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7월 10일 로동신문
력사의 새벽길에 새기신 불멸의 자욱
오늘 우리 조국은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중중첩첩한 시련과 암운속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꿋꿋이 싸워오신 김형직선생님의 길지 않은 한생을 줄기차게 관통한것은 남산의 푸른 소나무의 불굴의 넋과 기상이였다.
남산의 저 푸른 소나무가 눈서리에 파묻혀서 천신만고 괴롬받다가 양춘을 다시 만나 소생할줄을 동무야 알겠느냐 … 어느덧 세월은 멀리 흘렀다.하지만 조국과 민족의 운명은 그 어떤 외세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민족자체의 힘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민족자주정신과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는 몸이 찢겨 가루가 된다고 하여도 굴함없이 싸우겠다는 백절불굴의 혁명정신, 대를 이어 싸워서라도 이 땅에 밝은 세상을 안아오겠다는 계속혁명의 정신으로 력사의 새벽길을 꿋꿋이 헤쳐가신 김형직선생님의 빛나는 한생은 남산의 푸른 소나무와 더불어 최후승리를 향해가는 온 나라 천만군민을 끝없이 고무추동해주고있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의 한사람으로서 1894년 7월 10일에 만경대에서 탄생하여 1926년 6월 5일 망국의 심야에 한을 품고 돌아갈 때까지 일생을 혁명에 바친분이였다.》 32년, 너무도 짧은 생이였지만 조국과 민족을 위해 깡그리 바치신 김형직선생님의 한생을 돌이켜보는 이 시각 우리의 눈앞에 숭엄히 안겨오는 거룩한 모습이 있다. 어느해 화창한 봄날 유서깊은 혁명의 성지 만경대를 찾으신 그이를 모신 승용차가 소나무가 푸르러 설레이는 남산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생각깊은 눈길로 한동안 남산을 바라보시던 잊지 못할 그날 《남산의 푸른 소나무》를 읊으시며 제 한몸을 생각하고 걸음을 지체하면 조선독립이 그만큼 멀어진다고,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떠나야 하겠다고 하시며 출옥후 운신할수 없는 상태에서도 파괴된 조직을 복구하기 위한 길을 힘차게 이으시던 선생님의 발걸음소리였으리라.한몸이 찢겨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왜놈들을 쳐없애고 나라의 해방을 이룩해야 한다고 자제분들에게 절절히 당부하시던 그날의 김형직선생님의 강인한 모습이였으리라. 정녕 김형직선생님의 한생은 비바람, 눈서리에도 굽힘없는 푸른 소나무의 넋과 기상그대로였다. 중학시절에 벌써 평양일대는 물론 평안남북도일대를 비롯한 여러곳에 나가시여 동지들을 규합하며 광범한 군중속에서 반일선전을 벌려나가신 김형직선생님이시였다. 활동무대를 확대하고 본격적인 실천투쟁을 벌리시기 위하여 직업적인 혁명가로 나서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교원의 직업을 리용하여 국내 여러 지역의 동지들과의 긴밀한 련계밑에 반일민족해방운동을 통일적으로 이끌어나갈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을 적극 추진시키시였다. 주체6(1917)년 3월 23일 김형직선생님의 커다란 심혈과 로고에 의하여 결성된 조선국민회는 전체 조선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조선사람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며 참다운 문명국가를 세울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로서 3.1인민봉기를 전후한 시기 규모가 가장 큰 반일지하혁명조직이였으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중추적혁명조직이였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폭압이 극도에 이르렀던 시기에 민족자주의 기치밑에 국내외의 광범한 반일애국력량을 조선국민회조직에 묶어세워 그들을 반일독립투쟁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하신 불멸의 업적은 김형직선생님께서 쌓으신 특출한 공적이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일제경찰에 체포되시였을 때였다. 놈들은 여러차례나 김형직선생님에 대한 재판을 벌리였다. 그때마다 선생님께서는 조선사람이 제 나라를 사랑하고 제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이냐, 나는 당국의 그런 부당한 심리를 인정할수 없다고 단호하게 항의하시였다.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오실 때 선생님의 몸상태는 원쑤들의 모진 고문으로 하여 겨우 걸음을 옮길 정도였다. 그때 김보현선생님께서 분노로 치를 떨며 선생님을 들것에 눕히려고 하시였다. 그러자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제발로 걸어가겠습니다,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야 제가 어떻게 원쑤놈들앞에서 들것에 들려 가겠습니까, 놈들이 보란듯이 제발로 걸어가야 합니다라고 하시며 흔연히 걸음을 옮기시였다. 집에 돌아오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감옥에서 물이라도 더 먹고 어떻게 하든지 살아나가서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심을 했다.세상에 제일 못된 놈들이 일본놈들인데 그놈들을 그냥 놔둘수가 있느냐.형록이나 형권이도 왜놈들과 싸워야 한다.죽어도 피값은 해야 한다.》 민중이 총칼을 들고일어나 원쑤와 싸워 나라도 찾고 착취와 압박이 없는 새세상도 세워야 한다.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 이런 의지를 지니시고 조선국민회조직을 복구확대하고 무산혁명의 기치높이 반일민족해방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정력적인 투쟁을 벌리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어찌 잊을수 있으랴. 만경대를 떠나시기에 앞서 김형직선생님께서 지으신 시가 《남산의 푸른 소나무》이다. 닥쳐올 겨울의 눈서리를 이겨내고 다시금 양춘을 만나 소생할 소나무의 굳센 모습으로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불사신마냥 혁명의 길을 꿋꿋이 이어나가시였다. 활동거점을 압록강연안 북부국경일대에 옮기시고 무산혁명로선을 관철해나가기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벌리실 때에도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언제나 남산의 푸른 소나무를 심장속에 간직하고계시였다. 청수동회의에서 무산혁명의 력사적필연성을 론증하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관전회의에서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무산혁명에로 방향전환할데 대하여 정식 선포하시였다. 조선국민회 각 조직들에서 김형직선생님께서 보내시는 서한을 전달받았을 때였다. 그이께서 보내신 서한이 적힌 종이의 한쪽여백에 한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져있었다. 지원의 사상으로 기어이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시려는 김형직선생님의 불타는 애국의 신념과 백절불굴의 투지, 강의한 혁명정신이 어린 소나무였다. 진정 한몸 싸우다 쓰러지면 대를 이어 싸워 금수강산 삼천리에 양춘을 안아오실 의지로 심장을 불태우신 김형직선생님이시였기에 남산의 푸른 소나무의 정신을 애국의 혈통으로 물려주시였던것이다.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자면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열두살 어리신 우리 자신을 생각하시기에 앞서 겨레를 생각하시고 가정을 생각하시기에 앞서 조국을 먼저 생각하시며 찬바람을 맞받아 일생을 쉬임없이 걸으시였기에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림종의 시각 자제분들에게 뼈가 부서지고 몸이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엄숙한 당부를 유언으로 남기시였던것이다. 지원의 사상과 3대각오, 동지획득에 대한 사상과 두자루의 권총, 천만금에도 비길수 없는 참으로 고귀한 재부를 우리 혁명의 유산으로 물려주신것이야말로 김형직선생님의 위대하고 불멸할 업적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한길에서 굴함없이 싸우겠다는 굳은 결심을 품으시고 력사의 새벽길을 꿋꿋이 헤쳐가신 김형직선생님처럼, 아버님으로부터 물려받으신 두자루의 권총을 밑천으로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시고 이 땅우에 사회주의락원을 펼쳐놓으신 불후의 명작 《남산의 푸른 소나무》의 구절구절을 심장깊이 새기시며 백두에서 개척된 주체혁명의 백전백승사를 광휘롭게 빛내여가시는 그이의 령도를 충정다해 받들어나가는 여기에 조선의 혁명가라면 누구나 남산의 푸른 소나무의 기상과 넋을 안고 살아야 한다. 본사기자 백영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