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7월 3일 로동신문

 

숭고한 혁명적의리의 력사는 영원합니다

현 종 웅

 

해마다 그러했듯이 올해에도 7월을 앞두고 여러 나라들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고귀한 혁명생애와 불멸의 업적을 칭송하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조직되고있습니다.그 소식은 제가 사는 단동땅에도 전해지고있습니다.

그런 소식에 접할 때면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온 저의 가슴은 류다른 감회에 잠기군 합니다.

그래서 나이 70을 넘긴 후로 품어오면서도 필력을 저어하여 선뜻 들지 못했던 붓을 마침내 정히 들었습니다.

정작 이야기를 시작하고저 추억의 돛을 돌리니 절세의 위인들의 모습이 온통 눈앞에 어려와 마음을 진정할수가 없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혁명의 려명기에 맺으신 우리 현씨일가와의 인연을 끊을수 없는 혈연의 정으로 귀중히 여기시고 숭고한 의리의 절정에서 꽃피워주시였으며 위대한 장군님께서와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 끝없이 빛내여주시였고 또 이어주시는 전설같은 이야기는 우리 해외동포들도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다함없는 경모의 정으로 칭송하는 위대한 태양의 품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운데 하나로 될것입니다.

 

고유수시절로부터 60여년

 

저는 저의 이야기를 1990년 4월 어느날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벌써 2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내내 그날을 안고 사는 저에게는 어제런듯 생생한 일입니다.

그해 봄 어느날 저희들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저의 어머니 김순옥과 그 자녀들을 불러주신다는 천만뜻밖의 소식에 접하게 되였습니다.

(타향에서 살면서 긴긴 세월 늘 마음속으로 그리던 어버이수령님, 만민이 태양으로 떠받드는 수령님께서 어떻게 되여 우리를 찾아주실가?)

한편 꿈만 같았고 한편 놀라운 일이였습니다.

불현듯 저의 뇌리에는 어머니 김순옥이 수십년간 정히 보관하던 놋그릇이 펀뜩 떠오르는것이였습니다.

(어머니가 1929년 고유수에서 살 때 혁명가들에게 식사를 대접해올린적이 있었다는 그때와 무슨 연고가 있어서가 아닐가.…하지만 이제는 60여년전의 일이 아닌가.)

사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어머니는 농에 정히 보관해둔 놋그릇을 가끔가다 꺼내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파란많은 세월 마음속으로 높이 모셔온분에 대한 하염없는 추억에 잠기군 하였습니다.고유수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던 때의 김성주동지에 대한 추억이였습니다.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그때의 일을 연줄로 어버이수령님을 찾아가 뵈올가 하는 간절한 마음을 여러번 먹어보았습니다.그때마다 언감생심 그런 생각을 하다니 하고 자기를 자제하여왔었습니다.

바로 그 놋그릇이 어버이수령님의 부르심을 받는 꿈같은 연줄을 이어놓게 되였다는 사연을 우리는 평양에 체류하는 기간 비로소 알게 되였습니다.

저희들이 막상 평양으로 떠나자니 어머니가 10년나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앓는데다가 기억력도 그전같지 않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것이 안타까운 일이였습니다.

하지만 오매불망 그리던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게 된다는 오직 그 하나의 기쁨으로 벅적 들끓으며 우리 일행은 어머니를 부축하고 급히 평양을 향한 려정에 올랐습니다.

평양에 도착하여 국빈들을 위한 초대소에 려장을 푼 저희들은 먼저 어버이수령님께서 깊이 관심하여주신 일정에 따라 수령님의 사랑이 어린 새옷들로 단장하고 처음으로 조국의 현실을 체험하였습니다.

저희들이 그처럼 기다리던 날, 어버이수령님을 몸가까이 모신 영광의 날은 바야흐로 4월 15일을 며칠 앞둔 4월 10일이였습니다.

저희 일가가 어버이수령님께서 계시는 곳에 당도하였을 때 아, 이게 웬일입니까.어버이수령님께서 먼저 나와계시다가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두팔을 벌리시고 저희들에게로 마주 걸어오시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은 어푸러질듯 달려가 무작정 어버이수령님의 품에 와락 안기였습니다.순간 눈앞이 흐려지고 그 무엇인가 이름할수 없는 정회가 가슴에 뜨겁게 파고드는것이였습니다.

이윽고 저희들이 마음을 진정하고 자리에 앉았을 때였습니다.

어머니의 주름깊은 얼굴의 그 어디에서인가 22살때의 옛 모습을 찾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안광에 어느덧 형언할수 없는 강렬한 감회의 빛이 어리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저희들을 둘러보시면서 못내 감개에 젖은 음성으로 이렇게 교시하시는것이였습니다.

《지난날 나의 혁명활동을 적극 도와준 동무들과 자리를 같이하니 매우 기쁩니다.오늘 동무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회포를 나누자고 합니다.》

(혁명활동을 적극 도와주었다니?)

극상해서 식사를 몇끼 보장해드린 일이 있다는것밖에 모르던 저희들은 일순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다음순간 어버이수령님께서 저의 할아버지 현하죽에 대하여, 어머니 김순옥에 대하여 감회깊이 회고하시여서야 저희들은 의의깊고 감개무량한 자리가 어떻게 마련되였는지 다소나마 알수 있었습니다.

물론 저희들도 다는 모르던 할아버지의 일대기와 어머니의 일이였습니다.

원래 평안북도 박천이 고향인 할아버지 현하죽이 살길을 찾아 헤매이다가 동북지방의 거치른 벌판에 보짐을 풀고 주추돌을 놓기 시작한것은 3.1인민봉기직후였고 고유수땅에 정착하게 된것은 1927년초부터였다고 합니다.

어버이수령님의 추억깊으신 교시가 저희들의 페부에 뜨겁게 흘러들었습니다.

《김순옥의 시아버지인 현하죽선생은 오랜 독립운동자의 한사람이였습니다.내가 고유수에서 혁명활동을 할 때 그 일대에서 살던 사람들은 그를 하죽선생이라고 불렀는데 그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현하죽선생은 우리 아버지와도 아주 친한 사이였으며 독립운동에 뜻을 같이한 동지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유수에서 혁명활동을 할 때 현하죽선생의 집에 머물러있었고 오가자에 가있을 때에는 문조양동무의 집에 가있군 하였습니다.》

조선혁명의 대중적지반을 마련하시기 위하여 대중을 의식화, 조직화, 혁명화하기 위한 사업을 활발히 벌리시던 고유수시절에 감회깊은 추억의 닻을 내리시고 깊은 생각에 잠겨계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는 현하죽선생의 집에 가있으면서 신세를 많이 졌다고, 사실 그때에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에게 밥 한끼 해먹인다는것이 간단하지 않았다고, 농사를 지어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친 다음 남은 식량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집에 찾아오는 혁명가들에게 밥을 해먹이고나면 집사람들은 거의 굶어살아야 하였다고 하시는것이였습니다.

멀리 흘러온 력사의 기슭, 그 모든것을 돌이켜보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안광에 어느덧 특별한 감개가 어리여있었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계속하시여 자신께서는 그때 같이 투쟁하던 동무들과 함께 현하죽선생의 집에 가서 오래동안 숙식을 하면서 지냈다고 하시면서 《지금 그때 일을 생각하면 현하죽선생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나는 현하죽선생의 그 은정을 지금도 잊지 않고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않을것입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습니다.

모두 합쳐 한두달도 안되는 짧은 기간으로 알고있는 그때의 일,

아득히 흘러간 그 일을 아직까지 잊지 않으시고 어쩌면 이다지도 깊은 감회와 기쁨속에 추억해주신단 말입니까.

그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저의 아버지와 삼촌에 대하여서도 《현하죽선생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현화균이였고 둘째아들은 현균이였습니다.현화균이 김순옥의 남편이였습니다.그들에 대하여서는 내가 잘 압니다.현화균은 량심적인 사람으로서 나를 성의껏 도와주었으며 조선혁명군의 활동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그는 농민동맹에서 활동하였습니다.현균도 똑똑한 사람이였습니다.그는 〈ㅌ.ㄷ〉성원이였고 조선혁명군 대원이였습니다.》라고 감회깊이 회억하시면서 김순옥의 아들과 며느리, 손녀들은 고유수에서 떠나 쌍양현에서 살았기때문에 자기의 할아버지인 현하죽선생의 활동과 고유수에서 있었던 일을 잘 모를것이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백발을 인 어머니뿐아니라 할머니를 따라온 손녀까지도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였습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일가의 일을 잊지 않으시고 이처럼 감격적인 자리를 마련해주신 어버이수령님의 그지없는 인정의 세계에 뜨거운것이 끝없이 북받쳐올라 저는 어쩌면 오랜 세월 그때의 일을 잊지 않으시고 이렇게까지 환대해주신단 말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도 있습니까, 수령님,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목메여 말씀올리였습니다.

그러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동무들이 내가 60여년전의 일들을 잊지 않고 이렇게 만나주고 영광을 베풀어주어 감격을 금할수 없다고 하는데 어찌 그 간고한 혁명활동시기에 나를 도와준 사람들에 대하여 잊을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시며 저희모두를 다시금 사랑의 품에 안아주시는것이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너무나도 감격이 극하여 그저 눈물만 흘리는 저희들을 보시며 모두 자기 집처럼 생각하고 음식을 많이 들어야 하겠다고 거듭거듭 이르시였습니다.

단란한 한가정의 분위기에 휩싸인 저희들은 수령님께서 장수하시기를 바라는 노래도 불렀습니다.

우리 현하죽일가의 가슴속에 뿌리내린 이 절절한 념원은 조선의 위대한 태양을 모신 그 나날로부터 대대로 저희들의 가슴속에서 한시도 떠난적 없는 최대의 념원이였습니다.

온 세상이 우리를 부러워 바라보는것만 같은 행복의 절정에서 시간이 어떻게 흘렀던지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의 일이 꼭 꿈만 같습니다.

그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김순옥의 셋째며느리인 저의 안해 김명애가 어느 지방에서 살았는가도 다정히 물어주시고 그 지방에서 살던 사람을 만나기는 처음이라고, 그 지방 사람을 오래간만에 만나니 반갑다고 하시며 친자식을 대해주듯이 더없이 각근하게 위해주시였습니다.

일찌기 아버지를 잃고 추억할만 한 사진 한장도 가지고있지 못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을 내심 부러워하던 저와 시아버지의 사랑을 전혀 받아보지 못한 저의 안해는 솟구치는 격정을 금할수 없어 친아버지를 찾듯 스스럼없이 《아버지!》라고 목메여 부르며 터져나오는 오열을 참지 못하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은 진정 저희들의 아버지이시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지니고계시는 이 세상 가장 고결한 의리와 다심한 사랑이 그처럼 절절하게 부르고싶었던 그 부름에 다 함축되여있었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몸소 마련하신 영광넘친 그날의 자리는 결코 지나온 력사를 추억하기 위한 회우가 아니였습니다.

생사를 같이하는 혁명의 길을 헤쳐오다가 먼저 떠나간 동지들이 남기고 간 혈육들을 책임지고 보살피시는것을 자신께서 하셔야 할 응당한 사명으로 여기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혁명적의리의 세계가 감명깊이 펼쳐진 참으로 의미깊은 자리였습니다.

저희들과 헤여지기에 앞서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친아버지의 심정이 되시여 불편한 어머니를 위하여 모처럼 마련하신 고급밀차를 비롯하여 저희들 매 가족에게 사랑의 선물을 가득 안겨주시였습니다.

그날 저녁이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해당 일군에게 저희들을 만나시던 때를 상기하시면서 김순옥의 아들딸, 며느리들이 자기 어머니가 나에게 인사말도 변변히 하지 못하여 몹시 가슴아파한다는데 김순옥이 80이 넘은데다 당황하여 그랬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고 합니다.

저희들을 또다시 울리게 하는 눈물겨운 말씀이였습니다.

사실 저희들도 어머니가 그저 눈물만 흘리면서 어버이수령님께 인사말씀 한마디 변변히 올리지 못한것이 저으기 아쉬웠었습니다.

저희들을 더욱 울리게 한것은 그날이 마련되기까지의 일에 대하여 일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였습니다.

나라가 해방된 이듬해 여름 어버이수령님께서 오가자시절의 연고자를 만나시였을 때였다고 합니다.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에게 혹시 고유수의 현균이네 형제를 모르는가고, 고유수에 현균이와 현화균이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그들이 고유수의 주인이 되여 투쟁을 잘하였다고 회억하시였다고 합니다.그리고 외국방문의 길에 올라 광활한 동북지방을 지나실 때마다 만주의 낯익은 산천을 바라보시면서 고유수를 생각하시고 현하죽과 후손들을 생각하시였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하죽선생은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라도 선생의 후손들은 다문 한두명이라도 살아있을터인데 왜 종무소식일가, 나는 그들의 주소를 몰라서 속수무책이지만 그들이야 나에게 편지를 할수 있지 않는가라고 하시며 사람이 신세를 지기는 쉬워도 갚기는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으로 늘 저희 일가를 찾으시였다는것이 아니겠습니까.참으로 전설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어느때든지 나라가 독립되면 고유수에서 진 빚을 단단히 갚으려고 하였다고, 만나서 소박한 음식상도 차리고 회포를 나누고싶은 심정이 간절하다고 하신 어버이수령님,

그 숭고한 의리로 얼마나 가슴을 불태우시였으면 마침내 우리 일가를 찾아 사랑의 품에 안아주시고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무렵 해외동포들을 만나시는 기회에도 할아버지 현하죽에 대하여 뜨겁게 회고하시면서 《그는 내가 언제나 잊을수 없는 고마운 사람이였습니다.그때 사진을 찍어둔것이 없다보니 지금까지 그를 찾지 못하고있었습니다.그런데 얼마전에 중국 길림에서 조선사람들이 발간하는 잡지에 〈놋그릇〉이라는 제목으로 쓴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가 바로 나의 초기혁명활동을 도와준 현하죽선생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라고 하시며 저희들과 상봉하시던 때를 뜨겁게 더듬으시였겠습니까.

어버이수령님께서 그처럼 생사를 몰라 궁금해하시던 은인들중 한사람을 기적적으로 만나신 극적인 날은 이렇게 마련되게 되였던것입니다.

혁명의 중하를 한몸에 지니시고 시련에 찬 길을 헤쳐오신 어버이수령님께서 산천도 몇번 변한 그 긴긴 세월 현하죽일가를 잊지 않으시고 찾기 위해 그처럼 애쓰시였다는 이 모든 눈물겨운 사실을 전해들으며 저희들은 소리내여 울음을 터치였습니다.

어머니도 《김성주선생님!》, 《김성주선생님!》 하고 그냥 외우며 옷고름만 씹으면서 눈물을 흘리는것이였습니다.

저희들 현하죽일가를 위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웅심깊은 의리의 세계에는 정녕 끝이 없었습니다.

어느날엔가 저희들이 백두산일대의 혁명전적지들을 참관하고있을 때에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저희 가족을 위하여 비행기를 따로 보내주도록 하시였고 또 어느날엔가는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공연도 저희들을 몸가까이에 앉히고 보아주시는 은총을 베풀어주시였습니다.

저희들이 돌아가게 되였을 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처럼 분망하신 속에서도 작별식사를 잘 차려주도록 사려깊이 헤아려주시였습니다.

중국의 옛 문호는 한해의 계획은 곡식을 심는것이고 10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데 있으며 100년의 계획은 덕을 닦는데 있다고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인정의 세계를 동경하고 리상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살아 이런 눈물겨운 인정의 세계를 목격하였더라면 어버이수령님앞에 무릎을 꿇고 삼가 큰절을 올리였을것입니다.

조선혁명의 려명기에 송화강지류의 이통하강반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농촌마을인 고유수의 리가툰의 버들골에서 맺어진 위대한 수령님과 현씨일가와의 끊을수 없는 인연은 이처럼 60여년만에 기적적으로 다시 이어지게 되였습니다.

 

기슭이 없는 사랑의 바다

 

알길 없는 행처를 수소문하실 때에는 그리도 안타깝게 소식을 기다리시였고 일단 만나신 다음에는 떨어져있으면 정이 멀어질세라 자주 찾아주시고 옆에 있으면 무엇인가 하나라도 더해주고싶으시여 마음쓰신 어버이수령님의 무한대한 인정의 바다에는 정녕 기슭이 없었습니다.

평양에 갈 때면 저희들은 의례히 조선혁명박물관을 찾군 합니다.

올해 봄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106돐을 맞으며 방문하였을 때에도 저는 안해와 아들, 며느리를 데리고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았습니다.

고유수의 리가툰마을과 더불어 저의 어머니 김순옥이 나라찾는 대업에 몸을 내댄 혁명가들에 대한 존경심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여 아낀 쌀주머니를 풀어헤쳐 정성스레 밥을 지어올릴 때 윤기나게 닦고 또 닦던 놋그릇, 언제든지 어버이수령님께서 다시 오시면 쓰려고 오랜 세월 정히 보관하고있던 그 놋그릇,

어버이수령님께서 수십년을 두고 알길 없어 안타까와하시던 우리 일가를 찾으시는데 귀중한 연줄로 된 바로 그 사연깊은 놋그릇이 조선혁명박물관에 정히 보관되여있기때문입니다.

어느해인가 박물관에 갔을 때 저희들은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 그 놋그릇앞에서 오래동안 걸음을 멈추시고 또다시 고유수시절을 뜨겁게 추억하시고 어머니 김순옥에 대한 귀중한 말씀을 하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습니다.

이번에 저희들이 박물관을 찾았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놋그릇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어버이수령님의 고유수시절과 인연이 있는 한 녀인의 모습을 그려보고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놋그릇을 바라보는 저의 가슴에서는 초년고생의 어혈이라고 할가 내내 건강이 여의치 못하였던 어머니에게 생의 활력을 다시 부어주신 어버이수령님의 극진한 사랑, 현씨일가에 대한 숭고한 혁명적의리의 력사를 끝없이 수놓아가신 위대한 장군님과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무한대한 인정의 세계, 그 은혜로운 사랑의 바다가 마냥 일렁이였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80이 넘은 어머니는 조국에 나올 때 몹시 숨이 차하고 허리도 펼수 없어 부축을 받아서야 겨우 움직일수 있었습니다.

일찌기 남편을 잃고 혼자서 7남매를 키워야 하는 조련치 않은 인생길에 부대껴온 모진 세파의 흔적으로 여기면서 저희들도 그런 어머니를 두고 가슴아파하였을뿐 어쩔수 없는 일로 여겨왔었습니다.

어버이수령님과 60여년만에 다시 뜻깊은 상봉이 이루어진 그해 11월 어머니가 조국의 품에 안기였을 때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에 개선하신 이후 간고한 혁명의 길에서 다소라도 도움을 받으신 사람들을 잊을수 없는 사람들로 중시하시며 은인들을 찾지 못하여 그리도 애써오신데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계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가구, 전기용품이랑 일식으로 갖춘 어머니의 살림집을 풍치수려한 대동강기슭에 잡아주시였습니다.

이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잘되였다고 하시면서 당에서 김순옥할머니의 생활을 잘 돌봐주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일군들에게 간곡히 이르시였다고 합니다.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넘친 사랑으로 어머니가 좋다는 약은 다 쓰면서 생의 활력을 다시 찾았던 1992년 3월 12일이였습니다.

그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항일의 혈전만리를 함께 헤쳐온 투사동지들, 혁명사적부문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전국혁명사적일군예술소조종합공연을 관람하시였습니다.

영광넘친 그 자리에 어머니 김순옥과 당시 조국을 방문한 중국에서 사는 저의 누이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형수를 불러주신것만도 황송하기 그지없는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공연시작에 앞서 일군들에게 어머니가 위대한 장군님의 각별한 사랑으로 며칠전에 생일 85돐을 쇤데 대하여,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가족들이 그 상을 가지고 건설장에 찾아가 건설자들을 고무하여준 사실을 대견히 여기시면서 어머니일행을 따로 만나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의 각별한 보살피심속에 병치료를 적극적으로 하여 숨이 차던것과 허리를 펴는것이 훨씬 나아진것을 보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더없이 기쁘시여 어머니에게 그전보다 건강해보인다고, 조국에 나와 오래 살아있으니 자주 만나게 된다고 하시며 못내 기뻐하시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을 정히 우러러 어머니는 문수거리 살림집에서 살다가 얼마전에 당의 배려에 의하여 새로 지은 더 좋은 살림집으로 이사하였다고 고마움의 인사를 올리였습니다.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형수도 원래 살던 집도 만족하였는데 궁궐같은 훌륭한 살림집에서 살게 되여 눈물을 흘리였다고 목메여 말씀올리였습니다.

그러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문수거리에 있는 살림집에서 살다가 얼마전에 당의 배려에 의하여 새로 지은 더 좋은 살림집으로 이사하였으면 좋습니다라고 더없이 만족해하시면서 어머니에 대하여 또다시 추억깊은 말씀을 하시였습니다.

김순옥녀성의 시아버지 현하죽은 우리 아버지의 지도밑에 반일투쟁을 하였고 시동생 현균은 나와 같이 《ㅌ.ㄷ》와 조선혁명군에서 활동하였으며 남편 현화균은 고유수농민동맹사업을 맡아하면서 나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어머니와 누이, 형수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옷고름으로 눈굽을 찍는 어머니의 손을 다정히 잡으시며 정넘친 어조로 교시하시였습니다.

《김순옥녀성은 내가 고유수에서 활동할 때 식사를 보장하여주느라고 수고하였습니다.

그때 식사를 성의껏 보장해준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 기나긴 세월을 두고 잊지 않으시였을뿐아니라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강렬한 추억속에 감회깊이 더듬으시는 어버이수령님, 그이께서 지니고계시는 이 세상 가장 고결한 의리와 사랑이 한마디한마디 그처럼 뜨겁게 진정으로 함축되여있는 말씀이여서 어머니는 물론 누이와 형수도 얼굴을 싸쥐고 끝내 오열을 터치였습니다.

그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쳐온 투사동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의 자리에 어머니도 세워주시였습니다.

그날 저녁이였다고 합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김순옥이 한 5년 더 살수 있겠는지 모르겠다고, 김순옥에 대한 글을 써서 소개한 중국 길림성 《도라지》잡지사 기자가 용타고, 그가 글을 써내지 않았더라면 김순옥을 찾아내지 못하였을것이라고 정회에 젖은 어조로 뇌이시였다고 합니다.

저희 일가모두에게 한생에 다시없을 영광을 안겨주시고도 벌써부터 찾지 못한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하신 어버이수령님,

어버이수령님의 고결한 의리의 세계는 이렇듯 보통사람은 상상할수도 가늠할수도 없고 또 좀처럼 믿기 힘들어하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웅심깊고 무한대한 세계였습니다.정말 어버이수령님 같으신분은 넓고넓은 세상천지에 더는 없습니다.

어버이수령님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자신께서 돌보아주고 끝까지 책임져주는것을 숭고한 의리로 간직하신 위대한 장군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저의 어머니 김순옥을 대해같은 품에 안으시여 반일애국렬사로 높이 내세워주시였으며 다함없는 사랑과 은정으로 소생시켜주시여 95살까지 장수하게 해주시였습니다.

가지많은 나무가 바람 잘 날 없다는 말그대로 일곱 자식을 키우느라 이래저래 생일을 모르고 살던 어머니에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생일 85돐상에 이어 90돐상도 차려주시고 95돐생일상도 보내주시였으며 사후에는 신미리애국렬사릉의 높은 언덕에 영생의 모습으로 내세워주시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을 졸지에 잃은 충격에 저희들이 정신적방황으로 허탈감에 잠기였을 때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세상 가장 큰 상실의 아픔속에서도 수령님과 연고관계에 있는 저희 일가를 잊지 않으시고 평양에 불러 수령님의 령전에서 저희들과 슬픔을 함께 하시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혁명적의리의 화신으로 만민의 열화같은 경모의 절정에 높이 서계시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는 저희 일가에 있어서 어버이수령님이시고 위대한 장군님이십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전 11월이였습니다.하늘처럼 믿고 살던 민족의 어버이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서거 1돐을 며칠 앞둔 때여서 온 나라가 심심한 애도의 분위기에 휩싸여있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뼈저리는 상실의 아픔속에서도 저의 어머니 김순옥의 사망 10돐 추모행사를 잘하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중국에 사는 자식들이 다 참가하도록 사려깊이 헤아려주시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의 서거 20돐때에도 또다시 저희들을 불러주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저의 안해 김명애가 중국에서 앓던 병으로 신고하고있는것을 료해하시고 40여일간이나 치료해주도록 극진한 배려를 돌려주시였습니다.저의 안해를 치료해준 정부병원의 의료일군들 아니 천만사람의 심금을 울려준 고결한 의리였습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의리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 폭과 깊이를 헤아릴길 없는 그이의 고매한 덕성에 대하여 한가지만 더 적으려고 합니다.

올해 봄 민족최대의 경사스러운 명절 태양절에 즈음하여 평양에 온 저희들은 꿈에서도 상상할수 없었던 감격적인 일에 접하게 되였습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 숭고한 혁명적의리로 반세기도 훨씬 전에 우리곁을 떠나간 저의 삼촌인 현균의 이름을 《항일혁명렬사추모비》에 새기도록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던것입니다.

흔히 세월의 흐름은 사람들에게 잊음을 가져다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 가장 숭고한 혁명적의리의 최절정을 펼쳐가시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어버이수령님과 인연을 맺은 사람, 위대한 장군님께서 돌보아주신 그 당사자는 말할것도 없고 그들의 후손들까지도 한결같이 기억하고계실뿐아니라 그들 매 사람의 생활과 운명에 대하여 이처럼 깊이 헤아리시며 영생의 언덕에 내세워주시는것입니다.

해와 달처럼 다함이 없고 우주와 같이 가없으며 세월이 흘러가도 진할줄 모르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열화같은 사랑과 숭고한 의리의 세계는 날이 갈수록 만사람을 경탄시키고있습니다.

저는 저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세상에 꼭 하고싶었던 말을 마저 하려고 합니다.

사실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신세로 말하면 우리 현씨일가가 대를 두고 갚아야 할 어버이수령님의 은정입니다.

암담하던 민족수난의 시기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할아버지 현하죽을 독립운동의 의로운 길로 이끌어주시였으며 바로 그런 연고로 하여 할아버지는 김형직선생님 댁에서 이모저모로 페도 적지 않게 끼치였던것입니다.

어버이수령님의 품에 안겨 저의 아버지 현화균과 삼촌인 현균도 혁명조직성원으로 성장할수 있었고 저의 어머니 김순옥도 혁명적으로 계몽각성되여 야학에 나가 글도 배우고 부녀회에서 활동하게 되였던것입니다.

온 가족을 성스러운 혁명의 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신 어버이수령님께 저희들 현하죽일가가 저 하늘의 별을 따다 올린들 어찌 천만분의 하나라도 보은할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잠시 인연을 맺으시였던 사람들을 오랜 세월을 두고 그리워하시고 찾으시였으며 일단 찾으신 다음에는 그 당사자는 물론 후대들까지 련련히 사랑과 의리로 보살펴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위대하고도 숭고한 혁명적의리를 저희들 현하죽일가는 천년이 간들 잊을수 없습니다.

어버이수령님에 의하여 혁명의 개척기에 시작되여 장장 반세기가 흐르도록 아름답게 엮어졌으며 위대한 장군님에 의하여 더욱 꽃펴난 조선혁명의 숭고한 의리의 력사는 오랜 혁명투쟁사가 알지 못하는 류례없는 혁명적의리의 정화라고 저는 온 세상에 대고 소리높이 말하고싶습니다.

혁명과 인간에 대한 열화같은 심장으로 혁명적의리의 새 세계를 펼쳐가시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무한대한 의리로 하여 령도자와 혁명전사들사이의 혁명적이며 혈연적인 관계가 더욱 철통같이 맺어지는것이며 그것은 폭풍과 시련을 이겨내며 순결하게, 줄기차게 이어져 거창한 일심단결의 대하를 이루고있는것이 아니겠습니까.

태양의 인력과도 같은 거대한 힘으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후손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전사, 제자들을 사랑과 정으로 품어안으시고 지극히도 위해주시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무한대한 인정은 김일성민족, 김정일조선을 세상이 부러워하게 하는 각광의 원천입니다.

조선사람들은 예로부터 의리를 중히 여겨 사람은 의리에 살고 의리를 지켜 죽는다고 말하고있습니다.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태양절을 맞으며 조국을 방문하였을 때 저희들은 만경대를 찾아 남산의 푸른 소나무를 바라보며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께서 개척하신 력사의 새벽길을 다시금 더듬어보면서 사철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의 억센 기상으로 선렬들이 걷던 길을 꿋꿋이 이어갈 맹세를 더욱 굳게 가다듬었습니다.

할아버지세대, 아버지와 어머니세대를 안아 성스러운 혁명의 길에 세워주시였으며 대를 이어 고결한 육친의 정으로 보살펴주시였고 세월의 언덕을 넘어 끝없이 위해주시는 만경대혁명일가의 변할줄 모르는 혁명적의리의 력사는 우리 현씨일가에 있어서 억만금보다 귀중한 재보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사무치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그리움을 심장깊이 간직하고 태양민족의 자부심높이 저희들 현씨일가는 사람마다 신심과 활력에 넘쳐 광활한 미래에로 나아가는 조국을 위하여 적은 힘이나마 바치며 일편단심 의리의 길을 걸을것입니다.

(필자는 위대한 수령님의 초기혁명
활동연고자 김순옥의 셋째아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