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7월 20일 로동신문

 

전승의 력사에 빛나는 전인민적애국운동

 

지나온 력사의 갈피마다에는 수많은 전쟁들이 기록되여있다.

그러나 지난 조국해방전쟁과 같이 싸우는 전사들과 한전호에 선 심정으로 온 나라의 남녀로소가 떨쳐나 전선원호사업을 힘있게 벌리며 조국수호전을 벌린 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조국의 촌토를 사수할 일념을 안고 떨쳐나선 후방인민들의 가슴마다에서 세차게 끓어번진것은 과연 무엇이였던가.

다시는 노예로 살수 없다.사랑하는 조국땅,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지켜 우리의 모든것을 다 바치자.

이런 일념이 가슴마다에 만장약되여있었기에 조국의 운명이 판가리되던 준엄한 전화의 나날 후방인민들은 전선원호를 위한 여러가지 대중운동을 과감히 전개하여 전쟁승리에 적극 이바지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전쟁시기에 우리 인민들은 후방을 튼튼히 지키는 한편 전선에 나가 싸우는 아들딸들을 생각하며 전시생산과 전선원호사업을 적극 벌려 전쟁승리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전쟁의 첫 시기 가장 광범히 벌어진 전선원호사업은 군기기금헌납운동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싸우는 인민군대를 적극 원호할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전투적호소를 높이 받들고 전선에 보낼 비행기, 땅크, 함선을 마련하기 위한 군기기금헌납운동에 떨쳐나섰다.

영웅적로동계급은 군기기금헌납운동에서 애국적열성을 다할것을 궐기하고 이 운동에 총궐기할것을 호소하였다.

전국각지의 공장, 기업소의 로동자, 기술자, 사무원들은 이 호소에 호응하여 시간외로동과 자재절약, 로동생산능률의 제고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애국적증산투쟁을 벌려 많은 군기기금을 마련하였다.

함경남도 단천군(당시)안의 로동자, 기술자, 사무원들은 여러가지 애국로동으로 얻은 자금으로 《단천로동자호》비행기를 헌납하였으며 교통운수부문 일군들은 이 운동을 벌린지 한달 남짓한 사이에 1 407만 4 000여원의 막대한 금액을 군기기금으로 헌납하였다.

적들의 야수적인 폭격과 포격속에서도 굴함없이 전시생산과 전선원호사업을 벌린다는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

당시 청진제철소 해탄직장의 어느 한 운전공이 적들의 폭격으로 제철소의 심장부인 대형해탄로가 위험에 처하자 가스탕크에 뛰여들어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탕크의 폭발을 방지함으로써 기대와 설비를 지켜내는 영웅적위훈을 세운것을 비롯하여 희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들이 애써 마련한 군기기금이 침략자들을 무찌르는 총알이 되고 포탄이 되고 비행기와 땅크가 되기에 우리 인민은 그토록 어려운 나날에도 더 많은 군기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였다.

농민들은 전시의 어려운 조건에서 영농사업을 보장하면서도 전시식량증산투쟁에서 얻은 막대한 량의 량곡과 고기를 군기기금으로 바쳤다.

군기기금헌납을 위한 궐기모임에 참가한 재령군의 박농민은 모임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 령도하시는 인민군대가 있기때문에 이 땅의 영원한 주인으로서 기를 펴고 살아가고있습니다.만약 인민군대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처지가 어떻게 되였겠습니까.땅은 이미 원쑤놈들에게 빼앗겼을것이며 우리는 또다시 침략자들의 노예가 되였을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지키느냐 아니면 다시 식민지망국노의 멍에를 쓰느냐 하는 이 엄혹한 때에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그의 심정이라고만 하겠는가.

군기기금헌납운동을 벌린지 한달도 못되는 사이에 현금 2억 6 371만 4 400여원과 수많은 여유량곡, 귀중품들을 헌납한 평안남도안의 농민들을 비롯한 온 나라 농민들의 가슴에도 지지리 천대받고 못살던 자기들에게 땅을 분여해주시고 새 생활을 안겨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그 은덕을 잊지 않고 사랑하는 조국땅을 기어이 수호할 불타는 일념이 자리잡고있었다.

군기기금헌납운동에는 해방된 조국땅에서 새 삶을 받아안은 각계층의 녀성들과 공화국의 품속에서 마음껏 희망의 나래를 펴게 된 나어린 학생들도 적극 참가하였다.

남녀평등권법령발포로 지난날 봉건적예속과 착취의 대상으로 되여오던 자기들에게 참다운 삶을 안겨준 조국을 지켜 전국의 각계층 녀성들은 절약투쟁, 애국로동 등으로 《어머니호》, 《함주군녀성호》, 《평북도어머니호》를 비롯한 여러가지 이름을 가진 비행기, 땅크, 함선을 헌납하였다.

농촌녀성들은 전선에서 싸우는 남편들과 아들, 오빠들을 대신하여 전시알곡증산을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는 한편 방공호의 등잔불밑에서 밤을 새워가며 무명을 생산하여 거기에서 얻은 돈을 비행기, 땅크헌납기금으로 나라에 바치였다.

평안남도 강서군(당시)의 녀성들은 《녀성호》비행기기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무명생산에 궐기하여 200만원에 달하는 금액을 바쳤으며 황해도(당시)안의 녀성들은 무명생산에서 얻은 수입으로 비행기 《재령녀성호》와 《어머니호》를 헌납하였다.

각지 청년학생들도 전선에서 싸우는 인민군대를 돕는 심정으로 부모들의 뒤를 따라 군기기금헌납운동에 떨쳐나섰다.

그들은 《우리가 수집하는 파철은 원쑤를 무찌르는 탄약과 무기로 된다.》고 하면서 과외시간을 리용하여 파철, 파고무, 탄피, 자동차부속품 등 각종 페품들과 유휴자재들을 수집하였다.

나어린 소년단원들은 과외시간을 리용하여 파고철수집, 약초캐기, 산나물채취, 벼이삭줏기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군기기금을 마련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직원들의 《대학호》군기기금을 헌납할데 대한 애국적호소에 호응하여 북반부 각 대학 교직원들도 일제히 이 운동에 떨쳐나섰다.

그들은 생활을 전시조건에 맞게 하고 생활비를 극력 절약하여 헌납금을 마련하였을뿐아니라 한두달 생활비전부를 군기헌납금으로 바치는 등 애국적헌신성을 높이 발휘하였다.

이렇듯 전체 인민들의 열화같은 애국적지성에 의하여 전쟁이 시작된지 2개월후인 1950년 8월 31일 당시로 4억 1 634만 5 000여원의 현금과 수많은 곡물, 귀금속들이 헌납되였으며 그후에도 이 운동은 계속 확대되여 1951년 6월 10일까지만 하여도 15억 3 943만 5 758원에 달하는 많은 현금과 3만 3 640여점의 물품들이 헌납되였다.

오늘도 전쟁로병들은 후방인민들의 군기기금헌납운동으로 마련된 무기와 탄약, 포탄으로 침략자들의 머리우에 멸적의 불소나기를 쏟아붓고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한 전화의 나날들을 잊지 못해 추억하고있다.

군기기금헌납운동과 함께 전선원호를 위한 사회적운동의 다른 한 형태로 널리 벌어진것은 전선원호미헌납운동이였다.

공화국북반부의 농민들은 잃었던 조국을 찾아주시고 땅을 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전시의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도 영농사업을 성과적으로 보장하였을뿐아니라 앞을 다투어가면서 절약한 량곡을 전선원호미로 바치였다.

황해도(당시) 나무리벌농민들은 농민궐기대회를 열고 전선원호미를 헌납할것을 도안의 전체 농민들에게 호소하였다.이 호소에 호응하여 도안의 농민들은 식량소비에서 랑비현상을 없애고 모든 여유량곡을 애국미로 헌납하여 전선을 원호할것을 한결같이 결의하였다.

이리하여 불과 며칠사이에 많은 량곡을 전선원호미로 헌납하였다.

우리 농민들은 《식량절약은 부엌에서》라는 구호밑에 매 가정에서 구체적인 소비절약계획을 세우고 한사람당 매끼 15g의 쌀을 절약하였으며 량곡을 팔아서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던것을 부업생산에서 얻은 부수입으로 해결하도록 함으로써 많은 식량을 절약하여 전선원호미로 바쳤다.

광범한 농민들속에서 전선원호미헌납운동이 이처럼 힘있게 진행됨으로써 1953년 4월 30일 당시까지 각지에서 헌납된 전선원호미는 22만여가마니에 달하였다.

《후방농민들의 전선원호미헌납운동은 화선에서 투쟁하는 나에게 더욱더 승리의 신심을 앙양시켜줍니다.나는 원쑤들을 한놈이라도 더 많이 잡아서 이 전투적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당시 한 인민군전사가 고향에 보낸 이 편지의 글줄에서도 농민들의 전선원호미헌납운동이 싸우는 전선용사들에게 얼마나 큰 힘을 안겨주었는가를 잘 알수 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후방에서 광범한 대중운동으로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한 우리 인민들은 누구나 지난날 천대와 멸시속에 살아오다가 위대한 수령님의 품속에서 공장과 땅의 주인으로 자라난 새 조선의 주인들이였다.

해방후 위대한 수령님의 품속에서 맞고보낸 꿈같은 5년간의 생활을 통하여 조국의 귀중함을 소중히 간직한 우리 인민이기에 침략자들을 격멸하기 위한 대중운동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던것이다.

3년간의 가렬처절했던 조국해방전쟁은 수령의 두리에 군민이 한마음한뜻으로 굳게 뭉쳐 견결히 싸워나갈 때 그 어떤 강적도 능히 때려부시고 조국과 민족의 존엄을 영예롭게 수호할수 있다는것을 뚜렷이 확증하였다.

본사기자 리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