았다.그러면서 완전유격구주변과 북부조선지역에서 반유격구와 활동거점들이 믿음직한 위성들로 되고 우리 인민의 적극적인 지지성원이 있었기에 두만강연안의 유격구가 붉은기 펄펄 휘날리는 해방지구로 굳건했다는 력사적사실앞에 흥분을 금치 못하였다. 정녕 하나의 영상미술작품, 하나의 자료를 통해서도 우리 우리는 글 본사기자 김성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