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7월 12일 로동신문
혁명전통교양의 대전당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아서(9) 빨찌산장군의 만고의 항쟁사를 전하는 백두산
9호실로 들어서는 참관자들은 더욱더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백두의 이깔나무숲을 형상한 벽면들, 투사들의 체취가 그대로 슴배여있는듯 한 두그루의 구호나무, 백두산밀영 사령부귀틀집모형과 그옆의 기발대에 게양되여있는 붉은기… 참관자들모두는 백두밀림지대에 들어선 심정이였다. 참관자들은 누구나 경건한 마음을 안고 백두산에 오르는듯 한 격정에 휩싸였다. 《백두산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국경일대에 새로운 유격근거지를 창설할데 대한 력사적인 남호두회의방침의 정당성에 대해 설명하는것으로부터 강사의 이야기가 시작되였다. 강사는 백두산은 군사지형학적견지에서 볼 때 한사람이 지키는 관문을 천사람이 열지 못할 천연요새였으며 조선의 상징이고 우리 인민의 마음의 기둥이였다는데 대하여 그리고 백두산을 타고앉아야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하고 전반적조선혁명을 앙양에로 이끌어올릴수 있었다는데 대하여 해설하였다. 강사의 해설에 심취된 참관자들은 백두산이야말로 조선인민혁명군이 의거해야 할 지상제일의 보루였음을 절감하며 무송현성전투를 지휘하시는 벽면에는 그밖에도 무송현성전투에서 사령부의 안전을 지켜싸우시는 항일의 녀성영웅 조선인민혁명군이 화공전술로 적을 타승한 서강전투와 적들의 무기소제시간을 리용하여 불의습격으로 원쑤들을 항복케 한 시난차전투의 승리도 통쾌하였지만 백두산서북부의 적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조선인민혁명군의 맹렬한 활동에서 참관자들의 관심을 류달리 끈것은 무송현성전투에 대한 이야기였다. 강사는 무송은 일제는 무송에 관동군, 위만군, 경찰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무력을 주둔시켰고 견고한 방어시설을 구축하여 2중3중으로 경비를 강화했다. 전투개시시간은 주체25(1936)년 8월 17일 새벽 1시로 정해졌고 참가인원은 1 800여명이나 되였다. 그런데 전투는 여러가지 조건으로 하여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이때 여러명의 녀대원들과 함께 이곳에서 식사준비를 하고계시던 항일의 녀성영웅 무송현성전투에 대한 해설을 들으며 참관자들은 맞받아나가는 공격정신과 령활한 전술로 승리를 안아오신 참관자들은 계속하여 무송현성전투에서 총창으로 여섯놈의 적을 찔러눕힌 김확실동지가 세상에 유명한 망원전술로 마등창수림에서 싸우지 않고도 적들을 크게 이긴 소덕수전투와 19도구전투 등에 대한 이야기도 우리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였다. 우리는 《백두산근거지 창설》이라는 글발이 부각된 벽면에는 소백수골회의와 백두산밀영건설을 지도하시는 그앞에서 강사는 주체25(1936)년 9월 소백수골에 나오시여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지휘성원들의 회의를 소집하신 《항일의 녀성영웅 언제나 벽면에는 또한 백두산밀영건설을 위하여 선발대로 파견되였던 김주현동지, 리동학동지, 김운신동지들의 사진과 백두산지구 비밀근거지분포도가 전시되여있었다. 백두산지구 비밀근거지분포도에 표시된데 의하면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밑에는 압록강안밀영이 있고 옆에는 사자봉밀영이 자리잡고있으며 웃쪽에는 곰산밀영, 간백산밀영, 선오산밀영, 소연지봉밀영, 무두봉밀영, 대각봉밀영, 쌍두봉밀영이 차례로 놓여있었다. 강사는 이 10개의 밀영을 통털어 백두산지구 비밀근거지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매개 밀영들의 사명은 다르지만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하나의 통일적인 밀영망을 이룬데 대해 알기 쉽게 해설하였다.그런 다음 우리를 백두산밀영 사령부귀틀집모형앞으로 이끌어갔다. 모형안에 전시된 전시물들을 돌아보는 참관자들에게 강사는 백두산에 사령부가 자리잡은 때로부터 이어 우리는 백두산근거지분포도를 마주하였다.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 나라와 서간도의 넓은 지역에 표시된 수많은 밀영들과 지하혁명조직망들은 당시 혁명의 불길이 얼마나 세차게 타번졌는가를 보여주고있었다. 우리의 참관로정은 장백인민들속에서 정치사업을 하시는 해설을 통하여 참관자들은 참관자들은 대탁온천밀영자리, 곰의골밀영자리를 비롯하여 백두산근거지의 밀영자리들을 보여주는 사진자료와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밀영건설과 군복생산에 리용하였던 톱과 재봉기를 비롯한 전시물들을 돌아보면서 일제의 《동기대토벌》을 분쇄하기 위한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내용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된 곳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도문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동기대토벌》을 모의하고있는 일제침략자들의 사진자료를 보니 치솟는 적개심을 금할수 없었다. 이때 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의 〈토벌〉을 격파하는가 못하는가 하는것은 힘들여 꾸린 백두산근거지를 지키고 혁명을 계속 전진시키느냐 아니면 주저앉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로 나섰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강사의 이야기는 적들의 《동기대토벌》을 분쇄하기 위한 첫 전투인 곰의골어귀전투와 그후에 있은 홍두산전투에로 이어졌다. 그때 적들이 홍두산쪽으로 많이 몰려갔다는 정보를 받은 오중흡동지는 사령부의 안녕을 위하여 즉시 대원들을 이끌고 수십리길을 단숨에 달려가 야간습격조와 함께 적을 소멸하였다. 홍두산전투에 대한 해설을 마치면서 강사는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홍두산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일본군장교가 후날 우리 나라에 기자의 신분으로 왔던적이 있었는데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발휘한 강의한 정신력을 보여준 홍두산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참관자들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뿐이 아니다. 수백명의 정안군놈들을 토막치기 전술로 답새긴 도천리전투, 불과 30분사이에 100여명의 적을 살상하고 두개 중대를 투항시켰으며 3정의 기관총과 150여정의 보총, 많은 탄알을 로획하고 일제의 대《토벌》작전에 종지부를 찍은 리명수전투… 백두산근거지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정치활동이 얼마나 맹렬하게 진행되였던지 당시의 출판물들과 반증자료들에는 일제의 패망상이 그대로 비껴있었다. 진정 이처럼 9호실에 전시된 자료들과 전시물들은 오늘도 백두의 넋과 기상이 어려오는 뜻깊은 사적물들을 다시한번 바라보느라니 문득 장편서사시 《백두산》의 한구절이 떠올랐다. … 너 백두야! 조선의 산아 말하라- 어떻게 떨어졌던 태양이 이 나라에 솟았느냐? 떨어졌던 태양이 다시 솟는 그때 네 누구를 맞이했느냐? … 그렇다.조종의 산 백두산은 9호실에 대한 참관을 마치며 우리는 날로 비상히 솟구쳐오르는 백두산대국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가슴부풀어오름을 금할수 없었다. 글 본사기자 강원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