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3월 16일 로동신문

 

력사에 길이 빛나는 혁명의 천리길

 

배움의 천리길, 12살 어리신 나이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애국의 길, 혁명의 길을 걸으신 때로부터 세월은 흐르고흘러 95돌기의 년륜을 새기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수령님과 같이 어리신 나이에 애국의 큰뜻을 품으시고 투쟁의 길에 나선 혁명의 지도자는 력사에서 찾아볼수 없습니다.》

가장 혁명적이며 애국적인 가정에서 탄생하시여 누구보다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신 위대한 수령님,

조선에서 태여난 남아라면 마땅히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하신 김형직선생님의 높으신 뜻을 받드시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배움의 천리길에 오르신 날은 지금으로부터 95년전 3월 16일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망국을 한탄하며 살길을 찾아 류랑길에 오르고 돈냥이나 있는 집 자식들은 저마다 보따리를 싸들고 류학의 길에 오르던 수난의 그 시기 우리 수령님께서 단행하신 조국에로의 천리길!

그것은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시고 인민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신 절세의 애국자만이 걸으실수 있는 혁명의 길, 애국의 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사실 그때의 솔직한 심정은 그렇게 단순한것이 아니였다고, 조국에 나가서 공부하라니 다른것은 다 좋았는데 부모동생들의 곁을 떨어지는것이 싫었다고, 그렇지만 고향에 가고싶은 생각은 불같았다고 감회깊이 쓰시였다.

그날은 눈보라가 앞을 가리고 바람이 사납게 불어치던 날이였다.

팔도구에서 만경대까지 천리인데 혼자서 갈수 있는가고 물으시는 김형직선생님께 갈수 있다고 담담한 어조로 대답하신 우리 수령님.

강반석어머님께서는 먼길을 떠나시는 아드님의 두루마기고름도 다시 매여주고 목도리도 고쳐감아주시며 만경대에 가면 할아버님, 할머님말씀 잘 듣고 공부를 잘하라고, 그리고 편지도 자주 하라고 당부하시였다.

단정한 학생복차림에 강반석어머님께서 밤새워 지으신 두루마기를 입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부모님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드리신 후 동무들의 바래움을 받으시며 천리길에 오르시였다.

천리길을 떠나시는 우리 수령님의 수중에는 자그마한 보꾸레미와 넉넉하지 못한 려비가 전부였다.

그러나 조국땅으로 향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가슴속에는 이 세상 누구도 지닐수 없는 가장 큰것이 자리잡고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조국에 대한 열렬한 그리움과 조선을 알아야 한다는 김형직선생님의 숭고한 뜻이였다.

대낮에도 어둡고 사나운 맹수들이 무시로 나타나는 오가산령, 가야 할 천리중 500리이상은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는 험산준령…

단신으로 넘으시며 별의별 고생을 다 겪으시였건만 위대한 수령님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것은 어디서나 보고 느끼시게 되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이였다.

험난한 천리길을 이어가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느 한 객주집에 들리시였을 때였다.

그날 객주집에는 손님들이 몇명 있었는데 그들속에는 호남벌에서 살다가 간도로 살길을 찾아간다는 어느 한 길손도 있었다.

배고파 우는 어린아이들을 달래며 낯설은 이국땅으로 가는 그의 모습은 우리 수령님의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하였다.

호남벌이라면 우리 나라에서 농사가 잘되기로 이름난 곳이였지만 악착한 왜놈들에게 땅을 떼우고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살길을 찾아 방황하는 길손의 정상은 그대로 강도 일제의 쇠사슬에 휘여감긴 식민지민족의 비참한 모습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간도라고 별로 나은것이 없다고, 지주놈들이 있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이라고 간도형편을 자세히 이야기해주시였다.

방바닥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놈들이 산간벽촌에까지 기여들어 제세상처럼 날뛰며 주인행세를 하니 정말 통분한 일이라고 격하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다음날 아침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래워주시고나서 집주인에게 고향산천을 버리고 저렇게 살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서글퍼진다고, 이제 조선사람들도 왜놈들이 없는 세상에서 잘살 때가 꼭 올것이니 그날까지 조선사람의 량심을 지켜가며 대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뜻깊은 말씀을 남기시였다.

우리 수령님의 가르치심은 갈길 몰라 헤매이는 인민들에게 재생의 빛을 주는 고귀한 지침이였다.

조선에 나가서 우리 나라가 왜 망했는가 하는것만 똑똑히 알아도 그것은 큰 소득이라고, 고향에 나가서 우리 인민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있는가를 체험하면 자기 할바를 잘 알게 될것이라고 하신 김형직선생님의 간곡한 당부를 그이께서는 이렇듯 천리길의 전로정우에서 더욱 깊이 새겨안으시였다.

력사에 전해지는 명인은 많지만 우리 수령님처럼 단신으로 그것도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배움의 길로서만이 아니라 위대한 혁명의 천리길을 걸으신 위인에 대한 이야기는 동서고금 그 어느 갈피에도 없을것이다.

개천에 도착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역앞에 있는 서선려관에서 하루밤 묵으시였을 때였다.

그때 려관밥에는 등급이 있었는데 이 려관에서는 15전짜리가 제일 눅거리여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것을 청하시였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주인은 50전짜리 밥을 주면서 돈이 없어도 그냥 하라고 하였다.

밤이 되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려비를 계산하여 모포를 한장만 요구하시였다.

그러자 주인은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은 다 포단을 깔고 모포를 두장씩 덮고자는데 혼자만 어떻게 그렇게 하겠는가고 하면서 돈을 안내도 되니 마음놓고 두장을 받으라고 하였다.

마음씨가 고운 주인은 천리길에서 만나시였던 강계객주집 주인이나 중강려인숙 주인과 같이 김형직선생님의 지도와 영향을 받은 사람이였던것이다.

자신을 친혈육처럼 맞이하고 보살펴주는 사람들을 대하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인민의 선량한 마음, 미풍량속과 함께 나라찾는 큰일을 하자면 동지가 많아야 하겠다는것을 깊이 절감하시였다.

팔도구를 떠나신지 열나흘째 되는 날의 해질무렵 마침내 고향 만경대에 도착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할아버님과 할머님을 큰소리로 부르시였다.

너무도 귀에 익은 손자분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마당으로 뛰여나오신 할머님께서는 혼자 걸어왔다는 위대한 수령님의 대답을 들으시고 너의 아버지가 범보다 더한 사람이구나 하시며 얼마나 대견해하시였던가.

며칠이나 쉬여가려는가고 물으시는 할아버님께 며칠간 놀러 온것이 아니라 공부하러 왔다고, 조선사람은 조선땅에서 조선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시는 우리 수령님의 대답에 조부모님들의 감동은 참으로 컸다.

정녕 위대한 수령님께서 걸으신 배움의 천리길은 우리 조국과 인민이 받아안은 태양복과 잇닿은 성스러운 길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세계 그 어디에도 우리 수령님처럼 기나긴 세월 험한 길을 헤치시며 혁명을 령도해오신분은 없다고, 우리 인민은 위대한 수령님을 모셨기에 준엄한 혁명의 폭풍우를 뚫고 영광스러운 승리의 한길을 곧바로 걸어올수 있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긍지높고 행복한 인민으로 될수 있었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그렇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걸으신 배움의 천리길, 애국의 천리길, 혁명의 천리길이 있기에 오늘 우리 조국의 승리와 영광의 천만리가 끝없이 펼쳐져있는것이다.

우리 천만군민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나는 혁명의 천리길을 자욱자욱 심장에 새기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의 령도따라 주체혁명의 한길을 억세게 걸어갈것이다.

오영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