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6월 3일 로동신문
력사의 땅에 울린 멸적의 총성 최후승리에로 부른다
어느덧 80년세월이 흘렀다. 류수와 같은 세월속에 년대와 세기는 바뀌여도 이 나라의 천만군민은 보천보전투에 대해서 생생히 기억하고있으며 다발적, 련발적으로 일어나는 주체조선의 특기할 사변들을 맞이할수록 세월의 언덕을 넘어 더욱 세차게 울리는 보천보의 총소리를 듣고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하많은 생각을 주는 력사의 땅 보천보, 그 이름 소중히 불러보며 우리는 먼저 피눈물에 젖었던 과거사를 번진다. 예로부터 보천땅의 경치는 한폭의 그림을 방불케 하였다. 풍치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 곤장덕과 려수덕, 아름다운 숲속을 감돌아 흘러내리는 가림천, 계곡에 구슬같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 불리우던 옥계동… 그러나 그 모든것은 나라없는 백성들에게 설음과 고통만을 더해주었다. 어찌 보천땅뿐이랴.1930년대 중엽에 이르러 조선은 일제의 발굽밑에서 하나의 철창없는 감옥으로 화하였다. 당시 일제는 우리 인민의 반일민족해방운동을 완전히 말살해버리기 위해 그 어느때보다도 군대와 헌병, 경찰망을 강화하는 한편 세상에 보기 드문 악법을 만들어내여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잡아가두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는것조차 두려워하였으며 야학에서 글을 배우거나 들판에서 공차기를 하는것조차 모두 《불온행동》이라고 하면서 해산시키군 하였다. 또한 일제는 《내선일체》, 《동조동근》, 《황국신민화》를 떠들면서 조선민족의 자주의식과 넋을 송두리채 뽑아버리기 위해 조선사람이 자기 나라 말은 물론 자기의 성과 이름까지 가질수 없게 하였다. 한때 민족의 운명을 통탄하며 동분서주하던 《애국지사》들도 날로 횡포해지는 일제의 탄압에 겁을 먹고 주저앉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망국노의 처지를 피눈물속에 감수해야 했던 조선은 그야말로 암흑천지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조국의 북변땅 보천보에서 백두산청년장군이 울린 멸적의 총소리가 누리를 진감하며 울려퍼졌다. 보천보의 밤하늘에 울린 원쑤격멸의 총성, 그것은 짓밟힌 겨레의 가슴마다에 민족재생의 서광을 안겨주고 해방전의 불길을 지펴올린 력사적인 장거였다. 백의민족이 일일천추로 기다리던 조국진군의 력사적위업을 위해 그이께서 넘고넘으신 슬픔의 언덕과 시련의 고비는 과연 그 얼마이더냐. 백두산청년장군의 자욱자욱이 숭엄히 안겨온다. 1930년대 후반기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선 항일무장투쟁의 요구를 깊이 통찰하신 조국에로의 진군, 그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적들이 악을 쓰며 감행한 1936년의 《동기대토벌》을 물리치기 위해 사선의 고비를 헤치며 수많은 전투를 벌려야 했다. 곰의골어귀전투, 홍두산전투, 도천리전투, 리명수전투… 백두광야의 설한풍을 이겨내며 언 풀뿌리조차 없어 눈으로 창자를 달래며 한치한치를 사랑하는 전우들의 피의 대가로 톺아나가야 했던 무송원정의 나날은 또 그 얼마나 간고했던가. 그러나 이 과정에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불굴의 투사로, 어엿한 전투원으로 억세게 자라났다. 회의에서 이러한 정황에서 보천보는 당시 함경남도 갑산군의 면소재지로서 일제는 여기에 경찰관주재소, 면사무소, 산림보호구, 농사시험장, 우편국, 소방회관 등 폭압기구들과 략탈기구를 두고 인민들의 반일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출을 가로막아보려고 발악적으로 책동하였다. 일제가 비밀문건에 쓴바와 같이 보천보는 저들의 《국책》인 《북선개척》과 《국경경비》의 요충지였고 백두산밑에서 경제의 중심지, 물자의 집산지로서 200여호에 인구도 1 300여명이나 되는 산골도시였다. 보천보는 적들의 국경경비 2선에 있는 중요군사요충지였고 국경일대에서의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략탈의 중심지들중의 하나였다. 보천보를 치면 일제침략자들에게 심대한 정치군사적타격을 주고 인민들에게 조국해방의 신심을 안겨줄뿐만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도 직접 보여줄수 있었다. 주체26(1937)년 6월 2일 아침, 만단의 준비를 갖춘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얼마나 기다리고기다리던 조국진군의 길이던가. 6월 3일,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구시등판에 올랐다.구시등판에서는 조국산천이 한눈에 바라보였다. 백두산천지에서 흘러내려 굽이쳐흐르는 압록강의 푸른 물결, 눈뿌리 아득하게 펼쳐진 아름다운 조국산천, 저녁노을이 비낀 압록강에서 들려오는 떼몰이군들의 구슬픈 노래소리… 이역만리에서도 한시도 잊은적 없는 조국이였다. 대원들이 조국의 산발들을 바라보며 휴식하고있는 사이에도 구시물동에 떼목다리를 놓도록 하신 그때를 회고하시며 부대가 곤장덕에 올랐을 때는 주체26(1937)년 6월 4일 새벽이였다. 그때 곤장덕은 일제가 비밀문건에 쓴바와 같이 1년생으로부터 수십년생까지의 떨기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라 대부대가 휴식하면서 전투준비를 갖추는데는 아주 유리한 곳이였다. 대원들은 곤장덕의 우묵한 곳을 골라 휴식하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조국땅의 구수한 흙냄새와 꽃향기가 대원들의 페부로 흘러들었다. 깊은 감흥속에 조국의 귀중함을 다시금 뼈에 새기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의 얼굴마다에는 결사의 각오가 어려있었다. 가림천기슭의 황철나무아래에 지휘처를 정하신 《땅!》 어둠이 짙게 드리운 보천보의 밤하늘을 헤가르며 전투개시를 알리는 백두산청년장군의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뒤이어 우박치듯 기관총사격소리가 울리고 보총, 권총소리가 한데 어울려 온 거리를 들었다놓기 시작하였다. 온갖 폭압과 만행의 아성인 경찰관주재소에 불벼락이 쏟아져내리고 이어 면사무소와 산림보호구, 농사시험장, 소방회관, 우편국, 료리점이 불소나기를 맞았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의 불의타격에 혼비백산한 적들은 비명을 지르며 살구멍을 찾으려고 헤덤벼쳤다. 사방에서 자지러지게 울리던 사격소리가 얼마쯤 지나서 잠잠해지고 그대신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거리 한쪽구석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여러개의 적통치기관들에서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치솟아오르더니 어느새 온 거리는 불바다가 되여 대낮처럼 밝아졌다. 여기저기에서 인민들이 달려나왔다.선전공작대원들이 뿌린 삐라와 격문들을 본 인민들은 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조선독립 만세!》 그날 밤의 감동깊은 광경을 장편서사시 《백두산》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있다. … 밤바다같이 웅실거리는 군중 높이 올라서 칼짚고 웨치는 《동포들이여! 저 불길을 보느냐? 조선은 죽지 않았다! 조선의 정신은 살았다! 조선의 심장도 살았다! 불을 지르라- 원쑤의 머리에 불을 지르라!》 만세소리 집도 거리도 떨치고 화염을 따라 오르고올라 이 나라의 컴컴한 야공을 뒤흔든다 뒤울린다! … 승리의 개가는 보천보의 밤하늘에만 오른것이 아니였다.보천보전투의 련속인 구시산전투와 간삼봉전투에서의 승전소식은 온 삼천리강토를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끓어번지게 하였다. 우리 인민은 력사의 증견자인양 푸르러 설레이는 곤장덕의 이깔숲과 소연히 흐르는 가림천의 맑은 물소리는 우리의 가슴속에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군대와 인민의 마음속에 보천보의 총소리를 영원히 새겨주시려 끊임없는 로고와 심혈을 기울이신 일찌기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백두의 혁명전통을 견결히 옹호고수하고 빛내이실 웅지를 지니시고 첫 혁명전적지답사행군대를 이끄시였던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앞에 설 때면 반당반혁명분자들의 책동을 단호히 짓부시며 기념탑을 먼 후날에도 손색이 없는 대기념비로 훌륭히 일떠세워주신 불철주야의 선군혁명령도의 길을 이어가시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을 찾으시여 주체혁명위업을 완성하실 철석의 의지를 굳게 벼리신 정녕 자주, 선군으로 빛나는 우리 력사의 땅 보천보, 성스러운 이 땅에서 우리 천만군민은 백두산대국의 최후승리를 확신하고있다. 백두산후손들의 심장속에 보천보의 총성을 영원한 메아리로 새겨주시는 희세의 천출명장 그이께서 계시여 주체탄의 장쾌한 뢰성이 누리를 진감하고 세인을 경탄케 하는 만리마속도로 질풍노도와 같이 전진하는 이 땅에는 머지않아 최후승리의 축포성이 터져오를것이다. 본사기자 김일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