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7월 1일 로동신문

 

공화국력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긴 지식인들

당의 품속에서 성장한 대문호 백인준

 

백인준선생은 인민의 사랑을 받은 작가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백인준선생에 대해 그는 당에서 시를 쓰라면 시를 쓰고 가극혁명을 할 때에는 가극을 쓰고 영화혁명을 할 때에는 영화문학을 썼다고 하시면서 그처럼 문학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좋은 작품을 쓴 작가는 없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문학예술작품창작에서 그가 이룩한 성과를 평가해주시면서 백인준동무는 어버이수령님의 손길아래서 자라난 대문호라고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당의 령도를 떠나서는 작가들이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게 창작활동을 벌려나갈수 없다.》

백인준선생은 1920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출생하였다.일찌기 문학에 뜻을 둔 그는 작가가 될 꿈을 안고 직심스럽게 공부하였다.그러한 그를 일제는 제놈들의 침략전쟁터로 내몰았다.

죽음의 나락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해방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조국개선소식을 받아안고 무한한 기쁨과 감격에 휩싸이였다.

평양에서 백인준선생은 오매에도 그립던 위대한 수령님을 몸가까이에 모시고 일하는 크나큰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그 나날에 어버이수령님의 위대성을 가슴뜨겁게 체험하게 된 그는 시 《그대를 불러 우리의 태양이라 노래함은》을 창작하였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해방된 조국의 현실을 반영하여 그가 창작한 작품들을 묶어 시집 《인민의 노래》를 출판하도록 하여주시였다.

백인준선생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혁명의 군복을 입고 싸웠으며 전후에는 작가로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벌려나가게 되였다.

그의 창작생활은 위대한 장군님과 혈연의 정을 맺고 주체문학예술의 전성기를 열어나가는데 이바지해온 긍지로운 나날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문학예술부문 사업을 지도하시면서 백인준선생을 사랑의 한품에 안으시고 크나큰 믿음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그는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를 창조할 때부터 위대한 장군님의 정력적인 지도를 받게 되였다.

우리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그가 영화혁명, 가극혁명, 연극혁명수행에서 한몫 단단히 하도록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생전에 백인준선생은 가극혁명의 나날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적은 두툼한 학습장만 해도 여섯권이나 된다고 감회깊이 추억하였다.

동서고금의 그 어느 고전에도 없는 독창적인 문예사상과 리론을 위대한 장군님의 슬하에서 뼈에 새겨온 백인준선생이기에 당이 맡겨주는 그 어떤 창작과제도 훌륭히 수행하여왔다.

절세위인들의 뜨거운 사랑과 지도를 받으며 흘러온 50여년간의 창작생활기간에 백인준선생은 많은 영화문학, 가극대본, 희곡, 시작품들을 당이 바라는 높이에서 창작하였다.

백인준선생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였으며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사업하였다.그는 김일성훈장수훈자, 김일성상계관인, 조국통일상수상자, 로력영웅으로 값높은 삶의 령마루에 오르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우리곁을 떠났을 때에는 가족들이 삼가 올린 편지를 보시고 백인준동지는 우리 당이 제일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하던 위대한 인간이라는 친필을 보내주시여 혁명의 붓대를 틀어쥐고 충정의 한길을 걸어온 그의 생을 영광의 절정에 올려세워주시였다.

참으로 백인준선생의 삶은 우리 당을 백옥같은 충정과 높은 실력으로 받드는 길에 우리 지식인들의 존엄이 있고 영예가 있다는 진리를 새겨주고있다.

본사기자 차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