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6월 4일 로동신문
조국해방성전의 거세찬 불길로 타오른 보천보의 홰불 보천보전투승리이후 항일무장투쟁 국내에로 급속히 확대,
보천보에서 타오른 홰불은 삽시에 전민항쟁의 불길로 타번져 온 민족이 일제와의 전면대결전에 용약 떨쳐나섰으며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은 새로운 앙양기에 들어서게 되였다. 우리 군대와 인민은 보천보의 홰불을 전민결사항전의 거세찬 불길로 타오르도록 하시여 조선인민자체의 힘으로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신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신 《항일혁명전쟁의 승리는 항일혁명투쟁의 첫 시기부터 무장활동을 국내에로 확대시켜 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고 전민항쟁에 의한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는것을 기본전략으로 내세우신 1936년 2월 27일부터 3월 3일까지 진행된 남호두회의와 1937년 3월의 서강회의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국경지대에로 진출시키며 투쟁무대를 국내에로 확대할데 대한 전략적방침이 제시되고 그에 따르는 대부대에 의한 첫 국내진공작전계획이 토의결정되였다. 이것은 조선혁명의 주체적력량을 강화하고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전국적범위에서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올리는데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밤 10시 조선인민혁명군이 보천보에서 일제침략자들을 호되게 답새기였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은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1937년 6월 9일부 《동아일보》는 《태풍이 지나간 뒤의 보천보》라는 제목으로 《보천보의 주요건물들은 모두 하루밤사이에 재가 되고말았다.주재소는 가련하게도 벌의 둥지같이 되고 면사무소는 아직 연기가 몰몰 나고 기둥과 들보가 탄 시커먼 숯덩이만 앙상하게 남았으며 문서더미도 모두 타서 바람에 재만 날리고있었다.》고 전하였다.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을 뒤쫓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한 일본인은 그때를 회상하여 《보천보사건시에 내가 당한 부상 즉 만신창이 되도록 얻어맞은 몸과 혀바닥은 나 개인에게만 한한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말해서 참으로 중평광산습격전, 백학동전투를 비롯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출이 활발히 전개되였다.백두산지구진출작전, 백두산 서남부일대에서의 유격작전, 국내진공작전 등 수많은 대부대기동작전들은 《천하무적》이라고 떠들어대던 일제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기고 식민지통치기반을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았다. 특히 출판보도물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전투소식들을 크게 소개하며 찬양하였다. 1938년 1월 15일부 《동아일보》에 의하면 1937년 한해 조선인민혁명군의 압록강대안진출수는 1, 025차례(하루평균 약 3차례)이고 그 총인원수는 3만여명에 달하였으며 이는 《1년간(1937년) 국경의 특이한 광경》이였다고 한다. 이전 쏘련의 출판물들도 1937년~1939년기간에만 하여도 조선인민혁명군은 일제침략자들과의 3, 900번이상의 대소전투를 벌렸으며 국내에서 활동을 적극화하고있을뿐아니라 자기들의 활동구역을 확대해나갔다고 전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이 위풍당당히 국내에 진출하여 일제침략자들을 족친 격동적인 소식들에서 우리 인민은 만고절세의 애국자이신 1942년에 일제가 저들이 탐지해낸 국내의 반일지하조직만 해도 180여개나 되고 조직적력량이 50만이 넘는다고 비명을 지른것만 보아도 일제와의 전면대결전에 온 민족이 총궐기해나섰다는것을 실증해주고있다. 국내의 넓은 지역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 소조, 정치공작원들의 군사정치활동이 줄기차게 벌어졌으며 무장투쟁과 대중투쟁이 밀접히 결합되여 일제와의 최후결전을 위한 전민항전준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였다. 1930년대 후반기부터 1940년대 전반기까지 전민항쟁을 위한 비밀근거지, 림시비밀근거지들이 속속 꾸려졌다. 조선혁명의 사령부가 자리잡은 백두산밀영과 백두산지구 비밀근거지가 창설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발전시켜나갈수 있는 우리 혁명의 중심적령도거점, 기본전략기지가 마련되였다.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황해도를 비롯한 도처에 비밀근거지, 림시비밀근거지들이 꾸려져 지역적령도거점,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 소조, 정치공작원들의 활동기지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수행하였다.안주지구 비밀근거지, 랑림산비밀근거지, 부전령비밀근거지, 후치령비밀근거지, 풍산비밀근거지를 비롯하여 은페, 위장에 유리하고 진출하기 쉬우며 주민구성이 좋은 곳들에 근거지들이 련이어 마련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 소조, 정치공작원들에 의해 1940년대 전반기 북부의 온성지구로부터 남해의 제주도까지 조국땅 이르는 곳마다에 각이한 형태의 무장봉기조직들이 결성됨으로써 적의 배후에 전민항쟁의 군사적기반이 축성되게 되였다. 제주도에서 일본군의 공군기지를 습격하여 140여명의 비행사와 기술인원들을 죽이고 69대의 비행기를 파괴한것, 신의주에서 군수물자를 실은 7개의 차량을 폭파하고 제지공장을 소각한것, 웅기(선봉)에서 6개의 연유창을 폭발시킨것 등 온 나라에 전민항전의 불길이 세차게 일어번졌다. 1945년 8월 9일 평양, 함흥, 원산, 한성(서울), 대구, 부산, 진주 등 도처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에 합세한 인민들의 대중적인 반일폭동도 벌어졌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드세찬 공격과 인민들의 적극적인 반일항전에 의하여 적들의 지탱점들은 여지없이 격파되였다. 이렇듯 원쑤의 아성에 불을 질러 전체 조선인민의 심장속에 해방의 서광을 안겨준 그날로부터 장장 80년의 세월이 흘러갔으나 보천보의 불길은 우리 혁명의 영원한 승리의 기치로 주체의 사회주의위업완성을 위한 천만군민의 장엄한 대진군을 적극 고무추동하고있다. 보천보에서 높이 울린 자주, 선군의 총성은 오늘 력사의 돌풍을 쳐갈기며 명실상부한 핵강국, 아시아로케트맹주국의 지위에 올라선 우리 공화국의 장쾌한 승리의 포성으로 악의 제국인 미국의 최후멸망을 선언하며 다발적으로, 련발적으로 울려퍼지고있다. 백전백승 조선로동당의 현명한 령도따라 나아가는 길에 오직 승리와 영광만이 있다는 절대불변의 신념과 의지를 안고 사회주의강국건설을 다그쳐나가는 천만군민의 심장속에 보천보의 홰불은 혁명의 불길로 영원히 타오를것이다. 【조선중앙통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