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11월 9일 로동신문

 

원한의 38°선은 미제의 죄악을 고발한다

 

반만년의 오랜 세월 하나의 강토에서 살아온 조선민족, 평화애호국가인 우리 나라가 미제때문에 70여년세월 분렬의 가슴터지는 아픔으로 몸부림치고있다.

조국해방을 이룩하고 자주권을 되찾은 우리 민족은 자체의 힘으로 자주적인 새 사회를 건설할 열의에 넘쳐있었으며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적도 또 미국의 지배를 받아야 할 어떠한 리유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제멋대로 38°선에 인위적인 군사분계선이라는것을 만들어놓고 이 나라의 절반땅을 강점하였다.

그 저주로운 38°선은 얼마나 많은 민족수난의 비극을 낳았던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오늘도 남조선을 강점하고 나라의 통일을 가로막고있으면서 우리 인민에게 민족분렬의 고통과 슬픔을 들씌우고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육자살림집 준공식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 삼가 꽃다발을 드린 김정일상계관인이며 로력영웅 인민과학자 원사 교수 박사인 김상옥연구사의 고향은 제주도 서귀포이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이 되여 첫 수업을 받던 날 그는 학습장에 펜을 박은채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이 어려있는 교복이며 돈 한푼 내지 않고 받아안은 학용품을 목메여 쓸어보고 또 쓸어보는 그의 눈앞에 제일먼저 떠오른것은 남녘땅에 있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모습이였다고 한다.

아들의 학비를 마련하느라 바다에서 살다싶이 하던 해녀인 어머니, 어린 나이에 오빠의 학비를 보태준다고 부엌데기로, 아이보개로 고역을 치르던 누이동생이 여기에 함께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하는 생각에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지난날 살아가기가 죽기보다 더 끔찍해 어머니와 함께 보가지알을 먹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던 그, 소학교교원이 되는것이 희망의 전부였던 서귀포의 베잠뱅이소년을 사회주의조국은 얼마나 높은 영광과 행복의 절정에 세워주었던가.

김일성종합대학 교육자살림집에 입사할 교원, 연구사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신 그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그에게 새집들이를 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면서 앞으로도 후대들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해주기를 바란다는 참으로 뜻깊은 말씀을 남기시였다.

그로부터 3년후인 주체105(2016)년 1월에는 은정어린 생일상까지 보내주시였다.그날 그는 온밤 잠들지 못했다고 한다.

꿈같은 행복이 더해질수록 더욱더 커가는것은 이제는 백발의 할머니가 되였을 누이동생에 대한 생각이였다.

(우리 원수님께서 다녀가신 사랑의 집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복된 삶을 누리는 오늘의 내 모습을 동생이 한번만이라도 볼수 있다면!…)

즐거우면 즐거워서, 행복하면 행복해서 한시도 잊어본적 없는 동생이 오빠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잠결에도 들려와 뜬눈으로 맞이한 새날은 그 얼마였던가.

멀리 남녘하늘가를 눈물에 젖어 바라보며 《벌써 60여년세월이 흘렀습니다.》 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던 로학자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수십년간을 학생들에게 력사학을 가르쳐주었다는 송도사범대학 교수 박사인 전룡철교원은 50여년전 대학에 배치받고 개성땅에서 처음으로 본 비무장지대에 대하여 이렇게 추억하였다.

《한때는 배꽃, 살구꽃 만발했을 오붓한 마을자리엔 정자나무 한그루만 외롭게 서있고 철길이 끊어진 바로 그곳에 뿌리를 내린 아카시아나무는 무성하게 자랐는데 송전선이 끊어진 철탑까지 보고나니 정말 가슴이 쓰렸습니다.》

한피줄을 이은 혈육을, 하나로 이어진 강토의 혈맥을 서로 갈라놓은 저주로운 38°선은 과연 어떻게 생겨났는가.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땅에로의 노도와 같은 진격은 미제를 더욱 당황케 하였다.전조선이 해방되면 대륙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할수 없게 된다는데로부터 극도로 불안해난 미제는 일본군의 항복접수와 무장해제를 위한 《분담선》이라는것을 고안해냈다.

미제가 제창한 남조선에 있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것은 하나의 연막에 불과한것이였고 제놈들이 그어놓은 38゜선이남의것은 다치지 말아달라는 철면피한것이였다.

미제는 이 강도적인 안을 련합국 정부들과 맥아더사령부에 통보하였다.이에 따라 맥아더놈은 일제가 조선인민앞에 무릎을 꿇은지 5일이 되는 1945년 8월 20일 당시 조선총독이였던 아베놈에게 미군이 들어갈 때까지 남조선의 《치안》을 전적으로 책임지라고 명령하였다.

그해 9월 미제침략군은 총 한방 쏘지 않고 서울에 뻐젓이 진입하여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조선 전지역을 강점하였다.

후날 트루맨은 《38゜선을 조선의 분할선으로 하는것은 한번도 국제적토의에 오르지 않았다.》라고 고백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분단의 불행과 고통을 강요한 원한의 38゜선은 이렇게 그어졌으며 그것은 철저히 미제가 제멋대로, 고의적으로 고안해낸것이다.

그 군사분계선으로 하여 한 처마를 이은 집도, 마을과 도로, 산줄기도 북과 남의 뉴대를 이어가던 모든것이 끊어지고 두 동강났으니 해를 두고 집집마다에, 가슴마다에 서린 원한 그 얼마이더냐.

잔치날을 받아놓고 파주로 장보러 떠나갔던 새서방이 될 사람이 늙으신 어머니와 새색시가 될 애인에게로 돌아오지 못한 기막힌 사연도, 젖먹이 어린것을 떼여놓고 친정집에 약구하러 떠나갔던 며느리가 강역에 달려나와 사랑하는 아기를 피타게 찾고 부르며 가슴치던 피눈물의 사연도 미제침략자들이 인공적으로 갈라놓은 군사분계선으로 하여 림진강기슭에 새겨진 민족분렬의 비극이다.

림진강은 오늘도 천추에 사무친 원한 소리쳐 전한다.

부모를 곁에 두고도 수십년세월 어머니,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못하고 자라난 이 나라 아들딸들의 가슴속의 상처를, 사랑하는 자식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르며 눈도 감지 못하고 운명한 이 땅의 아버지, 어머니들의 그 통분함을!…

그렇다.조선의 분렬은 철천지원쑤 미제가 우리 인민앞에 저지른 가장 큰 반인권적, 반인륜적범죄이다.

우리는 더이상 원한의 38゜선을 다음세대에 물려줄수 없다.미제원쑤들에게서 70여년세월 조국이 겪고있는 고통의 대가를 천백배로 받아내고 통일된 조선을 후대들에게 안겨줄것이다.

본사기자 조향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