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3월 16일 로동신문
력사에 길이 빛나는 혁명의 천리길
배움의 천리길, 12살 어리신 나이에 가장 혁명적이며 애국적인 가정에서 탄생하시여 누구보다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신 조선에서 태여난 남아라면 마땅히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하신 김형직선생님의 높으신 뜻을 받드시여 수많은 사람들이 망국을 한탄하며 살길을 찾아 류랑길에 오르고 돈냥이나 있는 집 자식들은 저마다 보따리를 싸들고 류학의 길에 오르던 수난의 그 시기 우리 그것은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시고 인민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신 절세의 애국자만이 걸으실수 있는 혁명의 길, 애국의 길이였다. 그날은 눈보라가 앞을 가리고 바람이 사납게 불어치던 날이였다. 팔도구에서 만경대까지 천리인데 혼자서 갈수 있는가고 물으시는 김형직선생님께 갈수 있다고 담담한 어조로 대답하신 우리 강반석어머님께서는 먼길을 떠나시는 아드님의 두루마기고름도 다시 매여주고 목도리도 고쳐감아주시며 만경대에 가면 할아버님, 할머님말씀 잘 듣고 공부를 잘하라고, 그리고 편지도 자주 하라고 당부하시였다. 단정한 학생복차림에 강반석어머님께서 밤새워 지으신 두루마기를 입으신 천리길을 떠나시는 우리 그러나 조국땅으로 향하시는 대낮에도 어둡고 사나운 맹수들이 무시로 나타나는 오가산령, 가야 할 천리중 500리이상은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는 험산준령… 단신으로 넘으시며 별의별 고생을 다 겪으시였건만 험난한 천리길을 이어가시던 그날 객주집에는 손님들이 몇명 있었는데 그들속에는 호남벌에서 살다가 간도로 살길을 찾아간다는 어느 한 길손도 있었다. 배고파 우는 어린아이들을 달래며 낯설은 이국땅으로 가는 그의 모습은 우리 호남벌이라면 우리 나라에서 농사가 잘되기로 이름난 곳이였지만 악착한 왜놈들에게 땅을 떼우고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살길을 찾아 방황하는 길손의 정상은 그대로 강도 일제의 쇠사슬에 휘여감긴 식민지민족의 비참한 모습이였다. 방바닥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다음날 아침 우리 조선에 나가서 우리 나라가 왜 망했는가 하는것만 똑똑히 알아도 그것은 큰 소득이라고, 고향에 나가서 우리 인민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있는가를 체험하면 자기 할바를 잘 알게 될것이라고 하신 김형직선생님의 간곡한 당부를 그이께서는 이렇듯 천리길의 전로정우에서 더욱 깊이 새겨안으시였다. 력사에 전해지는 명인은 많지만 우리 개천에 도착하신 그때 려관밥에는 등급이 있었는데 이 려관에서는 15전짜리가 제일 눅거리여서 그런데 어인 일인지 주인은 50전짜리 밥을 주면서 돈이 없어도 그냥 하라고 하였다. 밤이 되자 그러자 주인은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은 다 포단을 깔고 모포를 두장씩 덮고자는데 혼자만 어떻게 그렇게 하겠는가고 하면서 돈을 안내도 되니 마음놓고 두장을 받으라고 하였다. 마음씨가 고운 주인은 천리길에서 만나시였던 강계객주집 주인이나 중강려인숙 주인과 같이 김형직선생님의 지도와 영향을 받은 사람이였던것이다. 자신을 친혈육처럼 맞이하고 보살펴주는 사람들을 대하시면서 팔도구를 떠나신지 열나흘째 되는 날의 해질무렵 마침내 고향 만경대에 도착하신 너무도 귀에 익은 손자분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마당으로 뛰여나오신 할머님께서는 혼자 걸어왔다는 며칠이나 쉬여가려는가고 물으시는 할아버님께 며칠간 놀러 온것이 아니라 공부하러 왔다고, 조선사람은 조선땅에서 조선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시는 우리 정녕 그렇다! 우리 천만군민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나는 혁명의 천리길을 자욱자욱 심장에 새기고 오영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