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6월 30일 로동신문
공화국의 발전행로에 빛나는 우리 인민의 영웅적투쟁(2) 위대한 전승세대들은 공화국기발을 지켜 이렇게 싸웠다 가렬처절했던 지난 조국해방전쟁의 3년간을 더듬으며
《조국해방전쟁의 가렬한 불길속에서 우리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이 발휘한 우리는 지금 조국해방전쟁에서의 전승과 더불어 우리 인민은 영웅적인민으로 그 이름 떨치게 되였고 우리 나라는 영웅의 나라, 기적의 나라로 그 위용 만방에 빛나게 되였다. 스치는 바람결에도 서슬푸른 총창을 비껴들고 노도쳐가던 인민군용사들의 발구름소리가 실리여오는듯싶은 이곳에서 우리는 승리자의 쾌감을 안고 돌이켜본다. 가렬처절했던 전쟁의 3년간, 1 129일을.
격전장마다에 휘날린 공화국기
1950년 6월 25일, 래일에 대한 아름다운 꿈과 희망으로 가슴부풀던 우리 인민에게 전쟁이라는 엄혹한 시련의 난파도가 들씌워졌다.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 인민은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은 목숨보다 귀중한 민족의 존엄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성스러운 싸움이였다. 땅의 주인, 공장의 주인이 되여 인간다운 생활을 누려온 해방후 5년간이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더없이 소중한것이였기에 이 나라의 수많은 아들딸들은 손에 총을 억세게 틀어잡고 전선으로,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전쟁이 일어난지 불과 3~4일동안에 당시 평양 7월 1일발 조선중앙통신은 《… 그들은 조선인민의 영명한 전선출동을 탄원한 애국청년들은 벌써 8만 1천 8백 58명에 달하고있다.》고 전했다. 우리 인민의 참전열기에 대하여 조선전쟁을 종군한 어느 한 외국기자는 자기의 소책자에 《전쟁이 시작된 최초의 6주사이에 120만명의 청춘남녀들이 조선인민군 지원병부대 또는 빨찌산부대에 탄원하였다.》라고 썼다. 인민군용사들은 공화국기발을 펄펄 휘날리며 원쑤를 무찔렀다. 공화국기발, 그것은 곧 어머니조국이였다. 화광이 충천하는 용광로였고 나라에서 분여해준 옥답이였다. 행복한 생활의 전부였다. 공화국기발이 휘날리는 곳마다에서 세인의 예상을 뒤집어엎는 군사적기적들이 련이어 일어났다. 그 기적의 창조자들은 어제날의 평범한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이였다. 이 맹세를 안고 그들은 승리를 위해 청춘도 생명도 아낌없이 다 바치였다. 우리의 눈가에 군상 《락동강도하전투》가 숭엄히 안겨온다. 공화국기발을 높이 들고 나아가는 병사, 적들을 쓸어눕히는 중기사수와 부사수, 적비행기를 사격하는 기관총수… 락동강에 흐른것은 물이였던가 피였던가. 여기에 우박처럼 쏟아지는 탄우속에서 공화국기발을 휘날리며 전우들을 승리에로 고무하던 한 전사가 남긴 마지막당부가 있다. 《이 공화국기발을 부탁하오. 끝까지 전사가 남긴 그날의 당부를 심장으로 들으며 우리는 군상 《1211고지방위자들》앞으로 다가간다. 인민군용사들이 탄약상자의 기름배인 종이우에 한자한자 적어나가던 맹세문의 글줄이 우리의 눈앞에 어려온다. 《 원쑤들은 악착스럽게 달려들고있습니다. 허나 항일의 전통을 이은 우리는 비록 몸이 천쪼각만쪼각나는 한이 있어도 한놈의 적도 올려놓지 않겠습니다. 우리에겐 죽어 묻힐 땅은 있어도 살아 물러설 땅은 한치도 없다는것을 똑똑히 알고있습니다. 이 맹세문을 가슴마다에 새기고 인민군용사들은 고지를 지켜싸웠다. 가칠봉에 휘날렸던 공화국기발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도 우리 인민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고있다. 1951년 초여름, 인민군대에 의하여 고향마을이 해방되여서야 난생처음 사람대접을 받아보게 되였다는 그 할머니는 재령까지 안고온 기발을 병사들에게 내놓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 공화국기발을 가는 곳마다에 휘날려주시우. 공화국을 잃으면 우린 죽은 목숨이웨다.》 이렇게 되여 비단천으로 만들어진 그 공화국기발은 1211고지앞 무명고지에 휘날리게 되였고 그후에는 가칠봉습격조에 전해지게 되였다. 사연깊은 공화국기발을 받아안고 습격전에 나선 병사들은 그 기발을 휘날리며 가칠봉으로 치달아올랐다. 공화국기발을 들고 선두에 섰던 전사가 적탄에 맞고 쓰러졌다. 그는 전우들에게 그 기발을 넘겨주며 마지막힘을 모아 말하였다. 《재령에서 만난 할머니의 부탁을… 잊지 마시오. …》 기발을 받아들고 불을 토하는 적화점을 향해 육박하던 전사가 또다시 쓰러졌다. 이렇게 적탄에 맞아 갈기갈기 찢기우고 구멍뚫린 공화국기발은 12명의 전사들의 손을 거쳐 가칠봉에 휘날리게 되였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피와 생명을 바쳤던가. 그것은 바로 조국이였다. 공화국기발을 지키는것이 사랑하는 고향과 부모형제들을 지키고 조국을 수호하는 길임을 그들은 잘 알고있었다. 우리 인민군용사들은 싸우는 고지마다에서는 총포성만 울린것이 아니였다. 인민군용사들은 포탄깍지와 불에 타다남은 나무로 만든 화선악기에 맞추어 결전의 노래, 멸적의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소리는 원쑤들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공포와 전률을 주었다. 전쟁 3년간의 매일, 매 시각이 바로 이러한 영웅적투쟁과 위훈으로 수놓아져있기에 그 나날을 더듬어보는 우리의 가슴이 그토록 뜨거운것이 아닌가.
공화국의 첫 공민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강용한 인민군대와 한전호에서 침략자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긴 인민들, 그들은 다름아닌 공화국의 첫 공민들이였다. 해방전 나라없고 주권이 없었던탓에 망국노의 피눈물을 뿌리지 않으면 안되였던 우리 인민이였다. 군상 《후방인민들의 전선원호》에 새겨진 한명한명의 모습에는 판가리싸움에 나선 우리 인민의 불굴의 기상이 비껴있었다. 인민군용사에게 박격포와 포탄을 넘겨주는 저 로동자가 좁은 갱도안에 꽉 찬 화약가스로 하여 사격수가 앞을 가려보지 못하게 되자 자기 신발을 벗어 불뭉치를 만들어들고 목표판옆에 서서 《나를 향해 쏘라!》고 웨치던 군자리의 그 불사신이 아닌지. 군자리로동계급은 작업장의 시계바늘을 꺼꾸로 돌려놓으며 24시간 교대없이 일하였고 밀려드는 잠을 이겨내기 위해 눈에 나무꼬챙이를 뻗쳐놓고 선반을 돌렸다. 희생된 동지의 몸에 박혔던 파편을 앞에 놓고 《피는 피로써 갚자!》고 부르짖으며 총신을 깎았다. 우리의 귀전에는 전화의 불비속을 헤치시며 군자리의 지하병기공장을 찾으시였던 그날 우리의 승리를 믿지 못하는 패배주의자들에게 이 갱도를
보여주라, 우리가 그 어떤 대국의 위성국으로 무기를 얻어다 전쟁을 겪고있는가 하여 색안경을 끼고보는 사람들이 이 갱도에 들어서면 정신이 번쩍
들것이라고 하시던 농민들도 전시식량증산을 위한 투쟁에서 애국적헌신성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적기의 폭격과 함포사격이 쉼없이 감행되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낮에 밤을 이어 영농작업을 다그쳤다. 농촌들에서는 녀성보잡이운동이 힘있게 벌어졌다. 주체40(1951)년 11월 22일부 당보에는 《강의한 농촌처녀 김락희동무의 농업증산투쟁》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 그는 〈식량을 위한 투쟁은 조국을 위한 투쟁이다.〉라고 교시하신 1951년 5월 3일 근위 제18련대 군무자들이 호소한 군기기금헌납운동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열망하는 전체 인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전국각지의 공장, 기업소로동계급속에서 많은 군기기금을 헌납하는 애국적소행이 련이어 꽃펴났으며 이 모범을 따라 각계각층 인민들이 앞을 다투어 참가하였다. 끝없는 행복과 보람찬 삶의 터전인 우리 공화국을 사수하기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친 인민들의 대중적운동에 의해 《로동자》호, 《민청》호, 《대학생》호, 《소년》호 등으로 명명된 비행기, 땅크, 함선들이 전선으로 나갔다.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불타는 원쑤격멸의 의지와 조국결사수호정신이 그대로 담긴 군기기금은 침략자들의 가슴팍에 복수의 불벼락을 안기는 총포탄으로 되여 전쟁승리에 이바지하였다. 전화의 불길속에서 순박한 우리 인민들이 영웅으로 자라났다. 강원도 고성군의 남강마을녀성들은 월비산과 351고지를 영웅적으로 지켜싸우는 인민군대와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전선원호사업을 힘있게 벌리였다. 인민들은 적기의 야수적폭격으로 하루에도 몇차례씩 끊어지는 다리를 복구하기 위하여 소용돌이치는 강물속에 서슴없이 뛰여들었고 몸으로 다리를 떠받들어 전시수송을 보장하였으며 집에서 쓰던 선반의 판자와 장농까지 뜯어 배와 떼를 무어가지고 전선에 포탄을 운반하였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지켜 싸웠던가. 그들은 우리 인민이 지녔던 승리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투철한것인가를 보여주는 법동농민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도 널리 전해지고있다. 어느날 밤, 조국을 지키는 싸움에는 남녀로소가 따로 없었다. 모두가 병사였고 누구나 방위자들이였다. 원쑤와의 판가리결전에 나선 우리 인민의 불굴의 투쟁모습은 군상 《적후인민유격대원들의 투쟁》에도 그대로 새겨져있다. 군상에는 인민유격대원들과 함께 복수의 총을 잡고 싸움의 길로 떠나가는 나어린 소년도 있다. 아직은 어머니의 치마폭에 매달려 어리광을 부려야 할, 공민증도 없는 소년인 그가 싸움에 나서지 않았다고 탓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부모형제들을 무참히 살해한 원쑤, 배움의 종소리 랑랑히 울려퍼지던 학교를 불태운 침략자들을 용서할수 없어 이 나라의 수많은 소년들이 분연히 일떠섰다. 연필을 잡아야 할 그 작은 손에 그들은 원쑤격멸의 총을 억세게 틀어잡았다. 침략자들의 피묻은 군화발이 닿는 곳마다에서 어린 복수자들의 투쟁조직이 생겨났다. 살인귀들이 한 지역을 점령하면 한개의 소년근위대가 조직되였고 두개의 지역을 점령하면 두개의 소년빨찌산이 무어졌다. 적통치기관에 람홍색공화국기발을 띄우고 희생된 조옥희소년자위대의 한 소년도 있다. 우리는 공화국기발을 지켜 침략자들과 피흘려 싸운 나어린 소년들도 당당한 공화국의 첫 공민들이였다고 말하고싶다. 1951년 7월 11일부 《로동신문》은 전쟁에서 특출한 공훈을 세운 1명의 소년단원에게 국기훈장 제3급을, 4명의 소년단원들에게 공로메달을 수여함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전했다. 국기훈장 제1급을 비롯하여 높은 급의 훈장을 수여받은 꾀꼴새소년근위대원들과 안주탄광소년근위대, 조옥희소년자위대 대원 등 수많은 소년단원들이 국가수훈의 영예를 지니였다. 이런 인민을 누가 당하랴, 이런 나라를 누가 정복할수 있으랴. 1953년 7월 27일, 드디여 내 조국의 하늘가에 전승의 축포가 터져올랐다. 조선은 이렇게 싸워 승리하였고 조선인민은 이렇게 자기의 존엄과 조국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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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조국해방전쟁의 격렬한 불길속에서 수백명의 공화국영웅이 배출되였다. 우리 삼가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조국의 자주적존엄과 영예를 목숨바쳐 지켜낸 전승세대들의 고귀한 넋이 그대로 깃들어있는 공화국기발이 인민군용사의 손에서 세차게 나붓기고있다. 전화의 용사들이 피흘려 지켜낸 공화국기발을 높이 추켜들고 우리 인민이 사회주의건설의 년대들마다 새긴 영웅적위훈은 또 얼마나 세계를 놀래웠던가. 본사기자 신 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