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12월 22일 로동신문
혁명의 성지건설에 온넋을 바친 참된 일군 216사단 혜산-삼지연철길건설려단
《자기를 키워주고 내세워주신 우리 혁명의 시원이 열린 삼지연군을 전국의 모범군, 본보기군, 세상에 둘도 없는 산간도시로 훌륭히 전변시키기 위한 거창한 투쟁의 갈피속에는 혜산-삼지연철길건설려단 려단장이였던 로력영웅 오학봉동무의 삶의 자욱이 뜨겁게 새겨져있다. 새 세기에 들어와 일떠선 백두관과 백두산지구 체육촌을 비롯한 삼지연읍거리의 문화체육 및 급양시설들, 사회주의선경으로 일신된 삼지연지구의 거리와 마을들, 삼수발전소 그리고 개통의 날을 눈앞에 둔 혜산-삼지연철길에는 투철한
충정으로 높뛰는
혁명의 백두산지구건설의 나날에 그는 보통 하루에 3~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피곤이 정 몰려들면 창문을 열어제끼고 백두의 쩡한 공기를 들이키군 하였다. 낮과 밤이 따로 없이 사방 수백리에 달하는 광활한 건설전역을 누비며 현장지휘를 전투적으로 하였으며 걸린 문제들을 풀기 위해 집체적협의를 거듭하면서 솔선 방도를 찾아내기도 하였다. 그는 삼지연으로부터 평양까지의 출장길을 떠날 때에는 함흥이나 원산에서 쉬는 일이 없이 머나먼 길을 하루동안에 달렸다.분초를 쪼개가며 일하는 그였지만 수도에 도착하면 그길로 반드시 만수대언덕에 높이 모신 그는 현장지휘부일군들과 함께 무산군의 산골에서 열남매의 여섯째아들로 태여난 그는 그 많은 형제가 한날한시에 새 교복을 한아름 받아안던 날 옷고름으로 눈굽을 찍던 어머니의 모습을 늘 잊지 못해하였다.어릴적에 어머니를 잃은 그가 조국보위초소로 떠나던 날 당원의 영예를 지니면 편지를 하라며 만년필을 쥐여주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친부모의 사랑을 다 받아보지 못한 그에게 군사복무시절과 하기에 내각사무국에서 일하던 오학봉동무는 새 세기에 백두산지구건설이 시작되자 남먼저 삼지연땅으로 달려갔다. 《지금 온 나라가 백두산으로 달려가고있소.》 그해 겨울 이런 말을 안해에게 남기고 떠난 그는 다음해 설날이 되여서도 집에 오지 못하였다.광명성절이 가까와오던 어느해 2월 그가 불쑥 집에 들어섰다.그리고는 가지고온 종이말이를 펼쳐놓은채 줄곧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었다.종이에는 백두산을 형상한 건축물이 그려져있었다. 《백두산이구만요.》 《그래, 백두산이요.》 하더니 그는 오학봉동무의 발기에 따라 현장지휘부에서는 백두산3대장군의 불멸의 업적과 숭엄한 발자취가 어리여있는 백두산지구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해설해주는 안내봉사기지를 꾸릴데 대하여 합의하고 빠른 시일에 건설을 끝냈다. 삼지연일대에 눈이 내리던 주체91(2002)년 10월 7일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신 백두산지구건설이 더욱 힘있게 벌어지던 어느날 돌격대 전체 력량이 삼수지구로 긴급기동하였다. 삼지연군을 훌륭히 꾸리자면 전기문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하신 수력발전소건설력사에도 없는 언제를 통채로 싸안은 거대한 비닐박막덧집속에서 백열전이 벌어진 삼수발전소건설, 억수로 쏟아지는 비속에서 현장지휘를 하다보니 오학봉동무는 심한 관절염으로 걸음마저 제대로 옮길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담가에 실려 오가면서 전투지휘를 하였다. 례년에 보기 드문 큰 장마가 덮쳐들어 언제수위가 위험계선을 넘어설 정황이 조성되였을 때였다. 방송차에서 전시가요가 그칠새없이 울리고 수만명의 대오가 언제우에 선채로 비물밥을 먹고 말뚝잠을 자면서 장마와의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렸다.모래마대를 만적재한 대형화물자동차들이 줄지어 언제우에 늘어섰다.만약의 경우 큰물이 언제를 넘어서면 그대로 막아나서려는 결사의 각오밑에 늘어선 대형화물자동차대렬, 선두차의 운전칸에는 오학봉동무가 있었다. 삼수골에서 우리의 영용한 618건설돌격대원들이 터친 대발파를 두고 핵폭발이라고 떠들어대는 미국놈들의 악설에 편승하여 《현지조사》를 온 7개 나라의 외교관들은 결사의 각오를 안고 한몸이 그대로 혼석이 되여 언제를 한치한치 쌓아올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때 오학봉동무의 입에서는 이런 준절한 웨침이 터져나왔다. 《보라! 미국의 봉쇄로 우리에게는 연유가 부족하다.하지만 우리는 연유가 아니라 피를 뿌려서라도 기어이 저 언제를 쌓고야말것이다.이 정신이 우리의 진짜 핵무기이다.》 백두의 광야에 나래쳤던 항일혁명선렬들의 넋을 뼈에 새기고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면 못할 일이 없다는 신념과 배짱으로 충만된 그였다. 낮과 밤을 불사신같이 이어가 삼수발전소건설장에 이날 사회주의기초는 인민! 오학봉동무의 가슴속에는 용암이 끓어번졌다. 《우리 오학봉동무가 가슴을 치며 한 말이였다. 그와 함께 오랜 기간 일해온 일군들은 오학봉동무가 기발한 착상력을 지닌 실력가였다고 말한다.일반건설부문만이 아니라 철길에 대한 지식도 놀라울만큼 풍부한 그는 소묘솜씨도 특이하였다. 그는 공사와 관련한 문건들도 그냥 받아 처리한것이 아니라 선 하나, 수자 하나도 혁명의 수뇌부안전을 선참에 놓고 꼼꼼히 검토하고서야 마음을 놓군 하였다.언제나 뜨거운 충정으로 불타는 그가 밤을 새울 때마다 돌격대가 나아갈 진격로가 설계되고 그가 찍은 발자국을 따라 돌격대가 전진했으며 그가 그은 선을 따라 돌격대원들은 철길로반을 열어나갔다. 혜산-삼지연철길건설려단 량강도련대가 맡은 압록강기슭의 수천m구간은 산짐승마저 발붙이기 저어하는 아슬아슬한 비탈로 이루어진 지대여서 위연청년역에서 시작한 로반이 더는 뻗어가지 못하고있었다. 때없이 쏟아져내리는 돌사태, 흙사태때문에 전진을 계속할수 없었다. 화산용암으로 뒤덮인 백두산지구의 지질상태를 손금보듯 잘 알고있는 오학봉동무는 바람이 숨막히게 불어오는 압록강기슭을 수십번 오르내리며 지형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방도를 모색한 끝에 현장협의회에서 가을이 아니라 겨울에 사태구간을 돌파해가자는 혁신적인 안을 내놓았다. 겨울철에 진행한 절토작업은 효과적이였고 마침내 로반은 뻗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어느날 현지를 밟아보던 오학봉동무는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절벽에서 떨어지면서 총알처럼 탕탕 튀여오르는 몇개의 돌파편들이 눈에 띄였던것이다. 《대담하게 설계를 변경시켜 피암차굴을 건설합시다.》 일부 사람들이 머리를 기웃거렸다. 피암차굴을 건설하자면 많은 품이 들어야 한다는 타산과 그러자면 긴박한 공사기일을 과연 보장할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우리에게는 피암차굴을 건설해본적이 전혀 없다는 생각때문이였다. 그때 오학봉동무의 절절한 목소리가 현장지휘부에서 울리였다. 이 철길건설은 단지 려객이나 화물을 실어나르기 위한 공사이기 전에 우리 혁명의 명맥을 백두의 혈맥으로 영원히 이어나가려는 우리 당의 높은 뜻을 실현하기 위한 중대한 사업이다.백두산을 언제나 마음에 안고 사는 동무들이 누구보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하지 않는가! 그의 절절한 호소는 모두의 심장에 불을 달아주었다.량강도련대 지휘관들과 돌격대원들, 혜산시의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떨쳐일어나 그 어떤 횡포한 자연조건에도 끄떡없는 피암차굴을 훌륭히 건설하였다. 함경남도, 황해남도련대도 7개소, 연 수천m의 구간에 북방의 엄혹한 자연지리적조건에도 끄떡없는 차굴을 만년대계로 건설하였다. 백두산을 향하여 뻗어간 두줄기 철길은 오직 백두의 흰눈처럼 순결하고 소백수의 물처럼 맑고 깨끗한 충정과 량심만이 떠받들수 있다는것이 오학봉동무가 돌격대원들만이 아닌 자기자신에게 제기한 엄격한 요구성이였다.
마지막피 한방울 다할 때까지
지난해 9월 오학봉동무는 불치의 병이라는 뜻밖의 진단을 받게 되였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억장이 무너져내리는것만 같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중히 여기고있는 생에 대한 애착때문만이 아니였다.아직 혁명의 성지건설을 위해 할 일은 많고많은데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안타까움때문이였다. 그의 뇌리에는 시급히 수술받을것을 권고하면서 의사는 그에게 이렇게 그루를 박았다. 《수술한 후에는 절대안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일은? 아무 일도 할수 없다는 소리인데.거야 안되지.백두산에서 우리 동무들이 기다리고있소.철길개통을 앞둔 분과 초가 흘러가고있단 말이요.》 현장에 돌아온 그는 군의소가 아니라 삼지연못가 수림속에 자리잡은 혜산-삼지연철길건설려단 평양시련대 공장대대 침실에 숙소를 정하고 전투지휘를 하였다. 숙소에서 삼지연못가역까지는 보통 5분이면 갈수 있는 거리였지만 지팽이에 의지하여 휘청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누며 가다가는 쉬고 또 쉬면서 걷다보니 20~30분이 걸려서야 현장에 도착하군 하였다. 삼지연청년역에 가서는 자갈은 몇㎥ 들어야 하고 전주대는 몇대 세워야 한다는것, 마감건재생산기지에 가서는 모양과 색갈은 어떻게 되여야 하는가를 놓고 돌격대원들과 협의도 하고 부사로 이 제품을 꼭 손색없이 완성하여야 한다고 간곡히 당부하군 하던 그였다. 몸이 불편한 속에서도 오학봉동무는 북부철길청년돌격대원들이 일하는 전투장에 나가 솔선 붓을 들고 청춘들의 심장을 울리는 구호를 써나가기도 하였다. 어느날 색날은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한 애어린 청년돌격대원이 눈에 띄였다.그날 오학봉동무는 종일 속이 내려가지 않아 저녁에 자기의 새 작업복을 내놓으며 문서원처녀에게 부탁하였다. 《수경이, 이 옷이 좀 큰데 줄여다오.》 이렇게 지은 새옷을 돌격대원에게 입혀줄 때 그의 눈가에는 티없이 밝은 미소가 피여올랐다. 그는 현장에서 몇번이나 심한 출혈을 하였다.그때마다 병원에 후송하려고 하는 군의들을 뿌리치며 그는 말하였다. 《당에서 준 과업을 수행하기 전에는 백두산을 떠날수가 없소!》 건설장에 찾아온 안해는 초인간적인 의지로 전투지휘를 하는 남편을 보게 되였다.시시각각 생명의 한초한초를 단축시키며 엄습해오는 병마를 강의한 의지로 이겨내며 공사를 지휘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다 못해 안해는 안타깝게 말했다. 《의림이 아버지, 이제 병원치료를 받지 않으면…》 《아니, 난 못가겠소! 《여보!…》 안해는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자나깨나 그후 그는 또다시 심한 출혈을 하여 량강도인민병원으로 후송되게 되였다. 《유리창을 좀 열라구.백두산의 청신한 공기를 조금이라도 더 마시고싶구만.》 혜산으로 달리는 승용차안에서 그가 운전사에게 한 소청이였다. 그날 오학봉동무를 바래우는 돌격대원들속에는 혜산-삼지연철길건설려단 부사마감건재생산기지에서 일하는 한 애젊은 청년도 있었다. 216사단 북부철길청년돌격대에서 일하다가 부사마감건재생산기지에 온 그는 들끓는 현장을 떠나 종일 부사를 가루내고 건재에 색칠하는 자기 일감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언제인가 그를 조용히 부른 오학봉동무는 말하였었다. 《백두산의 돌 하나, 나무 한그루도 무심히 스칠수 없는 소중한것이요.우리는 모두가 백두대지를 더욱 빛내이자면 어떤 정신세계를 안고 살아야 하는가를 깨우쳐주는 려단장의 진실하고도 뜨거운 마음에 감동된 청년은 잠시나마 동요하였던 자신을 질책하였다. 이렇게 과학자들을 고무하며 오학봉동무는 그들과 함께 수십일간 삼지연군과 대홍단군, 백암군의 높고 험준한 산발들을 신발창이 닳도록 누벼가며 부사매장량을 확정하였고 무봉지구에 부사마감건재중간생산공장을 일떠세울것을 발기하였다.이깔나무수림속에 꾸려진 기지에서 돌격대원들과 한데 어울려 뽀얀 돌가루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수십차례의 실패를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부사마감건재시제품을 완성한 그였다. 얼마전 영광의 그날 돌격대원들은 부사마감건재를 두고 그처럼 고심어린 노력을 기울이던 려단장에 대한 추억으로 더욱 가슴을 들먹이였다. 도인민병원에서 림종을 앞두고 철길개통의 기적소리만을 기다리던 그는 의식이 몽롱해지는 속에서도 병세는 최대로 악화되여 전혀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남편에게 안해는 그가 늘 사랑하던 노래 그러자 혼수상태에 있던 그의 얼굴에서는 기적같은 변화가 나타났다.입귀는 움직였으나 아무말도 못하고 다만 눈에서는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는 59살을 일기로 이렇게 우리곁을 떠나갔다.…
오학봉동무에 대한 보고를 받은 어머니당에서는 불타는 충정과 고결한 의리를 심장에 지니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삼지연군꾸리기에 떨쳐나선 돌격대원들을 위훈창조에로 불러일으킨 그의 영웅적소행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중구역인민위원회 부원으로 사업하는 오학봉동무의 안해 리은숙동무와 아들인 조선인민군 군관 오의림 그리고 혜산-삼지연철길건설려단 돌격대원들은 그가 생전에 다하지 못한 몫까지 합쳐 삼지연군을 혁명의 성지로 꾸려갈 결의에 넘쳐있다. 자나깨나 특파기자 전철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