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8월 2일 로동신문

 

화평땅의 참된 로당원

화평군 읍 76인민반에 사는 김창균동무에 대한 이야기

 

올해 나이가 70살인 김창균동무는 청춘시절에 조국보위초소에서 입당한 로당원이다.군사복무를 마치고 제대된 후 그는 후대들을 키우는 체육교원으로 한생을 보냈다.

훌륭한 병사, 성실한 교육자로서 년로보장을 받을 때까지의 김창균동무의 당생활은 당과 조국앞에 티 한점 없이 깨끗하고 아름답다.그러나 오늘 우리가 전하려는것은 산골학교의 체육교원으로서 제자들을 위해 바친 김창균동무의 헌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그것은 스스로 《산림감독원》, 《수매원》, 《농장원》이 되여 평범한 일상생활속에 밤하늘의 뭇별마냥 남모르게 새겨간 한 로동당원의 참된 삶의 자욱에 대한 이야기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당생활을 떠나서는 정치적생명을 끊임없이 빛내여나갈수 없으며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을 변함없이 간직할수 없습니다.》

수십년동안 김창균동무는 직업적인 혁명가로서의 자기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을뿐아니라 당과 조국을 위한 좋은 일을 많이 해놓았다.

수십만그루의 나무모를 키워 수백정보의 잣나무림과 창성이깔나무림조성에 기여, 수십t의 파철을 비롯한 각종 유휴자재수집, 수백t의 거름생산.

김창균동무가 교원생활의 나날에는 물론 년로보장을 받은지 1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어떤 평가나 보수도 바람이 없이, 변함없이 나무모를 심고 파철을 수집하고 거름을 생산해온 불같은 헌신에는 공민의 애국적소행으로만 평가하기에는 너무도 큰것이 비껴있다.감동을 금치 못해하는 우리에게 그는 《나야 당원이 아닙니까.》 하고 례사롭게 한마디 했을뿐이다.

 

그는 산림감독원은 아니였다

 

화평군 읍으로부터 강계로 향한 도로를 따라 5리가량 가느라면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체63(1974)년 10월 30일 화평군에서 잣나무와 이깔나무같은 나무를 계속 많이 심을데 대한 교시를 주신 뜻깊은 곳이 있다.

나서자란 고향땅 화평군에 어버이수령님께서 다녀가시였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날 김창균동무는 강계에서 화평까지 먼길을 달려왔다.그때 그는 인민군대에서 제대되여 강계시에 있는 어느 한 학교에서 교원으로 사업하고있었다.어버이수령님께서 오래도록 서계시며 교시를 하시였다는 장소에 선 김창균동무는 고향의 산들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둘러보았다.

(군사복무의 나날에 당기앞에서 수령님의 명령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바치겠다고 맹세를 다진 내가 아닌가.화평사람들모두가 나무를 열그루, 백그루씩만 심어도 수령님의 교시는 얼마든지 관철할수 있다.)

얼마후 김창균동무는 화평군 중흥로동자구의 산골학교 체육교원으로 자진해왔다.

그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어리신 나이에 혁명의 천리길을 걸으시며 발자취를 남기신 흑수려인숙주변에 어린 잣나무들을 심는 일로부터 시작하였다.열그루, 백그루가 아니라 산의 빈자리를 스스로 찾아내여 나무를 심어나갔다.아마 화평군의 산들중에 그가 가보지 않은 산과 못 넘어본 령이 거의나 없을것이다.일요일과 수업후이면 학생들과 함께 산으로 올랐다.그들과 함께 나무를 심으며 고향땅에 깃들어있는 만경대일가분들의 혁명업적에 대하여, 화평사람들을 잘살게 해주시려고 어버이수령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정에 대하여 뜨겁게 이야기해주군 했다.

《산마다 푸른 숲이 우거지게 하라는것은 화평사람들이 대대로 받들고 집행해야 할 어버이수령님의 뜻이란다.어른도 심고 아이도 심으며 우리 대에도 심고 다음대에도 나무를 심으면서 고향 화평을 아름답게 꾸려가자.》

이렇듯 그는 학생들에게 롱구기술을 배워주기에 앞서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었다.자기 고향의 명예를 걸고 롱구경기에 나선 학생들은 도와 중앙경기들에서 우수한 성적을 쟁취하였다.나날이 늘어만 가는 메달과 함께 나어린 학생들의 가슴속에서는 향토애라는 소중한 싹이 자라났다.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은 산골군인 화평땅에도 엄혹한 시련의 파도를 몰아왔다.김창균동무가 제일 가슴아팠던것은 가정살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자식들이 배를 곯는것보다 울창하던 화평땅의 산들이 점차 자기 모습을 잃는것이였다.

(우리 장군님께서 화평땅에 오시여 저 산들을 보시면 얼마나 가슴아파하시겠는가.화평군에 나같은 당원들이 수두룩이 있으면서 제고장숲을 지키지 못했으니 수령님앞에, 장군님앞에 어떻게 얼굴을 들수 있으랴.)

이것이 당원 김창균동무를 자나깨나 괴롭히던 아픔이고 고충이였다.

어느날 그는 안해에게 말했다.

《우리 집 터밭에 나무모를 심어야겠소.》

안해 박정봉동무는 깜짝 놀라 남편을 바라보았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터밭에 나무모를 심겠다는거예요? 부대밭을 일구어서라도 식량보탬을 해야 할 때인데 당신은 참… 당신이 뭐 산림보호원(당시)인가요?》

김창균동무는 터밭의 하얗게 핀 감자꽃이며 우줄우줄 나날이 커가는 강냉이포기들을 가슴아프게 바라보았다.안해가 손끝이 닳도록 애써 가꾼 농작물들이였다.한창 자라는 자식들의 배를 곯지 않게 하자고 치마끈을 졸라매면서 아글타글 애쓰고있는 안해에게 차마 더이상 말이 나가지 않아 김창균동무는 한숨을 내쉬였다.그날 밤 김창균동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박정봉동무도 끝내 잠들지 못했다.그는 남편의 고지식하고 결곡한 성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화평땅에 온 그해부터 남편은 새해를 맞을 때마다, 새달을 맞을 때마다 자그마한 책에 자기가 한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을 꼬박꼬박 적어넣군 하였다.그리고 늘 그 책을 펼치고 하루하루를 총화짓군 하였다.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짬짬이 심어가꾼 나무는 얼마나 많았던가.그 나무들이 자라 무성해진 숲을 볼 때마다 제자들이 체육경기에서 메달을 타올 때 못지 않게 기뻐하던 남편이였다.생나무가 찍힌 그루터기앞에서 그리도 괴로와하며 《나무모가 어데 더 없을가?》 하고 안타까와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마음을 파고들었다.

다음날 새벽 김창균동무는 호미를 들고 터밭에 나갔다.한창 익어가는 푸르싱싱한 감자포기앞에서 그는 또 망설이였다.이때 등뒤에서 인기척소리가 느껴졌다.안해였다.호미를 든 박정봉동무는 남편에게 조용히 말했다.

《어서 나무모를 심자요.》 …

김창균동무의 집 터밭에는 양묘장이 생겨났다.잣나무와 창성이깔나무, 종비나무 등 많은 나무모들을 심었고 아침저녁 온 가족이 양묘장을 가꾸었다.남들이 터밭에 곡식을 심고 가꿀 때 그들은 산에 심을 나무모에 정성을 쏟아부었다.나무모와 함께 김창균동무의 자식들도 자랐다.온 가족이 나무모를 등에 지고 산으로 오르는 그들을 마을사람들은 《애국자가정》이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김창균동무의 둘째아들 김광선동무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난해 겨울 김창균동무가 심한 고열로 병석에 눕게 되였다.병으로 신고하던 그는 어렴풋한 의식속에 도끼질소리를 들었다.도끼질소리만 나면 가슴이 철렁하여 뛰쳐일어나던 그여서 안해를 찾아 물어보았다.

《강계에 있는 둘째가 와서 땔나무를 패고있어요.》

《그렇소? 원 자식도…》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에 다시 누우려고 하던 김창균동무가 갑자기 눈을 떴다.

《우리 집에 무슨 도끼질할 나무가 있단 말이요?》

수십년동안 숱한 나무를 심으면서도 김창균동무의 집에서는 마른 풀덤불이 아니면 나무그루터기같은것을 때군 하였다.아버지의 그 성미를 잘 알고있는 둘째아들이 땔감으로 나무를 한차 싣고 왔던것이다.

김창균동무는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둘째가 패는 나무토막들은 하나같이 목재로 나무랄데 없는 퍼그나 굵은것들이였다.그는 아들을 머리맡에 불러앉히였다.

《아무리 땔나무라 해도 그런 실한 나무를 쓰면 못쓴다.저만큼 굵어지자면 십년나마 자라야 한다는걸 너도 잘 알지 않니.제대군인당원인 네가 우리 원수님께서 산림복구문제때문에 얼마나 마음쓰고계시는지 모른단 말이냐?》

김광선동무는 아버지의 꾸중앞에서 머리를 숙였다.수십년동안 변함이 없는 아버지의 량심의 타이름을 문밖에서 딸과 사위도, 박정봉동무도 묵묵히 듣고있었다.사연많은 그 나무들은 지금도 김창균동무의 집 창고에 고스란히 쌓여있다.

김창균동무는 늘 산에서 생나무를 찍어 땔감으로 쓰는건 나라의 쌀창고에서 쌀을 훔치는거나 같은 나쁜짓이며 산에 나무를 심는건 애국중의 제일가는 애국이라고 이르군 했다.

그는 산림감독원은 아니였다.그러나 로동당원 김창균동무는 화평의 산들에 나무를 많이 심으라고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군의 일군들이나 산림감독원들만이 집행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40여년간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관철하기 위하여 스스로 나무를 심고 가꾸고 숲을 지키며 살아온 한 당원의 아름답고 숭고한 생활의 흐름을 우리 어찌 로동당원의 참된 당생활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을수 있으랴.

 

당생활은 순간도 멈출수 없다

 

세월의 흐름이란 멈출수 없는것이다.화평군 《배움의 천리길》중학교(당시)에서 체육교원으로 사업하던 김창균동무가 년로보장을 받게 된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이였다.

토방에 걸터앉아 덤덤히 먼산을 바라보고있는 김창균동무의 귀전에는 학교운동장에서 와-와- 하는 학생들의 함성이 간간이 들려왔다.아마도 체육시간인듯 넓은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여노는 학생들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년로보장을 받고 집에 들어온 후 첫 당생활총화를 준비할 때의 허전하던 그 심정이 다시 되살아났다.

(일감이 있어야 당조직앞에 총화할것도 있을게 아닌가.아직 오륙이 성성한데 부양이나 받으면서 당생활을 한다는게 어디 말이 된담!)

산에 더 많은 나무도 심어가꾸고 한가지라도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찾아해야 당조직앞에서 떳떳이 당생활총화를 할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그의 하루일과는 년로보장을 받은 후에 오히려 더 바빴다.

이듬해 12월 어느날 이른아침 김창균동무는 읍사무소 초급당위원회에 찾아갔다.

《저에게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100돐이 되는 2012년까지 파철 50t과 거름 100t을 마련하는것을 당적분공으로 주시오.》

초급당일군은 그를 만류했다.

《아바이야 년로보장자가 아닙니까.》

《우리 장군님께서 강선을 찾으시여 새로운 혁명적대고조에로 온 나라의 당원들과 인민들을 부르시였는데 당원인 나도 대고조전투에 한몫해야 할게 아닙니까.》

교원생활을 할 때에도 김창균동무는 나무를 심는것과 함께 짬짬이 파철도 모으고 거름도 생산해왔다.길을 가면서 주은 파철쪼각들을 간수하군 하여 늘 주머니가 인차 해지군 하던 남편에게 박정봉동무가 언젠가 웃으면서 이렇게 핀잔한적도 있었다.

《이러니까 금희가 어렸을 때에 아버지직업이 수매원이라고 해서 교양원을 어리둥절하게 했지요.》

일감을 더 찾은 김창균동무는 일과표를 다시 짰다.월요일과 화요일은 유휴자재수집, 수요일과 목요일은 거름생산, 금요일과 토요일, 일요일은 가정양묘장관리와 나무심기…

방안벽에 큼직하게 나붙은 할아버지의 일과표를 어린 손녀애가 뜯어보며 물었다.

《할아버지도 나처럼 시간표가 있나요? 다른 할아버지들한테는 이런 일과표가 없는데…》

《할아버지는 당원이란다.당원은 다른 사람과 하루일과가 달라야 한단다.》

김창균동무는 마치 교원생활을 할 때처럼 하루생활을 시간을 쪼개가며 규칙적으로 해나갔다.오히려 그때보다 더 많은 일감을 안고 더 분주하게 하루를 보냈다.어느날에는 이런 생각도 했다.

(파철을 비롯한 유휴자재들을 모아놓을 통이 있어야겠군.)

하여 그는 안해가 차곡차곡 건사했던 판자로 함을 만들기 시작했다.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박정봉동무는 마당에서 들려오는 망치질소리에 귀를 강구었다.집안일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던 남편인지라 의아한 마음을 안고 다가가던 안해는 그만에야 야단을 했다.집안에 변변한 가구가 없어 마음먹고 한장두장 모아놓았던 판자로 무슨 함이라니? 하지만 남편의 고집을 꺾을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여 그의 집에는 큼직한 유휴자재수집함이 생겼다.나날이 그 수집함에는 파철이며 파비닐, 파고무 등 유휴자재들이 부류별로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깊은 밤 고즈넉한 정적이 깃든 길거리에서 박정봉동무는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고있었다.초저녁에 흑수리에 모아놓았던 파철을 가져오려고 떠난 남편이였다.이때 멀리서 따르릉- 종소리와 함께 불빛이 천천히 다가오고있었다.불안한 생각으로 성급히 달려가던 그는 한자리에 멈춰섰다.자전거를 무겁게 끌고 오는 남편의 모습이 눈가에 비쳐들었던것이다.

《무슨 일이예요?》

《당신이요? 글쎄 오던 길에 전번에 용접했던 자전거축이 또 부러지질 않겠소.그래서 할수없이 이렇게 끌고 오는중이요.》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훔치며 아무 일도 없은듯 흔연히 대답하는 남편을 민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박정봉동무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눈짐작으로도 수십㎏은 될것 같은 쇠붙이가 짐틀에 실려있었던것이다.

《맨몸으로 오기도 힘든 그 수십리길을 저 파철까지 싣고 끌고 왔단 말이예요?!》

그날 밤 김창균동무는 끝내 몸져눕게 되였다.파철, 파철 하며 헛소리치는 남편을 간호해주는 박정봉동무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걷잡을새없이 흘러내렸다.

(누가 시킨 일인들, 제 집일인들 이렇게 극성일가!)

박정봉동무는 지금도 남편의 땀이 슴배여있는 조그마한 수매증서들을 가보처럼 소중히 간수하고있었다.

어느해 1월초에 김창균동무는 창고에서 손발구를 꺼내여 손질하기 시작했다.새해에 들어서면서부터 첫 전투로 거름을 내가야겠다고 늘 생각하던 그였다.집뒤뜨락은 물론 마을의 여러곳에는 그가 전해에 봄내, 여름내 품들여 마련한 거름더미들이 있었다.그가 집뒤뜨락에 무져놓았던 거름을 손발구에 싣고있을 때 안해 박정봉동무는 참다못해 지청구를 했다.

《농장원보다 더 극성이구려.늘그막에 쉬염쉬염 하면 안되겠수?》

건강을 념려하는 안해의 마음을 잘 아는 김창균동무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 원수님께서 신년사에서 올해 농사를 잘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지 않았소.…》

김창균동무에게는 《로동신문》에 실린 사설을 비롯한 주요기사들을 하나하나 모아놓은 신문철이 있다.그 신문들에 실린 위대한 장군님과 경애하는 원수님의 로작들, 당의 목소리를 심장에 새기며 그는 로동당원으로서 자기가 할 일감을 찾았다.산림복구전투와 관련한 경애하는 원수님의 로작들은 자자구구 빨간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고 또 읽어 보풀이 일 정도였다.

40여년세월을 김창균동무는 이렇게 살아왔다.산림감독원의 일이든, 수매원의 일이든, 농장원의 일이든 당에서 중시하고 자기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을 스스로 당적분공으로 정하고 꾸준하고 완강하게 집행해왔다.

언젠가 가까운 사람이 자넨 무엇을 바라고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가고 물은적이 있었다.그때 김창균동무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바라는게 뭐냐고? 있소.아직 육신을 움직일수 있을 때 우리 원수님의 로고를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싶은거요.그 무슨 공로의 그늘밑에서 일손을 놓고 나라쌀이나 축낸다면 어떻게 당원이라고 하겠소.》

군사임무수행중에 부상을 당했을 때 전우들은 그더러 영예군인수속을 해야 하지 않는가고 권고했었다고 한다.그때에 병사 김창균은 《몸이 이렇게 성한데 왜 나라에 업히여 살겠소? 고향에 돌아가 당에서 배치해주는데서 일하겠소.》 하고 마다했다.

로동생활은 나이와 함께 끝날수 있어도 당원의 참된 당생활에는 년로보장이 있을수 없다.이런 생활지론을 안고 김창균동무는 오늘도 당기앞에 선서를 다질 때와 꼭같은 마음과 발걸음으로 성실하고 량심적인 당생활을 수놓아가고있다.

 

* *

 

우리 당에는 김창균동무처럼 나는 당원이다라는 자각으로 남보다 한가지라도 더 많은 일을 찾아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힘겨운 한걸음을 더 먼저 내짚으려고 애쓰며 자나깨나, 밥술을 뜨고 길을 걸을 때에도 당원으로서 자기가 할 일감을 생각하는 참된 당원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사보다 국사를 먼저 생각하고 보수와 평가보다 헌신과 희생을 더없는 긍지로, 행복으로 여기는 이런 당원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고있기에 조선로동당이 강하고 우리 조국이 굳건한것이다.

화평땅의 참된 로당원 김창균동무의 당생활은 오늘도 만리마대진군의 거세찬 투쟁과 생활의 한복판에서 용용히 흘러가고있다.

본사기자 신   철
정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