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6월 25일 로동신문

 

미제는 조선전쟁의 도발자

 

미제는 1945년 9월 8일 《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조선에 침략의 군화발을 들여놓았다.

조선을 세계제패야망실현의 중요한 전략적지역으로 간주한 미제의 남조선강점으로 하여 조선반도에는 전쟁을 배태한 위험천만한 긴장상태가 조성되게 되였다.

미제는 남조선에서 야만적인 군정통치를 실시하면서 친미반동세력을 규합하고 북침전쟁을 일으키는데 유리한 사회정치적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조선문제를 부당하게 유엔에 끌고가 《단독선거》에 관한 결정을 꾸며내고 리승만친미주구《정권》을 조작하였다.

조선전쟁도발준비를 주도한 장본인으로서의 미제의 정체는 침략전쟁수행의 돌격대역할을 놀게 될 괴뢰군을 편성하고 급속히 무장시킨데서 더욱 낱낱이 드러났다.

미제는 《북조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잘 무장된 10만여명의 병력을 신속히 육성하는것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괴뢰군을 조작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리승만괴뢰도당은 상전의 부추김밑에 《국군》의 간판을 단 괴뢰군을 만들어내고 짧은 기간에 그 병력수를 10만여명으로 늘였으며 20여만명규모의 청년방위대라는 반군사조직도 만들어냈다.

미제는 괴뢰군의 통수권을 완전히 틀어쥐였다.남조선에 미군사고문단을 설치하고 괴뢰군의 각 사단에는 물론 련대, 대대에 이르기까지 군사고문들을 배치하여 괴뢰군의 군사행동을 일일이 통제하였다.

미국은 괴뢰군을 저격무기로부터 시작하여 각종 포와 함정,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미국제무장장비들로 대대적으로 무장시켰다.괴뢰군의 현대화를 위해 미제가 퍼부은 돈은 1948-1950년기간에 26억US$를 넘었다.그에 편승하여 리승만괴뢰도당은 《정부》예산의 근 절반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을 군사비로 탕진하였다.

그에 대하여 미국경제협력국 조선분국 국장 죤슨은 미국회에서 《미국제무기로 무장하고 미국장교들에 의하여 훈련된 10만여명의 남조선군대는 모든 준비를 끝마치였으며 언제든지 전쟁을 개시할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떠벌였고 리승만역도도 《3일이내에 평양을 점령할수 있다.》고 비린청을 돋구었다.

또한 미국은 막대한 자금을 들여 일본을 조선전쟁에 필요한 병참기지로 전변시켜놓고 방대한 미제침략군무력을 일본과 그 주변수역에 전개하였다.

미제는 북침전쟁계획작성에 특별한 주목을 돌리고 총력을 기울였다.

조선과 만주, 씨비리를 점령할것을 예견한 《A, B, C계획》이 연구작성되였으며 《A》계획과 관련한 《북벌》군사행동계획이 작성되였다.《A》계획은 38゜선에 미군과 괴뢰군 10개 사단을 집결시켜 2개의 작전지대를 만들고 전선서부부대들은 평양으로, 전선동부부대들은 양덕, 원산으로 진격하며 평양북부지역과 원산북부지역에서 상륙작전을 진행하여 전조선을 타고앉는것이였다.

이 계획안은 1950년 1월 미합동참모본부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되였고 전쟁을 일으킨 즉시 미군을 투입한다는 등의 내용들이 보충되여 정식 조선전쟁도발계획 《AL-3》으로 최종완성되였으며 같은 해 4월 미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토의비준되였다.

이런 속에서 미제는 조선전쟁을 위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괴뢰군을 내몰아 1947년부터 38゜선일대에서 무장도발을 계단식으로 확대하였다.1949년 한해동안에만도 2 600여차례의 무장도발을 감행하였다.

서방출판물들이 무장도발사건을 38゜선에서의 《작은 전쟁》이라고 표현하면서 조선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돌발적으로 일어난것이 아니라 이미 1947년부터 시작되였다고 평한것은 당연하다.

당시 미군사고문단 단장 로버트가 괴뢰륙군사단장회의에서 《38゜선 이북지역에 대한 많은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해 수행되였으며 남조선군의 진공은 오직 미군사고문단의 명령에 의해서만 수행되여야 한다.》고 떠벌인것은 미제야말로 조선전쟁도발의 직접적인 조직자, 지휘자였다는것을 스스로 드러내놓은것이다.

하다면 미국에 조선전쟁도발이 왜 필요했는가 하는것이다.그에 대하여 미국국제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 윌리암 테일러와 부리사장 아모스 에이.죠단은 공동으로 쓴 책 《미국의 국가안보정책과 그 과정》에서 이렇게 폭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직후 트루맨은 랭전을 선포하고 대쏘봉쇄전략을 들고나왔다.트루맨이 긴급해결할 과제는 대쏘봉쇄전략에 맞는 군사력을 확보하는것이였다.이를 위해 트루맨은 국회에 국방예산을 늘여줄것을 요구하였다.그러나 국회는 이 요구를 묵살하였다.1949년 쏘련에서 핵폭발시험이 진행되고 중국혁명이 승리하자 트루맨은 더욱 난처하게 되였다.

그는 다시금 국방예산을 늘일것을 주장하였다.그러나 국회는 국방예산규모를 1949회계년도에 129억US$, 1950회계년도에 130억US$의 수준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

그 어떤 위기도 조성되지 않는 조건에서 어떻게 국방예산을 늘이고 군사력을 증강할수 있겠는가 하는것이였다.

트루맨이 안고있던 난문제는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에 의하여 해결되였다.》

전쟁도발전야에 남조선을 행각한 덜레스가 조선을 유라시아라는 《큰 고기덩어리》를 잘라먹을수 있는 《단검》이라고 한것은 결코 우연치 않다.

전쟁준비를 끝낸 미제침략자들은 1950년 2월에 리승만역도를 도꾜에 있는 미극동군사령부에 불러다 공화국북반부를 공격할데 대한 11개 조항의 전쟁훈령을 주었다.

트루맨행정부는 전쟁상인 덜레스에게 조선전쟁도발을 지휘하도록 위임하였다.

그에 따라 1950년 6월 17일 미국대통령의 특사로 남조선에 날아든 덜레스는 미군사고문단과 괴뢰군우두머리들을 거느리고 군사분계선에 직접 나타나 북침전쟁준비상태를 검열하고 트루맨이 최종적으로 비준한 전쟁비밀지령을 하달하였다.

괴뢰들은 미군사고문들의 지휘밑에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전지역에 걸쳐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불의의 무력침공을 개시하였다.

세계를 경악케 한 조선전쟁은 이렇게 터졌다.

본사기자 리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