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6월 18일 로동신문
혁명전통교양의 대전당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아서(8) 《조국에 무보를 뻗치고 군호를 올리자!》
강사를 따라 우리는 8호실에 들어섰다.이 호실부터 1930년대 후반기내용이 시작된다는 강사의 말에 우리는 벽면들을 둘러보았다. 한눈에 확 안겨드는 글발이 있었다. 《조국에 무보를 뻗치고 군호를 올리자!》 그 글발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우리에게 강사는 남호두회의의 기본정신을 반영하여 눈덮인 천고의 밀림을 배경으로 금문자로 부각되여있는 글발을 보느라니 금시 조선인민혁명군의 힘찬 발걸음소리가 들려오는듯싶고 멸적의 총성이 울릴것만 같아 참관자들로 하여금 당시 조선혁명의 새로운 앙양기가 도래하였음을 알게 해주었다. 강사는 먼저 우리가 앉은 의자들에 박물관을 찾는 참관자들의 편의를 두고 마음쓰신 벽면상단에는 조선반도에서는 모든 조선적인것을 말살하고 모든 형태의 반일운동과 반일적요소들까지 전멸시키기 위한 광란적인 대섬멸전이 벌어졌다는 우리 바로 이 벽면에 남호두회의를 전후한 시기 국내외정세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여있다고 말하며 강사는 사진자료들을 짚어나갔다. 《에티오피아전선으로 출동하는 파쑈이딸리아의 기계화부대》, 《〈방공협정〉을 체결하는 일본과 도이췰란드 군국주의자들》… 그 모든 사실들을 전시물들을 통하여 해설한 강사는 벽면을 가리켰다. 《사상범보호관찰법》을 비롯한 악법들을 조작하고 파쑈적인 폭압기구를 대대적으로 늘이였으며 가는 곳마다에서 애국자들을 닥치는대로 검거, 투옥, 학살한 일제의 만행자료들을 보며 우리는 치솟는 격분을 금치 못하였다. 《조선의 철광산은 대재벌이 전부 점령, 조선인의 경영은 한곳도 없어》, 《조밥먹고 농사지어 백미는 일본으로, 생산은 늘어도 배주리는 조선농민》… 주먹같은 활자로 찍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기사제목들은 1930년대 중엽 조선인민에 대한 일제의 파쑈통치와 식민지략탈상을 그대로 보여주고있었다.강사는 전시되여있는 토스레옷과 짚신, 《소작계약서》와 《차용금증서》, 벽면의 만화를 통하여서도 2중3중의 착취와 압박에 시달리던 우리 인민의 비참한 처지를 알수 있다고 하였다. 벽면에 전시된 《만주로 간 조선동포 8년간에 20만 격증》, 《살길 찾아 만주로 매일 260명》이라고 보도한 신문자료들이 강사의 말을 립증해주었다. 이처럼 1930년대 중엽 우리 인민에 대한 일제의 정치적폭압과 경제적략탈의 포악성은 최절정에 이르러 조선은 통채로 죽어가고있었다고 첫 벽면에 대한 해설을 마친 강사는 만년장설을 떠이고 설레이는 천고의 밀림을 형상한 다음벽면으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남호두란 경박호의 남쪽머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서 호수로 흘러드는 소자지하물줄기를 따라 상류쪽으로 몇십리 올라가면 깊은 계곡의 산탁에 낡은 귀틀집 두채가 있었다고 하면서 강사는 참관자들에게 남호두회의장소를 찍은 사진을 가리키는것이였다. 력사가들이 1930년대 후반기 우리 나라 력사의 시원지라고도 하는 《소자지하의 귀틀집》이였다. 당시 귀틀집앞에는 커다란 사스레나무와 잣나무가 각각 한그루씩 있어 찾아오는 사람들의 표적으로 되였다는 강사의 말에 우리는 사진을 주의깊게 보았다.무성한 잡관목들이 울창한 수림속에 자리잡은 귀틀집, 지금은 초목에 묻혀 집터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되였을것이다.허나 남호두의 저 소자지하골짜기는 얼마나 많은 사연을 안고있는것인가. 바로 그 집에서 력사에 널리 알려진 남호두회의가 열리였다는 흥분으로 우리는 강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남호두에 도착하신 위증민동지는 주체25(1936)년 2월 27일부터 3월 3일까지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소집하신 《남호두회의를 분기점으로 하여 조선혁명은 새로운 앙양기를 맞게 되였다.그런 의미에서 남호두회의는 1930년대 전반기와 1930년대 후반기를 구획짓는 조선혁명의 분수령이라고 할수 있다.》 벽면에 부각되여있는 우리 벽면의 왼쪽에 명시되여있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국경지대에로 진출시키며 투쟁무대를 점차 국내에로 확대할데 대한 방침,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더욱 확대발전시킬데 대한 방침, 당창건준비사업을 적극 추진시킬데 대한 방침들을 비롯하여 우리 우리는 《조국에 무보를 뻗치고 군호를 올리자!》 남호두회의의 기본정신을 반영한 구호를 바라보느라니 우리는 남호두회의후에 보무당당히 조국에로의 진출의 길에 올랐다.… 승리자들의 잔치라고도 할수 있는 남호두회의는 우리 혁명에서 주체를 완전히 확립한 력사적인 회의였다고 하며 강사는 다음벽면으로 향하였다.《새 사단의 탄생》이라는 글발이 부각되여있는 벽면앞에서 강사의 해설은 계속되였다. 《남호두회의방침에 따라 국내에로 무장투쟁을 확대해나가자면 주력부대를 튼튼히 꾸리는 문제가 급선무로 제기되였습니다.》 거기로 가시는것은 위험하다고, 절대로 들어가시면 안된다고 막아나서는 대원들을 만류하시며 끝내 병실을 찾으신 미혼진밀영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진행하신 후 품들여 키우신 우수한 지휘관, 대원들을 여러 항일무장부대들에 파견하신 《민생단》문서보따리를 불태우시는 마안산에는 순수 조선사람들로 구성된 2련대가 있었다.바로 2련대를 기둥삼아 새 사단을 꾸릴것을 결심하신 강사의 해설을 들으며 마안산에서의 《민생단》문서보따리의 소각은 새 인간들의 탄생, 새 사단의 탄생만을 보게 한것이 아니라 사랑의 부활, 새로운 사랑의 탄생도 가져왔다고, 사람들을 믿은 덕에 우리는 천하를 얻은셈이 되였다고 하신 새 사단의 탄생과 관련한 자료들이 전시되여있는 벽면에서 우리의 눈길을 특별히 끈것은 소년중대원들을 돌보시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작식대원이였던 장철구동지, 머슴군으로부터 조선인민혁명군 련대정치위원으로 성장한 김산호동지, 조선인민혁명군 첫 녀성중대 중대장 박록금동지, 국제주의렬사 장울화동지… 혁명전우 장울화, 누군가가 외워보는 이 말을 들으며 강사는 주체82 (1993)년 7월 29일 조선혁명박물관에 나오신 장울화는 항일무장투쟁시기 조선혁명을 적극 도와준 혁명전우라고 하시며 조선인민혁명군의 새 주력사단은 그후 항일무장투쟁과 당창건을 위한 사업, 통일전선운동을 비롯한 전반적조선혁명을 승리에로 이끌어가는 선두기관차의 역할을 수행하였다.이 나날 조선인민혁명군은 《김사령부대》, 《고려홍군》, 《대학생부대》라는 남다른 호칭속에 인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강사의 해설을 들으면서 8호실의 다음벽면을 바라보는 우리는 동강밀영의 귀틀집으로 들어서는것만 같은 감을 느꼈다. 조국광복회창건을 선포하시는 백두산청년장군의 모습을 형상한 영상미술작품이 온 벽면을 채우고있었다.붉은기를 배경으로 거연히 서시여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각계층 인민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으시는 조선인민혁명군 통일전선체조직은 불가능한것으로 여기고있던 당시견해의 부당성을 우리 바로 이 이야기가 우리 량심적이고 혁명적이며 박식하였던 리동백동지는 우리 남호두로부터 동강으로 나오시는 전기간 끊임없는 전투들과 행군의 짬시간을 리용하여 조국광복회의 강령과 규약, 창립선언을 작성하시는 주체25 (1936)년 5월 조국광복회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는 우리가 모든 차별을 론하지 않고 늙은이와 젊은이, 남자와 녀자 할것없이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식량이 있는 사람은 식량을 내고 기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기능과 지혜를 바치며 2천만 민중이 일심동체가 되여 반일조국광복전선에 총동원된다면 일제놈들은 괴멸될것이며 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은 이룩될것이다.… 《3.1월간》발간사업을 지도하시는 바로 이 사진자료들이 조국광복회 회장이신 우리는 참관자들과 함께 조선혁명의 창창한 새날이 백두산기슭에서부터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조국에 무보를 뻗치고 군호를 올리자!》 혁명앞에 시련이 겹쌓이고 력사의 모진 광풍은 항일의 전구들을 휩쓸었어도 민족의 글 및 사진 본사기자 리금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