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7월 23일 로동신문
인민군용사들과 한전호에 선 후방녀인들 노래 《직동령의 승리방아》 주인공들의 투쟁의 갈피를 더듬어
노래 《직동령의 승리방아》는 우리 인민이 사랑하며 즐겨부르는 노래들중의 하나이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휘영청 달밝은 밤에 싸우는 고지의 인민군전사들을 위해 신바람나게 원호미를 찧고 포연서린 화선길도 웃으며 걸은 녀인들의 숭고한 정신세계와 아름다운 모습을 눈앞에 그려본다. 흔히 문학예술작품은 실재한 력사적사실과 인물들에 기초하여 창작된다. 노래 《직동령의 승리방아》도 실재한 주인공들을 가지고있으며 《 가렬한 전화의 나날 1211고지의 서쪽기슭을 지나는 주요교통로였던 직동령아래 금강군 속사리가 자리잡고있다. 바위가 부서져 가루가 되고 다람쥐마저 몸둘 곳을 몰라 전사의 품으로 뛰여들었다는 우리 조국의 영웅고지 1211고지와 잇닿아있는 최전방의 화선지대였던 속사리, 그곳에서 1950년대의 나날을 보낸 이름없는 녀인들의 투쟁과 생활은 우리 인민이 사랑하는 노래 《직동령의 승리방아》를 낳게 한 또 하나의 훌륭한 바탕으로 되였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그들은 하루에도 수많은 포탄이 날아드는 불비속에서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어들이였으며 거두어들이는족족 방아로 쿵쿵 찧어 전선에서 싸우는 인민군용사들에게 보내주었다. 마을의 많은 녀성들이 자진하여 보잡이로 되였으며 농사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밭갈이방법을 익혀나갔다. 어느날 한 녀성은 밤에 밭을 갈다가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흙속에 묻히게 되였다. 간신히 흙속에서 빠져나온 그는 다시 보탑을 잡았다. 이날 그는 수백평의 밭을 다 갈고야말았다. 속사리녀인들의 작업시간은 따로 정해져있지 않았다. 적들의 포격과 폭격을 피할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면 낮과 밤이 따로 없이 일손을 잡았으며 해종일 포탄이 날아들 때에는 《쌀 한알은 총탄 한방이다!》라고 마음속으로 열렬히 부르짖으면서 물도랑과 밭고랑을 대피호로 삼아 희생을 무릅쓰고 곡식을 가꾸었다. 그러다가도 도로가 파괴되면 김매던 호미자루를 곡괭이와 삽으로 바꾸어들고 도로로 달려갔다. 깊은 밤 짙은 어둠속에서도 손더듬으로 돌을 모아 전선으로 통한 길가의 폭탄구뎅이를 메웠으며 다리가 끊어지면 또 그곳으로 달려가 적들의 폭격도 무릅쓰고 희생적으로 복구전투를 벌린 녀인들, 그 나날속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녀인이 다리복구전투장에서 가증스러운 적비행기의 폭격으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게 되였다. 하지만 그는 희생된 아들을 땅에 묻은 그 걸음으로 무거운 벼가마니를 등에 지고 방아간으로 향했다. 《내 아들의 복수를 내손으로!》 어머니로서의 가실수 없는 슬픔을 이런 말로 씹어삼키며 인민군군인들에게 보낼 낟알을 알알이 골라 쾅쾅 찧어가는데 적비행기들이 또다시 달려들어 이번에는 방아간에 대고 기총사격을 가하였다. 녀인은 다리에 심한 부상을 당하였지만 의식을 되찾기 바쁘게 불사신처럼 일어나 방아채를 잡았다. 그날 그가 마을녀인들과 함께 울린 방아소리, 그것은 마을사람들을 조국수호전에로 부른 멸적의 방아소리, 불같은 애국의 넋과 숨결이 높뛰는 승리의 방아소리였다. 금강군의 강하천들에 수십년래의 큰물이 범람했던 1951년 여름은 속사리녀인들에게 있어서 고난과 희생이 겹쳐든 준엄한 시련의 시기였다. 범람한 큰물은 원쑤들이 낮에 파괴하면 밤마다 복구하던 다리를 형체도 없이 삼켜버리고도 줄어들줄 몰랐다. 하여 중요보급로가 끊어지게 되였다. 이때 속사리녀인들은 스스로 큰일을 맡아나섰다. 한시도 멈춤없는 놈들의 폭격과 포격이 집중되는 직동령을 밤낮없이 넘나들며 싸우는 고지로 식량을 나른 녀인들, 가렬한 전화의 불길속에서 말그대로 불덩어리가 된 속사리녀인들은 긴장한 식량수송전투를 벌리는 속에서도 구석논 한뙈기,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밭 한평도 묵이지 않았다. 소가 오르기 힘든 비탈밭들에는 녀성들이 후치를 끌고 밭고랑을 째고 씨를 뿌렸으며 씨뿌린 밭이 적들의 폭격에 뒤집히면 또다시 밭을 갈고 씨를 뿌리였다. 식량증산을 위한 투쟁속에서 그들은 가슴미여지는 슬픔도, 눈물도 꿋꿋이 이겨내였다. 포연이 타래치는 속에서도 두려움없이 곡식을 가꾸던 자매간인 두 녀인이 적의 폭격에 숨을 거두었다. 남달리 쾌활하고 손끝이 여물어 전시식량생산에 앞장섰던 그들의 희생을 두고 속사리녀인들은 누구나 가슴아픔을 금할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앉아서 눈물만 흘린것이 아니라 두 녀인이 들었던 호미자루들을 멸적의 총창인양 비껴들고 폭탄이 우박치는 논밭을 타고나가며 종전의 3배, 4배의 일을 해제꼈다. 주체40(1951)년 가을 불비속의 최전연에 나오신 어느날 정성껏 지은 음식을 가지고 싸우는 고지의 인민군용사들을 찾아 떠난 녀인들의 앞을 억수로 쏟아진 장마비로 무섭게 불어난 강물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사품치는 강물에 빠져 목숨을 잃을지언정 그 자리에 주저앉을수 없는 그들이였다. 녀인들은 바줄을 허리에 매고 소용돌이치는 거세찬 물결을 헤가르며 한치한치 나아갔다. 간난신고끝에 그들이 고지에 다달았을 때 몇차례의 전투로 포연에 그슬린 인민군전사들이 달려와 그들을 얼싸안았다. 그런데 녀인들의 짐을 받아들던 한 인민군전사가 그것이 밥꾸레미라는것을 알고는 몹시 실망한 어조로 말하는것이 아닌가. 《야, 탄약이라면 더 좋았을걸!》 치렬한 싸움으로 때식을 건늬여 몹시 수척해진 인민군군인들, 그러나 원쑤에 대한 증오와 멸적의 기상이 이글거리는 그들의 모습과 피타는 웨침이 속사리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후 마을에 돌아온 녀인들은 인민군군인들에게 탄약을 날라가기 위한 녀성결사대를 무었다. 그들속에는 전쟁전에 금방 가정을 이룬 새각시도 있었고 다 자란 자식들을 전선에 내보낸 나이지긋한 녀성들도 있었다. 앞을 다투어 결사대원이 될것을 결의하던 속사리녀인들의 그날의 모습을 그려보느라니 참으로 뜨거운것이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가렬한 전쟁의 불길속에서 자기 하나의 생명, 자기 가정의 안락보다 조국의 운명이 더 귀중하다는것을 뼈에 새기며 참다운 애국자들로, 훌륭한 조국수호자들로 성장한 우리 녀성들이 아니였던가. 녀성결사대를 무은 속사리녀인들은 포탄이 우박치는 불비속으로 쉬임없이 달려가고 달려오며 탄약과 포탄을 고지로 나르고 부상자들을 후송하였다. 그 나날 속사리녀인들은 서로가 언제 자고 언제 깨여나는지 알지 못했다. 전쟁이 우리 군대와 인민의 그들이 한생토록 잊지 못해하였던 감동깊은 추억들가운데는 이런 사실도 있다. 그날도 밭에 나가 김을 매던 속사리녀인들은 1211고지에서 치렬한 격전이 벌어지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자 너도나도 호미를 밭고랑에 놓아둔채 포탄상자들을 이고 고지로 향하였다. 가파로운 령을 넘어가는데 적들의 집중포사격이 시작되였다. 하늘을 까맣게 뒤덮으며 날아든 적기들도 발광적인 폭격을 들이댔다. 녀성결사대원들은 골짜기며 큰 바위밑에 은페하였다. 얼마후 포사격이 멎고 적기들이 사라지자 검붉은 화염과 먼지로 뒤덮인 령길을 내리기 시작한 그들은 한 녀인이 보이지 않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녀성결사대원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가 은페하였던 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웬일인가. 포탄상자를 가슴에 껴안고 땅에 엎드린채로 꼼짝하지 않고있는 녀인, 또 한명의 가슴아픈 희생을 직감하며 조용히 그를 안아일으키는 순간 고르로운 숨소리가 결사대원들의 귀전을 울렸다. 모진 폭격속에서도 녀인은 겹쌓인 피로로 그만 잠에 든것이였다. 그곳을 지나다가 사연을 안 인민군전사들의 눈가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원쑤격멸의 포탄을 안고 포연속에 잠든 녀인의 모습, 그것은 인민군전사들의 가슴마다에 전쟁승리를 위해 하많은 낮과 밤을 지새워온 이 나라 녀인들의 눈물겨운 헌신의 모습을 말없이 새겨주었다. 그들모두가 다 우리 인민이 사랑하는 노래 《직동령의 승리방아》의 주인공들이 아니겠는가. 해방후 5년간의 꿈같은 생활을 통하여 나라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의 책임과 본분을 자각한 우리 녀성들, 애국충정에 불타는 이런
아름답고 숭고한 후방녀인들의 정신세계에 떠받들려 싸우는 고지마다에서 인민군용사들이 무비의 용감성을 발휘할수 있었으며 우리 조국은 전화의 엄혹한
시련을 뚫고 전선에서 싸운 용사들만이 영웅들인가. 그렇듯 강의하고 애국적인 녀성들이 많아 우리 조국은 오늘도 활력에 넘쳐 사회주의강국건설의 한길로 힘차게 전진하는것이다. 본사기자 허명숙 |