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8월 1일 로동신문
혁명전통교양의 대전당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아서(13) 자주의 기치높이 또다시 조국땅에로
조선혁명박물관 12호실에 대한 참관에 이어 우리는 다음호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13호실의 네 벽면우에는 《남패자회의》, 《고난의 행군》, 《무산지구진공작전》, 《백두산동북부의 광활한 지대에서》, 《국제주의의 기치아래》, 《대부대선회작전》이라고 쓴 글발들이 게시되여있었다. 강사를 따라 참관자들은 먼저 남패자회의를 지도하시는 《…남패자회의를 전후한 시기 조선혁명앞에는 매우 어렵고 복잡한 난국이 조성되여있었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뗀 강사의 이야기는 참관자들로 하여금 력사의 그 나날에로 추억의 노를 저어가게 하였다. 《남패자회의에서는 또다시 국내에로의 대부대진공작전을 벌릴것을 토의결정하고 그해 겨울에 〈고난의 행군〉을 하였고 그 이듬해 봄에 압록강연안일대에 나와서 춘기대반격전을 벌리여 도처에서 적들을 답새겨댔습니다.》 남패자회의가 열리던 당시 일제는 중국남방으로 공격의 예봉을 돌리는 한편 후방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병력을 투하하여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토벌에 더욱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산이면 산, 도로면 도로, 마을이면 마을마다 일제《토벌대》가 욱실거렸고 간첩들과 주구들이 마을과 산판들을 싸다니며 발악하였다. 게다가 《혜산사건》으로 해서 수많은 지하조직원들이 검거투옥되여 국내혁명운동도 시련을 겪고있었다. 국제당의 좌경모험주의가 빚어낸 열하원정의 후과도 컸다. 열하원정의 소용돌이속에서 동북항일련군의 적지 않은 부대들이 원정과정에 많은 유생력량을 잃었고 일부 무장부대들에서는 도주자와 귀순자들이 생기였다. 남패자에서 양정우가 말한 주견이란 다름아닌 《자주는 우리 강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관자들은 우리 회의에서 또한 적들의 대규모적공세에 대처하여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국경일대에 진출하여 군사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릴데 대한 문제와 파괴된 조국광복회조직을 복구정비하고 대중정치사업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릴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혁명에서 자주적립장을 확고히 견지하기 위한 전략전술적방침들을 내놓으시였다. 다음벽면을 마주한 참관자들의 눈앞에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승리에로 이끄시는 붉은기를 펄펄 휘날리며 설한풍이 휩쓰는 험준한 산발을 넘어 또다시 조국진군의 길에 오른 조선인민혁명군, 꿈에도 잊지 못하시던 사랑하는 조국땅을 그려보시는듯 손에 쌍안경을 드시고 대오의 진두에 서계시는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 참관자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강사의 해설에 귀를 기울이였다. 《항일무장투쟁기간에 어려운 행군이 여러차례 있었지만 이 행군은 행군기간으로 보나 그 간고성으로 보나 여느 행군에는 대비도 할수 없는 간고한 행군이였습니다.…》 고난의 행군은 시종 적들의 끊임없는 추격과 포위속에서 진행되였다. 주체27(1938)년 12월초 남패자회의를 성과적으로 마치신 몽강현 이도화원막바지를 떠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남패자의 울창한 밀림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을수 없었다.남패자의 수림을 중심으로 우등불이 겹겹이 원을 그리며 타오르고있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았던것이다. 불무지수로 보아 적《토벌대》놈들이 수만명이 되리라는 짐작이 갔다. 그때 적들은 처음부터 《맹공장추전술》을 썼는데 그 전술에서 기본은 진드기처럼 검질기게 달라붙어 상대를 못살게 구는 《다니전술》이였다.《다니전술》은 《토벌대》를 요소마다에 미리 배치해놓고있다가 유격대가 나타나면 치고 또 일단 발견한 유격대는 끝까지 따라가며 소멸한다는 전술이였다. 《맹공장추전술》이란 이를테면 《장거리추격전술》과 《요점배치전술》을 배합한것으로서 유격대가 쉬지도 자지도 먹지도 못하게 줄창 쫓아다니여 결국은 녹아나게 만든다고 줴치면서 적들이 고안해낸것이였다.그리하여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하루에도 몇차례씩 치렬한 격전을 벌리면서 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하루에 20번이상 전투를 한 날도 있었다. 적들이 어찌나 진드기처럼 악착하게 뒤따르는지 밥을 지을 시간이 없어 생쌀을 씹으며 행군하면서 결사전을 벌리기도 하였다. 도보로 대엿새면 가닿을수 있는 거리를 무려 100여일이나 걸려서야 목적지에 가닿을수 있었다는 이 한가지 사실로도 적의 추격이 얼마나 집요하였는가 하는것을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이해따라 겨울날씨가 전에 없이 사납고 눈이 많이 내리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100년래의 대강설》이라고 했는데 온 산판과 골짜기가 모두 눈에 묻혀 깊은데는 몇길씩 되였다. 눈이 너무나 깊어 그것을 계속 헤치고나갈수 없어 눈굴을 뚫거나 몇명이 눈우에 누워 디굴디굴 굴러 다져놓은 다음에 대오가 조금씩 전진하였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무서운 기아도 부대의 전진을 막아나섰다. 남패자의 수림속을 떠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한주일이상 낟알구경을 못하고 눈만 움켜먹으면서 전진할 때가 많았다.거기에 쫄라병까지 겹치여 설상가상이였다. 그 나날 한홉의 미시가루를 대원들에게 나누어주시는 벽면에는 또한 고난의 행군시기 청봉밀영에서 항일의 녀성영웅 감동깊은 눈빛으로 전시된 사적자료들과 사적물들을 주의깊게 보며 참관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이끄시고 조국진출의 길에 오르신 《고난의 행군을 승리적으로 결속하신 강사의 이야기는 계속되였다. 또한 반일민족해방투쟁을 계속 확대발전시키기 위하여 광범한 인민대중을 조국광복전선에 튼튼히 묶어세울데 대하여서와 무산지구진공작전을 성과적으로 결속한 다음 백두산동북부에서 대부대에 의한 새로운 작전을 전개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국내진출의 후보지로 무산지구가 선정되였을 때 일부 지휘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보천보전투가 있은 후 적들이 이 지대에 가장 악질적인 수비무력을 몇배로 증강해놓고 삼엄한 경비진을 펴놓고있는 때에 압록강을 건너 무산지구로 진출한다는것은 사실상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였다. 하지만 주체28(1939)년 5월 18일 력사에 널리 알려진 갑무경비도로에서의 일행천리전술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바로 무산지구진공때에 생겨났다. 보천보전투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일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에 진출하는 경우 기동수단을 리용하여 필요한 지점까지 《토벌》력량을 급송급파하기 위해 갑산과 무산의 무인지경을 련결하는 도로를 닦아놓고 준공검사를 기다리고있었다. 후날 갑무경비도로를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이 대낮에 통과했다는것을 알게 된 적들은 《미증유의 괴사》라고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벽면에는 적들의 삼엄한 경비진을 뚫고 무산지구에로 진출한 조선인민혁명군을 맞이한 인민들의 감격과 기쁨은 끝이 없었다.지난 겨울에 조선인민혁명군이 다 얼어죽었다고 줴친 놈들의 선전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 많은 군대가 어디에 있다가 무슨 수를 써서 무산땅에 나타났는가고 하면서 인민들은 대원들을 얼싸안고 기뻐하였다. 무산지구 인민들의 앙양된 혁명적열의를 더욱 북돋아주기 위하여 적들을 최종적으로 대홍단벌에서 소멸할것을 결심하신 대홍단전투를 치른 다음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활동무대를 백두산동북부로 옮기고 두만강연안을 류동하면서 군사정치활동을 맹렬하게 벌리였다.그 시기의 군사활동에서 대표적인것은 올기강전투였으며 대중정치사업에서 제일 이채로왔던것은 옥돌골에서의 경축모임이였다. 그곳에는 중국인민과의 반제공동전선을 더욱 강화하고 쏘련인민의 투쟁을 적극 지원하는것은 우리 공산주의자들의 숭고한 국제주의적의무이라고 하신 그밑에는 참관자들은 이어 《대부대선회작전》이라고 쓴 글발이 있는 벽면으로 향하였다. 벽면에는 대부대선회작전을 승리에로 조직령도하시는 그리고 또한 홍기하전투에서 마에다부대가 참패를 당한데 대한 자료들과 사진들도 있었다. 강사의 해설을 들으며 참관자들은 령활무쌍한 유격전법으로 《상승부대》, 《토벌의 왕자》로 자처하던 마에다부대를 비롯한 일제의 《정예》부대들을 격멸하고 대부대선회작전을 빛나는 승리에로 이끄신 참관자들과 함께 다음호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우리의 가슴속에는 자주의 기치높이 조선혁명을 빛나는 승리에로 이끄신 글 및 사진 본사기자 김일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